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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색단 습격
황보세가를 습격하여 내부에서 소요를 일으키려는 정체불명의 조직, 비색단에 대한 제보를 마친 독고연은 약속된 곳에 숨어 내공을 가다듬었다.
"빨리 움직여라, 황보세가가 위험에 처하기 전에!"
무림세가라고 한들 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는 게 아니다.
특히 산동 제일의 무림세가라면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고, 또 따로 산동성주와 기타 관료들에게 알음알음 주는 편의도 많다.
"황보세가의 주변을 몰래 포위한다. 색마들이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
유명 세가들을 지방 행정 조직들과 긴밀하고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관에서도 아무리 습격이 예정된 곳이 산동 최강의 무력집단이라고 한들, 첩보가 들어온 이상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색마 소탕 계획의 1단계는 성공.'
세가 안에서는 색마들이 계획에 따라 모임과 동시에, 밖에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독고연이 제보를 하여 색마들의 포위망을 형성한다.
괜히 피를 보는게 아닐까 싶었지만, 비천색마는 혼자서 탈출할 생각으로 계획을 밀고했다.
스스로 계획을 짜고, 스스로 계획을 까발렸다. 피해자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계획에 가담한 비색단의 색마들은 모조리 체포될 것이다.
'부디 무사히 도망쳐 나오시기를.'
무사히 탈출하면 좋으련만, 그럴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분명 전투가 벌어진다. 좋든 실든 모종의 변수로 인해 싸움은 벌어지게 되어있으리라. 독고연의 직감은 열에 아홉 정도는 분명 전투가 벌어지리라 믿고 있었다.
‘예상외로 모이는 이들이 많아.’
관에서 색마들을 붙잡기 위해 동원한 관졸의 수도 많지만, 황보세가를 공격하기 위해 모인 변태 고수들 또한 수가 제법 많았다.
특히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아니라, 밖에서 눈치를 보며 대기하고 있는 색마들의 수도 상당했다.
“...정말 가능하겠어?”
“안쪽에서 소란이 생기면 우리도 끼면 되는 거야. 황보 칠공주가 아니더라도 방계 여자든 누구든 따먹으면 되는 거 아니냐.”
독고연은 황보세가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색마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황보 칠공주 뿐만 아니라, 황보세가의 방계 여인들까지 노리고 있었다.
팔대세가 중 한 세가를 알지도 못하는 남자들이 하나가 되어 덮친다.
‘어떻게 이런게 가능한 거지?’
독고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산동은 무림맹이 있는 하남과 인접한 곳이며, 황보세가를 덮친 뒤에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무림맹에서 지원을 나올 것이다.
그런데도 무인들은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비색단의 조무래기가 되어 황보세가를 습격하는 데 동참했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가가가 딱히 힘을 보인 건 아닌데.’
빙색마인으로서 나선 것도 아니건만, 그저 ‘비밀병기’ 운운하며 뭔가 비장의 수가 있을 것처럼 속이기만 했을 뿐이건만, 색마들은 황보세가를 엿먹이겠다는 생각에 가득차있었다.
‘알아봐야겠어.’
왜 일류에 불과한 고수가 이런 계획에 동참한 건지.
따로 섭혼술을 쓴 것도 아닌데 왜 색마들이 대량으로 들어와 계획에 동참하는지.
왜 예정된 인원보다 '수 십 명'은 더 많은 색마들이 나타난 건지, 독고연은 숨을 죽이고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세가 안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
전신의 털이 쭈뼛서는 듯한 착각에 독고연은 검집에 손을 올렸다. 세가의 후문 방면으로, 하인의 복장을 갖춘 누군가가 은밀하게 세가를 빠져나왔다.
'고수!'
독고연은 어둠을 틈타 지붕 위를 뛰었다. 비천이 직접 옷을 꾸민 흑의를 입은 채, 그녀는 하인의 뒤를 밟았다.
저벅, 저벅.
하인은 허름한 장원에 담벼락을 넘어 뛰어들었다. 독고연은 하인이 사라진 장원을 유심히 살피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돌렸다.
'가가가 기다리실 거야.'
이상한 변수는 나중에 알리면 된다. 독고연은 비천과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바로 몸을 돌려 장원을 이탈했다.
하지만 쉽게 떠나지 못했다. 독고연은 뒤에서 느껴지는 끈적한 기운에 검을 바로 뽑아 휘둘렀다.
"커헉!"
복면을 한 흑의인은 독고연의 검에 목이 베여 쓰러졌다. 사람을 순식간에 검으로 죽인 독고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컥!"
검이 초승달을 그리며 유려하게 궤적을 그리기 무섭게, 또다른 흑의인이 단검을 쥔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쓰러진 흑의인들은 둘 다 독고연을 향해 독이 발린 단검을 들고 있었다.
