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203화 (203/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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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가장의 일상

사공희, 이시아, 독고연, 팽유월.

열흘 간격으로 넷의 잔여 내공을 흡수하는 일상의 반복이 계속되는 가운데, 나는 산동 나들이 이후 오랜만에 중원 전역 순회를 계획했다.

무당은 큰 문제가 없었다.

매화검수 선주희 문제 당시 현타도사 사정후가 한 번 크게 날뛴 이후, 장문인은 기가 죽은 채 무당파의 내치에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산동 방면의 황보세가도 큰 문제가 없었다.

나는 황보세가를 떠나오면서 괜히 황보 칠자매가 처녀가 아니게 된 것에 다소 걱정하기는 했지만, 몇몇 색마 기질을 보이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탈혼붕권을 욕하면 욕했지 황보 칠자매를 욕하지는 않았다.

하북팽가도 큰 문제가 없었다.

들리는 소문이 이상하여 며칠 전에 팽가를 다녀오니, 팽유월 왈.

"분가에 색마가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상공인 줄 알고 기대했는데."

"색마가 들었는데 무슨 기대?"

"비천색마가 팽유월을 따먹었다고 세상에 널리 공표하시나 싶어서요."

"나는 내 평생의 반려에게는 점수 같은 거 측정하지 않는다고 했을텐데."

대 색마 시대로 인해 하북팽가의 분가-그러니까 방계 여식이 색마들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하더라. 자세히 살펴보니, 남자가 팽가의 여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범한 것으로 모자라 폐인이 될 때 까지 강간했다.

"정신적 충격이 큰 것 같더라고요."

"그게 보통 범해진 여인의 모습이기는 하지."

"제가 보통이 아니란 말씀이시죠?"

"색마가 그냥 자기 즐기기만 하면 강간범이지만, 여자도 색을 즐기게 만들면 용서가 되는 거야."

팽유월은 내 말에 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의 내 모습도 아닌 추대광으로서 범해진 그녀는 외형에 상관없이 진심으로 추대광이었던 나를 섬기려고 했다.

"유월아, 솔직히 네가 나한테 반한 7할은 좆맛 때문이 아니더냐."

"...그런 상스러운 표현 말고, 상공께서 주시는 뜨거운 사랑에 반했다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뭐래. 다시 만나면 보지 때려달라던 애가."

아무튼 팽유월은 색에 맛이 들려, 색마에게조차 마음을 품게 되었다. 다른 여인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인으로서 천천히 색에 물들인 사공희.

스스로 나를 덮치게 만든 이시아.

연애감정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며 몸을 허락하게 만든 독고연.

모두 나와의 관계에 색이 얽혀있었다. 내가 색이 아닌 관계로 교류한 존재는 단 한 명 뿐이다.

혈교주.

정확히는 '미래의 혈교주'.

지금은 혈교 소교주의 위치에 있을 '그녀'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유월아. 팽신혜 주변에 혹시 사람이 오거나 하지는 않더냐?"

"네. 완전히 팽가 쪽은 관심을 끊은 것 같아요."

하북팽가가 위치하고 있는 북경은 하북에서도, 아니 중원 전체를 통틀어봐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대도시다. 그런 대도시에서 단물이 말라 비틀어지다 못해 쓴맛만 나는 하북팽가에서 뭔가를 얻어보려고 시도한다?

그럴 일은 결코 없다. 구멍이 숭숭 뚫려 침몰하는 배를 약탈하는 수적은 없는 법이다.

"혹시나 혈교의 잔당이 나타나거든 꼭 이야기해다오. ...그보다 팽가 가주 말이다, 미안하다. 내가 제 때 오지 못해서."

"괜찮아요. 호북까지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났으니까요."

악참도, 팽이왕.

한 때 하북 최강의 무인이라고 호령하던 이는 천환단을 통한 치료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더이상 팽이왕이라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 뭘로 바꿨냐."

"팽도황(彭刀荒)이요."

"왕에서 황제가 되었다니, 흐흐. 사람들 누가 모를까!"

팽가의 전대 가주, 팽이왕은 비밀리에 숨겨져 있던 팽가의 미청년을 후계자로 선정했다. 분가로 빠져나가 팽이왕이 죽기만을 기다렸던 분가의 이들이 화들짝 놀라서 본가로 찾아와 시위를 벌였다.

팽도황, 그는 누구란 말인가!

"실례하지."

밖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괜히 쑥쓰러워 팽유월의 침대에서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빠아-

청년-팽도황의 품에 안겨있던 아이, 월아는 나를 보며 반색했다. 나는 청년에게서 월아를 받아 꼭 끌어안았다.

"그대 품에만 가면 어떻게 이리 잘 자는 지 몰라."

"하하, 저도 모르겠습니다. 가주님."

나와 비슷한-조금 더 큰 키. 황보염이 거친 호랑이와 같은 외형이라면, 팽도황은 날카로운 독수리와 같은 인상이었다.

