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92화 (19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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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색단 습격

축제의 날이 되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인 황보세가는 수백 명에 이르는 인파를 초청하여 무투대회의 피로연을 열었다.

식탁을 수 십개 공수하여 비무장 전체를 피로연을 위한 식당으로 꾸몄을 뿐만 아니라, 산동의 유명 숙수들을 모집하여 수 십 종류가 넘는 음식들을 현장에서 즉석으로 만들어 내놓았다.

"어디 몇 가지 음식 정도로 모두 만족할 수 있겠소? 내 다른 날보다 여섯 배 더 쓰리다! 가주가 살림 좀 쓰겠다는 데 누가 막겠나! 하하!"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축제는 건전한 의미에서 주지육림을 방불케 했고, 작은 중소문파의 한 달 운영비에 준할 정도의 거금이 사용되었다.

"역시 황보세가!"

"크으, 돈 쓰는 거 한 번 확실하군!"

아쉽게 무투대회에 떨어졌던 이들은 황보세가가 준비한 고기에 맛들리고 술에 취했다. 2차전에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황보염에게 아쉬움만 표했지 딱히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

"대협, 2차전에서는 아쉬웠소."

"크으. 절정 고수들이 몇이나 나올 지 누가 알았나?"

애초에 실력차이가 워낙 많이 나서 우승은 커녕 칠랑 안에 들어가는 게 불투명했던 것이다.

"박 형은 그래도 탈혼붕권과 세 합은 겨루지 않았소? 이 중에 탈혼붕권의 일 합을 견뎌낸 이가 손에 꼽을 정도니. 하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제 다음에 바로 현천 백가의 적자에게 가던데, 어휴. 만약에 그걸 제가 맞았으면 의원 신세였습니다."

"암, 강했지요. 크으, 그토록 강한 남자라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상 황보세가의 후계자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군요."

그리고 설령 다른 자매와 결혼한다고 해도, 세가의 가주 자리는 사실상 탈혼붕권의 것으로 확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무림인들은 누구나 세가의 가주, 문파의 장문인과 같은 으뜸을 추구한다. 설령 황보세가에 들어간다고 해도 가주 자리는 오르지도 못할 나무가 뻔했다.

"그런데 들으셨습니까? 이번에 방계에서도 많이 온다고 하더군요."

"예, 들었습니다. 크으, 몇몇은 칠공주 중 일부보다 예쁘던데요?"

"그들을 굳이 이 자리에 불렀다는 건...."

"하하하,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게 아니겠습니까?"

무사들은 술 기운에 화기애애했다. 물론 그 중 일부는 잔칫집에 와서 대놓고 불평불만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다소 불쾌한 얼굴로 술만 홀짝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창천신룡 방도림.

그는 나름 현천 백가의 적자와 1:1 대결에서 우세를 가져왔으나, 다른 무인들의 난입으로 인해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그리고 숨을 골라 다시 싸우려고 한 순간, 비무장이 파괴되어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현천 백가의 적자, 백보준.

그는 전신에 붕대를 감은 채, 연거푸 술잔을 채우며 화를 분을 풀었다.

황보세가에서는 무투대회의 주최자답게 모든 부상자에 대한 치료에 돈을 아끼지 않았고, 탈혼붕권의 공격 또한 비무장을 전소시켰을 뿐 이상하게도 직접 맞은 백보준이 일어나지 못할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태악붕괴권이라고 했던가? 그 무술의 원리가 무엇이라고 보시오?"

"발경의 원리를 담은 주먹 아니겠소? 충격파가 땅으로 흩어진 거지."

"크으. 만약 몸이 붕 뜬 상태에서 얻어맞았으면...어휴."

무사들은 백보준을 두고 대놓고 수군거렸다.

안 그래도 몸을 크게 다친 백보준을 두고 적나라하게 한 소리를 하고 지나가는 이유는 백보준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백보준은 자신의 탈락에 탈혼붕권이 손속에 사정을 두었음에도 연거푸 탈혼붕권의 '사기'를 입에 담으며 비난했기 때문이다.

"분명 그 자식, 사술을 쓴 건데...!"

백보준과 같이 탈혼붕권의 실력에 의구심을 가지고 질투하는 자들도 연회장에 있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탈혼붕권에 대해 속내를 감춘 의문을 던졌다.

"그런 문파는 들어본 적도 없소."

"출신과 배경이 불분명한 자요. 황보세가와 격이 맞을 지 의문이군?"

"계란은 한 바구니에 여럿 담으면 안 되는 법이거늘...쯧쯧."

그렇게 궁시렁거리는 무리가 하나.

"...하하하."

"...후후후."

