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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
아침이 밝았다.
나는 사공희 스승을 모시는 제자로서, 그녀의 뒤를 보좌하며 화산파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 참여했다.
"먼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소, 태극화."
사공희를 맞이한 자는 다름 아닌 화산파의 현 장문인, 자하검(紫霞劍) 양기백이었다.
'초절정 고수!'
중년인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자하신공은 기세가 상당히 매서웠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멸문.
미래에는 혈강시에 의해 너무나도 쉽게 쓰러지는 자들이었다. 아무리 설중매나 선주희, 매화진검 등이 막으려 했어도 그들은 혈강시의 압도적인 힘앞에 강제로 봉문당했다.
멸문당했다.
'무당파에 태극검후가 태극혜검을 찾아와서 끊어지던 숨을 붙여준 것에 반해, 화산파는 그러지 않았지.'
먼 훗날.
혈겁이 일어나던 때에 화산파에는 불세출의 기재가 나오게 된다. 그는 화산파의 다른 어떤 제자도 달성하지 못한 두 무공을 극성까지 익혀 화경의 고수가 되었다.
육합신검(六合神劍).
그리고 무극태을검(無極太乙劍).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알 법한 화산의 두 무공을 극성까지 익힌 고수가 화산파를 지키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가 화산파를 멸문시킨 혈교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소개가 늦었소. 이쪽은 나의 제자 자우양, 그리고 이쪽은 내 사제인 자청하요."
"반갑습니다, 태극화님."
"......."
인자한 미소로 반갑게 인사하는 청년과 척 봐도 인간성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 전자가 장문인의 직전 제자 '자우양'이고, 후자는 장문인의 사제-전대 장문인이 늘그막에 들인 제자인 '자청하'다.
둘 다 훤칠하고 미모가 빼어나, 뭇 여러 섬서의 여인들이 결혼하고 싶다고 줄을 섰다는 풍문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구나 싶기는 했다.
'나보다는 못하지만.'
둘은 아닌 척 자신의 얼굴을 뽐내고 있었고, 사공희는 적당한 말로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상공, 저랑 비슷한 것 같은데요? 빨리 비무를 해보고 싶어요.]
자신과 비슷한-실은 조금은 낮은-무공 수위의 상대를 만난 것에 기뻐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둘은 사공희가 자신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에 은근히 기뻐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둘 다 절정의 고수.'
구룡쟁패에 등판했다면, 대진표가 좋았다면 둘 다 구룡에 이름을 올렸을 고수였다.
"어머, 정말요?"
"네. 제 칠절매화검을 보시면, 태극화께서도 화산의 검이 가진 풍류에 빠지게 되실 겁니다."
"...본인의 검법 또한 지지 않소."
내가 눈으로만 대충 봐도 워낙에 경지가 엇비슷하여, 확실히 서로 양패구상이 나는 바람에 용봉지회에 참가하지 못한 게 당연히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 둘의 악연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졌구나.'
현대 장문인의 제자와 전대 장문인의 제자.
나이로 치면 자우양 쪽이 더 많고, 배분으로 치면 자청하 쪽이 더 높다. 악연이 생기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둘의 관계는 미래에까지 이어져 서로의 심장에 검을 찌르는 결과로 끝나고 말았다.
'근데 남정네 놈들 사이의 질투에 신경 쓸 건 없고.'
둘이 지지고 볶고 둘 중 하나가 선주희와 결혼을 하든 말든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한쪽이 여자라면 내가 관심이 조금 생길지도 모르지만 한쪽이 혈교의 검사라고 한들, 양물 달린 사내놈이라면 있던 관심도 사라지기 마련.
'내 관심은 선주희 처녀 뿐이다.'
어차피 장문인이 되지 못한 놈은 열등감에 이기지 못해 혈교의 무사가 될 것이며, 자신이 취하지 못한 선주희와 장문인 자리를 빼앗으려고 발악을 하게 되리라.
그게 이번 생에는 자우양이 될지, 아니면 자청하가 될지.
