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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색마-220화 (220/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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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斬魔)

서걱!

얼음이 갈렸다. 유설라는 자신의 빙백신검을 일검에 갈라버린 검기에 공포에 질렸다.

공간이 너무 좁았다. 상대가 검을 먼저 뽑았다. 빙백신공을 써선 안 되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상대와 자신의 무공 수위는 '비슷'했고, 상대는 짧은 순간의 틈을 노려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눴다.

"방심했구나, 설라야."

"......."

유설라는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눈 여인을 어떻게 불러야 할 지 고민했다. 그리고 여인은 유설라의 고민을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따스하게 웃었다.

"언니라고 하렴."

"...장문인, 그-"

"언. 니. 참고로 이름은 류미아란다."

"...언니."

유설라는 중원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이름에 그만 질려버렸다. 조금만 꼬아 생각을 하면 바로 정체를 알아채기 쉬운 이름과 무공.

"멸색...."

"멸색사태라니? 그 분은 지금 아미파에서 폐관수련 중이시란다. 지금 나온 나는 아미파의 막내제자, 류미아란다."

자신이 빙마로서의 자신을 숨기기 위해 아미파의 무공을 익혔던 것과 달리, 류미아는 아미파의 무인으로서의 자신을 숨길 생각이 일절 없어보였다. 심지어 아미파 내에서도 마공을 상대함에 있어서 최고봉인 파사현정검을 사용했다.

"...차라리 따님이나 나이차 많이 나는 동생분이라고 속이는 건 어떻습니까?"

"좋은 생각인데? 역시 빙궁주야. 동생이라...사촌 동생 정도면 다들 속겠는데?"

"......언니."

검에 비친 유설라의 머리칼은 하얗게 물들어있었다. 천마신공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북해빙궁의 주인으로서 빙백신공을 유감없이 방출하고 있었다.

"저만큼 강해지셨군요. 그래서 제 정체를 금방 알아냈어요."

"그래. 그리고 네 속에 있는 '마기'도 알겠는 걸. ...네가 빙마지? 남자 빙마가 아니라, 여자 빙마."

"......."

유설라의 눈에 살기가 물들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동귀어진이라도 할 기세였다.

"걱정마. 아무에게도 말 안 해."

"...뭐?"

"아미파의 제자로 인정한 네가 마인이라고 드러난다면 아미파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지 않겠니? 다만 네 대답 여하에 따라서 내가 오명을 쓰고 만천하에 네 정체를 공개할 지, 아니면 나도 입을 닫을 지 선택할 거야."

"...뭘 원하십니까?"

류미아는 유설라의 하얀 머리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빙색마인, 살아있지?"

"......."

"살아있을 거야. 그리고 너를 목적이 있어서 육봉의 한 명으로 남겨뒀겠지. 그것도 무림맹 한 가운데. ...보호가 목적일까, 아니면 소요가 목적일까?"

자신의 목젖에 닿은 검기에 유설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예상하신 건가."

"뭐?"

"언젠가, 아미파 장문인이 제 정체를 알아채면 이렇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색마를 죽이고 싶다면, 색마에게 범해질 각오를 하라고."

"......풋."

류서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에 있는데?"

"...자신이 범하고 싶을 만큼 예쁜 여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아하하!!"

류서시는 맑게 웃으며 검을 회수했다.

"그거 참...건방진 말이네. 좋아, 그러면 네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돕다니, 무슨...?"

"아미파의 미녀 자매가 돌아다닌다. 색마에게 이것만큼 구미가 당기는 게 또 어디있겠니?"

"......."

색마 뿐만 아니라 다른 마인들도 습격할텐데. 유설라는 차마 자신이 하남에 계속 있어야 하는 이유를 밝히지 못했다. 그래서 차가운 이성으로 머리를 빠르게 돌려, 류미아를 설득할 논리를 찾아내야만 했다.

"......여자 둘이 같이 다니는 것 보다 혼자 다니는 게 더 색마를 만나기 쉽지 않겠습니까?"

"......그건 일리 있는데?"

류미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무슨 의도로 빙백봉이 되었는 지는 따지지 않을게. 하지만 명심하렴. 네가 아미파의 이름을 달고 있는 이상, 아미파 장문인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걸."

"......."

"그러니까 어서 생각해보렴. 내가 어떻게하면...빙색마인을 불러낼 수 있을까?"

"아까는 장문인 아니시라면서...."

"내 뜻이 곧 장문인의 뜻이란다. 빙궁주는 대대로 지혜롭다고 하던데, 나를 실망시키지 마렴. 순순히 빙색마인을 끌어낼 방법을 알려준다면, 네가 이곳에 은거...하고 있는 걸 함구하도록 하마. ...크흠, 할게."

유설라는 류서시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불합리한 상황은 스스로 타개할 수 없었다.