"제법 손속이 거친 걸. ...어머나, 꼬맹이가 옷차림 한 번 음란하기 짝이 없는 걸?"
황보세가의 하녀복을 입은 여인은 어느새 검은 무복으로 환복한 채 독고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주변에는 수많은 흑의인-아니 마인들이 독고연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정체를 밝히렴. 너는 누구니?"
"남에게 정체를 묻기 전에 자기 정체부터 밝혀야 하는게 인지상정 아닌가?"
독고연은 누군가를 흉내내며, 여인을 비웃었다. 기세를 끌어올리며 주변을 압박하자, 여인 이외의 모든 흑의인이 흠칫거리며 놀랐다.
"...초절정입니다."
"그래. 나도 알아. 아주 피부가 저릿한 걸. 좋아. 우리 부하들 다 죽을 것 같으니까 얘기하지."
파지직. 여인의 몸에서 전격이 튀어올랐다. 검게 물든 그녀의 머리칼은 순식간에 회색으로 물들었고, 여인은 독고연 이상의 기세를 내뿜으며 씩 웃었다.
"마교 십마 중 한 명, 지린뢰마라고 해."
"!!"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적을 만났다. 독고연은 이시아로부터 들었던 정보를 떠올렸다.
"비영선뢰문(飛影扇雷門)?"
"어머, 거기까지 알고 있어? ...정체를 밝혔으니 그 쪽도 밝혀야지? 입 꾹 닫고 있으면 재미 없을 줄 알아."
여인, 뢰마는 품에서 검은 봉 하나를 꺼내들었다. 뚜껑을 열어젖히며, 곱게 접힌 자줏빛 부채를 꺼내 펼쳤다.
"넌 누구지?"
"......."
독고연은 낭패한 얼굴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일월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여기서 십마 분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응? 너 마교인이니?"
뢰마는 다소 당황한 눈빛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던 정체와는 전혀 다른 정체에, 독고연이 마교인일 자처하는 목소리에 진심으로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예. 저는...."
- 만약에 그 새끼 부하들이랑 만났을 때, 위험하면 이렇게 말해. 그러면 십중팔구는 넘어갈 거야.
- 나를 팔아라, 연아.
"...있어서는 안 될, 존재하지 않는 공백의 좌를 모시고 있습니다."
"......!!"
뢰마는 형언할 수 없는 뒤틀린 표정으로, 독고연을 위아래로 가리켰다.
"...그런데 왜 옷이 그 모양이죠?"
"그 분의 취향입니다."
뢰마는 할 말을 잃었고, 독고연도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 * *
"뭐야, 너 나랑 싸우자는 거냐?"
"그 쪽이 먼저 부딪혀놓고 왜 시비를 거는 것이오?!"
웅성웅성.
화기애애한 연회장에 분란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흰 무복을 입은 남자의 몸에는 붉은 양념이 가슴부터 다리까지 한가득 묻어있었다.
"옷에 고추기름 냄새 어쩔 거냐!!"
남자의 아래에는 고추기름에 흠뻑 젖은 오리 구이가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얀 무복은 고추양념과 오리기름이 섞여, 다시 하얀 빛깔로 되돌리기에는 가망이 없어보였다.
"일부러 쏟았지!!"
"내가 뭐하러?"
"네 놈, 나한테 2차전에서 탈락한 새끼 아니냐!"
"지랄. 눈이 삐었소?"
점차 분쟁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남자들은 분란을 옆에서 구경하며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계집애들도 아니고 말로 싸워대다니, 쯧쯧."
"그럴 거면 차라리 주먹으로 싸우는 게 어떤가?"
"무림인이 되어서 말싸움이나 하려고 하다니 말이야, 쯧쯧. 저런 자와 동서가 될 뻔 했다니."
오히려 그들은 무사들을 매도하고 분노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두 무인 사이의 소란을 부추기며, 격한 싸움이 일어나도록 유도했다.
"이보게, 다들 취했군."
"진정하시오. 황보세가의 연회에 와서 부끄럽지도 않소?"
"닥쳐! 공짜밥이나 처먹으러 온 주제에!"
"뭐? 이 대머리 새끼가 말을 다했나?!"
술에 취한 무인들은 서로를 향해 모욕과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서로 멱살을 잡기 시작했고, 서로 술 기운에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란인가?"
의아할 정도로 억지스러운 주폭(酒暴)에 의아함을 느낀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소란은 일종의 신호였다.
"진정하시오! 이게 무슨 행패란 말인가!!"
픽, 픽픽.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폭력 행위를 일으키는 이들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고함과 함성 소리에 섞여 곳곳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뭐긴 뭐야, 섭혼향이지."
