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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가장의 일상
팽유월과의 뜨거운 밤을 보낸 뒤, 나는 팽유월과 월아를 새벽까지 재우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떠나려는 것인가?"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청년-팽도황은 담벼락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명백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하오. 가야할 곳이 있거든."
나는 바쁜 몸이다. 하북팽가를 찾아오는 것도 짬을 내서 오는 것이며, 앞으로 더욱 바빠질 것을 생각하면 좀처럼 오기가 쉽지 않다.
"빙정은 잘 쓰시오. 가공 처리를 했으니, 장물로 팔면 꼬리가 잡히지 않고 살림에 도움이 될 것이오."
"매번 고맙네."
팽도황은 내게 뭔가를 집어던졌다. 나는 청동으로 된 패 하나와 붉은 술병을 건네받았다.
"이미 유월이가 준 것으로 알고있네만, 내가 새로 하나 만들었네. 그대를 위한 특별한 패일세."
"이런 것보다는 술쪽이 더 궁금하오만."
"이곳의 명주일세. 50년 동안 숙성되었다고 하니, 잘 마시게."
"고맙소, 가주."
나는 담벼락으로 뛰어올라 가주와 마주섰다. 그는 나를 향해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고맙네. 정말 여러모로."
"딱히 고마울만한 일을 하지는 않았소만."
"결과적으로 그대는 내 목숨을 살려줬고, 반로환동을 하게 해줬고, 팽가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줬고, ...신혜의 악행을 막아줬지."
그는 내게 포권에 더불어, 허리까지 숙였다.
"진심으로 고맙네. 딸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아줘서."
"내가 그렇게 인사를 받을만한 사람은 아니오. 따지고보면 나는 당신의 딸을 범하고 멋대로 점수를 붙여 세간에 얼굴을 들고다니지 못하게 만든 색마요."
"신혜가 한 행동을 생각하면 그걸로도 부족하지.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어디 다리를 분지르거나 목숨만 붙여놓았어도, 나는 그대에게 감사했을 것이오."
아무래도 팽도황은 팽신혜의 악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고, 모든 진실을 안 지금도 팽신혜를 용서할 수 없는 듯 했다. 팽신혜를 내치지 않고 품는 것은 친딸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과 미련일 것이리라.
"수많은 여인들에게서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으니 그 대가를 치뤄야지."
"칼 같으시구만."
"그래야만이 가주로서 가문의 기강이 바로서니까.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고, 바르게 고칠 수 있어야만이 진정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팽도황은 팽유월이 자는 옆 방을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곳에는 팽유월의 활짝 열린 창과 달리, 감옥마냥 창 밖에 철창이 새로 단단하게 달려있었다.
분가가 본가로 합쳐진 이후, 팽도황은 팽신혜를 방에 감금했다. 그녀가 나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팽유월의 방을 거치는 것 뿐이며, 팽신혜는 팽유월의 말에 꼼짝도 못한다.
설령 팽유월이 잠시 월아를 보느라 신경을 쓰지 못해도, 다른 두 자매가 옆에서 눈을 부릅뜨고 팽신혜를 지켜볼 것이다.
"내 딸에게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진정으로 고맙소."
"...크흠, 고맙다면 이쪽에서도 한 가지 부탁이나 좀 합시다."
나는 그에게 똑같이 포권을 갖추고 허리를 숙였다.
"유월이와 월아를 잘 부탁합니다. 비록 혈교가 팽신혜에 대한 관심을 일시적으로 끊었다고는 하지만, 언제 어디서 팽신혜를 꼬드겨 마녀로 만들지 모릅니다. 그리고 강호에 어디 혈교만 있겠습니까?"
"...마교도 있지."
하북팽가는 혈교 뿐만 아니라 마교와도 악연이 깊었다. 다름아닌 팽유월과 천환단으로 엮였던 추소광 사건도 대공자 주지의 음모였다.
"마음같아서는 내가 그 주지라는 놈의 모가지를 날려버리고 싶으나, 그건 그대에게 맡기겠소. 아울러 혈교 놈들도 내가 가만두지 않으리다. 하북은 내게 맡겨주시오, 비천."
"그냥 비천이 아니고 비천색마."
"흐흐, 나에게 있어서 그대는 비천이오. 내가 그대의 장인은 될 수 없으나, 강호 무림의 평화를 위해 그대의 동지는 될 수 있소."
팽도황은 내가 바라는 평화로운 무림을 만들어나가는데 동참했다.
"팽가의 새로운 가주를 상대로 마교든 혈교든, 그도 아니면 맹의 첩자든 내게 접근하려고 들테지. 내가 꼭 그 놈들을 알아내겠소. 우리 세가에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놈들도 솎아내고."
