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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제자
무당파는 예고도 없이 찾아온 손님 때문에 조금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불청객을 냉대할 수는 없었다. 위급 상황에 찾아온 사람을 불청객이라고 쫓아낸다면, 앞으로 무당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몹시 안 좋아질 테니까.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함께 협행을 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장문인이 되신 걸 보니 제가 다 감개무량합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장문인."
"허허, 설 형. 오랜만에 보았는데 너무 냉담한 거 아니오? 우리 사이에."
"...제가 어찌 장문인께 무례를 저지르겠습니까?"
현철 도사는 눈앞의 화산파 장로에게 으스대며 속으로 웃었다.
불청객은 다름 아닌 화산파의 장로이며, 그는 젊은 시절 현철 도사와 교류가 깊었던 고수였다. 무공의 수위도 엇비슷하여, 세간에서 주로 검술로 비교를 당하기 일쑤였다.
- 무당파의 현철? 에이, 아무리 그래도 화산파의 칠매룡보다 못하지. 그는 구룡에 들지도 못했지 않은가?
한때, 칠매룡(七梅龍)이라고도 불렸던 사내. 이제는 화산파의 장로가 된 사내.
젊었을 때는 숱하게 비교당하며 '하위호환'이라는 굴욕을 당했으나, 불혹의 나이를 넘긴 현시점에 이르러서는 사회적 지위나 무공 모두 자신보다 한 끗발 아래에 놓이게 된 사내.
"하하. 어찌 됐든 만나서 반갑소, 난화검(亂花劍) 설중매 장로."
과거에는 현철 도사가 난화검을 사형처럼 깍듯이 모셨다. 하지만 장문인과 문파 장로라는 자리가 둘의 지위를 역전시켰다.
"갑자기 찾아온 무례를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문인."
사석이라면 모를까, 공석인 와중에 그냥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하물며 무당파의 한복판에서, 다른 무당파의 장로들을 옆에 두고 '부탁'을 하러 온 자가 무례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
현타 도사는 현철 도사가 으스대는 게 영 탐탁지 않았지만, 그래도 무당파의 장문인이 화산파의 장로에게 저자세로 나가는 것도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는 차치하고, 배분이 비슷한 이상, 둘의 위아래를 가르는 건 지위나 무공이었다. 둘의 무공을 따져도 현철 도사가 난화검보다 강했다.
"태극혜검을 익히셨다고 들었습니다. 실전된 옛 무공이 돌아오다니, 무당의 장래가 참으로 밝습니다."
"하하. 천운이었지요."
현철 도사의 콧대는 높아져 하늘을 찔렀다. 그게 영 아니꼬와, 결국 현타 도사가 책상을 손으로 긁으며 시선을 모았다.
"화산파의 장로께서는 어쩐 일로 태극화를 찾으러 온 것이오?"
"...현타!"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가 버린 현타 도사에 현철 도사는 버럭 성을 냈지만, 무당파의 장로들은 현타 도사에 편승하여 장문인의 노성을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유를 알고 싶소. 색마가 날뛰는 이 어지러운 시국에 굳이 태극화를 화산까지 초청한 이유가. 장문인만 알고 우리에게는 도저히 얘기해주지 않으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나."
현타 도사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 편지는 장문인에게 갔을지언정, 편지를 읽은 이가 현타 도사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짬을 때려-아니, 부탁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화산 최고 검수인 난화검선배께서 무당까지 오신 이유가 있을 것 아니오?"
"...장문인으로부터 전해 듣지 않았소?"
"전혀."
"...크흠."
현철 도사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난화검은 장문인과 장로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금방 눈치챘고, 장문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용이 화산에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오나, 장로분들도 듣지 않으면 수긍하지 못할 테니 말하겠습니다. 본 문파의 매화검수 한 명이 병을 앓아누웠소. 그래서 태극화를 찾고자 하는 것이오."
"태극화가 의원도 아니거늘 어찌?"
"그 아이는 현재 중병으로 의원에 누워있소.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열병에 걸렸지. 그 아이의 병은 상사병이오."
"음...."
장로들은 저마다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는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어이없어하기도 했다.
"도저히 일어나지 못할 정도라, 부득이 본 장로가 직접 무당파까지 찾아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이오. 만약 색마가 태극화를 건드리는 일이 있다면, 이 난화검이 목숨을 바쳐 태극화를 피신시키리다."
"음...."
"만약 보증이 필요하다고 하면, 내 검과 매화단을-"
"태극화는 지금 이곳에 없소."
현타 도사의 말에 여럿의 표정이 굳었다. 특히 난화검의 표정이 감출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소리요?"
"오늘 아침, 본 장로가 그 아이를 찾으러 갔더니 편지 하나가 덜렁 놓여 있더군."
현타 도사는 정갈하게 쓰여진 편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 새로 들인 제자 아이와 함께 화산을 다녀오겠습니다. 여럿이 있으면 소란이 더 가중될 듯하오니, 둘이서 조용히 다녀오겠습니다."
