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88화 (188/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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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음모

그 시각.

독고연은 홀로 객잔에서 잘 넘어가지 않는 밥을 먹으며 고뇌에 빠졌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승자박'이라는 네 단어만 계속 맴돌았다.

'괜한 짓을 한 게 아닐까.'

자신은 황보혜지의 사랑을 위해 도우러 왔다. 그리고 이왕이면 독고연 또한 사람인지라, 독고연 본인의 입장에서 최적의 흐름대로 사건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황보혜지의 순정에 감동한 비천색마가 황보혜지를 취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겁탈한 척 한다거나.

황보혜지의 정인은 겁탈당한 그녀를 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를 사랑하오!'와 같은 포효를 내지른다거나.

결국 혼삿길이 막힌 황보혜지가 정인과 혼인에 성공한다거나.

'황보혜지를 범하지 못했으니, 연아. 네가 오늘 밤은 혜지다.'

황보혜지를 품지 못한 비천색마가 그 울분을 자신에게 풀어준다거나!

"꺄악. 안 돼요. 하지마세요. 제게는 사모하는 사람이 있어요."

황보혜연이라는 이름까지 만들어 침대 위에서 범해지는 연습까지 하고 있건만, 그건 아무 짝에도 쓸모업는 망상으로 끝나버렸다. 황보염의 돌발행동으로 황보칠공주가 얽히게 되었지만, 중요한 건 황보혜지의 '의지'였다.

"혜지...."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은 흔하다. 독고연은 아직 확신은 할 수 없지만, 뛰어난 직감으로 황보혜지가 자신의 남자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어냈다.

그 눈빛.

저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황보혜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적어도 그게 비천색마일 리는 없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며, 산동에 온 이유는 황보혜지를 그와 이어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황보혜지는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탈혼붕권과 이어지는 것에 거부감을 내비치지 않았다.

조금 천박한 말로 표현하자면, 그건 강인한 수컷에 호감을 느낀 암컷의 모습이었다.

그걸 왜 알고 있느냐. 본인이 그랬으니까.

주변인들이 다 그랬으니까. 비천색마에게 반한 이유는 다 제각각이 되겠지만, 결국 자신의 운명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강한 남자에게 매료되었던 것도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으으...."

만약에 황보혜지가 진짜로 비천색마에게 연심을 품으면 어떻게 해야될까.

비천색마에게는 미안하지만, 독고연은 일부러 '황보혜지가 비천색마에게 호감을 품을 수 없는 조건'을 상정하고 계획을 짰다.

비천색마 또한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눈감아줬다.

만약 색마가 진심으로 황보혜지를 원했다면 독고연의 계획을 꺾고 황보혜지를 납치했겠지만, 그는 황보혜지와의 성교만 원할 뿐 딱히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가 산동에 온 이유는 독고연을 더욱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니까. 구체적으로 파헤치자면 황보혜지를 구해줬다는 것을 핑계로, 독고연이 더욱 자신에게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9할이었다.

나머지 1할은 그로 인한 부수입, 그러니까 황보혜지이리라.

문제는 그냥 하룻밤 자고 갈 황보혜지가 비천색마에게 반해버릴 경우.

오는 여자는 막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색마인 걸 모두 알면서 마음에 든다고 한다면, 색마도 굳이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정말 최악의 경우에, 황보혜지가 자신과 똑같은 길을 걷는다면?

탈혼붕권이 아니라, 빙색마인까지 등판한다면?

'아냐, 그럴 리 없어.'

호감을 쌓을 요인이 요만큼도 없었다.

설마 황보혜지가 자신보다 강한 남자에게, 또는 강한 권사에게 반하는 쉬운 여자일리가 없다!

독고연은 친구를 믿었다.

황보혜지의 순정을 믿었고, 황보혜지의 상식을 믿었다.

아무리 자신의 남자가 매력적인 남자라고 하더라도, 첫 인상이 개방 거지만도 못한 색마라면 당연히 거부하게 되는 법이다.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호랑이가 제아무리 늠름하고 멋지다고 한들, 사슴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반하지는 않을 것이다.

