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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음모
호기롭게 외치기는 했지만 본인도 다소 흥분했음을 인정했다.
"역시 일곱 명과 모두 주는 건 그런가?"
황보염은 흥분을 다스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호협스럽다는 말은 황보세가의 장점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황보세가의 약점으로 내비칠 때가 있다.
- 황보세가는 산동의 제갈세가와 비교하여 신중하고 침착하지 못하여, 한 때의 선택과 결정으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다.
좋게 말하면 호방하고, 나쁘게 말하면 다혈질에 감정적이라는 이야기.
황보염은 자신이 저질러버린 사태에 난감했다.
머리가 식은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면 남자 한 명에게 일곱 명을 모두 내어주는 건 사실상 무리가 있었다.
"끙...하지만 그 무공...."
하지만 탈혼붕권의 무공을 황보세가의 것으로만 만들 수 있다면 일곱 명 모두 내어줘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그를 가득 채웠다.
태산을 지배하는 호랑이의 기상!
그것도 그냥 호랑이가 아니라, 오악 중 으뜸인 태산을 호령하는 산의 주인이 가진 기세!
황보세가의 피, 무공과 섞여 훗날 황보세가의 후계자가 대성하게 된다면, 그 누가 황보염의 선택이 틀렸다고 하겠는가?
'무조건 그를 황보세가에 들여야 해.'
이미 황보혜지를 내어주는 건 기정사실이다. 여기서 얼마나 더 많은 '지출'을 감내하고 그를 세가의 일원으로 들이느냐 하는 것에 '투자'하느냐가 황보염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끄응...!"
딸 가진 아버지로서의 황보염.
황보세가의 가주로서의 황보염.
천하제일권이자 벽력신권이자 무인으로서의 황보염.
세 명이 제각각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뿐사뿐한 발걸음에 황보염은 반색하며 들어오기도 전부터 목소리를 높였다.
"혜지야, 사위는 괜찮느냐?"
"아직 저로 정하지도 않으셨는데 무슨...."
문을 열고 들어온 황보혜지는 얼굴을 붉히며 툴툴거렸다. 황보염은 슬쩍 바깥의 해를 확인하며 능글맞게 웃었다.
"제법 시간이 길었구나. 뭘하느라 그렇게 늦었는고?"
"...아버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아니, 내가 어떤 생각을 했다고 그러느냐."
"글쎄요. 제가 탈혼붕권과 혹시 그런 일을 했으면 그걸 빌미로 그와 대련을 하시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크흠. 내가 그리 옹졸해보이더냐?"
"......."
황보혜지의 묵묵부답에 황보염은 입술을 삐죽였다.
만약 젊은 남녀가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백주대낮부터 거사를 치뤘다면, 황보염은 '어딜 혼약도 맺지 않은 남녀가!!'하면서 탈혼붕권을 비무장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본인의 벽력신권으로 탈혼붕권에게 감정이 아주 약간, 눈곱만큼 실린 벽력신권으로 천하제일권의 힘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줄 계획이었다.
무인으로서의 호승심, 어찌됐든 딸을 가져가는 남자에 대한 불쾌감, 그리고 가주로서 가문의 일원이 될 남자를 직접 주먹으로 시험한다는 의무감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건 아쉽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흠흠. 딸아, 탈혼붕권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물으신다면...."
황보혜지는 복잡한 얼굴로 쓰게 웃었다.
"...마음에 들어서 난감한 거지요."
"흐흐, 그렇지? 강호에 그만한 남자 없다. 그 젊은 나이에 그만한 고수가 또 없어."
어째선지 황보염이 칭찬을 할 때마다 황보혜지는 웃음기가 굳어져만 갔다. 뭔가 말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해보였으나, 그걸 꾹 참고있는 듯 보였다.
"허어, 네가 긴장을 다하다니. 무엇이 신경쓰이는 것이냐?"
"만약에, 만약입니다만 아버님."
황보혜지는 인상을 굳혔다.
"정말로 아끼는 사람과 연적(戀敵)이 된다면, 소녀는 어찌해야할까요."
"음...."
