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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제일검
태극매화(太極妹花).
용봉지회에서 백도제일화에 오른 태극화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이들로 모인 이 비밀결사회는 태극화의 아름다움을 세상 널리 알리는 데 조직의 의의가 있다.
- 태극화? 소공녀보다 얼굴은 안 예쁘지 않아?
- 너 이 새끼, 비무다!
태극화를 상대로 온갖 음해를 일삼는 자들을 은밀한 방법으로 처단(?)하는, 다소 과격한 분자들도 섞여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태극화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태극화를 멀리서 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소장한다거나.
태극화가 마교 소공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두고 여인 간의 우정을 소설로 쓴다거나.
무당파에서 태극화와 비무를 나는 경험을 비밀리에 공유한다거나.
호북과 하남을 중심으로 넓게 퍼진 비밀집단은 당연히 섬서에도 존재한다. 아무리 섬서가 화산을 가장 우선시한다고 하지만, 구룡에 준하는-사실은 더 강한-백도제일화를 찬양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하아, 하아. 태극화 님...."
매화검수, 선주희는 용봉지회에서 태극화를 본 순간부터 병에 걸렸다.
검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실력, 유려한 움직임, 같은 여자로서 질투할 법도 하지만 너무 크고 아름다운 바람에 경외감이 드는 크기, 그리고 그런 크기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강한 승리욕.
거기에 가만히 서서 검 두 자루를 어검술로 다루며 상대를 압박하는 여유는 선주희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누군가는 백도제일화를 상대로 질투하고 시기하며 언젠가 반드시 꺾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지만, 선주희는 태극화에 대한 동경을 품고 그녀와 만나는 날만을 학수고대했다.
남들은 아무도 모르지만, 선주희는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백도제일화의 얼굴이 인피면구라는 사실을!
소공녀와의 비무가 끝난 뒤, 태극화의 옷을 입은 미녀가 무붕 의원이 있던 진료소로 급히 달려가는 것을 봤다. 처음에는 그냥 착각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태극화였다.
그녀는 벗겨진 인피면구에 울상을 지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확인한 것이었고, 태극화도 벗겨진 인피면구를 다시 덮어썼기에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선주희는 보고 말았다.
"아아, 언니...."
누가 백도제일화의 얼굴이 마교 소공녀에게 밀린다고 했는가?! 소공녀에게 상대적으로 밀리는 건 오직 눈높이뿐이며, 무공도 거의 막상막하에 준할 정도였다.
혹자는 마교 소공녀가 살검을 휘두르는 단계까지 가면 더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선주희는 태극화가 더 강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의 우상.
나의 목표.
그리고 그런 생각은 어느새 몹쓸 망상으로 격화되었다.
- 언니, 오늘이야말로 승부를 내겠어요!
- 주희.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화산의 대표로서 태극화와 다시 비무를 펼쳐 그녀의 호적수로 인정을 받아,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로 발전하고, 아름다운 정원에서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며 함께 경치를 구경하는-
쾅쾅쾅!
선주희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문파에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녀는 지금 태극화와 만나고 싶어서 미쳐버린 상황이었다.
주화입마라는 말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선주희는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태극화의 본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몸이 천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언니...하아."
성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동경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일 뿐이다. 어찌 여인이 여인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으응...."
...분명 그럴 것이다. 선주희는 스스로 몇 번이고 다짐했으나, 그로 인한 마음의 병이 도지는 건 본인도 견딜 수 없었다.
인정하기에는 매화검수로서 쌓아온 지금까지의 선주희가 무너질까 봐 무서웠다. 문파에 민폐를 끼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행여나 태극화가 자신을 상대로 경멸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 어...마음은 고마운데 여자끼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으흑...!"
459번째 차였다. 뇌내 망상에서만 벌써 수백 번 넘게 차인 선주희는 베개를 입에 물고 슬픔을 참아냈다. 태극화를 만나려면 병을 이겨내고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데, 마음의 병이 깊어 좀처럼 일어나질 못했다.
