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림의 여인
녹림!
사파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아무리 좋게 이야기해봐야 무공을 익힌 도적들이다.
관아에서도 골머리를 썩이고 있지만, 관에서는 적극적으로 토벌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워낙 많은 숫자 때문에 관에서 토벌한다고 한들 의미가 없다.
워낙 넓게 퍼져있기 때문에 토벌하러 가도 다른 곳에서 생겨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한 번 토벌했다고 한들, 이후에도 계속 그 지역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관에서는 성과 성을 잇는 주요 도로, 그리고 군사적 거점만 관리했다.
녹림은 관의 사각지대로 숨어들었다. 관에서도 대대적인 토벌을 포기하고, 녹림이 산이나 들에 자신들의 산채를 세워 산의 주인 노릇을 하는 걸 그냥 방치했다.
그 결과, 녹림 72채가 만들어졌다.
워낙 방대하게 펼쳐진 녹림의 무리는 스스로 녹림왕을 뽑고 자신들만의 체계를 이룩하였다. 힘 좀깨나 쓴다 하는 자들이 모두 녹림의 왕을 자처했지만,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녹림왕은 한 명뿐이다.
<태부악군(泰斧岳君)> 방득패!
호랑이보다 더 큰 도끼를 다루는 녹림왕은 '왕'이라는 칭호가 걸맞게 초절정의 고수다. 외공과 내공을 적절히 조화롭게 익힌 그는 백도 무림맹에서 예의주시하는 위험한 존재다.
'여우 같은 곰.'
용봉지회나 이봉결정전과 같은 장소에서는 무림맹주의 눈을 신경 쓰느라 호방한 협객의 모습과 딸을 응원하러 온 팔불출 아버지의 모습을 보였지만, 그건 대외적인 모습을 속이려는 여우 같은 짓에 불과하다.
녹림왕의 호협스러운 모습을 본 이들은 녹림왕이 산의 군주로 군림하는 것을 찬양할 것이다.
정작 뒤에서는 여인을 납치하고 민가를 약탈하기를 우습게 아는 산적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
아는 사람들은 모조리 죽었으니, 녹림왕의 실체는 철저히 장막 뒤에 감춰져 있다.
그리고 그가 한 여인을 납치하여 자식을 낳게 한 두 여자가 바로 지금의 산주봉 방철수, 그리고 내 눈앞에서 대흉근을 꿈틀거리고 있는 방영희다.
장녀가 여우 같은 내공을 이어받았다면, 차녀는 곰 같은 외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나를 감히 신랑으로 들이겠다고 하는 여자는 활기 넘치는 미인의 전형인 산주봉 방철수가 아니라, 활력 가득한 근육 떡대의 전형인 방영희였다.
"상공, 죽일까요?"
뒤에서 사공희는 은은한 살기를 내뿜으며, 마차 안에 놓아둔 검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허락만 하면 자보검과 와룡봉추가 곧장 튀어 올라 녹림의 무인들을 단칼에 베어버릴 기세였다.
"진정해라. 내가 알아서 정리하마."
사공희에게 피를 묻힐 수 없다. 부엌에서 물이 묻는 다거나 양물을 만지다가 정기는 묻을 수 있어도, 언젠가 임신할 여인의 손에 피를 묻게 할 수는 없다.
'녹림은 패야지.'
죽이는 게 가장 깔끔한 해결 방법이 되겠지만, 그러면 복수하겠다면서 길길이 날뛰어 귀찮아진다. 녹림은 그냥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 최선이며, 주먹으로 해결하는 게 가장 적합한 방법이다.
"녹림왕의 딸이라고 했는가? 뒤로 부하들을 수십 명 데려와 놓고 신랑으로 삼겠다고 하는 모양새가 썩 좋지는 않군."
"하하하! 다들 그렇게 얘기하지! 걱정마라! 너는 그냥 침대에 깔려서 좆이나 세우면 그만이니까!"
"......."
이시아가 저 말을 할 때는 뭔가 가슴이 설렜는데, 방영희가 저 말을 하니까 두려움밖에 들지 않는다. 그녀가 기승위로 내 위에 올라탄다면, 그건 성행위가 아니라 남자를 잡아먹기 위한 사냥행위라고 봐도 무방했다.
'뭘로 때려잡지.'
중려신화정으로 전부 머리칼을 태워버릴까, 아니면 빙백신공으로 하루 동안 얼려놓을까. 그도 아니면 상천용제쌍고검을 이용해 전부 팔을 그어버릴까.
'적당한 무공을 꺼내는 것도 일이군.'
머릿속에 너무 많은 무공이 담겨있으니, 그걸 필요할 때 하나씩 꺼내 쓰는 것도 일이다.
'역시 깔끔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지.'