"야, 빨리 해독제나 삼켜!"
폭력 행위를 직접 자행하거나, 옆에서 부추기거나, 가만히 숨어있던 이들이 하나 둘 입에 무언가를 넣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크흐흐, 금방 픽픽 쓰러지는 구나."
"시킨 대로 해! 당장!"
색마들은 섭혼향에 취한 이들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황보지들 따먹고 싶다.... 당장 내 아래에 깔고 범하고 싶다...."
"으어어...."
섭혼향에 중독된 이들은 하나 둘 몽롱한 정신으로 몸을 흐느적거렸다. 그들의 아랫도리는 하나같이 전부 부풀어올라 있었다.
"흐흐, 황보지들은 어디있지?"
색마들은 본색을 드러내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주변에는 무투대회에서 탈락한 이들 밖에 없었고, 황보세가의 무인들이나 여인들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이 년들 어디로 갔어?"
그 누구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 * *
연회장에서 다소 동떨어진 고층 건물, 황보혜지의 방.
우리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연회장의 분위기를 살폈다.
"슬슬 시간이 되었군."
나는 몸 이곳저곳의 상태를 확인하며 몸을 일으켰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이미 무르익을대로 익었고, 이제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이유도 없다.
"준비는 모두 끝났소. 색마들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군."
"...정말 이거면 되나요?"
황보혜지는 침대 위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 앉아 허리에 손을 올렸다.
"물론. 그대는 안심하고 여기서 나와 즐기면 되는 것이오."
"...걱정됩니다. 혹시나 일이 잘못되지는 않을까."
"이미 황보 가주는 첩보를 들었을 것이오. 그러면 더이상 술을 마시지 않거나...아니면 오히려 상황을 역으로 이용하겠지."
이미 황보염은 거나하게 취해있었다.
수십 명이 넘는 색마들은 서로 번갈아가며 황보염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었다. 황보염이 아무리 첨잔을 하고 술잔을 몰래 버린다고 한들, 결국 입안에 잠시 드나든 술에 빨리 취해버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딸들을 윤간하기 위해 들어온 색마를 두고 누가 술에 취할 수 있겠는가!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군. 첩보는 성공적으로 전해졌소. 그러니 그대는 탈혼붕권과 긴밀한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세가가 습격당하는 동안, 탈혼붕권은 황보혜지와 뜨거운 밤을 보낸다."
"그렇소. 그리고 소주지라는 자가 우리를 습격하게 되겠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소주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군. 습격자는 없소. 흐흐."
"자기 자신을 어떻게 그냥 보겠어요."
색마들이 동참한 것으로 모자라 다른 색마들까지 모집하게 된 계획은 철저하게 망할 것이다.
그들은 소주지에 의해 배신당하고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할 운명이다. 자신들이 이용당했다는 것 조차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자신들이 몰래 가지고 들어간 연기구슬을 터뜨릴 것이다.
"슬슬 터질 때가 되었는데."
나는 색마들에게 나눠준 구슬을 꺼냈다. 영물의 내단처럼 제법 큼지막한 구슬 안에는 회색빛 기체가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푸쉬이이이.
연회장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황보혜지에게 구슬을 보였다.
"특별히 제조한 섭혼향(攝魂香)이오. 구슬을 빠져나온 순간 주변을 뒤덮는 연기가 되어버리며, 맡은 상대를 순식간에 수면에 빠지게 만드는 아주 무서운 것이지."
톡. 나는 섭혼향이 든 구슬을 손으로 짖이겼다. 황보혜지는 순간 놀라서 몸을 움츠렸지만, 나는 손으로 가볍게 연기를 흘렸다.
"참고로 이건 진짜 섭혼향이오. 가짜가 아닌 진짜이며, 놈들에게 나눠준 것들 또한 진짜지."
"그러니까 걱정된다는 거예요. 진짜로 섭혼향이면 사람들 다 약에 중독되는 거 아니에요?"
"당연히 중독되겠지. 해독제가 있는 색마들은 섭혼향에 중독되지 않고 움직일 것이고."
휘이이이잉.
밖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오."
나는 내가 짖이긴 섭혼향의 기운을 연회장에 퍼뜨렸다.
"섭혼향은 진짜인데, 해독제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
아마 저곳에 있으면, 같이 이성을 잃고 폭주하지 않을까.
"색마 짓 하기 좋으라고, 해독제라고 준 단약에 발기 강화제를 집어넣었지."
모두가 섭혼술에 걸려 색마가 된 가운데, 진짜 색마들을 구분할 수단을 마련해뒀다.
"붙잡히고 세 시진이 지나도 서있는 놈들이 범인이오."
[작품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