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가장의 일상
<호북, 장하호 포구 낚싯터>
중원에서 호(湖)라고 하는 건 고여있는 물을 뜻하지만, 그 너비가 어지간한 도시와 맞먹을 정도로 넓다.
장하호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생업을 이어나가는 낚싯꾼, 주삼은 낚시를 해보겠다고 도전하는 이들을 위해 배를 빌려주는 것으로 소소한 용돈벌이를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포구에 모인 낚싯꾼들을 둘러보며, 혹시나 낚싯배를 빌리는 사람을 찾아 이리 저리 돌아다녔다. 마침 그의 눈에는 돈 좀 있어보이는 젊은 청년이 인상을 팍 찡그린 채 낚싯대를 잡고 있었다.
청년의 옆에 놓인 나무상자에는 아무런 물고기도 없었다. 주삼은 헛기침을 하며 청년의 근처에 앉았다.
"낚시가 잘 안 되시오?"
"잘 안 되냐고 묻는 건 예의가 아닐텐데?"
청년은 대놓고 빈정거렸다. 주삼은 얼굴이 괜히 붉어졌으나,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강대한 기세에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똥 밟았다.
청년은 아무리 봐도 무림인이었고, 주삼은 무림인의 심기를 건드렸다.
"크흠. 미안하오. 나는 뭐 소문을 사러 온 양반인 줄 알았지."
"음?"
"그게 이 동네 사는 이야기꾼들한테 신호거든."
주삼은 없는 말을 대충 지어내며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청년은 주삼을 한참 위아래로 쳐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어디 뭐 좋은 소식 있소?"
"물론! 잘 들어보시오."
주삼은 청년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자신이 들은 바를 아는 대로 전부 읊었다.
가령, 무림 전역에 돌아다니는 색마들의 수가 급증하여 관아에서 무림맹과 연계하여 본격적으로 토벌에 나섰다거나.
가령, 안휘에서 남궁가의 폭룡이 검으로 유명한 문파를 돌아다니며 도장깨기에 나섰다거나.
가령, 하북의 팽가가 본가와 분가가 다시금 합쳐져 막대한 세력을 구축했다거나.
가령, 섬서에서 마검비라는 여인이 수많은 색마들을 검으로 거세하고 여전히 서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거나.
가령, 사천 아미파의 장문인이 폐관수련에 들어갔다거나.
가령, 모용세가의 여식이 아직 행방불명이라거나.
"그것 참 아는 것 한 번 많군. 이거 정보료로 얼마를 지불해야하는 것이오?"
"하하, 이 정도야 이 일대 아는 사람은 전부 다 아는 이야기인데 무슨 정보료인가? 그냥 오랜만에 이야기 할 사람을 많나서 기쁜 놈의 주책이라 생각하시게."
주삼은 청년의 누그러진 목소리에 안도했다.
"참. 그 소식 들었는가?"
"그 소식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이야기하면 안 되나?"
"에잉, 참 대화를 주고받는 재미를 모르는 젊은이군. 산동의 일이야. 황보세가 말일세."
청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하지만 주삼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황보세가! 벽력신권이자 천하제일권인 황보염이 가주로 있으며, 딸이 무려 일곱이나 된다고 하더지. 몇 주 전에 글쎄 딸들을 혼인시키기 위해 비무대회를 열었는데, 글쎄 신랑으로 선발된 남자가 무서워서 도망갔다구만!"
"...크흠. 그것 참."
청년은 혀를 차며 낚싯대를 회수했다. 고리에 미끼를 갈아 끼운 그는 다시 낚싯대를 던졌다.
"그 이야기라면 나도 대충 알고 있소. 절정 고수를 이긴 남자 아니오?"
"그렇소! 신비문파의 청년이었지. 가주가 워낙 그의 강함에 반해서 글쎄 일곱 자매를 모두 내어주겠다던데...크으, 그토록 복을 받은 청년이 있나."
"그게 복인가?"
청년의 빈정거림에 주삼은 손뼉을 쳤다.
"내 말이! 복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람 죽이는 길이었다 이거지. 흐흐, 이건 그대만 알고 있게."
주삼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보세가의 둘째딸이 워낙 절륜해서...남자가 도망갔다는 소문일세!"
"허."
청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아무리 여인네가 대단하다고 한들, 어찌 남자가 여자 무서워서 도망친단 말인가?"
"내 말이! 하지만 말이야, 그런 소문도 들더라고. 사실 황보세가 둘째 딸만 절륜한 게 아니라, 다른 여섯 명도 그렇다고."
"...그럼 일곱 명이 전부 그 남자와 합방을 했다 그 말인가?"
주삼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모르지! 황보세가 차녀만 무서웠을 수도 있고, 황보세가 여자들이 무서워서 도망쳤을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당사자가 사라졌으니 이제 알 방법은 없지. 흐흐흐. 거기서 이어지는 말인데 말이야...."