철컥.

팽도황은 문을 걸어잠궜다.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나니, 열린 문은 오직 창문 뿐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나?"

"혈교가 혹시나 접촉할까봐 걱정돼서요."

"하하, 걱정말거라. 지금 신혜 주변에는 이교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팽도황은 주먹을 불끈쥐었다. 탄탄한 구릿빛 피부와 근육 위로 떠오른 혈관은 어지간한 외공의 고수도 한 수 접고 들어갈만큼 도드라졌다.

"설령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악참도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야."

"가주님, 별호도 새로 바꾸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하. 미안하네. 별호라는게 말이야, 이름보다 더 애착이 가는 것이라서 말이야."

그렇다.

악참도, 팽이왕.

그는 반로환동했다.

* * *

지금으로부터 약 이 주 전.

나는 무림맹이 있는 허창에 들렸다.

"오랜만에 뵙네요."

"벌려!"

"네!"

찌걱, 찌걱.

나는 아미파의 옷을 입은 빙마와 정사를 즐겼다. 그녀는 나를 받아들였고, 나는 하북으로 올라가기 전 휴게소에서 빙마를 먹었다.

"아직...백습광아를 죽이기에는...?"

"아아, 그래. 최소 10년 정도는 있어야 해."

"괜찮아요. 20년도, 30년도 더 기다릴 수 있어요."

유설라는 나의 약속을 철썩같이 믿었다. 내가 차기 천마의 남자로서 북해빙궁을 품어주기로 약속했기에, 그녀는 나를 전적으로 믿고 따랐다.

"여기요, 지금까지 모은 빙정들이에요."

"고맙다."

나는 그녀가 자신을 습격한 마인들을 잡아 만든 빙정을 한가득 챙겼다. 그리고 그녀의 안에는 내가 허창으로 올라오면서 챙긴 영약을 한가득 부어넣었다.

"...저기, 색마님."

"응?"

"북해빙궁...그냥 다 데리고 호북으로 가도 될까요?"

"......지, 진가장으로 오너라."

오는 여자는 막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그냥 해본 소리일 것이다.

'설마 처녀를 그런 식으로 가져갔는데 나한테 반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나는 빙마의 상식을 믿었다. 최소한 그녀가 북해빙궁주로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리라 굳게 믿었다.

그리하여 나는 빙정을 한보따리 들고 팽가로 잠입했다. 팽가에는 이상하게 사람들이 엄청 많았고, 나는 바로 팽유월의 방으로 직행했다.

"까꿍."

그러자 그곳에는 월아와 정말 친절하게 놀아주는 청년이 있었다. 월아는 무릎으로 바닥을 기며 청년을 향해 활짝 웃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속에 천불이 났다.

'아직 나도 못해본 것을?!'

내가 지난 번에 왔을 때는 월아는 아직 제대로 걷지 못했다. 팽유월은 다음에 왔을 때는 기어가거나 잠깐은 일어설 수 있을 거라며 기대하라고 말했다.

"어이쿠, 그래. 우리 월아, 잘한다."

하파아아-

월아는 청년을 향해 뭔가를 말했다. 나는 빙정이 든 보따리를 둘둘 말고 망치로 만들었다.

'혈교주는 말했다.'

- 불륜은 확실한 증거를 잡기 전까지 함부로 던져서는 안 된다.

'스승은 말했다.'

- 부부는 완전한 타인이 하나로 엮이는 관계다. 서로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하며, 약간의 거짓으로도 관계는 끝날 수 있다.

나는 팽유월을 믿는다. 월아를 믿는다.

그래서 남자의 뒤를 쫓아 팽유월의 방에 들어가는 것에도 참았다.

"아, 오셨어요?"

팽유월은 그를 너무나도 쉽게 방에 들였다. 심지어 그는 월아를 안고 방에 들어가 팽유월과 마주앉기까지 했다.

- 만약 끊어낼 인연이라면, 확실하게 끊어라.

- 확실하게 잡아내는 건 역시 현장급습이지!

나는 그림자에 숨어 몰래 팽유월의 방에 잠입했다. 그리고 남자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며 그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했다.

'입맞춤이라도 하면 월아 데리고 떠난다. 어디 한 번 두고보자.'

그는 팽유월과 다소 닮아있었다. 팽가의 젊은 이들 중에 월아와 친하게 지낼 남자가 누가 있나 생각하던 순간.

"흠!"

그는 손날을 세우며 정확히 내가 숨어있던 곳을 찔렀다. 정확히는 빙정을 들고 있던 보따리에 수도를 찔렀다.

데구르르.

손날로 펼쳐지는 오호단문도에 빙정은 바닥을 굴렀고, 나는 급히 몸을 드러내며 남자를 향해 권을 휘둘렀다.

"네놈은 누구-"

"내가 할 소리-"

"잠깐만요, 뭐하는 짓이에요?!"

