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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색마-173화 (173/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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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으로 가는 길

웅성웅성.

넓은 비무장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이름 좀 날린 무사부터 시작하여 무명의 표사, 낭인에 개방의 거지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족히 100명 넘게 모인 이들 중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신체 건장한 남자였고, 서로서로 '적'으로 생각하며 아무 말 없이 자신들의 무공만 가다듬을 뿐이었다.

"모두 모였군."

진중한 목소리와 함께 제법 체구가 큰 중년인이 전각에서 내려와 계단 앞에 섰다. 눈썹과 수염이 짙은 그는 사나운 호랑이와도 같은 인상이었다.

"이곳에 모인 그대들 모두 다 속내는 같을 테지. 누군가는 크게 다칠 수 있고, 누군가는 피눈물을 흘리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담담한 중년인의 말에 그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비무장에 모인 이들 모두를 합해봐야 중년인 한 명을 이길 수 없었다.

화경의 고수!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염이 풍기는 수미천왕신공(須彌天王神功)의 기운에 비무장의 무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천하제일권(天下第一拳), 벽력신권(霹靂神拳)!

권법으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백도 최강의 권사가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무인들을 압박했다.

"커헉!"

벌써 몇몇 무인들이 각혈하며 무릎을 꿇거나 쓰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을 부축하거나 용태를 살피지 않았다.

"약한 사내다."

황보염의 말에 두 다리가 무너지지 않은 무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말대로, 이미 쓰러진 사내들은 약했다.

"나의 기세를 버티지도 못하는 자가 어찌 색마를 두고 내 딸을 지킬 수 있겠느냐?"

황보염의 압박은 소위 어중이떠중이를 가려내는 시험이었다.

과연 황보세가 여인의 지아비가 될 자격이 있느냐.

황보세가는 대대로 여식의 지아비를 무공으로 찾고자 했다.

아내보다 약한 남자가 어디 남편 구실을 제대로 하겠느냐는 이유로, 황보세가는 강한 무인을 세가 여인들의 아내로 맞이하고자 했다.

"지금은 내 막내딸 수준의 기세다.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어찌 황보세가의 남자가 되겠다고 하느냐. 색마의 앞에서 아내를 지키기는커녕 아내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냐? 갈! 썩 꺼져라!"

자신을 증명하는 것으로 황보세가의 일원이 될 수 있다. 무인들은 하나둘 픽픽 쓰러지는 이들을 보며, 저들처럼 굴욕을 당하지 않으리라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황보염 뒤에 앉아있는 일곱 명의 여인을 바라보며 더욱 의지를 다잡았다.

시험만 버텨내면, '일곱 명'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일단 혼인은 할 수 있다. 황보세가 황보염의 적녀, 칠공주 중 한 명의 지아비이자 왕자가 될 수 있다.

무인들은 색마에게 반쯤 진심으로 고마웠다.

색마가 날뛰는 바람에 황보염은 급히 일곱 명의 여식을 혼인시키고자 했고, 무인들은 무려 후보가 일곱 명이나 되는 자격시험에 너도나도 남편이 되고자 입후보하기 시작했다.

기준은 오직 강함.

과연 색마로부터 아내를 지킬 수 있는지.

피눈물을 머금고 금지옥엽들을 혼인시켜야 하는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만 있다면, 인생 역전이다.

황보 칠공주.

인형처럼 앉아있는 여인들은 반투명한 얇은 천막 뒤에 앉아, 자신들을 품평하듯 바라보고 있을 여인들을 침대에서 눕힐 수 있다.

"...저들이 색마랑 무엇이 다른지."

황보 칠공주 중 두 번째 자리에 앉은 둘째, 황보혜지는 자신들을 향해 욕망을 숨기지 않는 무인들을 보며 한숨만 내뱉을 뿐이었다.

"크흠."

황보염은 헛기침으로 황보혜지에게 무언의 경고를 날린 뒤, 기세를 거두어들였다.

"그만! 1차 시험은 여기서 끝이다. 2차 시험은 내일부터! 모두 비무를 준비하라!!"

황보염의 사자후에 살아남은 무인의 수는 아직도 70명.

70명 중에 일곱 명 안에 들 사람이 과연 있을까. 경쟁률이 10:1이라고 생각하면 분명 해봄 직한 경쟁이었으나, 아쉽게도 경쟁률은 2차만 하더라도 100:1, 아니 300:1을 훌쩍 넘겼다.

"...다음 조!!"

살아남은 70명이 비무장 밖으로 빠져나가고, 다시금 새로운 100명이 비무장 안으로 들어왔다. 황보염은 물을 한 모금 들이마시고, 다시 기세를 끌어올렸다.

"...모두 모였군."