똑똑똑.
"주희 있느냐."
"...예, 장문인."
선주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인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않는 장문인은 문밖에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당파에서 손님이 오셨다. 지금 매화검수들과 친선 비무를 펼치고 싶다고 하셔서, 우양이와 청하가 상대를 하는 중이다. 너도 같이하겠느냐?"
"무당파에서요? 뭐 장로분이라도 오신 건가요?"
"...놀라지 말고 들어라. 지금 비무장에는 네가 그토록 만나기를 바라던 사람이 왔으니."
"......네?"
선주희는 순간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나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봐도 장문인은 이런 쪽으로 장난을 친다거나, 말을 잘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너는 진정으로 네 스승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약 열흘 전, 중매가 내게 부탁하여 편지를 보냈다. 혹시 화산으로 한 번 들러줄 수 있냐고. ...어젯밤에 화산에 도착했더구나."
"아, 아...!"
선주희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그걸 왜 말씀 안 해주셨어요?!"
"...편지를 받자마자 올라왔고, 또 미리 얘기했으면 네가 화산을 떠나 마중 나갔을 거 아니냐."
"그, 그렇기는 하지만!"
우당탕. 선주희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에 울상을 지으며, 장문인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어디에 계셔요?!"
"매화검수 전용 비무장에 있다."
벌컥! 선주희는 문을 열어젖히고 비무장을 향해 달렸다. 헝클어진 소복이나 머리칼을 정돈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저 태극화가 왔다는 소식에, 태극매화로서 멀리서 얼굴을 봐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녀를 지배했다.
챙, 채쟁!
비무장에 칼 소리가 들린다. 이미 비무는 시작된 듯,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비무장에서 울려 퍼졌다.
누구랑 비무를 펼치고 있을까. 자우양? 아니면 자청하?
"와...."
둘 다였다. 태극화는 검 한 자루만 들고 가만히 자리에 선 채, 두 개의 검을 각각 어검술로 휘두르며 화산의 두 후계자를 동시에 상대했다.
"저게...태극혜검...!"
이전에도 봤지만, 이전보다 훨씬 세련되고 아름다워 보였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매화꽃 사이에서 흑백으로 나뉜 태극화가 각각 검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 * *
화산의 검은 난검(亂劍)이다.
나뭇잎을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있듯이, 무수히 많은 허초를 뿌리고 그사이에 진짜를 넣어 적을 베는 조잡한 기술이다.
여기까지가 소위 '허세'가 들어간 화산파 무공에 대한 마교인들의 악평.
- 그냥 죽일 거면 냅다 찌르면 되지 뭐하러 여기저기 헛손질을 하는지 모르겠다.
무공으로 상대를 이기는 것에는 상대의 눈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검격을 먹여 상대에게 검을 맞추는 것이 목표이다.
- 좇질 할 때 구멍에 안 끼우고 주변에 미끄러지듯 쑤시는 거랑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 하하!
화산의 검 또한 마찬가지나, 화산의 검은 검을 찔러넣은 과정이 너무 길다.
독고구검이 천하제일을 차지한 배경이 무엇인가?
실전에 특화되어 있으면서, 적의 약점을 강제로 만들어 베고 찌른다는 아주 간결한 과정 덕분이었다. 상대의 눈을 속이기 위해 상하상상하좌우상과 같은 식으로 찌르는 시늉을 하며, 실제 찌르기는 그중에 하나밖에 없는 행위는 본인의 힘만 떨어뜨릴 뿐이다.
그게 보통 일류, 또는 절정에 이른 화산파 검사들의 약점이다.
하지만 초절정, 화경에 이르면 어떻게 될까?
- 씨발, 허초인 줄 알았는데....
여기서부터는 아무리 화산에 악연이 있는 자라고 한들 난검이라고 매도하지 못할 것이다.
초절정을 넘어선 화산의 검은 그때에서야 진정한 환검(幻劒)이 된다.