어느 쪽이든 선주희의 처녀는 내가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좀만 더 욕심내면 아예 처녀뿐만 아니라 선주희를 내가 가지는 길도 있지.'
무공의 수위는 다른 이들에 비해 약하지만 선주희는 아이를 기르는 분야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녀가 가르친 아이들은 모두 성인에 이른 시점에 평균적으로 일류 고수가 되었고, 이미 장성한 무인들도 선주희의 가르침으로 절정, 초절정에 이르렀다.
화산으로서는 아쉽게도 그들 모두 선주희를 넘어서지 못했지만, 처음 화산에 진입했을 때 진심으로 놀랐다.
- 씨발, 여기가 소림사도 아니고 백팔매화검수는 무슨 개짓거리야!!
절정의 매화검수 108명이 뛰쳐나오는 바람에 혈교의 첫 공세가 잠시 주춤했을 정도.
감히 내가 확신하건대, 선주희가 가르치는 방면에서는 내 스승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으리라.
다만.
탁탁탁탁.
나는 간밤에 보고만 선주희의 실체에 오한이 들었다.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기억 속에는 여인이 이불속에서 사공희의 별호를 부르며 손장난을 치던-
"제자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아."
나는 내 손을 붙잡는 사공희의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호호, 제자님이 이 스승을 두고 다른 생각이라니...."
사공희는 은근한 눈으로 앞의 빈자리를 눈짓했다. 나는 사공희가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매화검수로 이름난 분은 세 분인데, 두 분밖에 안 계셔서 한 분은 누굴까 기억을 더듬고 있었습니다."
"크흠. 그 아이는 지금 몸이 매우 아파서 요양 중일세."
아프긴 아플 거다. 주로 마음이.
'선주희가 나왔으면 했는데 어쩔 수 없군.'
그녀가 나왔다면 처녀를 가질 준비를 하는데, 유감스럽게 지금 자리에 나오지 않았으니 하는 수 없다.
'그럼 온 김에 선주희 처녀 대신 다른 것부터 챙기는 수밖에.'
나는 사공희에게 신호를 보냈다. 사공희는 내 신호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천천히 열었다.
"혹시 저를 찾는다는 매화검수가 혹시...?"
"그렇소. 부끄럽소만...선주희. 그 아이가 그대를 보고 싶다고 하다가 마음에 병이 난 아이오."
자하검은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이런 일로 태극화를 부른 것도 그에게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리라.
"그렇군요...알겠습니다.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말씀하시오."
사공희는 두 매화검수를 가리켰다.
"두 분의 검술이 출중하다고 들었습니다. 모처럼 화산까지 온 만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죠? 어때요?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사공희는 은근한 눈빛으로 자신의 검을 가리켰다.
"비무 한 번, 어떠신가요?"
두 매화검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사공희가 두 매화검수와 비무를 하러 간 사이.
나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따로 객실로 돌아왔다. 물론 당연하게도 혼자서 움직이기 위한 술수이며, 나는 화산파의 구조를 파악하여 잽싸게 화산파 곳곳으로 숨어들었다.
'적마가 내가 된다.'
나는 지금부터 적마이며, 그림자와 하나가 된다. 암살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황궁에서 황제의 목을 베어가듯 은밀하게 움직일 기세로 그림자 속을 움직였다.
목표는 화산파의 보검을 훔치는 것.
'은홍검(銀紅劍)'
무당파에 자보검이 있다면, 화산파에는 은홍검이 있다. 훗날 화산파 장문인이 쓰던 보검이지만, 지금은 아무도 주인이 없는 평범한 보검일 뿐이다.
'화산파가 습격당하기 전에 발견되었지.'
은홍검은 훗날 혈겁이 일어날 때 나타났던 검이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냐 하면, 혈교주가 은홍검에 다소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말하지 못한다! 차라리 죽여라! 설령 나를 혈강시로 범한다 해도, 은홍검의 출처는 말할 수 없다!
