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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의 만남
황보세가의 총관이자 오랜 기간동안 황보 세가에서 일한 황 노인은 세가 밖에 진을 친 남자들에 진절머리가 났다.
"아가씨들을 저 거지 새끼들에게...!"
저들은 혼인을 위해 온 이들이란 말인가, 아니면 혼약을 빙자해 황보세가에 빌붙으러 온 거지새끼들인가?
개방의 거지도 이 정도로 염치불문하고 저리 당당히 앉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황보세가의 총관으로서 황 노인은 진정으로 분노했다.
'이 개같은 색마!'
그의 모든 분노는 이 사단을 만든 색마들에게 향했다.
색마가 준동하지 않았다면 가주가 급히 칠공주를 혼인시키려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에 따라 수많은 이들이 황보세가 근처에 몰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황보세가는 멀리서 온 손님을 이리도 박대해도 되는 것인가!"
"황보세가가 산동 으뜸이라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허명이었던 모양이군!"
"역시 산동 제일의 가문은 제갈 세가로군!"
제갈 세가는 호북에 있다. 산동에 있는 건 제갈 세가의 분가다. 황 총관은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심정을 진정시키며 빨리 내일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내일로서 1차 '예선'은 끝이 난다. 그러면 밖에 모인 어중이떠중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순수한 실력자들만 남아 무위를 겨루게 된다.
"아저씨, 힘드시죠?"
뒤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 노인은 자신을 향해 다가온 차가운 기운에 괜히 울컥했다.
"둘째 아가씨...!"
"죄송해요. 괜히 저희들 때문에."
"크흑, 아닙니다. 색마가 날뛰어서 이 사단이 일어난 거지, 어찌 아가씨들을 탓하겠습니까?"
황 노인은 황보혜지가 건넨 수통을 받아들었다. 안에 작은 얼음덩이가 세조각 들어있는 것에 황 노인은 더욱 울컥했다.
아아, 무공과 인성은 정녕 비례하는 것인가!
세가에서 가장 마음씨가 고우면서도 누구보다도 황보세가다운 여인이 꽃다운 나이에 '강제로' 결혼을 해야한다니.
황노인은 밝게 웃기만 하는 황보혜지의 웃음 뒤에 감춰진 슬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가씨. 이런 상황에 이 말씀을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닌 줄 아오나, 꼭 드려야겠습니다."
"들으면 엄청 후회할 것 같은데, 말 안하면 아저씨가 힘들어할 것 같네요."
황보혜지는 이미 황 노인이 할 말을 짐작하고 있었다. 황 노인은 눈물을 머금고 품에 넣어둔 서찰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 분'의 마지막 서찰입니다."
"......."
황보혜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서찰은 건네받았다. 떨리는 손과 아련한 눈빛에 황 노인은 울컥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쉽네요.... 육봉이 되어서 다시 인사드리겠다고 약속했는데."
"아가씨...!"
"괜찮아요, 아저씨. 이미 마음을 다잡았으니까. ...저는 황보세가의 둘째잖아요. 이 세가에 태어나 좋은 음식 먹고 예쁜 옷 입고 강한 무공도 익힌 것에 보답을 해야죠."
황 노인은 한 명의 여인이 아닌 황보세가의 여식으로서의 길을 택한 황보혜지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만약 그녀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다면, 강한 무공 실력을 바탕으로 원하는 여인을 당당히 취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호감을 품은 남자가 황보세가의 격에 맞는 무인이었다면, 황보혜지는 사랑하는 남자와 백년해로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그녀는 마음에 품은 이를 마음속에 묻은 채, 가문에서 정한 남자와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요. 저는 그 사람의 혜지가 아니라 황보혜지니까."
그럼에도 황보혜지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이봉결정전으로부터 긴 시간이 지나 어느덧 절정 고수급의 권술을 가지게 되었으면서, 수많은 남자들의 무투대회 우승 상품이나 마찬가지인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총관, 저희 7자매 남편이 될 사람들은 모두 어때요?"
"하나같이 무위가 출중한 이들 뿐입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이류 이하로는 모조리 탈락했습니다."
어디 가서 보기도 드문 일류 고수만 무려 수 백명이 1차 시험을 통과했다. 그만큼 황보세가와 황보 7공주에 대한 인기가 대단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특히 황보혜지에 대한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
이봉결정전에 나가서 무림맹주의 여식 독고연을 상대로 백 여 합이 넘는 매력, 아니 실력을 뽐내며 그녀의 태양같은 활력에 마음에 불이 난 남자들이 수두룩했다.
"우승...아니 신랑 후보로 유력한 사람은 누가 있어요?"
"섬서에서 낭아권으로 이름을 날린 염차승, 사천 청성파에서 온 옛 창천신룡 방도림, 그리고...."
황 노인은 언급하는 것 만으로도 짜증이 일었지만, 속내를 애써 감추고 어조를 낮췄다.
"...현천 백가의 적장자, 백보준이 있습니다."
"현천 백가? 안휘에 있는 세가 아니에요?"