벌써 몇 번째 반복인지는 모르겠지만, 바깥에는 수천 명의 무인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가가. 팔대세가가 세력을 불려 나가는 방법은 잘 알고 계시는가요?"

"물론. 유력 세가끼리 혼인으로 피를 섞는 것이 아니더냐."

"그래요. 아무리 천하에 남자 반 여자 반이라고 한들, 한 가정 안에서 남녀가 정확히 반반씩 태어나는 경우는 흔치 않죠. 바로 황보세가처럼."

독고연은 열 손가락 중 무려 일곱 개를 접었다 펼쳤다.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염에게는 일곱 명의 딸이 있어요. 축첩으로 낳은 이복자매들이 아니라, 한 분이 연달아 낳은 친자매죠."

"남자아이가 나올 때까지 낳은 것이로군. 황보염은 아내와 오래전에 사별했다고 들었는데. 난산이었나? 안타깝군."

"...아뇨, 복하사에요."

나는 독고연의 입에서 나오는 황보세가의 비밀에 입이 떡 벌어졌다.

"대외적으로는 다산으로 인해 몸이 견디지 못하고 병사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아이 만들기를 하다가 돌아가셨대요."

"그거참 무서운 이야기로구나."

나는 쪽배의 노를 저으며, 독고연의 이야기를 뱃노래 삼아 귀담아들었다.

혼인할 여자가 이제 더는 없는 하북팽가와 달리, 황보세가는 혼인을 하지 않은 여인이 수두룩했다.

당장 황보세가의 가주, 벽력신권 황보염의 직계 7공주만 해도 그랬다.

황보염은 아내와 사별하기 전 그녀와 황보혜지를 비롯한 7명의 자식을 낳았다.

황보염은 남아를 낳고 싶어 했고, 무림인이었던 아내 또한 남아를 낳기 위해 몸이 허락할 때까지 낳고 또 낳기를 반복했다.

아이를 일곱이나 기르는 게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냐는 질문에는 당연히 어렵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황보세가에는 낳은 아이마다 유모를 교대로 붙여줄 수 있는 재력이 있었다.

산동 제일의 가문이 아이 좀 여럿 낳겠다는데 누가 말릴쏘냐!

남자아이가 여럿 나오는 경우는 후계자 자리를 두고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딸은 출가하는 경우 외인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있어 아무리 많아도 큰 문제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아이가 계속 나오지 않는 건 얘기가 달랐다.

7남매 중 남자가 막내 한 명인 것과 7남매도 아닌 7자매인 경우는 차원이 달랐다.

다만 벽력신권은 아내를 그렇게 잃은 충격이 좀 컸다고 하더라. 그는 더는 아내를 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딸들을 강하게 키웠다.

데릴사위로 들이는 강자에게 황보세가의 뒤를 잇게 하기 위해서.

"잠깐만. 그거 이상하구나. 혼인하여 출가한 여인의 가정을 방계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사위에게 가주 자리를 물려준다?"

다소 수긍이 가지 않는 선택이었다.

"황보염이 아직 정정하다면 후처를 들여서 아들을 낳게 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제 경우, 그러니까 제 아버지의 경우가 있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예요."

"호오, 그렇군. 독고자영의 경우처럼 되기를 바라는 건가."

독고세가는 세가의 핏줄 이외의 남자를 데릴사위로 들여 대성한 경우이다.

심지어 딸인 독고연도 갓 성인이 된 어린 나이에 초절정에 이르렀으니, 다른 세가에도 좋은 교보재가 되었으리라.

꼭 직계 남자를 가주로 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걸.

어머니가 될 가문의 적녀가 후계자 하나만 잘 낳으면, 독고세가처럼 천하를 호령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제 친구, 황보혜지는 황보 칠공주 중 둘째예요. 칠공주가 저마다 재능이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들 황보세가의 무공은 익히고 있죠."

"보자...분명 일곱 명 전부 최소 이류 무사 수준은 된다고 했지?"

"예. 혜지를 제외하면 전부 일류거나 이류지만, 전부 호신술 하나는 대단하다고 들었어요."

"이류면 몰라도 일류 정도면 어디 가서 고수 소리 충분히 들을 수 있지. 강하군, 황보세가. 최소한 일류 고수 중에서 알짜배기만 쏙 골라서 사위로 들일 수 있으니."

독고연은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는 그 표정에서 내 말에 수긍은 하지만 공감은 하지 못하는 모습을 엿보았다.

'이래서 천재들이란.'

독고연은 사실상 무공의 시작이 절정부터 시작이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강호의 5할을 차지하는 이류, 일류 고수가 얼마나 강한 자들인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 절정 고수는 강호에서 1푼, 아니 1리라도 될까?