그리고 또 술을 홀짝이며 서로 영혼없는 대화를 나누는 무리가 또 하나.

연회장에는 수많은 이들이 모여 술잔을 꺾었고,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었다.

"여봐라. 거기 멈춰라."

술을 마시던 백보준은 황보세가의 하녀복을 입은 여인을 불렀다. 머리를 묶지 않았다면 남자 하인으로 착각했을 법한 여인은 허리를 천천히 숙였다.

"이 술이 맛 한 번 제법 화끈하구나. 이 술은 어디의 명주인가?"

"...감히 출처를 말씀드리기 저어되오나, 진정으로 궁금해하시는 듯 하니 알려드리겠습니다. 마위뢰천이라고 합니다. 섬서에서 들어온 거지요."

"섬서에 이런 술이 있던가? 흠.... 뭐, 맛이 좋으면 그만이지. 한 병 더 주게."

백보준은 여인에게서 술을 건네받았다. 탈혼붕권을 욕하며 술병을 비우니, 금방 동이 나고 말았다.

"크으, 몸이 달아오르는 게 내가 화가 많이 쌓였던 모양이군. 으어, 벌써 달아오르...크흠."

백보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차마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여인이 돌아다닐 때마다 몇몇 무인들이 허리를 구부정 숙이거나 자리를 피하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 * *

'많이도 왔군.'

나는 수없이 모여든 인파에 진절머리가 났다. 공짜 술과 고기에 홀려서 온 자가 5할이고, 황보세가의 방계와 어떻게 좀 잘 해보려고 온 자가 3할이고, 나머지 2할은 전부 색마들이었다.

'사람 많은 건 딱 질색인데.'

여럿이 모여있으면 꼭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드는 것 같아 괜히 불안하다. 실제로 저들 중 일부는 탈혼붕권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적의를 가진 이들이 분명히 존재했고,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기를 퍼뜨려 그들을 압박했다.

'좀 있으면 다 잡혀들어갈 놈들이 어디서 나를 넘봐?'

그들 모두가 나와 내통한 비색단의 색마들이다. 그들은 황보혜지를 비롯한 황보 칠공주를 향해 아닌 척 음란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한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다고 모를 줄 아나.'

남자의 은밀한 시선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건 눈총을 받는 당사자들이다. 황보 칠공주는 그들의 시선을 모른 척 흘려내며, 손님 맞이에 여념이 없었다.

"사람 구경이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물론. 정리는 다 끝...."

나는 슬며시 다가온 황보혜지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평소에는 무복이나 가벼운 옷차림만 입더니, 한껏 꾸미고 나오니 다른 팔대세가 여식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예쁘군."

"빈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진심이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만약 황보혜지의 이 모습을 먼저 봤더라면 분명 겁탈했을 것이다. 어차피 잠시 뒤에 겁탈하겠지만, 독고연의 부탁에 의한 겁탈이 아니라 내 자의에 의한 겁탈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꾸며놓으니 훨씬 예쁘군."

"이게 뭐가 예쁘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무공을 쓸 때 불편하기만 한데."

황보혜지는 나풀나풀 거리는 옷에 불만을 드러냈다. 벽력신권을 이어받을 여인 답게, 그녀는 활동성이 좋은 옷을 선호했다.

하지만 역시 여인은 여인다운 옷을 입어야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무복과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에 나는 그녀를 향해 술을 건넸다.

"눈요기 잘 했소. 계속 입으시고, 뒤에도 잘 부탁하오."

"......정말, 당신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황보혜지는 내게 딱 달라붙어 퉁명스레 말했다.

"그냥 범하고 도망가면 되는데, 왜 굳이 또 이상한 계획을 추가한 거예요?"

"글쎄. 생각보다 황보세가의 호탕함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야하나."

호협스러운 면이 제법 매력적인 곳이다.

전생에 인연이 없어서 그냥 팔대세가 중 '하북팽가'와 비슷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의외로 시원시원하고 화끈한 매력이 있어 그냥 엿을 먹일 수 없었다.

"...일곱 자매를 전부 주겠다는 양반이 불쌍해서 말이야."

"정말 괜찮겠어요? 괜히 벌집을 건드리는 셈이 될텐데."

"그대가 걱정할 건 아니지."

결과적으로 황보혜지는 강압에 의해 더렵혀진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기만 하면 된다. 나는 황보세가의 더 낳은 미래를 위해 계획을 일부 수정했다.

"그대는 그대의 사랑을 어찌 설득할 지 고민이나 하시오. 나와의 육체 관계를 숨겨도 좋소."

과연 황보혜지가 사랑하는 이는 황보혜지가 나와 육체관계를 맺는 걸 인정해줄 것인가? 개인적으로 조금 궁금하기는 하지만, 황보혜지가 자기 편하자고 진실을 숨기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호기심이 될 것이다.