황보염은 괜히 미안했다. 자신의 실수 아닌 실수로 인해 황보혜지와 탈혼붕권 뿐만 아니라, 다른 여섯 딸들도 몹시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그, 나는 말이다. 나는 어머니가 여러분 계셨단다. 그건 너도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장남이자 적자로서 그분들께 효심을 다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다른 이복형제 분들과도 누구 하나와도 다툼없이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그래. 내 이복형제만 열 명이지. 그 중 누구도 내게서 황보세가의 가주 자리를 달라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황보염은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힘이 되니까. 아무리 우리가 팔대세가라고 한들, 우리는 '무림의 세가'이니라. 결국 우리도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집단이며, 혈연관계가 근간을 이루지. 서로 피가 섞이지 않은 여인들보다...아무래도 함께 자란 자매들과 서로 화목하게 지내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아버님 말씀은 저희 자매들끼리 한 명의 지아비를 섬겼을 때, 싸우지 않고 큰 문제없이 지낼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버님께서 이미 그런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나의 아버님, 네 할아버님께서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으로 대해주셨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 그러니까 네가 걱정할 이유는 없단다. 모두 황보의 핏줄을, 내 핏줄을 이어받은 네 혈육이 아니더냐."
"......하아."
황보혜지는 진심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가주의 앞에서 한숨을 내쉬는 건 몹시 무례한 일이었으나, 황보염은 차마 딸에게 무례하다고 얘기를 할 수 없었다.
따지고보면 그 자리에서 '내 딸을 가지게!'라고 말하고 끝내면 좋았을 것을, 괜히 흥분해서 '내 딸.들.을 가지게!'라고 말한 것이 이 일의 원흉이었으니.
"...알겠습니다. 아버님의 뜻이 그렇다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지금부터 아버님께서 많이 고생해주셔야 할 겁니다."
"응?"
"첫째. 언니 동생들에게 형식적이라도 따로 한 명씩 대면해서 의사를 물어보세요. 만약 그들이 탈혼붕권이 아닌 다른 이를 마음에 품었다면, 괜히 사이만 소원해질 수 있습니다."
"...끙, 알았다."
황보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가에 안주인이 없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황보혜지는 묵묵히 안주인으로서의 역할도 잘 수행해냈다.
"둘째. 의도치 않게 탈락한 무사분들을 위로해주세요."
"응? 떨어진 놈들은 왜?"
"...그 분들은 단순한 패자가 아닙니다. 탈혼붕권이라는, 어찌보면 자연재해를 맞이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용봉지회에 나가서 구룡을 모두 한 주먹에 눕혀 천하제일룡이 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크흠, 그렇긴 한데."
황보염은 황보혜지의 제안이 영 탐탁찮았다.
"일류는 영 눈에 차지 않고, 절정 고수라고 하는 놈들도 성정이 그다지 좋지 않더구나."
"탈혼붕권은요?"
"눈에 아주 순수한 욕망이 가득하더구나! 흐하하, 그 나이 대에는 다들 그렇지! 흐흐."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하셔야 해요. 이번 기회를 빌어 방계의 어른들도 초청하시어, 그들에게도 자리를 마련해주셔요."
"...그것도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황보염은 표정을 굳혔다.
"방계에 힘을 실어버리면 나중에 네 자식이 가주가 되는데 위협이 될 수 있다."
"아버님. 저를 못 믿으십니까? 제 아이가, 혹은 저희 자매가 낳을 자식이 후계자 경쟁에서 밀릴 것 같습니까?"
황보혜지는 강한 목소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았다. 사흘 뒤, 크게 잔치를 열자꾸나. 오랜만에 방계의 이들도 다 모으고, 탈락한 이들에게도 술과 고기로 위로를 하고, 무엇보다 우리 세가의 일원이 된 탈혼붕권을 축하하자꾸나."
"예, 제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황보혜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탈혼붕권에게도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잠깐만. 만약에 다른 아이들이 거부한다고 하면, 내가 난처해지지 않겠느냐?"
"탈혼붕권은 제 자매들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한다고 했습니다."
황보염은 할 말을 잃었다. 황보혜지는 붉어진 얼굴로 쭈볏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자신은 저로도 괜찮지만, 만약 자신과 혼인을 맺고 싶다고 한다면 거절할 이유도 없다고...."
"허어. ...알겠다, 이만 가서 마저 보필하거라."
황보혜지는 방을 떠났다.
"......부인."
황보염은 인자한 얼굴로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화를 쓰다듬었다.
"황보세가에 영웅이 들어온 모양이오."
* * *
황보혜지를 겁탈한다는 계획하에, 나는 독고연과 황보혜지의 제안에 절충안을 내놓았다.
"다다익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옛 성현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어차피 무전취식을 하고 떠날 사람이라면, 주 요리 하나만 먹고 사라지는 것보다 전채부터 후식까지 전부 먹고 화려하게 사라지는 것이 정답이다.
"...과유불급."
하지만 여러 가지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다보면 배가 터지기 마련.