팽이왕이 반로환동을 한 것이 아니라 팽도황이라는 새로운 존재로 사람들을 속인 이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방계의 이들을 속이기 위함이다.
팽이왕이 죽고 새로운 가주가 나왔을 때, 과연 누가 세가 안에서 반란을 일으킬 지 시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팽가를 정리하고 난 뒤에 팽가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리라.
"팽가는 다시 일어날 것이오. 그리고 팽가는...유월이에게 맡길 것이오. 이미 유월이는 소가주로서의 자신을 증명해냈소. 월아가 여아인 것이 조금 아쉽지만...."
"여아인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겠소? 누구보다도 팽가를 잘 이끈다면, 유월이나 월아가 가주가 되어도 되지 않겠소?"
"후후, 욕심은. 유월이가 어찌 가주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아무래도 가주는 말이 통하지 않-
"그대의 아내로 출가외인이 될 여인인데."
는 건 아닌 듯 했다. 아무래도 팽도황은 농을 즐기는 인간인 듯 했다.
"부디 강호의 미래를 위하여 힘써주시오. 너무 아무나 범하고 다니지는 말고. ...그보다 이제는 어떻게 할 요량인가? 모용세가라도 가는가?"
"육봉을 전부 범할 것이오."
"육봉?"
내가 범하겠다고 예고를 날린 모용란은 육봉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육봉 중 셋을 건드렸다.
"산주봉, 와백봉, 그리고 남은 중최미봉. 그들을 모두 건드리면 혈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는 못 베길 것이외다."
"어째서? 그들이 혈교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녹림, 제갈세가, 그리고 정체불명의 여인.
셋 중 누군가는 혈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혈연'이라는.
"중최미봉. 그 여인이 바로 혈교주의 딸이오."
* * *
"부진장강곤곤래!"
"그래, 장강은 넓지."
제법 큼직한 배에 오른 두 여인은 갑판의 난간에서 화목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셨다. 배는 길고 넓은 장강을 따라 서쪽으로 천천히 강을 따라 흘러갔다.
"류 언니, 무림맹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예요?"
"아는 동생이 거기에 있단다. 잠시 인사를 하고, 서안으로 갈 거야."
"서안이요?"
"그래. 거기 색마를 주살하겠다는 여자가 있거든."
마검비는 색마를 찾고자 했으나, 아직 그 어떤 색마도 마검비를 도모하지 못했다.
"같이 색마를 제압하려고 하시는 거군요!"
"......그래."
류미아는 차마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지 못했다. 본심을 알아주는 사람은 지금 중원 무림에 단 한 사람 뿐이고, 그와 만난 지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다.
"찾는 색마가 있단다."
"언니가 찾을 정도의 색마라니...유명한 색마인가봐요? 아, 혹시 빙색마인?"
"그 자는 아니야. 그냥...."
류미아는 허리에 찬 칼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여인네 몸과 마음에 불을 질러넣고 그냥 떠나버린 놈이 색마가 아니고 뭐겠니?"
"...그럼 색마가 아니라 먹튀..흠흠, 도망가버린 남자 찾으러 나온 거네요?"
"그렇단다. 소예는 이제 어디로 갈 거니?"
"음...글쎄요."
금소예는 넓은 장강을 향해 두 팔을 쭉 펼쳤다.
"천하는 넓고, 먹을 건 정말 넘쳐나죠! 천하 곳곳의 유명한 맛집들을 돌아다니면서 한 번 탐방해보려고 해요."
"맛집탐방?"
"네. 나중에 전부 사라지게 될 지 모르잖아요."
류미아는 금소예의 말에 흠칫 놀랐다. 순수한 목소리 아래에 깔린 불운한 기운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검집에 손을 올릴 뻔 했다.
"사라진다니, 그게 무슨 말이니?"
"현재에는 존재할 지 모르지만, 미래에는 어떻게 될 지 모른단 말이죠. 지금 유명한 맛집이라고 하지만 숙수가 어느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질 수 있고, 아니면 맛이 변해서 폐업이 될 수 있잖아요? 그 전에 최대한 많이 즐겨보려고요."
금소예는 허리춤에 찬 전낭을 흔들었다. 류미아는 그녀의 순수한 모습에 푸근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네 무공 경지를 보아하니 색마에게 당할 일은 없어보인다만...그래도 조심하렴. 언제 어디서 누가 튀어나올 지 모르는게 강호란다."
"물론이죠. 그래도 걱정마세요. 이래보여도 제법 그럴싸한 별호를 가지고 있답니다."
"별호?"
"네! 제가 직접 자칭했어요."
