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99화 (199/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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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은 포승줄에 묶여있었다.

"여긴...."

몸이 차갑다. 주변에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추위에 금삼은 소름이 돋았다.

뚝, 뚝, 뚝.

멀리서 떨어지는 물소리는 분명 평범한 물소리가 아니다. 금삼은 흐릿한 눈을 힘들게 여러번 감았다 뜨며 제정신을 되찾았다.

"나는...어째서?"

금삼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의 계획에 따라 비색단의 일원으로 연회에 참가하여, 시킨대로 섭혼향을 뿌려 무인들을 색마로 만들었다.

모든 무인들이 색마가 되어, 황보세가 연회장에서 날뛰었다.

그렇게 색마들은 수 백 명에 이르는 무사들의 틈바구니로 숨어들었다. 모두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금삼은 황보세가의 무인들을 적당히 상대하며 여섯 자매를 범하려고 했다.

그게 금삼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그게 금삼에게 주어진 '계획'이었다.

다른 비색단 색마들이 혼란을 야기하며 몸으로 황보세가 무인들을 막는 순간, 몰래 밖으로 빠져나와 여섯 자매들을 윤간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그런데 실패했다.

어째서? 계획은 일견 완벽한 것처럼 보였고, 새어나갈 이유는 없어보였다.

'설마 누군가가 그 하루를 못참고 밀고를?'

쿵!

금삼은 발로 벽을 걷어찼다. 내공을 쓰려고 해도 좀처럼 내공이 일어나지 않았다.

"소용없다, 죄수 47호."

어둠 속에서 낮고 평범한 목소리가 울렸다. 금삼은 소리가 나는 복도쪽으로 달려가 철창을 흔들었다.

"네놈은...."

"나는 왕삼. 네놈과 함께 그 사찰에 있었던 자지."

"96호?"

얼굴은 피떡이 되고 산발이 된 왕삼이라는 자의 옷에는 '色-九六'이라는 번호가 적혀있었다. 그건 분명 관아에서 죄수들에게 붙이는 관리번호였다.

하지만 왜 색(色)이 붙어있는가. 장삼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망했다. 아주 철저히. 황보세가는 마치 우리의 습격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대응했다. 관병들이 말하는 것도 들어봤는데...우리가 습격할 시간에 맞춰 누군가가 관아에 밀고를 했다더군."

"이...이...!"

철컹철컹! 금삼이 붙잡은 철창이 거칠게 흔들렸다.

"이 개같은 쫄보 새끼들! 그 하루를 못참고 대의를 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뜻을 함께한 동료들을 밀고해?!"

그 대의가 남자들을 약에 취하게 하고 여인들을 범한다는 것만 아니었으면,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무슨 투사가 들어온 것 마냥 금삼은 억울해했다.

"황보 칠자매들은?! 그 자들은 어떻게 되었는 지 아나?!"

"...애초에 습격조차 당하지 않았다더군."

"뭐?"

"우리가 연회장을 혼란에 빠뜨린 사이, 황보세가의 창고가 습격당했다고 하더군. 우리를 이용해...놈은 황보세가의 금품을 약탈했다네."

왕삼은 허탈한 목소리로 자조했다.

"우리는 이용당한 것이야. 놈에게. 너무나도 멍청했지."

"이...이...! 아아아아아악!!!"

금삼은 분노를 터뜨리며 절규했다.

"용서하지 않겠다, 소주지 개새끼야-----!!"

소주지에 대한 욕설만이 공허히 감옥에 울려퍼졌다.

* * *

"누가 내 욕을 하는 건가?"

"어서오세요, 가가. 급히 전해드릴 말이 있어요."

나는 황보 칠자매의 방을 빠져나와 독고연과 합류했다. 독고연은 내게 뭔가 하고싶은 말이 있는 듯 보였고, 나 또한 그녀에게 전할 말이 있었다.

"그러니까...."

"...뢰마가 나타났다?"

나는 뢰마와 마인들의 등장에 다소 당황스러웠다.

"뢰마가 왜?"

"모르겠어요.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자들은 사전에 가가의 계획을 눈치챈 것 같았어요."

독고연은 자세하게 뢰마와 이야기를 나눈 것을 풀어 설명했다.

뢰마에게 나는 무마(無魔)이며, 독고연은 무마를 모시는 시녀라고 소개한 것.

"일단 여기부터 감점."

"네? 왜요?"

"아내라고 소개하지 않은 것에 깊은 유감이로구나."

"......다음 번에는 제대로 소개할게요."

독고연은 계획을 실행하는 주체가 무마임을 언급했고, 뢰마는 알아서 술술 자신이 한 행동을 밝혔다.

"음식에 미약을 태운 사람이 뢰마였다 이거지?"

"네. 덕분에 혼란이 예상보다 더 길어졌던 것 같아요."

"......흠."

