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78화 (178/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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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의 만남

전생에 나는 언제나 이용당하는 자의 입장, 그러니까 하급자의 삶을 살았다.

불합리한 상황에 놓여도 언제나 고개와 허리를 숙여야했고, 자존심을 굽혀가며 콩고물 하나 떨어지는 것에 미칠듯이 기뻐했다.

나는 나보다 윗사람을 이용하여 더 강해지려고 했고, 추마귀는 여러 사람에게 이용당하며 그 힘을 불려나갔다.

그래서 홍련의 노림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반로환동을 한 고수의 눈에 들면 자신이 상승의 무공을 익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어, 추소광의 첩이 된다는 양다리를 동시에 걸쳐놓았다.

만약 순수한 의도로 내 제자가 되기로 하였다면, 나는 그녀를 데리고 다니며 검을 가르쳤을 것이다.

만약 나를 지아비로 모시려고 했다면, 나는 그녀를 데리고 여인의 기쁨을 가르쳤을 것이다.

만약 나와의 인연을 끊고 추소광의 첩이 되기로 했다면, 나는 그녀에게 축하하며 깔끔하게 이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이용하려고 했다.

기녀와 손님으로 만났으면서, 나에 대한 일말의 연심도 없이 나를 이용해 쉽게 강해지겠다는 생각에 나는 그녀를 과감히 쳐냈다.

- 강자의 곁에 붙어서 꿀빨려는 기생충은 차고 넘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악질은 충성심도 없이 언제든 배반할 생각이 가득한 것들이지.

혈교주는 말했다.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사랑이든 누군가에게 충성을 하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지만, 충성의 대상이 여럿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 남편과 사별한 여인네가 삼년상을 치르고 새로운 남자와 재혼하는 건 괜찮지만, 남편을 두고 딴 남자랑 새살림 차리는 건 인정할 수 없다는 거랑 같은 이치지. 딴 남자랑 바람 피우는 년들은 붙잡아다가 주먹으로 거기를 그냥, 아오.

혈교주는 말했다. 한 번 배신한 자는 배신의 맛을 알기에 평생을 배신한다고.

사람의 근본이 바뀔만한 일이 없다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혈교주, 역시 당신이 옳소.'

나는 그 때와 전혀 변하지 않은 홍련의 모습에 씁쓸함만이 가득했다.

주르르르.

홍련은 명백한 살초에 실금했다. 나는 내가 손을 쓰기 전, 나보다 더 빠르게 검을 찔러 위협을 가한 독고연의 어깨를 붙잡았다.

"연아, 네 손을 더럽힐 일이 아니다. 진정하거라."

"죄송해요. 하지만 듣자하니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독고연은 싸늘한 목소리로 홍련을 내려다봤다.

"추소표국의 이야기는 저도 알고 있어요. 홍련이라는 기녀가 추소광이라는 자에게 입적을 하고, 또 다른 손님들을 받았다가 크게 낭패를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첩으로 들어가기 전에 크게 한 탕 당기려다가 걸렸다고."

"........"

홍련은 시선을 피했다. 독고연의 매서운 눈빛을 직접 마주보지 못했다.

"...그러면 자업자득 아니에요?"

"닥쳐! 저 새끼 때문에 내 인생은 나락으로 빠졌다고! 기루도 망하고, 잘 곳도 없이 거지촌에서...!!"

"그러다 마교로 들어가서 복수를 위해 칼을 가셨다? 안타깝기는 한데, 저는 딱 거기까지네요."

독고연은 검을 회수했다.

"가가. 살인멸구라는 제일 좋은 방법이 있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만약 가가께서 하기 껄끄럽다면, 제가 하는 방법도 있어요."

"아니다, 연아. 네가 할 필요없다. 이건 나의 과거로부터 이어진 악연이니."

나는 한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붙잡았다.

"내 스승께서는 말씀하셨지. 무인의 삶이 막혔다고 꼭 무인의 삶을 억지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고. 농사꾼이든 약초꾼이든, 과거의 영광은 접어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백년해로 살아가는 삶도 가치가 있다고."

말투는 이상했지만, 분명 그런 의도였을 것이다.

"나는 너를 돈으로 샀고, 너는 나를 몸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우리의 관계는 거기서 끝이었지. 내게 복수를 하려고 했다? 내가 네게 피해를 입혔느냐? 아니지. 네가 자승자박한 게 아니더냐.“

스르르.

내 손에서 이형의 기운이 홍련의 머리로 깃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복수를 논하는 것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구나. 너는 복수라는 명목으로 그저 네 삶을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냐.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전부 나 때문이라며, 내가 나락으로 떨어진 건 전부 내 책임이라며."

"그게 뭐가 나빠...!!"

"그래, 나쁘지 않지. 하지만 그럴 거라면 당사자에게 걸리지 말지 그랬나."

이곳에서 홍련을 만나게 된 것도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악연을 확실히 정리하고 가라는 하늘의 계시가 아닐까.

"내가 어디 마냥 착한 놈처럼 보이더냐? 나는 내게 복수하겠다고 하는 놈들을 가만히 살려두지 않는 주의라서 말이야."