빙백신공과 천마신공을 함께 써서 하남을 탈출하지 않는 이상, '아미파의 빙백봉' 유설라는 류미아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좋은 돌파 전략은-

"...언니, 저는 연기의 달인이랍니다."

"응?"

"조건과 역할만 주어진다면, 그 모습에 맞게 저를 변화시킬 수 있죠. 상대가 저를 좋아하게끔 만드는 거죠. 겨울에 눈을 뭉쳐서 눈사람으로 만들어 보셨나요?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네 평소 모습이 연기하는 거다?"

유설라는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니?"

"그리고 제 주인님...그러니까 색마께서는 어린 여자를 좋아하신답니다."

빠득. 류미아는 이를 갈았다.

"너 지금 나를 놀리는-"

"언니랑 밖에 나가면 언니가 저를 언니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어리고 예뻐보이는데, 언니는 말투가 아직 부족해요."

"......크흠."

유설라는 류미아의 두 손을 붙잡았다. 그녀가 손을 함부로 움직여 자신을 제압하지 못하게 만드는 동시에 시선을 마주했다.

"제가 언니...완벽한 소녀로 만들어드릴게요. 언니가 저 기감으로 파악하기 전까지, 저 제법 연기 잘했잖아요?"

"네 정체를 함구하는 대신, 내게 이 모습에 걸맞는 모습으로 나이대로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네. 혹시 알아요? 주인님께서 저를 찾아오실 지."

"...후후, 역시 북해빙궁주. 좋다, 설라야."

류미아는 유설라의 손을 맞잡았다.

"어디 한 번, 나를 17세 소녀로 만들어 보거라."

".......“

유설라는 눈앞의 여인을 어떻게 소녀로 만들어야하나 깊은 고민에 빠졌다.

* * *

저릿, 저릿.

숲은 참격에 박살이 났다. 색마가 일으킨 참격은 나무를 부수고 땅을 헤집었다. 마치 번개를 일으키는 짐승이 땅을 손톱으로 긁고 간 것 처럼, 땅에는 파지직 거리는 전격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

마검비, 그리고 뢰마.

두 여인은 멍하니 제자리에 멈춰있었다. 전신을 찢어버릴 듯한 뇌기를 머금은 참격이 자신에게 닿는 순간, 죽음을 예상했다. 천지를 뒤덮는 참격에 오래 살아온 생명이 다하는 구나 직감했다.

하지만 참격은 교묘하게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땅은 수 백 갈래로 쪼개졌으나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솟구친 전격은 구름을 갈랐을 뿐이었다.

천지가 뇌전에 갈렸으나,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하, 하하...."

마검비는 자신의 옷을 보고 허탈감을 금할 수 없었다. 갈래 번개처럼 퍼져나간 도기는 옷감에만 예리하게 상처를 입혔을 뿐, 피부에는 그 어떤 상처도 남기지 않았다.

- 여기서 더 쫓아오면 그 때는 봐주지 않겠다.

패도적이면서도 상냥한, 완벽한 무력시위였다.

"당했네."

환(幻).

화산의 매화검수들의 검이 이와 비슷했다. 요란법석하고 죽음의 공포를 자아내게 했으나, 실상은 그저 눈속임이었다. 마검비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도법이 아니라...검기였다면."

천지를 가르는 ‘검’법이었다면? 생각만해도 손끝이 저릿하다. 색마가 무공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마검비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이런 검법에 죽는다면 백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이 남자...천하제일일지도."

마검비는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과 싸워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마검비를 검으로 이기지 못했다. 누구도 마검비를 검으로 충족시키지 못했다.

혹자는 이야기한다. 그렇게 검으로 싸우고 싶다면 천하제일검인 무림맹주와 싸워보라고.

‘그 놈은 검법이 아니라 살법(殺法)으로 검을 도구처럼 쓸 뿐!’

하지만 그녀는 검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할 뿐, 상대의 무공에 대한 예의도 없는 근본없고 막되먹은 검을 사용하는 자를 검사로서 인정할 수 없었다.

검에는 검리(劍理)가 담겨있어야 한다.

그리고 천하제일검이 있다면, 마검비를 스스로 인정하게끔 만드는 자이리라. 천하에서 가장 검에 통달한 존재이며, 모든 검리를 받아들이는 존재여야 한다.

그리고 마검비는 그와 상대하며 깨달았다.

만류귀종.

모든 검리를 총망라하여 만들어진 검의 성전(聖典)은 말했다.

- 검은 그저 도구일 뿐이다. 나는 단지 그걸 여자 범하는 데 쓰고 있을 뿐.

검은 도구.

그리고 검을 어떻게 쓰는 지는 검을 쓰는 사람 나름.

환부를 잘라내며 사람을 살리기 위한 칼날이 될 수도 있고, 검술을 쌓아 자신의 인생을 증명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남을 가르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남을 겁박하고 범하는 범행도구가 될 수도 있다.

“아아...!!”