"예, 맞습니다. 1차 시험이 되기도 전부터 계속...아가씨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란을 피워서 민폐를 끼쳤죠."
"풋."
황보혜지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미있는 분이네요. 마지막 시험이 무엇인지 안다면 크게 경을 칠 걸요?"
"아가씨, 방심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가씨를 믿지만, 혹시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걱정마세요. 제가 연이를 상대로도 백합을 견딘 여자랍니다. 연이만큼 강한 자가 아니면 저를 이길 수 없어요."
황보혜지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하지만 막상 말하고도 우울해진 낯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연이, 정말 괜찮을까요?"
"역시 독고연 소저가 걱정되십니까?"
"아니, 그게.... 어, 음, 연이는-"
황보혜지는 뒷말을 삼켰다. 횡설수설하며 말을 돌리려고 하는 모습이 보여, 총관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께서는 참으로 솔직하신 분입니다. 거짓을 말씀하시지 못하시죠."
"......."
"두 분의 우정에 제가 감히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지요. ...'색마에게 납치당한 연 소저'는 분명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아계실 겁니다. 그렇지요?"
"네. ...고마워요, 총관."
황 노인은 귀를 붉히며 고개를 숙인 황보혜지에 옅게 웃었다. 동시에 속으로는 슬펐다. 손녀같은 이 여인의 행복하기를 바랄 뿐인데, 왜 이리 현실은 고달플까.
"아 참. 아저씨, 아버지는 설마 그걸 강행하시나요?"
"예. 가주께서는...유감스럽게도 무투대회 참가자들에게 선택권을 주실 것 같습니다."
"네? 그거 지난 번에 안 하기로 했잖아요."
"예. 하지만 오늘까지 무투대회에 참가하는 후보들이 생각보다 실력이 쟁쟁하여, 내일까지 뽑힌 후보들을 보고 그 계획을 확정한다고 하셨습니다."
"...칠랑쟁패(七郞爭覇)!"
황보혜지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제일 강한 무인부터 일곱 명 중 한 명을 선택한다는 그 미친 짓! 절대 안 돼요!"
"그...하지만."
황 노인은 우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르신께서는 이번 무투대회를 제 2의 구룡쟁패 급으로 판을 키우고 싶어하십니다."
* * *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대량의 천환단을 챙긴 우리는 합비에서 제남으로 올라갔다.
물론 약속을 잊지는 않았다. 시간이 없는 만큼, 나는 독고연을 안고 땅을 접어 달리고 하늘을 달리며 북동쪽으로 달렸다.
"와, 가가! 저기 지평선 끝까지 물인 곳이 있어요! 저게 바다인가요?!"
"유감스럽게도 아니란다. 회수에서 유입된 담수호지."
중간에 워낙 넓어서 바다라고 착각하기도 했지만, 나는 북동을 향해 평야를 끝도 없이 달렸다.
안휘를 지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강소성.
산동의 바로 아래기도 하며, 원래 우리가 지나치려고 계획했던 곳이기도 하다.
유명 세가나 문파가 자리잡은 곳도 아니고 특장점이 있는 곳도 아니지만, 언젠가 한 번은 들릴 예정이었던 곳이다.
바다.
넓은 장강이나 황하와는 다른 또다른 환상이 있는 곳.
"와아아!!"
평생을 육지, 그것도 장원 안에서만 독고연에게 파도가 굽이치는 넓은 바다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다.
"연, 가만히."
나는 신이 난 그녀를 멈춰세운뒤, 그녀의 신발을 벗겼다. 갑작스레 맨발이 드러나게 된 그녀는 깜짝 놀라며 내 눈치를 살폈고, 나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신발을 벗어던졌다.
"몸을 담구고 갈 수는 없을 지언정, 발 정도는 잠깐 담굴 수 있지. 갑시다."
나는 독고연의 손을 잡고 모래사장을 밟았다. 파도에 젖은 백사장에 독고연은 함정이 깔린 진을 밟는 것 마냥 조심스레 움직였다.
"가가, 느낌이 이상해요...."
"익숙해 질 것이오."
발목 근처로 파도가 스치며 바스라졌다.
제법 늦은 밤에 도착해 아쉽게도 경치가 훤한 낮의 바다는 눈에 담을 수 없었으나, 파도에 의해 모래 바스라지는 소리만 가득한 밤바다도 제법 운치가 있었다.
"가가, 끝이 안 보이네요. 여기도 아까 담수호만큼 지나가면 땅이 나올까요?"
"글쎄. 방향을 잘 잡아야겠지?"
나는 중원과 주변의 지리를 어느정도 알고 있지만,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망망대해를 향해 나아가면 평생을 바다에서 지내야 할 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러더군. 아는 만큼 보인다. 우리가 사는 천하 너머 또다른 땅이 있을 수 있고, 우리가 디디고 있는 땅보다 두 배 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을 수 있다고 하더군."
"생전 처음 듣는 말이네요. 가가가 말씀하신 게 아니었다면 허풍으로 들렸을 거예요."