"그, 그런!"
현철 도사가 놀라 책상을 손으로 치며 일어났다. 현타 도사는 담담히 편지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그 아이는 화산으로 출발했습니다. 길이 엇갈리셨소, 난화검."
* * *
객잔은 언제나처럼 사람들로 넘쳐났다. 점소이, 화앵은 여느 때보다 더 많은 손님들에 정신이 없었다.
“흐하하, 어디 오리가 돌아다니는 것 같구만!”
“꺅! 아저씨!!”
“흐하하, 그 꼬맹이가 이렇게 크다니!”
화앵은 주변 남자들의 손장난에 눈을 부라렸지만, 그들이 은근히 건넨 엽전에 눈만 흘기며 일에 다시 집중했다.
인근 마을 객잔 중 얼굴로는 자신을 이길 자가 없었기에, 화앵은 자신의 미를 무기로 제법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짤랑짤랑.
입구의 종이 울리며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화앵은 또 어떤 주책맞은 자가 들어왔나 한숨을 내쉬었다가-
“실례합니다.”
정중하고도 예의 바른 소년의 모습에 숨이 턱 막혔다. 인근 산동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미소년의 모습에 화앵은 자리를 안내해야 한다는 것조차 순간 까먹어버렸다.
“두 명 자리 있나요?”
“예, 예. 안쪽에 하나 있어요.”
“아, 다행이네요. 잠시만요.”
소년이 밖으로 나가자, 화앵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하! 앵아, 너 설마 저런 꼬맹이한테 반한 것이냐?!”
“아서라. 네가 그러면 범죄다, 범죄. 크하하!”
“뭐래요. 자기들도 저런 예쁜 여자 보면 눈 돌아갈-”
객잔의 모든 손님이 눈이 돌아갔다. 소년의 손에 이끌려 조심스레 들어온 여인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어우야….”
화앵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자신감 차이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실례합니다.”
구슬처럼 흐르는 목소리의 여인은 소년과 함께 의자에 앉았다. 고작 의자에 앉았을 뿐인데 주변인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객잔을 가득 채웠다.
“주, 주문하시겠어요?”
“네. 스승님, 뭘 드시겠어요?”
소년은 여인에게 ‘스승’이라고 불렀다. 여인은 그 소리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먹고 싶은 거로 하자꾸나.”
“네? 스승님은요?”
“나는 네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단다.”
여인의 참된 마음가짐에 주변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화앵에게 목판을 가리켰다.
“그럼 소면 두 개랑 만두로 주세요.”
단출한 주문. 화앵은 얼굴에 정신이 팔린 자신을 자책하며 둘의 행색을 살폈다.
‘무인!’
상대는 무인이었다. 외모 이전에, 그들이 입고 있는 옷차림은 평범한 여행객의 복장이 아니었다.
애초에 소년이 여인을 상대로 ‘스승님’이라고 부른 것부터가 이상했다. 스승이라고 불린 여인은 허리에 검 세 자루를 차고 있었다.
“주문받았습니다.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실례가 안 된다면 뭔가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여인은 화앵을 붙잡았다. 화앵은 다른 손님들의 눈치를 봤지만, 그들은 화앵에게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대답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형님, 우리 아까 시킨 소면이 아직도 안 나오는데…?”
“좀 닥쳐봐, 이 새끼야.”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화앵의 임무는 여인의 말 상대가 되는 것이었다. 화앵은 식탁 위에 올려진 은자 두 개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저희는 화산파로 가는 중인데요, 매화검수에 대해 알고 싶어서요!”
“아….”
화앵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에 초행길로 보이는 소년에게 여러 경험을 시켜주고 싶어 하는 스승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화산파에 대한 정보는 섬서성의 점소이들에게 필수 교양과도 같은 상식이었다. 섬서를 찾는 무림인들은 열에 아홉은 화산파에 용무가 있으니까.
“지금 매화검수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은 총 세 명이에요. 장문인의 직전제자인 자우양, 난화검의 제자인 선주희, 그리고 전대 장문인이 마지막으로 들인 제자 자청하.”
“그들의 성별은 어떻게 되나요?”
“자우양이 남자, 선주희가 여자, 그리고 자청하가 남자입니다. 셋 다 매화검수로서 젊은 나이에 벌써 일류 고수가 된 검술의 천재랍니다.”
“와! 대단하네요. 그 나이에 일류라니.”
화앵은 소년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르게 영혼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승님이랑 비교하면 어때요?”
“아붕, 그건 그분들에게 실례입니다. 그나저나 조금 궁금하기는 하군요. 용봉지회에는 선주희 양만 참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구룡쟁패에 도전한 화산파의 무인은 둘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아...그게.”
화앵은 쓰게 웃었다.