주삼은 앞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가주, 황보염이 그 자에게 현상금을 걸었다네! 하하하! 그래도 딸을 책임지라고 하는 걸 보면 도망간 그 남자도 대단하고, 황보세가 차녀도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들어!"
"참으로 대단한 여자였지."
청년은 입꼬리를 비틀며 낚싯대를 당겼다. 낚싯줄 끝에는 제법 팔뚝막한 잉어가 팔딱거리고 있었다.
"오, 오오!"
청년은 잉어와 밀고 당기기를 할 틈도 없이, 힘으로 낚싯대를 당겼다. 그러다 끊어지면 어쩌려고 하냐고 핀잔을 주려기도 무섭게, 잉어는 순식간에 물 밖으로 빠져나와 청년의 손에 안착했다.
"흠."
청년은 씩 웃으며 잉어를 나무상자에 집어넣었다.
"이제 좀 만족할만한 녀석이 잡혔군."
"대단하군. 혹시 자네, 이 잉어를 내게 팔 생각이 있나?"
"미안하지만 이 녀석은 시합 겸 오늘 저녁 반찬이라서."
청년은 나무상자와 낚싯대를 챙겨 몸을 일으켰다.
"이야기는 잘 들었소. 덕분에 중원 돌아가는 정세, 재미있게 들었구려."
"그, 그렇지? 흐흐."
주삼은 은근히 기대감을 내비쳤다. 강호의 이야기로 푼돈을 버는 건 그의 소일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집에 가는 길에 탁주 하나 사가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여기 있소, 정보료."
청년은 통크게 은자 하나를 품에서 꺼내 던졌다. 주삼은 자신의 품에 쏙 들어오는 은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은자가 아니라 만약 암기였다면?
가가---!
멀리서 옥구슬처럼 맑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청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주삼은 누가 이 청년을 가가라고 부르는 지 시선을 따라 돌렸다.
"헉."
봄이 피어오른 듯한 환한 미소를 띈 여인은 선녀가 지상에 내려온 듯한 모습이었다. 보라색을 띄는 눈동자의 여인을 바라보는 청년의 눈빛도 삽시간에 손바닥 뒤집히듯 변했다.
"많이 잡았소?"
"네. 이거면 오늘 저녁은 충분하겠죠?"
여인은 자신이 든 큼지막한 나무상자를 가리켰다. 안에는 손보다 더 긴 민물고기들이 수없이 많았다.
"나는 한 마리 밖에 잡지 못했소."
청년은 나무상자를 건네받으며 자신의 나무상자를 가리켰다. 여인은 나무상자 속 잉어의 크기에 볼을 부풀렸다.
"저보다 큰 거 잡으셨네요?"
"운이 좋았소. 고작 한 마리 잡은 게 이런 놈이었을 뿐."
"피. 거짓말은."
여인은 청년으로부터 나무상자를 빼앗으려고 했으나, 청년은 물까지 든 무거운 상자를 좌우로 움직이며 여인의 손길을 피했다.
"그대는 저걸 챙겨주시오. 형장, 이야기 재미있었소. 다음에 연이 닿으면 또 만납시다."
"연이 닿으면...푸흡. 안녕히계셔요."
여인은 화사하게 웃으며 청년과 함께 낚싯터를 떠났다. 주삼은 홀린 것처럼 은자를 품에 집어넣으며 혀를 내둘렀다.
"다시 봐도 선녀같다."
이 근방에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있던가? 주삼은 여인의 모습을 계속 상기하며 실실 웃었다.
"오늘 횡재했구만...응?"
탁주를 사러 간 순간, 그는 무림의 무사들로 보이는 이들이 객잔 벽에 무언가를 붙이는 걸 보았다. 탁주를 사고 벽보를 본 그는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실종자, 독고연. 쯧, 갓 성인이 된 여아가 어찌...."
벽보 속 독고연이라는 소녀는 너무나도 어린 소녀였다.
"빙색마인...죽었겠지?"
모용세가를 덮치겠다고 예고한 지도 어느덧 수 개월이 지났고, 그 동안 빙색마인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무림 어디에도 전해지지 않았다.
"빙색마인...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 * *
"콜록."
"가가, 감기에요?"
"아니. 아까 목소리를 좀 낮춰서 냈더니 목이 잠겨서 말이지."
우리는 가까운 도시에 잡은 물고기를 전부 판 뒤, 내가 잡은 잉어 한 마리만 챙겨 귀갓길에 올랐다.
"탈혼붕권은 이제 영영 다시는 못 쓰겠구나. 산동에서 있었던 일이 이곳 호북까지 전해졌으니."
"그래도 다행이네요. 혼삿길이 아예 막힌 건 아니라서."
탈혼붕권은 대외적으로 황보혜지'만' 관계를 맺은 것으로 되어있다. 물론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탈혼붕권이 황보혜지만 먹고 튀었다면 황보혜지만 피해를 본 것 처럼 행동해야하는데, 다른 여섯 자매들도 탈혼붕권의 편을 들어버리면 그림이 이상해지지 않겠는가.