- 저는...혜지가 되겠어요. 연.

"설마."

황보세가를 등지지는 않겠지. 독고연은 불안감에 애꿎은 채소를 젓가락으로 푹푹 찔렀다.

"혜지...진짜 위험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독고연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침대에 몸을 묻었다.

- 연, 가가께서 오늘 점심은 뭐가 드시고 싶다고 하셨어요?

- 혜지랑 연이요.

- 어머나. 그러면 맛있게 드실 수 있게 해드려야겠네요.

왠지 모르게, 천가장안에서 혜지와 자신이 함께 집안일을 하는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혹시...아이라도 가진다면?"

제발 망상으로 그치기를. 독고연은 하늘에게 빌고 또 빌었다.

* * *

"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대답하세요. 말 돌리지 말고."

황보혜지는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추궁했다.

"나는 나를 시험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소. 농이라도 거짓을 싫어하지."

"농담인 것처럼 보이세요?"

"그야 당연하지. 그대는 황보세가를 버릴 수 없을테니."

정곡이 찔린 황보혜지는 표정이 굳었다.

"나는 혜지는 납치할 수 있소. 하지만 황보혜지는 아니오."

"...연이처럼 세가를 등질 각오를 하라?"

"물론."

인생의 우선 순위에 있어서 나와 세가를 두고 선택할 수 있는 여자는 팽유월 뿐이다. 그녀는 내 자식을 팽가의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원했기에, 나는 그녀를 팽가에 두었다.

"나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거든, 삶의 우선 순위에 나를 첫째로 둬야 할 것이오."

"......상당히 무거운 사랑을 요구하시네요."

황보혜지는 씁쓸한 미소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시험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단지...."

황보혜지는 뒷말을 삼키며 말을 얼버무렸다. 무슨 말을 머뭇거리는 건지는 몰라도, 나는 그녀가 오해하지 않도록 확실히 못을 박았다.

"그리고 설령 그대가 그걸 원한다고 해도, 들어줄 생각은 없소."

"그건 의외인데요."

"당연하지. 내가 그대를 만나러 온 건 연이의 친구이기 때문이지, 내가 그대를 꼭 가지겠다고 온 건 아니기 때문이오."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

하지만 이왕 먹을 거라면 국물 하나 남기지 않고 든든하게.

그리고 기왕지사 먹을 거라면 만한전석으로 조금도 남기지 않고.

"내게는 독고연이 우선이지, 황보혜지가 우선이 아니라 이 말이외다."

"연이가 만약 저랑 하는 걸 하지 말라고 하면, 진짜로 안 하실 건가요?"

"당연하지."

내 말에 황보혜지는 진심으로 놀란 눈치를 보였다.

"연이를...진심으로 사랑하시는 군요."

"물론이오."

나는 당당히 가슴을 두드리며 응답했다. 말하는데 다소 부끄럽기야 했지만, 몸으로도 얼마든지 표현할 자신이 있다.

"그녀의 안에는 나의 반신이 깃들어있소. 세상 어떤 색마가 자신의 진기를 사랑하지 않는 여인의 몸에 넣는단 말이오?"

"...진짜인가요?"

"물론이지."

무인이 생명과도 같은 내공을 상대에게 줬다. 그것으로 이미 내 연심에 대한 증명은 충분했다.

'물론 그만큼 내가 받기도 하지만.'

채음보양, 채양보음.

우리는 서로를 통해 부족한 음양이기를 흡수하고, 더욱 강해질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반신을 주다니.... 정말...여인으로서는 부러운 사랑이네요."

나는 진실을 얘기했다. 반만.

"알겠어요. 그럼 믿어볼게요."

황보혜지는 내게 손을 건넸다. 그녀는 잠시 씁쓸한 눈빛으로 내 손을 움켜쥐었다.

"...먼저 만났다면 더 좋았을텐데."