나는 마차에서 몸을 일으켰다. 산적들을 눈앞에 두고 불안해하는 말의 등을 쓰다듬어 진정시킨 뒤, 가볍게 두 팔을 털었다.
'혈교식 해결법.'
헷갈리면 일단 명치부터 때리고 봐라. 전부 입에 게거품을 물게 만들면 분명 정신을 차리고 감히 다시는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용하는 무공은 패왕의 권법.'
미래, 파천신검 독고연과 함께 혈교의 교인들을 두 주먹 하나로 때려잡았던 여인.
단신의 몸으로 장판파처럼 혈교인 수천 명을 협곡에서 막아냈던 권법의 최강자.
벽력신권의 초절정 고수도, 백보신권의 화경 고수도 닿지 못했던 천하제일권.
<맹호패왕권(猛虎覇王拳)>.
'원래 여동생은 언니가 때려잡는 법이지.'
산주봉 방철수-훗날 방윤이라고 바꾼 이름을 떨친 여인.
나는 그녀의 힘을 빌어, 두 주먹과 두 발에 호랑이와도 같은 기운을 실었다. 방영희를 비롯한 산적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느껴진다.
산의 진정한 주인, 산군(山君)을 만난 공포가.
* * *
"......!!"
산주봉, 방철수는 멀리서 느껴진 기이한 기운에 소름이 돋았다.
"왜 그러냐, 철수야."
"...아빠, 방금 그거 느끼지 못했어?"
"방금?"
방철수의 부친, 녹림왕 방득패는 좌우로 허리에 손을 휘감고 있는 두 여인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여자 말고는 모르겠는데?"
딸의 앞에서 딸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인의 술 시중을 받는다? 모두가 그걸 보고 부끄럽지 않냐고 성토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곳은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운 녹림의 산채였다.
"너희는 뭐 느낀 거 없냐?"
"호호호, 없습니다."
"태산 같은 기운이 저희를 희롱하는 것 말고는 모르겠사와요."
분내를 풍기는 두 여인은 대접에 술을 따르며 진하게 웃었다. 방철수는 그들의 입꼬리가 벌벌 떨리는 게 보였지만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약육강식.
어려서부터 녹림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건 자연의 섭리이며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를 주변의 시선에 방철수는 기분이 자꾸만 불편해졌다.
"채주! 나랑 한 판 붙읍시다! 철수 처녀는 내가 가져가겠소!"
얼굴이 붉어진 남자 한 명이 들어와 근육질의 가슴을 두드렸다. 1장 가까이 거리가 벌어져 있음에도 풍겨오는 술 냄새에 방철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크하하! 내 딸을 가져가고 싶거든 먼저 내 딸부터 이기고 와라!"
"...어휴."
방철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옆에 놓아둔 봉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체구만큼 긴 철봉에는 검붉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괜히 육봉이 된 것 같아. 이게 뭐야, 되고 나서 더 귀찮아졌잖아."
"하하! 네가 오죽 예뻐야지. 슬슬 손주도 보고 싶구나, 하하하!"
"오오오, 내가 산주봉을 이기면 가질 수 있는 거요? 히야, 채주를 장인어른으로 부르는 날이 오다니!!"
"크흐흐, 이 개새끼."
방득패는 술을 한 사발 들이키며 낄낄 웃었다.
"태악신공(泰岳神功)이 어디 질 것 같으냐?"
* * *
"흐어, 시원하다."
나는 등허리에 흐르는 짜릿함에 소름이 돋았다. 강력한 힘을 마음껏 발휘하는 게 벌써 몇 달 만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너, 너...도대체 정체가 뭐냐...!"
"천하제일."
퍼억. 나는 바닥에 엎어진 산적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한 일주일 가량은 죽을 만큼 아파서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다.
"깔끔하군!"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오랜만에 무공이 아니라 순수하게 체술로만 몸을 움직인 덕분에, 나는 전신이 개운했다.
맹호패왕권.
초식이나 무공은 모두 배제하고, 내공의 힘을 오직 근력과 체력에 몰아넣어 체술로서 싸우는 권법.
체술이라고 말은 하지만 정해진 초식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상대가 가장 아플 것 같은, 상대를 가장 쉽게 무력화할 방법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것뿐이다.
호랑이가 사슴을 사냥할 때 초식을 사용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아가씨,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는 바닥에 엎어진 산적들을 가리켰다. 마차 안에서 나와 내 무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한 사공희는 맹호패왕권의 기세를 보며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죽은 건 아니죠?"
"예.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그냥 가요.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요."
내 손에. 나는 사공희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구나. 하지만 희야, 저들은 우리를 죽이려고 한 산적들이다. 손속에 사정을 두어서는 안 되느니라."