마검비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사천으로 달려온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자각했다.

그가 검이 아닌 도를 사용했던 것도, 도강을 나뭇가지에 불어넣어 사용했던 것도, 검 뿐만 아니라 모든 ‘병장기’는 사람이 쓰는 손의 연장선에 불과하다는 걸 몸소 보여준 것이다!

“상공께서는 제게 이런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

그는 이미 자신이 닿지 못한 경지에 올라있었다. 그리고 그가 만약 자식을 낳는다면, 그 자식의 어미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

"...천하제일은 무조건 천하제일검이어야해.”

마검비는 목표가 생겼다. 내공만으로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초마교인의 손에 검을 들게 만들어야했다.

왼손에는 천하의 보검을, 그리고 오른손에는 왕소현이라는 여자를!

그리고 천하제일의 검사와 천하제일의 여검사가 만나, 후대에 낳을 자식이 또다시 천하제일검이 된다.

음검(陰劍)인 월영성희검과 쌍벽을 이루는 양검(陽劍)과의 조화!

천하제일검의 자식을 낳아, 그 아이들에게 자신의 무공과 지아비의 무공을 가르치는 삶!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인 검각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주는 꽃길과도 같은 미래!

- 보시오, 소현. 그대와 내 자식을. 우리가 만들었소, 검신(劍神).

"아흑...!”

그리고 그의 아내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이미 아내가 넷이라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천하제일이 호색 좀 하겠다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랴!

"후후, 흐흐흐...!!”

옆에서 들려온 귀기어린 웃음에 마검비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무릎을 꿇은 채 엎어질 듯 몸을 떨고 있는 뢰마는 입에 침까지 흘리며 벌벌 떨고 있었다.

"마검비.... 저, 정했습니다.”

풀썩. 뢰마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저분이야말로...우리 마교를, 십만마인을 이끌어나갈 마교의 미래입니다...!!”

뢰마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마치 원시시대, 하늘을 향해 기원을 올리는 제사장처럼, 그녀는 귀기어린 얼굴로 소리질렀다.

"초마교인의 아들이야말로, 천지에 개벽을 일으킬 진정한 신마(神魔)가 될 겁니다! 마검비!!”

뢰마는 몸을 일으켜 마검비의 앞에 섰다. 마검비 또한 뢰마가 내민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우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쫓아갑시다.”

"그래요. 죽어도 상공의 손에 죽겠어요.”

두 마인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뜻을 함께하며 의기투합했다.

"그 분, 색마에게 꼭 가르쳐드립시다.”

"저희가 가진 매력을...!!”

"우리가 당신의 앞길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이라는 걸...증명해봅시다!”

두 마인은 떠오르는 아침 해를 향해 의지를 다졌다.

“색마, 꼭 잡고 말겠어요!!”

단 한 명의 색마를 붙잡기 위해 만들어진 추색여단은 사천의 이름없는 숲에서 조용히 일출과 함께 발족을 알렸다.

* * *

“!!”

뇌전이 휘몰아쳤다. 깎아지른 절벽 위, 누각에서 동쪽을 내려다보던 흑발청안의 여인은 미미하게 떨리는 기운을 간신히 다스렸다.

“이건....”

“스승님!!”

수염이 희게 난 도인들이 급히 전각 위로 달려와 부복했다.

“무슨 소란이냐.”

“죄, 죄송합니다! 사천의 기운이 흉흉하여...!”

“이미 알고 있다. 흉기(凶氣)가 이곳 곤륜까지 닿았구나.”

여인은 기둥에 세워둔 검을 붙잡았다. 손잡이와 검신이 유독 긴 검은 무언가에 공명하듯 떨리고 있었다.

“악인(惡人)은 아니나...악행을 행함에 있어 부끄러움이 없구나. 행동이 과하면 자승자박할 운명이다. 제자들은 들으라. 너희는 저 강대한 흉수가 곤륜에 검을 들지 않게 해야할 것이다.”

“...!! 스승님, 저 자가 그렇게 강하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쩌면 건곤망(乾坤網)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허어...!”

도인들은 침음성을 흘렸다.

“장문인, 위험한 것 아닙니까? 혈귀가 날뛰게 될 운명에 변수가 생긴다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여인은 옅게 미소지었다.

“그 자는 내게 결코 검을 들이밀지 못할 것이니.”

“어째서...그렇습니까?”

“글쎄.”

여인은 그저 슬며시 웃기만 했다. 항상 무표정하기만 하던 그녀가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자, 도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당황했다.

“나도 모르겠구나. 그저...그런 기분이 든다. 언젠가 만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알게 되겠지.”

여인, 곤륜파의 장문인은 하얀 도복을 펄럭이며 검을 붙잡았다.

"어긋난 천기를 바로잡고자 하는 저 자와 나는, 아무래도 깊은 인연이 있는 듯 하니."

[작품후기]

색마행에 슬슬 난이도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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