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79화 (179/568)

--------------------

과거와의 만남

현천 백가의 차남 백성기.

그게 내가 태어나면서 받은 최초의 이름이며, 내가 가질 수 없던 이름이었다.

사람이름이 성기(星基)라서? 성기를 연상케해서? 아니다.

애초에 나는 '백'이라는 성을 가질 수 없는 몸이었다. 내 몸에는 현천백가의 피가 요만큼도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현천백가의 가주, 백수광은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지. 그녀는 자신이 남궁세가의 가주가 기녀와 낳은 사생아라고 했단다."

"...전혀 들은 바가 없어요."

"당연하지. 무림에 비화가 얼마나 많은데."

칠성화(七星花).

그게 나를 낳은 어미의 이름이었다. 기녀의 이름이며, 나는 그녀가 가진 남궁으로서의 이름은 모른다. 애초에 그녀도 남궁세가의 호적에 없는 존재니까.

"정말로 그녀가 남궁의 사생아였는지는 모른단다. 하지만 안휘 최고의 미녀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지."

"안휘 미녀 중에 칠성화라는 이름은 없었는데...."

"당연하지. 숱한 백도 여인을 두고 어디 어미가 기녀인 사생아를 성의 최고 미녀라고 공식적으로 최고 미녀라고 불리겠느냐."

그녀는 안휘제일미가 될 수 없었다.

구정물에서 연꽃이 피어오른다고 한들, 사람들은 구정물이 아닌 깨끗한 물에 핀 꽃에 시선을 보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반한 현천 백가의 청년과 혼약을 맺었지. 그리고 아들을 두 해에 걸쳐서 두 명을 낳았다."

"그게 가가셨군요."

"그래. 다만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나는 말하는 것도 실소가 나왔다.

"아들은 낳았는데, 한 명은 혼약을 맺은 남자의 아들이 아니야."

"......네?"

"세가에서 몰래 붙여준 호위무사 하나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녀를 지켜준 무사는 물심양면으로 여인을 보호했고, 여인은 호위 무사를 상대로 그만 저질러버리고 말았단다."

혼약은 유력 세가의 청년과 하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자식을 낳는다.

"탁란이라고 혹시 아니? 그녀는 뻐꾸기와도 같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지. 아니, 이 경우에는 아이니까 탁아인가."

"가가...."

그게 자식에게 어떤 비극으로 다가올 지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그녀는 모든 진실을 숨기고 백성기를 낳았다.

"뭐, 그래도 나름 어린 시절은 제법 좋았단다. 현천 백가가 팔대세가 급은 아니더라도 남궁의 사생아를 부인으로 들일만큼, 제법 부유하고 사랑을 받으며 지냈단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 날이요?"

"그래. 가주가 모든 진실을 알아버린 날."

진실을 숨기려고 했다면 끝까지 숨겨야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이용하려고 했던 백수광의 순정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녀는 죽기 직전 아들에게 편지를 남겼다. 그리고 그 편지에는 모든 진실이 적혀있었고, 여인이 죽은 시점으로부터 수 년 뒤에 발견되었지. 참으로 무서운 여자야. 스무 살 성년이 되는 날의 선물이라면서 보물과 함께 편지를 숨겨뒀으니."

"......."

내 손을 잡은 독고연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꽉 붙잡고 다독였다.

"하지만 진실은 결국 언젠가 드러나는 법. 안휘에 큰 지진이 있었고, 봉인해둔 선물은 전부 함이 망가졌지. 백수광은 그 선물을 다시 잘 감싸다가 발견하고 말았단다."

"편지를 봤군요."

"그래."

진실을 숨기고 한 남자의 순정을 조롱한 것에 대한 천벌일 것이다.

"자기 자식도 아닌 아이를 어찌 사랑할 수 있을까? 차라리 여인이 살아있기라도 한다면 그녀를 향해 울분을 터뜨릴테지만, 이미 죽어 관에 묻힌 사람이었다. 결국 울분은 자식에게 향하게 되었지."

"가가, 혹시...."

"그래서 튀었다."

"...네?"

가벼운 내 말에 울 것 같은 독고연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 뭐 나도 눈치는 못 챘던 게 아니거든. 나한테 이부형(異父兄)이 하나 있다 이 말이야. 나를 낳기 전에, 이미 백수광과 한 명 낳았다 이거지."

"아...."

"근데 그 놈도 여인의 친자는 아니었어."

"...네?"

실타래처럼 엉키고 설킨 혼란의 시작에 독고연의 눈썹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여인에게 여동생이 하나 있었거든? 백수광은 여동생과도 아이를 낳았고, 아이는 뒤바뀐 거야. 여인이 배아파서 낳은 백수광의 자식은 사라졌거든."

"그, 그게 도대체 뭐예요?! 정신 나갈 것 같아요!"