"뭐요?"

지금 일부러 들으라고 한 소리다. 내가 바로 추궁을 하자, 황보혜지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잘못들으신 거랍니다."

그녀는 내가 진심을 밝히자 눈에 힘을 풀고 나긋나긋한 눈빛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색마로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탈혼붕권으로서, 황보세가와 황보혜지를 위해 일해주셔야 해요. 알겠죠?"

"물론. 뭐부터 하면 되겠소? 또 비무를 하면 되겠소?"

"뭐...제일 중요한 건 오늘 밤에 하기로 하고요. 우선 준비하러 갈까요? 황보혜지 겁탈 계획의 성공을 위해."

황보혜지는 음흉한 미소로 내 손을 잡아당겼다.

"자, 가요. 어서."

"...흠, 좋긴한데, 손을 잡을 것 까지는 없지 않나?"

"어머. 여보세요."

황보혜지는 내 입술에 검지를 올리며 눈을 찡긋였다.

"탈혼붕권은 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면서요?"

"......왠지 내가 듣던 거랑 조금 다른 것 같은데?"

"후훗, 얘기했잖아요. 저, 당신이 싫지는 않다고."

황보혜지는 내게 바싹 다가오며 작게 속삭였다.

"말했잖아요. 제가 당신의 방에 들어간 순간, 이미 각오는 끝났다고요."

"......."

그러고보니.

아직 독고연은 내게 황보혜지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조차 하지 않았다.

"혜지."

나는 순순히 그녀의 도발에 응했다.

"오늘 밤에 하자는 거...내가 생각하는 그거요?"

"아닌데요. 저는 단지...."

황보혜지는 내 눈을 피하며,

"......여, 역시 잠자리는 다음에."

나와의 잠자리를 미뤘다. 나는 아쉬움에 혀를 찼지만,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휘감으며 속삭였다.

"흐흐, 할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군?"

황보혜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다음 날.

나는 황보혜지와 함께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았다. 황보염, 그리고 황보혜지와 셋이서 먹는 식탁에는 육류가 넘쳐흘렀다.

"하하, 자고로 고기란 많이 먹어야 힘이 나는 법! 우리 세가에 들어온 귀인을 위해 힘 좀 썼다네."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눈으로 훑은 고기의 종류만 무려 일곱 가지였다. 돼지, 소, 양은 물론이거니와 닭, 제비, 잉어에 이르기까지 육해공이 골고루 갖춰져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외형적으로 특이한 음식을 가리켰다.

"이건...."

"하하, 산에는 산삼이 있으면 바다에는 해삼(海蔘)이 있는 법이지!"

심지어 내륙, 호북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바다생물까지 잡아다가 요리를 해놓았다. 제법 손길이 많이 가는 화려한 음식들로 가득하지만, 일부 향이 강한 음식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음식들이 맑고 순한 기색이 가득했다.

"무투대회의 우승자를 축하하는 자리이며, 황보세가의 일원이 된 이를 축하하는 자리이며, 동시에 내가 그대에게 사과를 하기 위한 자리기도 하지."

"사과라니요?"

"미안하네."

황보염은 갑자기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대의 무위에 너무 심취하여, 가주로서 경솔한 판단을 내렸어."

"...그건 괜찮습니다. 그만큼 저를 좋게 봐주셨다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나는 담담히 포권을 취했다. 황보염은 순박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역시 호쾌하군. 고맙네, 사위."

나는 이 미소를 알고 있다. 소위 사기당하기 쉬운 호인의 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추마귀 시절 이런 자들을 몇 번이고 죽여봤기에, 나는 저 순수하고 호탕한 웃음에 속이 쓰렸다.

"그런데 사위, 하나 물어보도록 하지. 그냥 의례상 하는 질문이니 편-하게 답하시게."

"말씀하십시오."

"내 딸의 무엇이 그리도 좋은가?"

"......."