평소라면 내가 노발대발하며 뢰마를 조지러 갔을 것이다. 그녀의 춘약 살포 덕분에 예상보다 더 많은 색마들이 발생했고, 그에 따라 관아에서는 연회에 참가한 모든 이들을 일단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그 과정에서 방도림이나 백보준같은, 내 초대에 응하지 않은 선의의 피해자도 발생했다.

"뢰마가 감히 나 몰래 내 계획을 도운 것으로 인해 의도치 않은 피해가 발생한 건 자명한 사실."

"어떻게 할까요. 지금이라도 쫓아볼까요?"

"아니다, 내버려두자꾸나."

뢰마 덕분에 춘약에 중독된 여섯 자매 하고도 한 명을 먹을 의지가 생겼으니, 나는 뢰마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인연이 다시 생기면 만나게 될 날이 오겠지."

"...상공, 엄청 시큰둥하시네요. 제가 뢰마가 여자라고 얘기를 안했었나요? 뢰마, 여자에요. 되게 미인."

"안다. 하지만 뢰마에게는 엄청난 흠이 있다."

내가 만약 뢰마와 마주하게 된다고 해도, 아기색마는 뢰마에게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뢰마에게 세울 수는 있어도, 굳이 박고 싶다는 욕구는 들지 않았다.

'아는 맛이다.'

혈강시로서 범해본 경험도 있거니와,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큰 하자가 있다.

창녀로 몸을 수도 없이 굴린 염마도 범했고, 어지간한 내공이 아니면 넣었을 때 양물이 얼어붙은 빙마도 범했으나, 뢰마는 일부러라도 범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자가 따로 한 말은 없었고?"

"......네."

독고연은 뭔가를 명백히 숨기고 있었다. 나는 불안해하는 독고연의 손을 맞잡고 시선을 맞췄다.

"연아. 불안해하지마라. 내가 누구냐. 부부 사이에는 서로 숨기는 게 없어야 한단다."

"......뢰마가 한 말이에요.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독고연은 정말로 내뱉기 싫어하는 눈치로 입을 열었다.

"뢰마는 개쓰레기같은 남자가 취향이래요."

"......응?"

"가가. 절대 가가가 개쓰레기라는 건 아닌데, 뢰마가 생각하는 무마는 지금 여자를 취하고 버리는 쓰레기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시고-"

"나 쓰레기 맞는데? 그러니까 마인이지."

"가가!"

독고연은 빽 소리를 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혜지도 모자라서 이제는 뢰마까지 챙기려고 하시는 거예요?!"

"혜지는 모르겠는데 뢰마는 아니야. 그 여자는...."

나는 말하는 것 만으로도 불쾌해져서 말을 아꼈다.

"괜히 들으면 네 정신에 해가 될 것 같구나. 뢰마의 이야기는 여기서 정리하자."

뢰마가 우리를 추적한 배경에 대해서는 대충 감이 오는 게 있으니, 굳이 더 캐낼 필요는 없었다.

단지 생각하면 되는 것은 하나.

뢰마는 무마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한다는 것.

'정확히는 자신이 섬길 주인일지 아닐지 판가름 한다는 거지만.'

자신보다 강한 남자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삐둘어진 여자다. 스스로를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여기는 가련한 여인이다.

'근데 그런 성격은 아무래도 좋단 말이지.'

무엇을 숨기랴. 그녀의 나이, 올해로 일-

"가가. 혜지는 모르겠다는 거, 혹시 혜지도 데려갈 생각인가요?"

"...아니?"

나는 독고연의 또다른 걱정에 그녀를 안심시켰다.

"일단 들어보거라. 황보세가 말이다, 옛날에...."

나는 황보세가와 대공자 주지 사이에 얽힌 과거의 이야기를 풀었다.

위지주라는 남자가 식객으로 들어와서 황보혜지와 풋풋한 사랑을 나눈 것.

하지만 정작 황보혜지의 언니와는 뷰릇뷰릇한 사랑을 나누며, 양다리를 걸친 것.

가임기임에도 임신하지 않는다며 반대로 알려준 뒤, 질내사정을 해버린 것.

그걸 황보혜지에게도 시도하려다가 실패했고, 결국 황보세가 무인들에게 발각되어 추격을 당하다 폭포에 빠져 도망친 것.

"위(僞)지주. 아마 대공자 주지일 것이다. 일단 이름이 '지'랑 '주'가 들어가는 건 전부 그 놈일 가능성이 높아. 인륜을 저버린 행위를 하는 젊은 남자 놈이다? 10할이란다."

"그래서 소주지라고 사칭하신 거예요?"

"그래. 내가 욕 안 먹게."

설령 누군가 와서 이 사태를 조사하더라도, 그들은 대공자 주지를 의심할 것이다. 나는 대공자스럽게 계획을 실행했고, 대공자스럽게 굳이 '소주지'라는 이름을 사용해 자신의 행적임을 과시했다.

황보세가에 의해 사로잡힌 색마들이 '주지'를 향해 울분을 가지게끔, 나는 모든 화살이 주지로 향하게 만들었다.