팽유월은 귀신같이 화를-남자를 향해 내며 소리질렀다.

"월아가 깨잖아요, 지금 간신히 재웠는데!!"

"유월아, 지금 습격자가-"

"그 사람이 비천색마에요."

"!!"

나는 팽유월의 폭로에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월아, 이 남자는 누구냐?"

"하아.... 그게."

팽유월은 말했다.

"...팽가 가주님, 팽이왕이셨던 분이요."

내 은신술을 파악해낼 정도로 뛰어난 기감을 가진 소유자는 다름아닌 죽어가던 팽가의 가주, 팽이왕이라더라.

그렇게, 비천색마는 들통이 나고 말았다.

* * *

이류 무사까지 떨어졌던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매일매일 시름시름 앓아가며 죽어가는 듯 보였다. 피부가 주글주글해지고 머리카락과 손톱에 생기를 잃으며,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죽어가는 신호가 아니라, 다시 태어나기 위한 탈피였다.

반로환동(返老還童)!

그는 반로환동하여 젊음을 되찾았다.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청년이 되었고, 힘 또한 전성기 수준을 되찾았다.

"그대에게는 진정으로 고맙네. 새로운 별호를 얻게 해주었으니."

"제가 한 거라고 해봐야...."

"그래. 그 돼지 놈 대신 그대가 유월이를 취했지."

팽유월에게 내가 모든 것을 밝혔듯, 나는 팽유월과 월아를 보호하기 위해 팽도황에게도 진실을 밝혔다.

"그래도 그대는 이렇게 책임을 지지 않는가?"

"그것도 월아가 있으니까...."

"늦게라도 책임을 지러 왔으니 된 거지. 그대 덕분에 우리 팽가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으니, 내 가주로서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하하."

그는 내게 포권을 취했다.

"유월이는 걱정말게. 그대 덕분에 다시 받은 이 목숨, 유월이를 위해 다시 쓴다고 생각하지."

"......감사합니다, 가주님."

그가 반로환동하게 된 계기는 간단했다.

그가 복용한 천환단이 반로환동을 하게 만든 것이다. 천환단의 효력으로 병세가 안정화되었으나 이미 상한 장기가 더이상 복구되지 않을 줄만 알았지만, 천환단은 거기서 효과를 끝내지 않았다.

그가 천환단을 처음 복용하고 수 년에 걸친 시간동안 천환단은 팽이왕의 몸에서 반로환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팽이왕 또한 이류의 몸으로 전락했음에도 매일같이 내공 수련을 거르지 않았고,

마 참 내!

반로환동을 하게 된 것이다.

"유월이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그대가 유월이에게 준 영약들, 거의 1/3은 내가 복용했으니."

"괜찮아요, 제가 그만큼 상공께 채음보양으로 드렸으니까요. 상공이 주신 시점에서 그건 제 거예요. 팔아도 그만, 제가 먹어도 그만."

맞는 말이다. 나는 하북 일대의 영약을 챙겨다가 팽유월에게 전권을 일임했다. 그리고 팽유월은 영약의 일부를 가주인 팽이왕에게 원기회복을 위해 먹였다.

설마 그게 반로환동을 위한 밑거름이 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내가 기러기처럼 물어다 준 영약들은 1/3이 팽유월에게, 1/3이 월아에게, 그리고 1/3이 팽이왕에게 들어가고 말았다.

"크흠, 월아. 그런 말은 조금...."

"뭐 어때요? 가주님 우리 사이 다 아는데."

"흐허허! 유월이가 눈치를 주는구나. 그래, 부부끼리 오붓하게 즐거운 시간 보내시게."

팽이왕, 아니 팽도황은 능글맞게 웃으며 방을 나갔다.

"아 참. 월아 동생은 언제쯤 볼 수 있는 건가?"

"가주님!!"

"하하하! 좋은 밤 되시게."

팽도황은 짖궂게 웃으며 방을 떠났다. 나는 그가 사라진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하가 안정되기도 전에 저런 말을 하다니. 하아."

"어머...?"

팽유월은 내 손을 세게 붙잡았다.

"천하가 안정되면...월아 동생 보시게요?"

"아."

"천하는 몰라도 하북은 안정되어있는데, 그냥 지금 보시죠?"

"자, 잠깐만. 유월아, 나 지금 방금 와서 쉬어야-"

"어허."

팽유월은 내 입에 손가락을 붙였다.

"예, 아니오로만 답해주세요. 저랑 지금 하기 싫으세요?"

"......아니."

나는 월아가 잠에서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월아는 동생이 태어나기를 바라는 지 깨어날 기미도 없었다.

"제게 불만이 있으면 보지 때리기로 풀어주세요."

"...오늘 울 때까지 맞을 줄 알아라."

그렇게, 나는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팽유월을 벌했다.

[작품후기]

누가 약을 수백 개로 쪼개지만 않았어도 하루만에 반로환동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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