"뭐긴 뭐야, 개족보 집안이지."

동네 개들도 이보다 족보가 덜 복잡하리라. 나는 혼란에 빠진 독고연을 위해 정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잘 들어봐.

호위무사와 칠성화가 낳은 자식이 나, 백성기.

백수광과 칠성화의 여동생이 낳은 자식이 내 이부형, 백보준.

그리고 백수광과 칠성화가 낳은 '진짜 자식'은 나도 어디서 뭘 하고 있는 지 모른단다. 칠성화의 여동생이 데리고 어디선가 잘 키우고 있겠지."

나이로 치면 나보다 한 살 손윗누이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찾을 방법도 찾을 생각도 없다.

"무림에서 아마 개족보로 치면 현천 백가만한 곳이 없을 거다. 흐흐흐."

"뭔가 되게 슬프고 복잡한 이야기일 것 같은데, 가가께서 이렇게 가볍게 얘기하시니 제가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 모르겠어요."

"가볍게 생각하면 된단다."

전생에서야 증오와 분노가 질척거렸지만, 이미 그건 회귀하자마자 강물에 몸을 던지면서 말끔히 씻어던졌다.

"이제 나는 백성기가 아니니까."

"...아, 그래서 '백'이었군요?"

"응?"

"저를 납치하여 겁간한 '의사 백'이 그래서 나온 건가요?"

"......아마도?"

그냥 아무 이름이나 생각나는 성으로 붙였을 뿐인데, 의도치 않게 빙색마인의 성을 백 씨로 정해버렸다.

"...뭐, 피해가 가진 않을 것이다. 세상에 백 씨가 어디 현천 백가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다행이네요. 가가, 은근히 지금 신경쓰고 계신 것 같거든요."

"...아예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이지."

회귀 전에 뒤지게 맞아 근골이 비틀렸던 고통에 대한 울분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걸 현생에서도 다시 따지고 들 생각은 없다.

다만 모처럼 온 김에, 인사 정도는 하고 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독고연과 함께 내가 평생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곳을 찾았다.

칠성화의 무덤.

나는 어여쁜 꽃과 함께 내 생모의 무덤을 찾았다.

* * *

사락.

머리가 희어진 반백의 중년인은 일곱송이 꽃을 들고 무덤가로 향했다. 그의 앞에는 중년인을 보좌하는 노인이 길을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가주님."

"고맙소, 총관."

"아닙니다. 제가 응당 해야하는 일입니다."

총관은 눈물젖은 목소리로 가주를 인도했다. 수많은 비석이 놓인 무덤 중 중년인이 찾는 무덤은 하나였으나, 애석하게도 정작 중년인은 무엇이 '그녀'의 무덤인지 몰랐다.

"이쪽...응?"

가주를 이끌고 가던 총관은 한 무덤 앞에 합장하며 기도를 올리는 두 남녀를 보고 놀랐다.

훤칠한 청년과 빼어난 미모의 남녀가 이런 곳에 있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예를 표하는 비석은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이보시오."

총관은 붉어진 얼굴로 젊은 남녀에게 다가갔다. 두 남녀는 자연스레 손을 움켜쥐며 총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곳이 어떤 무덤인지 알고는 있소?!"

"...지나가던 찰나에, 비석의 상태를 보고 안타까움이 들어."

"죄송해요. 혹시 관리인이신가요?"

남녀의 순순한 사과에 총관은 멎쩍게 고개를 돌렸다. 현천 백가의 죽은 자들을 모시는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남녀의 앞에 있는 비석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다.

"손님께서는 현천 백가의 무덤에 어인 일이시오."

중년인, 현천 백가의 가주 백수광은 힘없는 목소리로 둘에게 물었다. 청년은 담담하고, 여인은 놀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아, 그게."

"비석이 훼손된 것을 보고 안타까움이 들어."

"...명복을 빌어줘서 고맙소. 하지만 이곳은 우리 가문의 사유지이외다. 정중히 부탁드리건데, 나가주시오."

백수광의 말에 청년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하지만 발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 무덤은."

그는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가 강했다.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이보시오!"

"......."

총관은 청년을 엄한 목소리로 나무랐으나, 백수광은 좀처럼 대답을 쉽게 하지 못했다. 앞머리 사이에 살짝 가려진 청년의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기분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 무덤은...."

최소한 절정 이상의 고수가 틀림없다. 백수광은 이런 강자가 왜 현천 백가의 무덤에 온 건지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 아내였던 자의 무덤이오."

단장의 고통을 토해내는 듯한 백수광의 말에 청년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여인은 청년을 걱정하는 눈빛으로 청년의 손을 붙잡았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 꽃은 아내분께 드리고자 하는 겁니까?"

"아니오."

백수광은 무덤의 옆, 작은 비석에 이름조차 적히지 않은 무덤을 가리켰다.