결국 뜬소문이지만, 탈혼붕권은 일곱 자매와 하룻밤을 보내고 도망친 소인배로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력을 내면 일곱 명은 커녕 열두 명도 거뜬히 상대할 수 있거늘."
"그건 처를 열두 명으로 늘리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그냥 그렇다는 거란다. 연아, 내가 하는 말에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면 못 써."
그냥 가능성의 이야기만 했을 뿐인데, 독고연은 칼같이 가능성을 자르고 들어왔다. 상대의 검로를 읽고 파훼하여 먼저 제압하는 독고구검의 사용자다웠다.
"그치만 가가, 혜지가 좋다고 하면 받아주실 거잖아요."
"왜?"
"혜지, 처녀였으니까."
"...크흠."
황보혜지는 독고연이 걱정(?)한 것과 달리 처녀였다. 처녀를 잃을 뻔 했지만 다행히 육체적으로는 처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첫사랑이 존재했다. 바로 대공자 '주지'.
"연아. 나는 이전의 인연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란다."
나는 불안감을 보이는 독고연을 다독였다.
"내가 꼭 아무도 좋아하지 않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누구와도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은 여인만 들이려는 건 아니란다."
"그럼요?"
"마음가는대로. 하지만 지금은 딱히 그럴 사람은 없구나."
사공희, 이시아, 독고연, 팽유월.
이미 나는 심적으로 어느정도 안정되어있는 상태다. 아침, 점심, 저녁 삼시 세끼에 더불어 칠일에 한 번은 외식을 다녀오는 나로서는 딱히 여기서 더 참을 늘릴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이어져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단 말이지. 흐흐."
"그치만 가가, 오는 사람 막지 않을 거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네게 지난 번에 말했지만, 황보혜지가 혜지로서 온다면 나는 받아 줄 요량이다. 너는 어떠냐?"
"...저도 이왕이면 아는 사람인 게 편해요."
독고연은 혜지에 대해서 특별히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누구든 내가 좋다고만 하면 흉부 크기를 보고 넘어가는 사공희나 오히려 호색을 더욱 즐기라는 이시아와 달리, 독고연은 여자를 여럿 늘리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연아, 내가 여인을 늘리는 게 싫으냐?"
"싫은 건 아니에요. 단지 제가 걱정되는 건 가가께 안좋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여자들이 늘어날까봐 걱정되기 때문이에요."
"뢰마같은 여자?"
"...네."
오는 여자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뱃속에 꽃을 들고 오는 지 칼을 들고 오는 지는 겪어봐야 아는 법이다.
"걱정마라. 내가 누구냐.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자지. 어떤 여인이 내게 칼침을 놓겠느냐?"
"가가. 제가 걱정하는 건 여기랍니다."
독고연은 내 가슴에 손을 올렸다.
"저는 가가께서 행여나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그게 두려워요."
"...흐흐, 그럴 때는 네가 옆에 있어다오."
나는 독고연의 앞에 상체를 가볍게 숙인 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산동까지 간 여행길 이후 독고연은 제법 많이 성장하여, 이제는 키 만큼은 사공희를 뛰어 넘겠다 싶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딱 좋은 크기야.'
"가가, 그렇게 만지면 저 집에 걸어서 못 가요."
"왜?"
"가가랑 하고 싶어지니까요."
독고연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샐쭉 웃었다. 몸이 자라며 눈빛 또한 점점 속세의 자색(紫色)으로 물들어가는 그녀는 이제 완전히 숙녀이며 색녀라고 자처해도 될 정도였다.
"이것 참. 가슴 좀 만진 것 가지고 젖어버리면 어찌하느냐? 누가 네 가슴을 노리고 만지면 어쩌려고?"
"가가께서 가슴을 만지니까 그렇죠."
"허허. 너는 평생 나에게 약점이 생긴 모양이구나."
"가가께서도 제게 약점이 생기셨잖아요?"
독고연은 손을 펼쳐 내 하복부를 쓸었다. 독고연의 은밀한 금나수에 내 양물 또한 화들짝 놀랐다.
"...흐흐흐."
"후훗."
우리는 서로 서로 상대의 약점을 붙잡고 한참 동안 웃었다. 이미 시간은 늦어 해가 어느덧 산 너머로 저물고 있었다.
"흐흐. 잉어가 맛이 상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괜히...."
퍼----엉!!
산 위에서 폭발소리가 들렸다. 넓게 펼쳐진 미혼표식구궁진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몰랐지만, 매캐한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친 건지."
"...튀김?"
알싸한 기름 냄새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튀김은 신발을 튀겨도 맛있을텐데."
"또 물기 안 닦고 기름에 튀긴 거 아닐까요?"
"......."
독고연은 천기를 읽는 여자였다.
[작품후기]
화공이다!
수정했습니다. 동시 연재의 위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