혈교주는 혈강시로 선주희를 범하면서까지 은홍검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했다. 처음에는 억지로 범해져도 견뎌냈던 선주희도 결국 혈교주의 협박에 굴복하고 말았다.
- 네가 순순히 말하지 않으면 네 남편과 제자들을 혈녀들에게 돌려버리겠다. 혈마십이월에게 정기가 빨려 죽은 네 화산파 무인들의 시체가 보고 싶지 않다면 자백하라.
- 부인...!!
- 사부님...!!!
선주희는 남편과 제자들의 목숨이 걸리자 그만 굴복하고 말았다. 자신의 육체가 유린당하는 걸 참았던 그녀도 가족을 건드리는 것에는 견딜 수 없었다.
- 은홍검은....
혈강시는 선주희를 범했고, 혈교주는 은홍검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혈교가 기습을 하기 직전, 선주희는 꿈속에서 어떤 도사의 부름을 받고 검을 손에 넣었다고 했다. 왠지 모를 기운에 선주희는 꿈속의 절벽을 찾아다녔고, 화산의 동굴에서 보검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 아아, 그 또한 기연이로구나. 알겠다. 선주희만 남고 모조리 다 꺼져라.
- 혈교주! 놈들은 살려두면 반드시 복수하러 올 겁니다!
- 닥쳐라. 복수하러 오면 네가 다 죽여버리든가.
혈교주는 은홍검에 대한 정보를 대가로 선주희를 제외한 모든 무사를 풀어줬다.
평소 백도 무림의 운명력-폭포에 떨어지면 살아남는다거나, 살려주면 꼭 기연을 얻고 강해져서 돌아온다거나, 약해진 문파를 습격하면 꼭 감당하기 곤란한 은거기인이 튀어나온다거나 하는 법칙-을 혐오하던 혈교주 답지 않게, 혈교주는 간혹 자신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은홍검이 대표적인 예였다.
혈교주는 선주희를 데리고 은홍검을 얻었다는 곳까지 직접 산을 오른 다음, 우수에 젖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은홍검 뿐만 아니라 그런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은홍검도 자보검이랑 와룡봉추검에 준하는 검이라 이거지.'
화산에 온 기념으로, 나는 은홍검을 챙겨갈 것이다. 화산파에서 발견된 검이라고는 해도 그냥 좋은 보검일 뿐이며, 태극신공을 운용하여 검을 휘두르면 펄펄 날아다닐 것이다.
자보, 와룡, 봉추.
사공희에게는 마지막 한 자루의 검이 더 필요하다.
'안 그래도 무슨 검으로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 됐지.'
만약 화산에서 사공희를 찾지 않았다면 다른 검을 찾으러 갔을 텐데, 하필 화산에서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우리를 불렀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리라.
'어차피 여기 있어 봐야 십몇 년은 그냥 썩을 검, 내가 챙겨도 아무도 뭐라고 못 해.'
어쩌면, 은홍검을 사용하는 사공희를 보고 혈교주가 나와 우리를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내가 혈교주가 바라는 것을 제공해준다면, 분명 혈교주도 혈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여기는 변한 게 없군."
생각을 하는 사이, 나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깎아지른 정상 위에 우뚝 솟아오른 넓은 봉오리. 마치 진짜 화산(火山)의 분화구처럼 움푹 파인 공간에는 수 백 년도 더 되어 보이는 낡은 석재 건물 하나가 샘에 둘러싸여 있었다.
'여기서 선주희가 월녀가 될 뻔했지.'
제단의 위에는 쌍고검 때와 마찬가지로 검 한 자루가 꽂혀있었다. 검날은 은빛에 손잡이 부분이 매화처럼 짙은 홍색인 직검은 은홍검이 분명했다.
미래, 검이 뽑힌 은홍검의 제단에서 선주희는 죽었다.
혈교주는 선주희를 혈녀이자 월녀로 만들고 싶어 했지만, 선주희는 끝까지 혈교주의 것이 되는 걸 거부했다. 결국 선주희는 혈강시에 의해 죽었다.