무엇이 진짜인지 모르고, 무엇이 가짜인지 모르게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랑비에 옷이 젖듯 매화향에 젖는 것이 화산의 검이다.
그리고.
그 힘이 화경, 현경에 이르는 순간.
화산의 검은 환검을 넘어, 환검을 현실로 만드는 힘을 가지게 된다.
카강!
은홍검에 실은 검강에 불꽃이 튀었다. 허상인 줄 알았던 검은 어느새 실체를 가지고 내 목을 노렸고, 나는 모든 허상을 검으로 튕겨 내야만 했다.
"껄껄껄, 좋네, 좋아!!"
검선은 아주 신이 나서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허벅지와 어깨를 동시에 노리는 검을 튕겨내기 무섭게, 이번에는 다시 목과 복부를 베려고 하듯 검을 찔렀다.
검로를 차단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쪽에서 먼저 검의 흐름을 끊으려고 들어간 순간, 허상을 찌르며 상대에게 공격을 허용하게 된다.
"막기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네!"
"유능제강이다, 이 늙은 도사놈!"
나는 크게 원을 그리며 비연검을 튕겨냈다. 은빛 검신과 자색 검신이 서로 크게 부딪혀 검강이 튀었고, 나는 뒤로 물러나며 검으로 계속 원을 그렸다.
"흐허허! 태극혜검! 설마 등선하기 전에 태극혜검을 상대할 수 있다니, 이런 천운이 있나!"
검선은 아이처럼 기뻐하며 검을 찔렀다. 검 끝에서 풍겨오는 매화향에 코가 마비될 것만 같았다.
'검 하나로는 힘들다!'
태극검후의 태극혜검은 네 자루의 검을 동시에 펼치는 것을 근간으로 한다. 아무리 은홍검이 절세의 보검이라고 한들, 한 자루로는 검후의 무공을 모두 드러내는 게 불가능하다.
"잘 버티는구려! 하지만 언제까지 불안정한 힘으로 버틸 수 있을지?!"
"시끄럽소! 칼침이나 놓고 얘기하시지!"
나는 아직 상처가 없다. 이미 검선은 수백 번의 환검으로 나를 공격했지만, 나는 모든 공격을 검 한 자루로 막아냈다.
태극혜검이 어검술에 특화되어있다고 한들, 근간은 손으로 펼치는 검법이다. 당연히 그중에는 한 손으로 펼치는 초식도 있다.
"나를 죽이려고 든다면, 공격은 결코 성공할 수 없소!"
그리고, 검후의 검은 살검을 받아내는데 특화되어있다. 검후의 태극혜검은 독고구검과 마찬가지로 무당파를 이끌기 위한 무공인 동시에, 혈겁에서 살아남기 위해 단련되고 개량된 무공이다.
즉, 상대의 살검을 막는 데는 태극혜검만한 검이 없다.
"하아, 젠장. 이십사수매화검법은 제자들이나 배우는 무공인 줄 알았는데."
"하하.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소? 상승의 무인이 쓰는 초식이 곧 상승의 무공이지."
"맞는 말인데 왜 듣기 싫지? 젠장."
나는 기수식을 바꿨다. 검후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천상용제검.
비어있는 손에 검강이 뻗어 나와, 은홍검과 똑같은 형태로 맺혔다.
"쌍검! 한 때 검존이 쌍검으로 천하를 주유했었지. 이번에는 그의 무공인가?"
"미안하지만 검존이 아니라 검제라고 하지. 이름하야, 용제검!"
나는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렸다. 용제검은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찍어누르는 패검(覇劍)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환검에게서 우위를 점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카----앙!!
은홍검을 횡으로, 검강을 종으로. 어지럽게 피어오르는 모든 매화를 일검에 그어버리며 파괴한다. 아예 허초를 펼치지 못하게, 압도적인 힘으로 검로를 그리지 못하도록 공간을 통째로 베어버린다.