금소예는 제자리에서 빙글 돌더니,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찔렀다.
"하늘과 땅! 그 가운데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 있나니!"
"......하하."
류미아는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중최미봉이 너니?"
"네! 봉이라는 건 마음에 안들지만, 그래도 무림맹주님이 참 말이 통하는 분이더라고요. 다행히 이상한 별호가 붙기 전에 중최미봉이 되었죠. 히힛."
금소예는 자신의 별호가 큰 애착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그래도 역시 천하는 넓네요. 제가 제일 예쁜 줄 알았는데, 류 언니도 저만큼이나 예쁘시고."
"칭찬 고맙구나. 그래도 나보다 네가 더 예쁜 이유가 하나 있단다."
류미아는 금소예의 손을 잡으며 토닥였다.
"여자는 한 살이라도 어린 게 최고야."
"어...."
금소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저희 아버지가 하시던 말이랑 똑같-"
"......."
류미아는 금소예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금소예는 식은 땀을 흘리며 류미아의 시선을 피했다.
"하, 하하. 새겨들을게요. 조언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이제 곧 헤어지게되겠구나."
배는 어느덧 장강을 흐르고 흘러, 넓은 포구에 도착했다. 류미아는 하선할 채비를 마쳤고, 금소예는 손을 흔들며 그녀를 배웅했다.
"다음 용봉지회에서 다시 만나요, 언니."
"...그래, 용봉지회에서 다시 만나자꾸나. 그런데 소예야, 너는 이제 어디로 갈 거니?"
"저요?"
금소예는 어깨를 으쓱였다.
"몸 가는 대로, 바람 닿는 곳으로. 풍류를 벗삼아 자연을 즐기며, 근방에 맛집 있으면 들리는 거죠. 그러다가...."
금소예는 씁쓸한 미소로 웃었다.
"때가 되면, 이제 해야할 일을 하는 거죠.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전부 누렸으니, 제게 주어진 의무를 해야할 때가 된 거예요."
"의무...?"
"네. 저희 가문의 숙원."
류미아는 금소예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짙은 피냄새가 나는 건 분명 착각이리라.
"후훗, 류 언니. 너무 무거운 얘기는 나중에 언젠가 하기로 하고, 혹시 추천하는 음식 있어요? 이건 꼭 먹어봐야한다는 거?"
"...이 근처에 한(漢)이 있단다. 호북의 성도인데, 그곳에 참 맛있는 음식이 많이 있단다."
"네, 고마워요. 그런데 거기는 안 갈 거예요."
금소예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버지가 거기는 절대 가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예전에 역병이 크게 돌았다고."
"소예는 아버님 말씀을 참 잘 따르는 구나."
"네. 당연하죠."
금소예는 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님 말씀은 틀린 게 없으니까요."
그렇게, 두 여인은 포구에서 헤어져 각자 갈 길을 떠났다.
* * *
하북에서 돌아오는 중, 나는 이곳 저곳의 정보를 긁어모았다.
"이제 열흘 정도 남았나."
마검비가 서안에 머무르기로 약조한 날이 이제 머지 않았다.
전전대 검마.
검각주.
처녀, 왕소현.
아직까지 누구도 공략해내지 못했다면,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검각인데.'
마검비는 엄밀히 따지자면 은퇴한 여인이다. 검마의 대를 따져도 '전전'이라는, 미래까지 따지면 '전전전'대의 노마(老魔)에 해당하는 원로급 존재다.
미래에 내가 그녀와 마주했던 날은 혈겁난세의 때, 마교를 습겼했던 때였다.
그녀는 이시아를 지키기 위해 몸을 바쳤다.
그녀와 일부 검각의 여인들만 마교를 지키기 위해 몸을 바쳤다.
그렇다면 다른 검각의 무인들은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혈교의 하수인이 되었지.'
마교의 여인들은 혈교의 부하가 되었다.
대공자 주지가 중원 전역에 첩자를 보내어 정파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전략을 취했다면, 혈교는 흑백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을 혈교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팽신혜나 을소소의 경우처럼, 이미 혈교에 가담한 여인들도 존재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혈교의 하수인이 될 지 모른다. 그러므로 혈교가 손을 뻗어도 유혹에 혹하지 않게, 집단의 우두머리를 우리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검각을 끌어들여야겠어."
검각주를 이시아의 아래에 두게 만들어, 혈교의 전력을 최대한 줄인다.
'오래기다렸다, 마검비.'
주인공은 원래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비천색마가 네 처녀를 가지러 간다."
호북으로 돌아가는 즉시, 마검비를 범하러 갈 것이다.
[작품후기]
지금까지 혈교주 관련하여 정확한 설정을 맞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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