내가 하북팽가처럼 황보세가를 책임질 거라면 마음껏 허리를 흔들고 가도 된다. 하지만 나로서는 황보 세가는 그렇게까지 챙길만한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굳이 욕심을 더 부리지 않았다.
막말로 황보혜지만 취하면 된다. 이것은 황보혜지도 인정한 바.
"그래서 내 제안은 어찌됐소?"
"이제는 아버지께 달렸죠. 고마워요. 일곱 자매를 모두 겁탈하지 않아줘서."
황보혜지는 나를 향해 날선 목소리로 말했다. 충분히 그럴만했다. 그래도 조금 억울한 게 나는 독고연과 황보혜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단은' 칠공주를 모두 맛본다는 계획을 뒤로 미뤘다.
"세상에 여자가 어디 황보 세가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여섯 명 같은 한 명을 취한다면 어디 뭐 나쁠 것도 없지."
"그렇게 봐주시니 참 고맙네요."
황보혜지는 두 주먹을 들어올렸다. 나는 식객용 방 안의 모든 집기를 옆으로 치웠다.
"황보세가의 여식, 황보혜지라고 합니다."
"무명이오. 본명을 듣고 싶다면, 나를 이겨보시오."
나도 자세를 갖추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선수는 양보하지."
"그럼...!"
황보혜지는 가벼운 발놀림으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독고연조차 이기지 못하는 실력으로 내게 덤비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나, 이게 그녀가 내건 또다른 조건 중의 하나였다.
비무.
그녀 또한 황보세가의 핏줄이라는 걸 증명하듯, 그녀는 강자와의 비무를 원했다.
"그대는 참으로 몸이 가볍군."
나는 그녀의 권을 가볍게 흘려내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황보혜지 또한 내 말을 무겁게 듣고, 권에 무게를 실었다.
"가벼운 만큼 빠르죠!"
"빠르지만 힘이 없소."
나는 황보혜지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명치에 손가락을 올렸다. 열 합이 채 채워지기 전에, 나는 그녀의 급소를 찔렀다.
"이거로 한 번 죽었소. 계속 하겠소?"
"물론!"
황보혜지는 내 손을 아래로 쳐내며 더 강한 공격을 펼쳤다. 주먹에 무게를 실으라는 말에 더 힘을 강하게 주기 시작했고,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주먹을 피했다.
"좀 더 허리에 힘을 싣고."
나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살짝 더 비틀었다. 주먹이 앞으로 번개처럼 날아와 그녀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윽...!"
자세가 무너져 발을 헛디딘 황보혜지는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주먹은 내 볼을 스쳤다.
"호신강기가 아니었으면 아마 핏줄이 튀었을 것이오. 지금의 느낌을 살려서 계속 해봅시다."
나는 황보혜지에게서 물러나 두 팔을 좌우로 뻗었다.
"시작하시오."
"후우...!"
황보혜지는 수미천왕신공을 자신의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나를 향한 눈빛이 생사지적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고, 주먹에는 살기가 번들거렸다.
쾅!!
그녀는 냅다 명치를 향해 정권을 내질렀다. 호신강기가 순간 흔들릴 정도로 강력한 정권이었지만, 황보혜지는 내게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못했다.
"약하군."
쾅, 콰앙, 쾅!!
한 번의 일격으로 모자라자, 그녀는 연타를 퍼붓기 시작했다. 벽력신권이 괜히 번개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게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권격은 번개처럼 빠르고 정확했다.
"흐아아앗!"
황보혜지는 기합까지 내지르며 주먹을 내질렀다. 나는 그녀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호신강기를 풀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힘없이 마지막 주먹을 내 앞에 내질렀다.
"...졌어요."
약 일 각.
그녀는 원없이 나를 때렸고, 나는 그걸 맞아줬다. 호신강기를 두른 상태에서.
"고생하셨소. 이거로 화는 풀리셨나?"
"...조금은 개운해졌네요."
땀에 흠뻑 절은 황보혜지는 시원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부채 하나를 꺼내 빙백신공으로 그녀에게 냉풍을 불었다.
"연이에게 나쁜 물을 들인 악적. 연이를 데려가놓고 다른 여자를 탐하려고 드는 여자들의 적. 여인을 취하고 도망치려는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알고 있소."
나는 내 악행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정도를 지키며 살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색협 따위가 아니라, 색마라 자칭하지."
"...그럼 색마에게 질문."
황보혜지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에게 강공을 펼쳤다.
"만약 제가 원한다면...당신도 저를 납치해줄 건가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격이었다.
[작품후기]
벽력신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