콰득.

나는 홍련의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또 얘기하는군. 일어나면 모든 게 끝나있을 것이다."

"시, 싫-"

툭.

홍련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 * *

딱히, 의미는 없다.

처음에는 마교의 존재를 건드린게 아닌가 전전긍긍하던 뢰마는 남자가 전한 말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 남궁살과 함께 마교지부의 부대 전체를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

"여깁니, 윽."

남궁살은 도착하자마자 평상에 놓인 여인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뢰마 또한 여인의 상태를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겁간당했구나."

아무리 봐도 그런 흔적이 역력했다. 안에 사정당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전신이 벗겨진 채 점혈을 당한 여인이 겁간당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당했겠는가!

"내공이 텅텅 비었어. 심지어 채음까지 당했다."

"...살영문은 이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래야지. 마교의 일원이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기다려보거라."

뢰마는 여인의 명치에 손을 올렸다.

파지지직!!

뢰마의 손에서 흘러나온 전격이 여인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여인은 말 그대로 번개에 얻어맞은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마른 기침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허억, 허억, 허억!"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여인, 홍련을 향해 뢰마는 자신의 외투를 집어던졌다.

"정신이 들었으면 보고하라."

"......누, 누구세요?"

홍련은 잔뜩 겁을 먹은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남궁살은 그 모습에 바닥에 침을 뱉었다.

"젠장, 충격에 기억을 잃은 것 같습니다."

"겁간당한 여인들 중 이런 경우가 종종 있지. 성고문에 대비한 교육은 하지 않았나?"

"그럴 리가요. 당연히 했습니다. 오히려 이 아이는 하루에 남자 둘 씩 잡아먹을 정도로 채양보음을 하며 성에 익숙한 아이입니다."

"...그럼 그런 여인이 기억을 잃을 정도로 남자가 위험하다는 건가?"

뢰마는 홍련의 눈을 까뒤집으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홍련은 붉게 물든 뢰마의 눈동자를 보며 바들바들 떨었다.

"마, 마인...!"

"네 년도 마교도가 아니더냐. 무엇을 그리 놀라."

"제, 제가 마교도라고요...?!"

"하, 젠장."

남궁살은 진심으로 귀찮다는 눈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제법 쓸만한 년이었는데."

"글쎄. 이 여자를 범한 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뢰마는 홍련이 누워있던 평상에 새겨진 문구를 가리켰다.

체 ★★★★☆

기 ★★☆☆☆

심 ★☆☆☆☆

종합 2.3

평 인성이 글렀다.

"......이곳에 다녀간 자는 색마인가?"

"색마라고 하면 그 독고연을 납치한 빙색마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 자는 지금 모용란을 쫓고 있지 않은가."

빙색마인은 모용란을 범하겠다고 예고했고, 모용란은 세가를 떠나 잠적한 것으로 대응했다.

아직까지 빙색마인의 또다른 예고가 나타나거나 모용란이 범해졌다는 소식이 없는 이상, 빙색마인을 모방한 또다른 색마의 소행이 틀림없었다.

"강호에 변태는 참 많군. 배후성주, 이 여자의 처분은 그대에게 맡기겠소."

"마음대로 해도 됩니까?"

"그래. 마음대로. 나는 그 둘을 추격하겠다. 너희 중 다섯만 나를 따라와라. 그리고 그대는 이곳에서 천환단이 남아있는지 살펴보도록."

"존명!"

뢰마는 손을 저으며 자리를 떠났다. 남궁살은 비릿하게 웃으며 홍련을 제압했다.

"우웁?!"

"인성은 글렀어도 몸은 5점 중 4점이라. 어차피 몸만 즐기면 되니까 상관은 없지. 혹시 아느냐, 예전처럼 몸 을 굴리면 기억이 되돌아올지."

남궁살은 바지를 벗어던졌다.

"내가 정말로 네 년이 4점인지 확인해주마. 크으, 절정 고수라고 뻗대던 년이라 벼르고 있었는데!"

"누, 누가 살려, 우우웁?!"

뢰마가 얹은 외투는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가고 말았다.

* * *

"누군가가 얘기하더군. 저런 여인을 두고 뭐라고 부르는 지 아느냐?"

"뭔데요?"

"꽃뱀."

혈교주가 말했다. 남자를 파멸시키고 제 이득을 챙기려하는 여인은 중원에 수두룩하다고. 특히 몸 파는 기녀들 중에 그런 이들이 훨씬 많다고.

"꽃뱀이라.... 머리에 꽃잎을 달고 가만히 있다가 먹이를 노리는 건가요?"

"글쎄. 나도 그냥 들은 거라서 자세하게는 모르겠는 걸. 느낌만 알면 된단다."

나는 독고연의 손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재촉했다. 그녀는 자꾸 뒤가 신경쓰이는 지 뒤를 몇 번이고 돌아봤으나, 나는 그녀를 잡아당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나머지는 저 여자의 인덕이 알아서 해결해줄 것이다."