'육체적으로는 좋아 죽으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의지가 매력적이었던 여자야.'
무공이 화경이었다면, 거기에 채음보양을 하기에 적합한 여인이었다면 안휘를 떠날 때 화산을 선택지에 넣었을 것이다.
'인연이 생기면 그때 챙기고, 지금은 은홍검이랑 처녀만 가져가자.'
저벅, 저벅.
나는 제단을 앞으로 쭉 나아가 은홍검에 손을 뻗으려 했-
"참으로 신기하오. 육체는 아직 어린데, 정신은 이미 완성되었다. 심지어 내공은 벌써 삼갑자를 넘었다?"
"......!!"
등 뒤에서 짜릿하게 울리는 검기에 나는 역체변용술을 해제했다.
"내가 이래서 백도, 그중에서도 구파일방, 그중에서도 오대 문파가 정말 싫소."
"허어,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소?"
"가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천하십대고수 뺨 때리는 미친놈들이 튀어나오거든."
"크허허허!!"
내 말에 상대, 노인은 껄껄 웃었다. 어찌나 웃음이 큰지 산이 다 흔들리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렇지! 동감하는 바이오! 반로환동도 하지 않고도 그 경지에 이른 자답게, 세계의 이치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구려!"
세계.
천하가 아닌 '세계'.
'아는 놈'이다.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소?"
"원래라면 먼저 이름을 밝히는 게 맞지만, 좋소이다."
인자한 얼굴의 백발노인은 내게 포권을 갖췄다. 그의 허리춤에는 연보라색의 검 한 자루가 걸려있었다.
"본인은 한때 적성자(赤成子)라고 불렸던 자요."
"...씨발."
욕지기가 절로 나온다. 동시에 한숨이 나온다.
"검선(劍仙)을 진짜로 볼 줄은 몰랐는데."
훗날, 이미 등선하여 혈겁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자.
하지만 과거 시점인 지금은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는 자.
너무나도 옛날의 존재라 내가 천하 삼십대 고수를 꼽으며 아예 제외해버린 몇몇 '예외'적 존재.
"허허, 120년 전의 별호인데 어찌 알고 있을까."
"화산제일검, 한때 천하제일검이었던 자의 역사를 알고 있으니."
내 시선은 절로 적성자의 검으로 돌아갔다. 그가 찬 검이 바로 훗날, 파천신검 독고연이 한 번 사용하여 혈강시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검이었으니까. 한 번 쓰고 망가져서 다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게 비연검(飛燕劍)이오?"
"비연검까지 알고 있다니, 혹시 환생이라도 하셨소? 워낙에 많이 '섞여 있어서' 근본을 찾을 수가 없구려."
환생이 아니고 회귀라는 것을 제외하면, 그는 거의 내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봤다.
"그래서 아직 누군지 듣지 못한 것 같소만."
"비천색마(飛天色魔)."
내 말에 검선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눈은 나를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로웠다.
"...그게 그대의 본질은 아니지 않소?"
"내가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면, 그게 곧 본질이지."
철컥.
나는 은홍검을 뽑아 들었다. 검은 꽂혀있기만 할 뿐 특별히 진기를 불어넣어야 한다거나 하는 족쇄가 없었다.
내 앞에 있는 검선이 바로 은홍검을 가져갈 자격이며, 은홍검의 현 주인이니까.
"그냥 줄 생각은 없을 테니, 거 한 판 시원하게 붙어봅시다."
"껄껄껄!"
검선은 비연검을 움켜쥐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본인과 비슷한 자를 상대하는 터라, 양해해주시오."
"무엇을?"
"나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만 두근거려서, 손속에 사정을 둘 수 없음을."
화산, 이름 없는 봉오리 정상.
"비무, 어떠시오?"
날 리 없는 매화향이, 물씬 코를 찔렀다.
[작품후기]
은거기인 : 아무런 예고나 복선도 없이 나타나 주인공에게 도움이나 시련을 주는 자들을 일컫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