"황보세가에 칠공주와 결혼하겠다고 모인 남자들도 이류나 일류가 태반이지만, 그들도 강하단다. 어쨌든 일곱 명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니."

"절정 고수도 나오지 않을까요?"

"절정 고수쯤 되는 자가 굳이 황보세가의 칠공주를 노릴까? 글쎄. 나는 아니라고 보는데."

절정에 이르렀으면 이미 자신만의 도장이나 작은 문파를 만들어도 될 정도의 실력인데, 굳이 황보세가의 사위로 들어가려고 할까?

아무리 벽력신권이 강해서 화경의 권사가 어떤지 매일 느낄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는 완전한 남이 아닌 '장인'이 될 사람이다.

"절정 고수가 굳이 벽력신권에게 매일같이 얻어맞을 이유는 없지. 무림인이란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남들 아래에 태생적으로 있을 수 없는 몸이지."

"하지만 그걸 전부 감내할 만큼의 이득이 있다면요?"

"그것이 무엇이냐."

"혜지요."

나는 독고연의 자신감에 놀랍기까지 했다.

"황보혜지...얼굴은 너만큼 예쁘지 않잖니."

"상공 눈에야 제가 혜지보다 예뻐 보이지만, 천하 사람들이 저희 둘 중에 누구를 안고 싶냐고 하면 혜지를 선택할걸요?"

"왜?"

"저는 이미 색마에게 납치당해 범해졌을 여자고, 혜지는 아직 처녀로 알려진 존재니까요."

"......."

나는 독고연의 애매한 발언에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알려진 존재? 그 말은...."

"농담이에요. 혜지 처녀 맞아요."

"놀래라. 아기색마가 식겁해서 고개를 들어버렸잖니."

독고연은 갓을 살짝 아래로 내리며 싱긋 웃었다.

"근데 제가 아는 것도 이봉결정전에서 만났을 때 들었던 거라,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요."

"...빨리 확인하러 가지 않으면 늦을 수 있겠군."

"후후, 걱정마세요. 혜지, 그래도 속으로는 여린 아이라서...."

독고연은 소녀처럼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꼭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하여, 결혼식을 올린 첫날 밤에 처음을 주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허허, 그것참. 왠지 모르게 미안한데."

식을 올리기는커녕 집에서 납치하여 데려온 거로도 모자라, 처녀를 위-아래-뒤 셋이나 취했으니. 나는 독고연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화경에 오르면 환골탈태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완전히 새로운 몸이 되는 거 아니겠어요?"

푹푹.

독고연은 입을 살짝 벌리며, 자신의 검지를 두어 번 넣었다 빼며 웃었다.

"그때 해주시면 된답니다, 가가."

"화경에 당연히 오를 거라고 확신하는 건 둘째치고, 만약 화경에 이르렀는데 식을 올릴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식을 올리기도 전에 하고 싶어지면 어떻게 하지?"

"그럼 현경 올라가고 환골탈태 한 번 더 하면 되죠. 아, 환골탈태해도 딱히 그게 다시 자라거나 하지는 않겠네요. 그냥 느낌만 가져주시면 될 것 같아요."

"허, 네가 번데기니?"

"아뇨. 선녀인데요."

사공희와 이시아가 없으니, 혼자서 연속으로 공격을 퍼붓는다. 나는 직진밖에 없는 독고연의 말에 그만 노를 놓아버리고 말았다.

"슬슬 어두워지겠구나. 지금부터는 화수가 이끄는 대로 따라 흘러내려가기만 하면 돼."

유속은 완만하고, 수면은 고요하다. 적어도 한 시진 가량은 조용히 배에 앉아있어도 노를 저을 필요가 없다.

"가가, 밤공기가 차갑습니다. 데워드릴게요."

독고연은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나는 그녀의 뒤로 팔을 뻗으며, 함께 배에 누웠다.

"가가 덕분에 배도 타보고, 정말 좋아요."

"무릉도원에도 호수가 있었지 않느냐."

"피. 거기야 한 바퀴 돌고 나면 끝인걸요. 고여있는 샘이랑 흘러가는 강이랑 같나요? 하늘을 보세요."

독고연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이렇게 별이 많은 건 처음이에요. 정말 멋지지 않아요? 정말...가져버리고 싶을 만큼."

"그래. 하늘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그런데 왜 너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나를 보고 있느냐."

"그거야 당연하죠."

스륵.

독고연은 내 볼에 입을 가볍게 맞추며, 내 품에 안겼다.

"제게 하늘은 가가, 당신이니까요."

"......."

역시 강하다, 독고구검.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찌르고 들어오는 독고구검에 저항을 포기했다.

[작품후기]

독고구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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