내 말이면 전적으로 신뢰하는 독고연조차 믿지 않았다. 혈강시로서 중원뿐만 아니라 이 대륙 전체를 돌아다닌 나로서는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허풍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 재미있지 않소? 중원도 이리 넓은데, 이보다 더 넓은 땅이 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흐음, 그래도 중원만큼 사람이 많은 곳은 없을 걸요?"
독고연은 내 손을 풀고 치마를 양 옆으로 들어올렸다. 파도를 밟으며 백사장을 달리는 그녀는 치마를 한 손으로 잡아당기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가가---!!"
사방이 탁 트인 백사장 한 가운데. 독고연은 내공이 실리지 않은, 순수한 자신의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제게 바다를, 천하를 보여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나도 고맙다."
과연 들었을까? 우리의 거리는 제법 멀어서 내가 조용히 말한 것도 잘 들리지 않을 것이다.
빙긋.
하지만 독고연은 내 감사를 들었는 지, 더할 나위 없이 활짝 웃으며 나를 향해 두 팔을 좌우로 뻗었다.
"제가 정말, 이만큼 좋아하는 거 아시죠?!"
사자후도 아니고 내공도 싣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리 쩌렁쩌렁 울리는 걸까. 나는 독고연의 고백에 방금 전보다 더 큰 목소리로 소리를 높였다.
"나도 좋아한단다."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독고연은 귀에 손을 올리며 나를 도발했다. 나는 파도를 박차고 달렸고, 독고연은 치마를 잡고 내게서 도망치듯 달렸다.
"꺅! 색마가 잡으러 온다!"
"이게."
나는 더욱 속력을 올려 독고연을 붙잡으려했다.
"가가, 저를 잡으면, 히익?!"
풍덩.
앞으로 계속 나아가던 독고연은 갑자기 아래로 풍덩 가라앉았고, 나는 독고연에게 몸을 날려 그녀를 붙잡았다.
"........"
독고연은 얼이 빠진 채 물에 젖은 생쥐꼴이 되어 내게 안겼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은 뒤, 백사장 쪽을 가리켰다.
"내가 얘기를 안 했구나. 강과 달리 바다는 갑자기 깊어지는 곳이 수두룩하단다."
독고연이 달려나가던 방향은 백사장이 안쪽으로 들어가는 방향과 정반대, 그러니까 바다가 더 깊어지는 곳이었다.
"...바닷물, 진짜 짜네요."
갑작스레 물에 빠지게 된 독고연은 입안 가득한 바닷물에 허탈하게 웃었다.
"이렇게 짤 거라고는 몰랐어요."
"바다니까."
나는 독고연을 안고 헤엄쳐서 물가에서 빠져나왔다. 물에 젖지 않게 신을 벗은게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고, 우리는 속옷까지 홀딱 젖어버렸다.
"으으, 죄송해요."
"미안할 것 없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옷을 말리고 가도 제 시간에 결코 늦지 않다. 마침 백사장 근처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고, 나는 우리가 벗어둔 신을 챙겨 절벽 아래의 작은 동굴을 가리켰다.
"저기서 말리자꾸나."
"네? 음, 그냥 걸어가다보면 자연히 마르지 않을까요?"
"머리도 말려야지. ...음."
나는 외투와 웃옷을 훌러덩 벗어버렸다. 갑작스러운 탈의에 독고연은 움찔거리며 놀랐고, 나는 팔에 젖은 외투를 걸고 독고연을 동굴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마침 딱 좋군."
동굴 안에는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었고, 나는 딱딱한 바위 위에 옷을 넓게 펼쳤다.
"...가가, 설마?"
"옷, 말려야지? 벗어라, 연아. 여기에는 아무도 없으니."
"으...."
독고연은 고개를 숙이며 망설이더니.
"...이건 그 신호라고 봐도 되는 거죠?"
보라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로 입술을 가볍게 훔쳤다. 그리고는 손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난감한 듯 웃었다.
"아아, 아까 바다에 들어갔을 때 놀라서 손을 다쳤나봐요. 가가가 벗겨주세요."
독고연은 나를 향해 몸을 가까이했고, 나는 독고연의 옷깃을 잡았다.
"두 말하면 잔소리지."
나는 독고연의 옷을 모두 벗겨버렸고, 우리는 어두운 동굴에서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 되었다.
"가가...."
한 손으로는 자신의 가슴을,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꽃잎을 가린 독고연은 상체를 내 가슴에 밀착하며 허리를 뒤로 뺐다.
"엉큼하셔라. 저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시다니."
내가 아래에서 내려다보는 각도에서는 자신의 중요 부위가 보이지 않게.
"밤바다의 날씨가 추우니, 따뜻하게 해드릴게요."
사락.
"옷 마를 때까지...밤을 지새워야 할 것 같은데."
어둠속에서 빛나는 독고연의 자색 눈동자에 나는 가만히 그녀에게 모든 걸 맡겼다.
[작품후기]
夜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