"아뇨, 사실대로 말할 거예요. 저는 색마와 살을 섞었다고."

"그것 참. 그대도 고집 한 번 대단하군."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걸요."

"...그대도 하여튼 정상은 아니야."

이상한 곳에서 이상한 고집을 피운다. 덕분에 내가 황보혜지를 겁간이 아닌 화간으로 한 번 안을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황보혜지의 속내를 도통 읽을 수 없었다.

섭혼술까지 걸 정도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냥 모르는 상태로 두는 게 훨씬 더 좋을 것 같았다.

웅성웅성.

마침 아래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석양이 지고 떠오른 달을 향해축배를 들었다.

"곧 사로잡힐 색마들을 위하여."

현재.

"혜지, 천하에 가장 강한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무력?"

"그렇소.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무력이 있지."

이곳에 없는 독고연은 남들 몰래 조용히 어딘가로 향했다.

"공권력(公權力)."

우리의 황보세가 윤간 계획이 적힌 서찰을 들고,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곳을 향해.

* * *

"황보 가주 님의 아량에 이 주 모, 감복했습니다."

"하하! 주 소협, 별 것 아닐세. 이런 좋은 날을 위해 모아온 재산인데, 어찌 씀씀이를 아낄 수 있겠나?"

황보염은 하나 둘 인사를 나눌 때마다 기분이 들썩거렸다.

"제 잔을 받아주시지요."

"고맙네."

황보염은 잔에 가득 찬 술에 인상을 잠시 찌푸렸으나, 껄껄 웃으며 호방하게 한 입에 털어넣었다.

애초에 그는 자신의 특수한 잔으로 술을 입에 넣고 '마시지 않았다'. 술은 좋아하지만 많이 마시면 문제가 생기기 십상인 그는 최대한 조금만, 그리고 많이 마시기 위해 온갖 꾀를 동원했다.

"현지야, 물을."

"예, 아버님."

출렁.

물을 마시는 척, 술을 다시 뱉어낸 그는 껄껄 웃으며 다른 이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안 마시고 넘어가기에는 오늘따라 가주에게 인사하는 손님이 유독 많았다.

"껄껄껄, 좋구나."

"가주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총관이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는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지 못했으나, 뭔가를 급히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흐허허, 현지야. 잠시 소피를 보고 오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황보염은 화장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손님들을 위한 화장실과는 다른, 세가 사람들을 위한 전용 화장실에 가서 바지를 내렸다.

"그래,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관아...산동성주에게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객잔에서 한 여인이 이 서찰을 받았는데, 관아에 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서찰?"

"예. 관아에서 곧 병사들이 올 겁니다."

황보염은 인상을 찌푸렸다.

"쯧쯧, 관무불가침은 허명인가? 어찌 황보세가의 일에 산동성주 따위가 병사를-"

화륵!

황보염의 몸에서 술기운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서찰을 가리켰다.

"이게 사실인가?"

"예. 서찰에 적힌 곳으로 가니 무인들이 바닥에 박혀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유감스럽게도 무투대회에 참가한 무인들이었습니다."

쿵!

황보염은 벽에 주먹을 휘두렀다. 나무 기둥에 황보염의 주먹이 박혀 선명한 자국이 남았다.

"이 개새끼들이 감히 이 좋은 날을 이용해 내 딸을 윤간하려고 들어?"

황보염은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술잔을 건네던 이들 중 유독 기감에 이상한 것이 걸리던 자들이 몇몇 있었다.

"나를 취하게 만들고 소란을 피워 내 딸들을 덮친다? 하, 어림도 없지!"

"어찌하시겠습니까? 관에서 오기 전에 은밀히 무사들을 동원할까요?"

"...아니, 아니. 그러지 마시게."

황보염은 물에 손과 얼굴을 씻으며 열을 식혔다.

"산동성주가 이미 병력을 보낸 이상, 이건 관무를 따질 일이 아니야. 총관, 그대는 관과 접촉하여 포위망을 형성해달라 요청하시게."

"알겠습니다. 또 하명하실 건 있으십니까?"

"혜지를 제외한 여섯 아이들을 모두 한 곳에 불러모아. 그래...혜지의 옆 방이 좋겠군."

"탈혼붕권에게 아가씨들의 안전을 맡기시려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그래, 그래. 사위는 아내들을 지켜야지."

황보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 딸들을 노리는 색마들은 내 손으로 처단하겠다."

천하제일권의 눈에는 술기운이라고는 일절 없었다.

[작품후기]

투철한 신고정신!

사실 오타인데 틀린 말은 아니니 그냥 놔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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