“자우양과 자청하, 두 명의 매화검수가 화산 대표의 자리를 두고 비무를 펼쳤다가 같이 상처를 입었답니다. 그래서 아쉽게도 다른 제자가 참가했지요.”
“그럼 만약에 둘이 출전했으면 어떻게 됐어요?”
“제가 화산파는 아니지만, 섬서성에 사는 사람이라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화앵은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제일룡은 자우양이나 자청하의 것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손님들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화산파가 위세를 떨치는 영역에서 지내며 화산파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화산파의 두 매화검수가 가진 실력이 뛰어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음...검으로 겨뤄보고 싶긴 하네요. 어떤 분들인지."
"스승님?"
"후훗, 걱정마세요. 제가 질 것 같습니까?"
여인은 허리춤에 단 세 개의 검을 가리켰다. 화앵은 도대체 검을 세 자루나 들고 다니는 여인의 정체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쌍검을 쥐고 검 하나는 입에다가 물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가슴에 끼우기라도 하는 걸까?
"화앵아, 면 식겠다."
"아, 네네!"
화앵은 급히 소면과 만두를 식탁에 놓았다. 두 사제는 조용히 식사한 뒤, 죽엽청 한 병을 구매하여 객잔을 떠났다.
"저런 미인이 있다니, 오늘 횡재했군."
"화앵아, 네가 진 게 아니다. 방금 그 무사님이 너무 아름다우셨던 거야."
"...저런 사람이 있었나?"
화앵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책자를 하나 펼쳤다.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낡은 책자의 겉표지에는 '꽃도감-용봉지회후기'라는 문구가 박혀있었다.
"화앵아, 그걸 봐서 뭐 하게? 거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육봉이나 다음 육봉으로 꼽히는 여인들이 아니니. 지금 색마 피해 다니느라 바쁘지, 어디 이런 곳에 소년 한 명 달고 오겠느냐?"
"그래. 상중, 상하 정도의 얼굴, 하지만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상냥한 마음의 보유자. 여러 개의 검을 다루는 자. 그런 자가 있다면-"
객잔 안의 모두가 표정이 굳었다.
"""...태극화?"""
* * *
"미끼를 던졌으니, 이제 슬슬 화산으로 출발하면 되겠군."
나는 죽엽청을 입에 물고 산길을 걸었다. 사공희는 내 뒤에 서서 아무 말 없이 내 뒤만 졸졸 따라왔다.
"희야, 무슨 생각을 하느냐?"
"상공 생각이요."
"...그건 고마운데, 네 표정이 조금 무섭구나."
누가 색마부인 아니랄까 봐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더욱 색기가 넘쳐흘렀다. 정확히는 나를 잡아먹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그 모습이 상공 어렸을 때였나요?"
"그래. 어떠냐. 태극화 제자 겸 시동으로 충분히 속일 수 있었지? 흐흐."
이미 사정후에게는 공작을 펼쳐놓았다. 사정후는 알아서 '태극화의 제자'를 만들어놓을 것이고, 이걸로 나는 무당파 안에서도 사공희와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너는 내가 이 모습일 때는 나에게 태극검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쓰읍, 하아."
사공희는 자꾸만 나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진정해라. 지금 그게 스승의 모습이냐? 지나가는 관졸들이 너를 잡아가려고 할 거다."
"상공께서 저를 키워서 잡수셨으니, 저도 스승으로서 도리를 다하고자 합니다."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빨리 와다오.'
내가 사공희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빨리 떡밥을 물어버린 놈들이 나타나야만 했다.
"상공, 저희 화산파 들어가기 전에 그 모습으로 한 번만 하면 안 될까요? 네?"
"그건 나중에 돌아가는 길에-"
"멈추시오----!!"
나는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붉은 무복의 무사들을 향해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화산의 선배님들께서는 무슨 일이십니까?"
"소협, 본인은 자우양이라고 하는 화산파의 제자요. 혹시 뒤에 계신 분이...."
"만나서 반갑습니다."
인자하면서도 차가운 듯한 목소리로, 사공희는 내 어깨를 뒤에서 붙잡으며 말했다.
"태극화, 사공희라고 합니다. 이 아이는 제 제자고요."
"아붕입니다."
"제자라.... 하긴, 이미 장로급이시니."
자우양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가, 시원한 미소로 포권을 취했다.
"화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두 분."
짧은 여행 끝에, 우리는 화산에 도착했다.
[작품후기]
아붕!
시아 일러가 90% 완성되어 하는 말인데요, 예전에는 일러를 뽑을 엄두도 못냈는데 요즘은 일러가 완성 되기도 전에 다음 일러 구도부터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게 다 여러분이 재미있게 봐주시고, 또 후원까지 해주신 덕분입니다. 여러분의 후원 쿠폰은 작품을 쓰는 카페인과 일러스트를 위한 자본금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항상 즐겁게 봐주셔서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립니다.
덧) 따로 더 시아 일러를 주문한 게 아니라, 지금 표지로 올라간 시아 일러 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