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82화 (18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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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랑쟁패

날이 밝았다.

황보혜지는 자신의 언니 동생들과 함께 한창 부엌에서 요리에 전념해야했다.

"언니, 거기 소금 좀 집어주세요."

"이, 이게 소금이야?"

"그건...아니에요, 제가 집어갈게요. 예지야, 거기 끓이는 거에...아니다. 너는 가서 대파를 자르렴."

부엌은 전쟁터고, 여럿이서 요리를 하는 곳에서 가장 요리를 잘 하는 이는 야전사령관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야전도 사령관이 몸소 나서서 적을 쓰러뜨리는 경우는 없다.

황보혜지는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해야했다.

황보세가의 식객으로 온 남자들은 자신들의 신랑이 될 지 모르는 남자들이고, 아무리 황보세가에 요리할 사람이 많다고 해도 아내가 부엌일 조차 하지 못한다면 구박을 받기 십상이다.

황보혜지는 자신이 무공을 익힌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몸이 일곱 개라도 부족한 상황에서 신속히 움직이는 게 불가능했을테니.

"...나머지는 여기 국에 담아서 옮기면 돼. 그건 할 수 있지?"

한 시진 가량의 전쟁을 끝낸 황보혜지는 뒷 일을 동생들에게 맡기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침에 운기조식하는 것 조차 미루고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데 집중했고, 그녀는 조용히 황보세가의 무사들이 밥을 먹는 식당으로 오는 남자들을 예의주시했다.

"허허, 밥을 가져와도 모자랄 판에 우리를 오라가라 한단 말인가."

'탈락.'

"뭐야. 생선을 구워놓고 뼈를 직접 바르라고?"

'탈락.'

"황보여, 국이 짜구나."

'탈...그건 인정.'

황보혜지는 의미없는 자신만의 시험으로 남자들을 시험하고 있었다. 자신의 판정이 최종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마음가짐의 준비 정도는 될 수 있으리라.

'유력 우승후보는 현재까지 둘.'

자매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황보혜지는 우승자가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녀는 비무대회의 우승자, 그러니까 가장 강한 사람이 누가 될 것인 가에 대해서 깊게 고민했다.

남자들이란 강한 여자를 굴복시키기를 좋아했다.

일류 고수가 절정에 준하는 황보혜지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자신보다 강한 여인이 아녀자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에 무척이나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먼 절정의 고수들을 꺾어야 했다.

멀리 사천에서 산동까지 날아온 옛 창천신룡, 방도림.

그리고 황보혜지만을 부르짖으며 올라온 현천 백가의 적자, 백보준.

절정 고수에 이른 두 남자가 동시에 황보혜지를 노리고 있었다. 그녀는 둘의 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탈락.'

한 명은 눈에 열등감과 열패감이 짙고, 한 명은 눈에 자만심과 오만함이 가득하다.

동생들은 누구든 잘생기고 훤칠한 자들을 썩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지만, 황보혜지의 눈에는 영 시원찮았다.

'그'와 비교를 함에 있어 좋은 점수를 주고자 해도 소용이 없었다.

"......제발."

누군가와 결혼해야하는 운명이라면, 마음에 묻어둔 그를 잊을 수 있는 남자가 나타나기를.

황보혜지의 시름은 깊어져만갔다.

* * *

기나긴 조별예선도 이걸로 마지막.

황 노인은 음습한 눈빛을 숨기지 않는 이들을 보며 진심으로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이전 시험에서 합격을 한 유명하고 실력 좋은 소협들에 안도했다.

이미 신랑쟁패에 나온 후보는 크게 일곱 명으로 좁혀졌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사이에 큰 간극이 있어, 사실상 이미 일곱 명이 황보칠공주와 혼인을 맺는게 아니냐 하는 말이 공공연히 퍼지고 있었다.

'포기 안 해주나.'

황 노인은 마지막까지 끈덕지게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이들을 보고 깊은 한숨이 나왔다.

술 기운에 힘입어 세가의 비무장에 발을 디디는 놈도 있거니와, 심지어 여인의 응원을 받으며 나오는 남자도 있었다.

"꼭 성공하세요!"

"반드시 성공하리다."

소꿉친구일까, 아니면 사제지간일까? 누가봐도 연인처럼 보이는 남녀이건만, 여인은 남자에게 응원을 하며 배웅했다.

"실례하겠소."

남자는 성큼성큼 황노인에게 걸어왔다.

훤칠한 키에 다부진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청년은 나이가 제법 차보이기는 했으나,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보통 고수가 아닌 듯 보였다.

"...이름, 별호, 그리고 문파를 적어주시오."

"음."

청년은 붓을 집었다. 황 노인은 정갈하게 이름을 적기 시작하는 청년의 서체에 안도했다.

방명록처럼 보이는 이것 또한 기본적인 시험이었다.