"허허허! 대단하군! 한 명의 몸에 몇 개의 무공이 들어있는지 모르겠구려! 허나!"
매화향이 순간, 사라졌다. 나는 검을 좌우로 늘어뜨려 제자리에서 몸을 빙글 돌렸다.
"쌍룡승천!"
검에 깃든 두 마리의 와룡이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다. 검기의 폭풍에 어느새 하늘로 높이 뛰어오른 검선의 몸에는 비연검과 마찬가지로 자색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썩을."
자하신공.
무당파의 태극신공과 쌍벽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화산파 최강의 내공심법이 검선의 몸에 깃들었다.
"하하하! 강하군!"
검선은 어깨 너머로 넘기며, 검기의 폭풍을 향해 검을 겨눴다. 자하신공 특유의 기운이 번들거리는 눈을 반짝이며, 그는 천상용제검의 승천을 모두 눈으로 읽어냈다.
"좋군, 좋아!!"
낙매성우(落梅成雨).
비연검이 비처럼 쏟아지며, 검끝에서 매화가 폭발했다. 빛처럼 빠르게, 비처럼 쏟아붓는 검선의 검은 하늘로 승천하려는 용을 위에서 찍어눌렀다.
검제의 힘을 극성으로 일으켰으나, 검선의 힘은 더 강했다. 태양을 등지고 날아올라 자하신공까지 펼친 검선의 이십사수매화검은 화산의 그 어떤 초식보다도 강력했다.
"강하구려. 이토록 강대한 기운의 검은 본 적이 없소."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 검선은 여전히 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그대와 싸우는 건, 마치 천하 모든 검객과 싸우는 것 같구려!"
"아주 좋아 죽는군."
"당연히 좋지! 이대로 싸우다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그대도 일부러 나를 상대로 이것저것 '시험'해보고 있지 않은가!"
들켰다. 나는 절로 짜증이 일었다.
"이래서 선인이라는 놈들은 싫어."
"흐하하. 선인이라니? 나는 별호가 그저 검선이었을 뿐. 그냥 속세의 일에 관심이 없을 뿐이오. 온 천하, 세계가 피로 물드는 일이 일어난다면 모를까."
"......."
나는 기수식을 바꿨다. 은홍검은 변화무쌍한 내 검기에 다행히 정확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검이오? 점창? 아니면 종남? 혹시 검마의 검도 가능하오?"
"이쯤 되면 내 정체가 궁금할 때 아닌가?"
"하하하! 말해주지도 않을 건데 궁금해야 할 이유는 없지! 그런 것보다 그대와 검으로 나누는 대화가 더 중요한 것을!"
"젠장. 그거 더럽게 짜증 나는군."
차라리 정체를 궁금해해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면 약점이라도 생길 텐데, 검선은 오직 검에 미쳐 검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검마는 너무 약하고, 빙백신검으로 응답하지."
"오오오...!! 대단하군!"
쩌적, 쩍.
샘이 얼어붙고, 매화의 꽃잎 또한 얼어붙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검신에 비친 내 머리칼은 하얗게 새어있었다.
"어떤 검을 사용하든 소용 없소. 왜냐? 천하제일은 아닐지 몰라도... 천하제일검은 화산이거든."
"화산파 놈들은 하나같이 광오하다니까. 중원의 검법이 얼마나 많은데, 화산이 지존인 줄 알고 말이야."
"그게 화산이지. 그렇다면 증명해보시오. 화산을 뛰어넘는 검이 있다는 걸. 증명하지 못하면 화산이 천하제일검이오."
"아니지, 아니야."
철컥.
나는 다시 검을 겨눴다.
"천하제일이 사용하는 검이 곧 천하제일검이다."
[작품후기]
이하는 일러잡담.
시아 눈이 더 깊어졌습니다.
시아 허벅지가 더 탱글탱글해졌습니다.
참고로 일러 장면은 하고 나서 난 뒤에 옷만 걸치고 나간 장면이랍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