"내 아들이오."

"아들이라...현천 백가의 아드님은 살아계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십 수년도 전에 잃은 내 아들이지."

"......."

청년은 벙찐 얼굴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백수광은 죽은 아들의 무덤에 꽃을 올리며, 짧게 묵념을 했다.

"...오래전, 내 실수로 인해 잃은 아들이오."

청년은 한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고개를 비석 쪽으로 돌린 채 눈을 감았던 그는 백수광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가주님. 불청객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니오. 지나가는 객에게 못 볼 꼴을 보인 우리의 잘못이지. ...두 분은 연인이오? 아니면 부부?"

"부부입니다."

여인은 똑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백수광은 그 목소리에서 왠지 모르게 자신을 향한 도전적인 기세가 느껴져 떨떠름하게 웃었다.

"부부가 쌍으로 절정 고수 이상이라. 좋은 인연을 만났군. 참으로 어울리는 한 쌍이오."

"감사합니다."

여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청년을 바라봤고, 청년은 멎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색마를 조심하시오. 안휘에는 색마가 상대적으로 덜 출몰한다고 하지만, 혹시 어디서 빙색마인 같은 자가 나타날 지 모르니."

"네, 조심하겠습니다. 불청객임에도 이리 너그러이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잘 살겠습니다."

"응? ...그, 그래. 잘 사시오."

백수광은 기이한 분위기에 괜히 찝찝해졌다. 말 수가 적은 청년도 그렇지만, 들뜬 여인도 조금은 규격 외의 존재인 것 같았다.

"그...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부부간에 서로 거짓이 없기를 바라오."

"큿."

청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백수광은 잠시 불쾌해졌지만, 왠지 모르게 청년에게는 쓴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런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화사하게 웃던 여인도 조금은 쌀쌀맞은 목소리로 답한 뒤, 청년을 이끌고 사라졌다. 백수광은 볼을 긁적였다.

"내가 괜한 얘기를 했군."

"아닙니다, 가주님. ...응?"

부부를 향해 성을 내던 총관은 비석 뒤에 놓인 꽃을 보고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일곱...송이?"

"......!!"

백수광이 급히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청년과 여인이 사라진 뒤였다.

* * *

"마지막 한 마디만 안 했으면 참으로 좋았을텐데.“

"그러게요. 모르고 들었다면 정말 피와 살이 되는 교훈이었을텐데."

객잔에 들려 가벼운 끼니를 떼우기로 한 우리는 백수광이 말한 마지막 한 마디 사족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칠성화가 홧병으로 죽었던 이유가 자기 여동생과 놀아난 걸 알고 난 뒤였거늘.”

백수광을 보면서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인간은 뻔뻔한 존재라는 것을.

“좋은 분 같기는 했어요.”

“최소한 보이는 모습은 말이지.”

다소 노쇠하여 힘없어 보이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나는 백수광에게 동정심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결국 백수광이나 칠성화나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을 했으니.

"그런데 참으로 이상해. 아들은 어디로 간 거지?"

"가가의 그...."

"헷갈리니까 그냥 그 자라고 하거라."

"완전 남남인 형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그래도 대외적으로는 칠성화 또한 자신의 모친일텐데 왜 현천 백가의 영역에서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걸까. 설마 나처럼 복잡하고 머저리같은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아서 가출이라도 한 걸까?

"이보시오."

나는 점소이를 불렀다. 처음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던 그는 내가 식탁 위에 올리는 동전 여럿에 화사한 미소로 응답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소협."

"죽엽청 한 병 주시오. 그리고 혹시 술과 함께 안주 삼을 재미난 이야기 없소?"

"글쎄요. 최근에는 워낙 뒤숭숭한 일밖에 없어서 재미보다는...아!"

점소이는 키득키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현천 백가의 도련님 있지 않습니까?"

"음."

"그 분이 얼마전 제남으로 떠났습니다."

"제남? 왜?"

나는 독고연이 따르는 술잔을 받다가 술맛이 다 달아나고 말았다.

"이봉결정전에서 본 황보 세가의 여식에게 반해 청혼하겠다고, 신랑 후보에 입후보 하러 갔답니다. 누구더라...이름이 지혜였던가? 혜자?"

"황보혜지?"

"아! 그래요, 그 아가씨. 첫눈에 반했다고 아주 결혼하겠다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가주님이 말린다고 애먹었다가, 결국 포기하고 몰래 보냈습죠. 흐흐."

"......."

아무래도 과거의 인연은 쉽게 떨쳐낼 수 없는 모양이다.

[작품후기]

여러분은 주인공에게 같은 배에서 나왔지만 어버이가 다른 한 살 차이 이부누나가 있다는 것만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후원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후원 덕분에 한 명의 일러가 9월 중순에 하나 추가 될 예정입니다. 누구로 할 지는 고민 중입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