황보세가의 남자가 될 자가 신원이 불분명해서야 되겠는가! 스스로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자는 떳떳하지 못한 자이며, 켕기는 자들은 제대로 적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청년은 일필휘지로 자신의 신상을 적었다. 황 노인은 청년이 붓을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린 뒤, 청년의 신상을 살폈다.

"산군문(山君門), 탈혼붕권(奪魂崩拳), 무명(武名). ...처음 듣는 문파에 처음 듣는 별호에, 처음 듣는 이름이로군."

"문제 있소?"

"물론 문제가 많지. 신원이 불분명한 이를 어찌 들일 수 있겠는가?"

황 노인은 세가 밖을 가리켰다. 어서 나가라는 신호였으나 무명 청년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가시오, 당장!"

"나가게 할 수 있으면."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하나 둘 나타났으나, 청년이 눈을 흘기자마자 무인들은 몸이 굳었다.

"크, 으으...!"

"강한 무인을 찾는다고 하여 왔건만, 이리 홀대를 하다니."

청년의 말에 황보세가 무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기세는 지금까지 신랑 후보로 무투대회에 입후보한 다른 이들보다 훨씬 강했다.

"힘으로 이름을 증명할 것이다."

"이, 이런 강자가 왜 이제서야...!"

"훗,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무명 청년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씩 웃었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 * *

"꼭 성공하세요, 가가."

독고연은 황보세가 안으로 들어간 비천색마를 배웅한 뒤, 몸을 돌려 곧장 사람들의 이목에서 벗어났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끈적한 시선.

면사포와 갓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한들, 타고난 미모는 숨길 수 없는 법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모두 황보세가 칠공주와 혼인을 하고 싶어 온 구혼자들이다.

여자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이들이 다섯 중 한 명 꼴로 존재했다. 독고연은 이목이 더 쏠리기 전에 급히 몸을 숨겼다.

"휴우."

독고연은 빠른 몸놀림으로 인파를 헤치고 황보세가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는데 성공했다.

여인 혼자 온 것에 객잔 주인은 의아해했지만, 독고연이 검기를 살짝 흘리자 객잔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안내했다.

"이거지."

방에는 침대가 하나 뿐이었다. 독고연은 가볍게 손뼉을 친 뒤, 외투를 벗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빨리 무투대회가 끝나야하는데."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시험은 총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1단계에서 내공 시험으로 어중이떠중이를 전부 쳐낸 뒤, 2단계는 지지부진하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화끈한 실력 싸움으로 승패를 결정짓는다.

사실상 2단계에서 일곱 명의 후보가 정해지는 셈.

3단계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고연은 황보세가에 대한 사전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 시험이 나올 지 훤히 꿰고 있었다.

"우선 선택."

신랑 후보들끼리 서열을 정리하여, 가장 강한 남자부터 원하는 여인을 차지하리라.

즉, 첫번째로 강한 자가 일곱 명 중 한 명을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백이면 백, 누구든 황보혜지를 고르리라.

무림인들은 아내가 자신보다 강하면 다소 껄끄럽게 여기기 마련이지만, 이미 몇몇 후보는 황보혜지의 경지보다 더 강한 자들도 있었다.

"혜지, 은혜를 갚으러 왔어요."

독고연은 황보혜지와의 대결이 있던 날을 떠올렸다. 독고연이 무림맹주에게 패륜아닌 패륜을 저지르며 사랑을 찾아 떠난 것도 황보혜지의 격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탈혼붕권, 무명.

그러니까 비천이 우승자가 되어 황보혜지를 선택하는 날, 독고연이 직접 황보혜지에게 정체를 밝히며 그녀를 설득할 것이다.

황보혜지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질 수 있도록.

"저는 당신의 사랑을 믿어요, 혜지."

비록 그 과정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지 시험하며 남자를 기만하는 셈이 되겠지만, 독고연은 황보혜지와 남자의 사랑을 믿었다.

과연, 황보혜지의 정인은 황보혜지가 색마에게 범해졌더라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천지신명 님, 꼭."

독고연은 두 손을 모아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혜지가 저의 계획에 동조하되, 가가와 실제로 하지는 않게 해주세요."

독고연은 그릇에 물을 떠놓고 계속 기도를 올렸다.

"옥황상제 님, 부디 혜지가 가가의 실력에 몸을 허락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

어째서일까.

- ...이런 계획인데, 어쩌시겠어요?

- 푸훗. 세상을 속이려면 제대로 속여야죠. 괜찮아요, 저는. 일단 벗으면 될까요?

왜 자꾸 독고연의 머리속에는 황보혜지가 스스로 몸을 허락하는 그림이 자꾸만 그려지는 걸까.

- 연, 미안해요. 연이 반한 남자인데...제가 반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쾅쾅쾅!!

독고연의 고뇌는 깊어만 갔다.