"...이름을 부르시면."
"걱정마라. 정체를 들킬 일은 없으니."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는 살인멸구가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사공희는 설령 우리를 죽이려고 한 상대여도 살기는 내비쳤지만 진짜로 죽이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네 착한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하지만 저들을 죽여야 우리가 조용히 화산에 다녀올 수 있으니까, 그게 마음에 걸리는 게 아니더냐."
죽이지 않으면 꼬리를 잡힐 일이 없는데, 그렇다고 죽이는 거로 해결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이럴 때 보면 사공희는 천생 백도의 무인이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
"...상공, 저는."
사공희는 내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단호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상공이 저보고 저들을 죽이라고 한다면, 제가 직접 검을 들고 저들을 죽일 것입니다."
"희야."
"저는 상공의 것이며, 상공의 편이니까요. 제게 의견을 물으셔도 제 대답은 언제나 같아요. 제게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제 모든 기준의 영순위는 상공이니까요."
"...네 마음은 알겠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여행 중이지 않느냐. 날씨 화창한 좋은 날에 살겁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구나."
나는 내 검으로서 움직이고자 하는 사공희를 진정시켰다.
"내 의사를 우선시해주는 건 좋지만, 나는 사공희가 검이 아닌 나의 여인으로 있기를 바란다."
"상공...!"
"내가 너에게 검을 가르친 이유는 네가 스스로 몸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한 거지, 남을 죽이라고 검을 가르친 게 아니다. 죽이는 건 내가 하면 돼."
그래서 나는 색협(色俠)이 아닌 색마(色魔)를 선택했다. 다시 태어난 새로운 삶에서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정도를 가리지 않고 잔혹한 손속을 사용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만약 꼭 피를 봐야겠거든, 언젠가 내가 없을 때 네 정조를 노릴 악적의 양물을 잘라버리거라. 그런 놈에게는 목과 심장, 단전과 양물에 칼침을 놓아도 된다. 알겠지?"
"......네, 상공."
사공희는 내 손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산적들을 마음껏 패다 보니, 조금 피가 튄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들은 분명 몸이 회복되면 저희를 쫓아올 거예요."
"섭혼술. 기억을 지우는 건 아니고, 기억을 조작하는 거지. 희야, 태극혜검으로 검을 뽑아라. 그리고 이놈들을 전부 한곳에 모아주겠느냐?"
나는 산적들의 무기를 끌어당겨, 놈들의 옷에 걸치게 한 다음 강제로 바닥을 끌었다. 사공희도 세 검을 이용해 검의 손잡이로 산적들의 멱살을 빙글 돌려 땅바닥에 질질 끌었다.
"다 모았군."
수십 명의 산적이 일렬로 놓여있는 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나는 한 곳에 모인 산적들의 입을 전부 벌려놓은 뒤, 근처에서 주워온 버섯 한 무더기를 잘게 잘라 그들의 입에 밀어 넣었다.
"잘 들어라, 녹림의 개새끼들아."
화륵.
산적들의 입에 삼매진화를 가볍게 튕겼다. 그렇게 강하게 불꽃은 튕기지 않아 혀가 덴 것처럼 따가운 정도만 아플 테지만, 안에 들어간 버섯 조각이 삼매진화에 타오르는 게 더 중요했다.
스멀스멀.
산적들의 입에서 황색의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급하게 주변에서 굴러다니던 버섯치고는 제법 환각성분이 강했다.
"너희들은 검마(劍魔)에게 당한 것이다. 머리는 전부 밀어버려서 햇빛에 번쩍이는 놈이며, 눈이 붉게 번쩍이는 놈에게 당한 것이다. 알겠느냐?"
"""예...."""
섭혼술에 당한 산적들은 힘없이 내 말에 복종했다. 이제 저들은 습격자를 추궁당해도 검마의 모습을 언급할 것이다.
"너희는 부부를 습격한 것이 아니라, 돈 좀 많아 보이는 검객을 습격했다가 호되게 당한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나와 사공희에 대한 것은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이제 증거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상공, 검마는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검마지."
멍청한 놈이든 똑똑한 놈이든, 이미 죽은 검마에게 습격당했다는 것에 혼란스러워하리라. 특히 똑똑한 놈이라면 새로운 검마가 나타났는지 더 혼란스러워할 테고.
그리고 이제 마지막.
"...이걸 어떻게 하지?"
도저히 박기에는 엄두조차 나지 않는 거한, 방영희는 눈을 뜬 채로 바닥에 누워있었다.
내게 배를 얻어맞으며 눈을 부릅뜬 순간 그대로, 그녀는 기절한 채 누워있었다.
"하아, 이제-"
우둑, 우두둑.
"...음?"
[작품후기]
우두둑!
선작 10000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