"어...그러면 큰일 난 거 아니에요? 뢰마가 알아버렸으니까요."

"괜찮다. 네 덕분에 뢰마는 쉽게 대공자에게 일러바치지 못할 것이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여자, 지금쯤 무마랑 대공자 사이에 누구 줄을 붙잡을 지 저울질하고있을테니."

염마와 빙마가 그랬던 것처럼, 뢰마 또한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에 빠질 것이다.

* * *

그 시각.

푸욱.

뢰마는 마지막 남은 마인의 심장을 향해 비수를 꽂아넣었다.

"대체 왜...?"

마인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피분수를 뿜으며 고꾸라졌다. 그의 주변에는 이미 숱한 마인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다.

"글쎄."

뢰마는 마인들을 향해 비수를 던지며 확인사살을 빼먹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확인하며 마인들을 죽인 그녀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상쾌한 미소로 웃었다.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한 대가?"

뢰마는 죽은 마인들을 비웃었다. 그저 '거슬리게'했다는 이유로 죽였으며, 누군가가 찾아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일각 정도 시간이 흐르자, 대규모 흑의인이 뢰마를 둘러싸며 포위망을 형성했다. 그 중 유일하게 정체를 숨기지 않은 중년인은 굳은 얼굴로 포권을 취했다.

"...뢰마시여, 이러려고 제 부하들을 데려가신 겁니까?"

"흥. 미약에 중독되어서 주인을 무는 개새끼들이었어."

뢰마는 딱딱하게 발기한 남자들의 시체를 가리키며 마기를 끌어올렸다.

"부하들을 잘못 기른 사람에게 내가 책임을 따져야 하는 거 아닐까, 남궁살?"

"...정말로 제 부하들이 십마 중 한 분, 뢰마께 칼을 들이밀었습니까?"

"그래. 아주 딱딱하고 흉측한 고깃덩어리 칼을 내게 겨눴지. 이거 봐."

뢰마는 시체들을 가리켰고, 그들은 모두 발기한 채 죽어있었다.

"마음같아서는 대공자가 아니라, 내가 직접 천마께 건의해서 안휘배후성주를 바꾸고 싶을 지경이야."

"죄송합니다, 뢰마시여."

남궁살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다. 그에 그를 따라온 무인들은 인상이 일그러졌고, 뢰마는 낮게 웃으며 남궁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죄송해야지. 독약을 퍼뜨리는 임무에 독약에 중독되는 마인이 세상에 어디있겠어?"

"물론입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그런데 뢰마시여."

남궁살은 차가운 눈빛으로 뢰마에게 되물었다.

"아랫 것들에게 숨겨야 할 일이 있다면, 최소한 제 손으로 처리하게 해주십시오. 무능하든 말든 제가 직접 기른 부하들입니다."

"...흐흥."

뢰마는 눈에 이채를 띄며 남궁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는 남궁살의 손 위에 서책 하나를 올려두었다.

"황보세가의 벽력신권을 필사해왔어. 이거로 산동배후성주랑 잘 이야기해봐."

"감사합니다, 뢰마."

"...아, 그리고 말이야."

뢰마는 다른 부하들에게 들리지 않을 낮은 목소리로 남궁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이, 백 씨. 당신 아들 관리 좀 잘 해. 고작 그 정도로 되겠어?"

"......더욱 잘 노력하겠습니다."

남궁살의 이가 갈렸다. 뢰마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빠르게 자리를 이탈했다.

"눈치 빠르네."

흑의인들은 번개처럼 떠나가는 뢰마를 뒤쫓을 생각도 못했다. 뢰마는 산길을 달리며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무마 님에 대한 걸 퍼뜨릴 수 없지. 히힛, 나만 알고 있어야지...."

천마 다음의 2인자라고도 불리우는 무마.

설령 지린구마가 된다고 하더라도, 무마가 비천무마가 된다면 십만마인은 모두 소공녀를 따르게 될 것이다.

그만큼 무마라는 자리는 의미가 강했다.

그러니 대공자에게도 말할 수 없다.

"설마 그런...쓰레기같은 분일 줄은."

저벅, 저벅.

뢰마는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스스로 손가락을 튕겨, 몸에 전류를 흐르게 만들었다.

파지지직.

"아흣."

푸른 전류가 튀길 때마다, 뢰마는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팔을 팔짱끼며, 흙바닥에 몸을 처박은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하아.... 천마 님과 대공자 님 이후로 이런 남자는 처음이야...."

뢰마는 전신에 흙이 묻든 말든, 누가 보든 말든 자신의 행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착한 쓰레기랑 나쁜 쓰레기...하아, 누굴 천마로 만들지?"

그녀의 망상은 나날이 깊어져만 갔다.

[작품후기]

염마 - 걸레

빙마 - 백치

뢰마 - 이상성욕

이제 십마 중 남은 여자는 단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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