나는 눈을 질끈감았다. 슬쩍 눈치를 보니 황보혜지도 가만히 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 아랫도리에 깃든 아기 색마에게 질문했다.

'황보혜지가 좋은 이유는?'

그는 답했다.

'가슴도 적당하고 몸매도 잘 빠지고, 뭣보다 권사라서 그런지 몸에 군살 하나 없이 생명력이 넘치는 구나. 아이를 낳으면 쌍둥이가 나올 정도로 골반이 순산형이다. 얼굴? 이미 몸매를 살피는 시점에서 확인이 끝났지. 외형만 따지고 보면 5점 만점에 5점은 기본인 여자다.'

어떤 답이 좋을까.

"...산군문은 일인전승의 신비문파였습니다."

나는 진중한 분위기로 운을 떼었다.

"스승께서 불미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뒤, 맹호패왕권은 제 대에서 끝날 운명에 처했습니다."

"저런...!"

황보염의 눈에 안타까움과 동시에 이채가 서리는 게 보였다. 내가 의도한 대로 그는 생각하는게 틀림없다. 혼인을 서둘러야 하는 건 황보세가 뿐만이 아니라, 탈혼붕권도 마찬가지라는 걸.

"무림은 넓고, 언제 이 무공이 실전될 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곳 황보세가라면 맹호패왕권도 실전되지 않을 것이며, 제 문파의 사조들께서도 응당 만족하시리라 믿습니다."

중소신비문파가 거대 문파의 산하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거대 세가의 산하에 들어가는 경우도 흔하다.

특히 일인전승의 문파라면 더더욱 그러하며, 이것이 애초에 황보세가가 무투대회를 연 근본적인 배경이기도 하다.

"물론이네. 황보세가는 맹호패왕권을 격히 환영한다네."

"감사합니다, 가주님. 이거로...스승님께서도 여한이 없을 겁니다."

방철수? 알 거 없다. 지금부터 맹호패왕권은 황보세가의 무공이다.

"환영하네, 사위."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장인 어른."

나는 그를 향해 절을 올렸다. 그렇게까지 안해도 된다면서 손사레를 쳤지만, 황보염의 입꼬리는 내려갈 줄을 몰랐다.

"아버님, 그래서 자매들은...."

"아 참. 그래, 혜지야. 너도 잘 듣거라. 크흠."

황보염은 진중한 얼굴로 손뼉을 쳤다. 그러자 단정한 옷차림을 한 여섯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 내게 인사했다.

"가주로서 한 말을 주워담을 수 없는 바. 하지만 사위의 말도 일리가 있어, 내 딸들에게 한 명 한 명 물어봤다네."

나는 황보 칠공주의 여섯 자매를 살폈다.

'씁.'

아깝다. 괜히 칠공주라는 말이 있는게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그들의 미모는 출중했다.

물론 황보혜지가 으뜸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미모가 크게 뒤쳐지는 건 아니었다. 확실히 수 천 명이 신랑 후보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난 게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어떤가. 다들 예쁘지."

"예...."

미사여구를 괜히 붙일 필요가 없었다. 나는 황보염이 원하는 눈치대로, 그들을 홀린듯 바라보았다.

"얘들아, 그러면 인사하거라."

""""""상공을 뵙습니다.""""""

그들은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여섯 명 모두.

"......?"

나는 황보혜지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 또한 혼란스러워보였고, 우리 둘은 황보염에게 고개를 돌렸다.

"크흐흐, 그대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보는군. 아니, 그게...크허허!!"

황보염은 내 어깨를 거칠게 두드렸다.

"그대가 어디 보통 매력적이란 말인가! 아 글쎄, 내 딸들이 누구 하나 싫다는 이가 없다더군!!"

"......."

"내 딸들의 의사를 물었다지? 다 좋다더군! 사위, 내 딸들을 잘 부탁하네! 그대가 우리 황보의 대를 이어주시게! 껄껄껄!"

[작품후기]

파워블로거, 인심좋은 사장님의 탕수육 서비스에 낭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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