"네? 이대로 진짜 그냥 가요?"

"그래. 곧 여자의 동료들이 올 테지. 그럼 저 여자가 평소에 주변에 행실을 잘 했으면 보살펴줄 것이고, 악행을 일삼았다면 파멸을 겪게 될 것이다."

겁간을 당해 단기기억상실에 걸린 여인을 과연 누가 잘 보살펴 줄 것인가? 과연 홍련의 동료들은 그녀를 챙겨줄 것인가, 아니면 버릴 것인가.

"설령 마교의 조직이라고 한들, 옆에서 누구 한 명이라도 잘 보살펴 준다면 다시 절정의 무위를 금방 되찾을 것이다."

평소에 잘 했으면 옆에서 챙겨주면서 재활을 도우리라.

하지만 업보는 돌아오기 마련. 만일 그녀가 주변에 콧대를 세우고 내게 했던 것처럼 주변을 이용하려고 들었다면, 파멸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연아. 모처럼이니 이야기를 해주마."

나는 독고연과 함께 폐가를 빠져나오며 그녀에게 담담히 내 속내를 밝혔다.

"나는 내게 범해진 누군가가 내게 복수를 하러 온다면, 철저히 대응할 것이다. 지금은 그들을 압도하지만, 언젠가 내가 파멸할 수 있지. 강호 무림에 나보다 강한 자들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느냐."

"가가."

"나는 파멸을 담담히 받아들일 것이다. 업보는 결굴 언젠가 찾아오게 되는 법. 설령 그게 견희, 시아, 연, 너희라고 한들...."

이들이 구천현녀가 되어 내 심장에 칼을 박는 날이 오더라도, 나는 순순히 받아들이리라.

"나는 내 행동의 업보를 달게 받을 것이다. 단, 지옥 끝까지 추하게 저항하고 난 다음."

"가가,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아니 저희는 언제나 가가의 편이에요."

독고연은 내 손을 꽉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가가께서 구정물에 몸을 담그신다면, 저는 머리 끝까지 담글 각오로 가가와 함께 하겠어요. 이미 아버지께 패륜도 저지른 몸인데, 여기서 뭔들 더 못하겠어요? 어차피 파멸할 거라면 같이 망해버리죠, 우리."

"......그렇게 말하면 내가 엄청 미안해지는데."

"미안하면 여기에 사과 한 번 해주시는 건 어때요?"

독고연은 내 앞을 가로막으며 까치발을 들었다. 나는 그녀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이와 마주섰다.

"아주 그냥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들끼리 서로 물고 빨고 난리가 났군 그래."

"본인은 젊었을 때 더했을 텐데."

"시끄럽다, 이 놈아."

우리의 앞을 막아선 노인-무명은 봇짐을 진 채 곰방대에 연초를 피웠다.

"네 놈 때문에 이게 무슨 소란이냐.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천환단 보여줬으면 그만한 값어치를 해야하지 않겠소?"

"내가 이래서 네놈한테 약값 딱 맞게 치르려고 했던 건데. 씁."

무명 노인은 내게 진심으로 짜증을 부렸다.

"그놈은 남쪽으로 갔다고 하더구나. 만나러 갈 것이냐?"

"내가 왜? 다 때가 되고 인연이 되면 만나게 되겠지. 이미 그 날 나는 놈의 행방에 대해서는 손을 놓은 몸이오."

"에잉, 알았다. 네 좆대로 해라."

노인은 몸을 돌려 떠나려했다. 나는 모처럼 생각이 난 김에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약령(藥靈), 호북이 그리 살기가 좋다고 하더구려."

"호북만 안 가면 되겠군."

무명 노인-약령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는 벙찐 독고연을 향해 눈을 찡긋였다.

"저래놓고 나중에 호북에 올 거란다."

"...약령이라면 안휘의 유명 약사가 아닌가요? 20년 전 즈음 약을 잘못써서 옥살이를 했다고 들었는데."

"누명이야. 그 뒤로 정체를 숨기고 사는 은거 의원 중 한 명이지. 나는 함부로 사람을 사귀지 않는단다."

특히 오랜 인연을 쌓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훗날, '약선(藥仙)'에 이를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를 내가 어찌 가만히 둘 수 있겠는가.

특히 천마가 예의주시하는, 발모제를 만들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유일한 의원을.

"그래...연아, 미안하지만 내게 잠깐 시간을 내어다오. 나와 함께 잠깐 인사를 드리러 가자꾸나."

"어느 분께요?"

"나를 낳아준 여자."

나는 독고연과 함께 안휘에 온 김에, 나의 과거 인연을 모조리 정리할 것이다.

"겸사겸사 가는 동안 내 이야기도 해주마."

"드디어 옛 이야기를 해주시는 건가요?"

"그래. 우리가 갈 곳은...현천(玄天) 백가."

한 때, 내가 백성기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나의 생가.

"내 생모는 남궁세가의 버려진 사생아였단다."

현천 백가를 이용해 가문에 복수하려다 실패한, 꽃뱀.

[작품후기]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칠공주는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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