* * *

바다에서 새벽같이 달려 우리는 제남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제시간에 도착한 것도 물론이거니와, 나는 마침 딱 시간에 맞게 마지막 조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만약 밤놀이로 인해 시간이 늦었다면 늦은대로 방법이 있었지만, 차선책을 굳이 사용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모두 모였군."

비무장을 내려다보는 계단 위에는 중후한 인상의 사내가 우리를 속속들이 꿰뚫어보고 있었다.

벽력신권, 황보염.

과연 강하다. 눈빛만으로 삼류 수준의 무사는 픽픽 쓰러뜨리는 건 물론이거니와, 이류 무사도 어중간하면 바로 내상을 입고 무릎을 꿇었다.

'천하제일권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나중에는 천하제일권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게 되더라도, 지금의 그는 권법에 있어 천하제일을 자부할 만큼 강했다.

화경.

약간의 계기만 있다면 현경을 노려볼 법도 한 그의 시선은 모든 후보를 차근차근 살피고 있었지만, 유독 내게 더 꽂혀있었다.

"훗."

나는 일부러 기세를 더 사납게 피워올렸다. 일부러 지지 않기 위해 내공을 피우자, 황보염의 눈썹이 크게 일그러졌다.

"으음...!!"

황보염이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내공을 뿌리는 기세 싸움에서 밀려는 순간 지는 게 확정이며, 이 싸움에서 지면 앞으로 계속 밀린다.

"커흑!!"

"허어억!!"

이류 무사들을 넘어 제법 유명한 일류 고수들 조차 강대한 내공 싸움에 숨이 턱턱 막히며 물러서려고 했다.

과연 벽력신권. 내가 아는 벽력신권(미래)와는 차원이 다른 힘이다.

훗날, 천하제일권은 방철수-방윤이 가져간다.

그 뒤를 이어나가는 권사가 바로 소림의 백보신권, 그리고 저기 걱정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는 나의 목표-황보혜지.

황보혜지는 황보염의 사후, 그의 별호를 이어받아 벽력신권으로서 초절정 고수의 힘을 유감없이 뽐냈다.

때문에 나는 지금의 벽력신권이 가진 힘에 괜한 호승심이 일었다. 무인이라는 족속들이 전부 다 그렇지만, 권사들은 유독 강한 자와 맞붙어보고 싶다는 호승심이 강했다.

'참아, 내 안의 산군.'

태산의 주인은 감히 자신을 도모해보려는 도전자에 사나운 이빨을 세웠으나, 나는 그걸 간신히 억눌렀다.

괜히 일부러 시험의 난이도를 높일 필요는 없다. 나는 적당히 주목을 받았다 싶은 순간,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숙였다.

"...크흠."

내가 한쪽 무릎을 꿇을 뻔 하자, 황보염은 그제서야 내공을 거두었다. 한결 편안해진 나는 다시 두 다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황보혜지를 비롯한 칠공주가 나를 바라보며 놀라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런."

황보염은 낭패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일부러 패자들을 향해 도발했다.

"약한 사내다."

비무장에는 누구 하나 허리를 바로 세우는 이가 없었다. 황보염과 내 내공 싸움의 여파에서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만약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기 싸움의 틈을 파고들어 탈락자를 걷어냈다면, 지금쯤 나 혼자 비무장에 남아 서있었을 터.

"끝난 것 같소만."

"...그런 것 같군. 모두 저들을 밖으로 인도하라."

황보염의 명령에 세가의 무사들이 쓰러진 무인들을 부축하며 밖으로 인도했다. 나는 비무장에 홀로 남아 어깨를 으쓱였다.

"더 하면 다 죽을 것 같아서 거두었소."

"뭐라?"

내 도발에 황보염은 눈썹을 크게 찌푸리더니.

"크하하하하하!!"

광소를 터뜨렸다.

"시건방지구나!!"

"끝까지 가면 내가 질 것 같소?"

"좋지, 좋아! 흐흐흐. 마지막에 이런 거물이 들어오다니, 대단하군!"

황보염은 계단을 내려와 내 앞에 마주섰다. 제법 키를 키워왔건만, 나보다 훨씬 큰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부디 헛짓거리로 2차, 3차 시험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런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있을 수 없소."

"그렇긴 하지. 흐흐, 황보세가에 복덩이가 굴러들어왔군. 그런데 말이야...."

황보염은 벌써부터 나를 자신의 사위 대하듯, 능글맞은 미소로 뒤를 눈짓했다.

"누가 좋은가?"

"누가 좋냐고?"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황보혜지!"

나는 황보혜지를 범하기 위해 왔고, 그녀를 범할 것이다.

무투대회 참가자로 위장한 색마는 황보세가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취한 다음, 혼인하지 않고 도망칠 계획이다.

무전취식.

그게, 독고연이 세운 계획이었다.

[작품후기]

색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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