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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림의 여인
"화산파에서 정식으로 초청을 한 만큼, 꼭 다녀와 주기를 바라오."
무당파의 장문인, 현철 도사는 말을 하면서도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장문인으로서 당당해야 했지만, 그는 당당할 수 없었다.
"끙...."
"......."
옆에서 눈을 부라리는 현타 도사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고, 인피면구를 벗고 온 사공희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는 명백히 자신보다 배분이 낮은 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사형. 화산파의 초청에 따르는 건 좋소.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잠시 다녀올 수 있지. 선물로 매화단을 주겠다는 것에도 혹할 수 있고. 다만."
사정후는 사공희의 얼굴을 가리켰다.
"희를 그들이 직접 데리러 오겠다니. 그게 가능하다고 보시오?"
"무엇이 가능하고 불가능하다는 건가. 태극화를 모시러 오겠다고 화산파의 장로들도 오겠다는데. 화산에 무당의 기세를 보여줄 좋은 기회가 아닌가?"
"그렇지. 그런데 태극화 한 명만 데려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오."
"...뭐가 문제라도 있소?"
현철 도사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현타 도사의 눈치를 봤다.
"보시오. 화산파에서 이번 초청에 보내겠다고 하는 호위대의 규모를."
화산파에서는 태극화 사공희를 모셔가겠다며 대대적으로 호위 무사들을 파견하겠다고 했다. 엄연히 '호위'로 장로급의 절정 고수가 파견되는 만큼, 안전에 최대한 힘을 기울였다.
"'문제라도 있소'?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이 시국에 천하제일 미녀가 움직이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 묻는 것이오? 색마가 돌아다니는 이 시국에!"
사정후는 말을 하면서도 속이 뒤틀려렸지만,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성을 부렸다.
"빙색마인! 독고연을 납치하고! 을가와 팽가의 여인들을 범하고! 연희봉 모용란을 범하겠다고 한 작자가 어언 4개월 동안 감감무소식이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단 말이오!"
"...4개월 정도면 어디 칼침 맞고 죽었지 않겠나?"
사정후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간신히 제정신을 차렸다.
"그놈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오! 빙색마인이 세 번이나 겁탈에 성공한 나머지, 지금 무림 전역은 자신이 빙 색마인 인양 날뛰는 색적(色賊)들이 넘쳐난다 그 말이외다!"
"그러니까 호위를 꾸린다는-"
"만약!!"
사정후는 사자후까지 터뜨리며 으르렁거렸다.
"만약, 태극화가 움직인다는 소식을 듣고 빙색마인이 움직이면 어쩔 것이오! 본인이 노린다고 하던 연희봉이 실종되었으니, 다른 표적을 노릴 수도 있는바!"
"......."
위험을 무릅쓰고 태극화를 화산에 보내느냐, 아니면 혹시나 모를 색마의 위험에 대비하여 보내지 않느냐.
"자, 결정하시오! 태극화의 안전인지, 아니면 고작 매화단 하나 받고 화산에게 거들먹거린다는 명예인지!"
"현타 장로. 말을 삼가시오. 명예 때문이 아니잖소? 죽어가는 청년을 구하기 위한 행위이며-"
"가겠어요."
사공희는 두 무당 최고 배분의 말을 가로막으며 싸움을 중재했다.
"제가 가겠어요. 대신 얼굴 한 번 비추고 오는 게 끝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거예요. 화산에 머무르면서 비무행을 한다거나, 뭔가 다른 행사에 참여한다거나 그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공희는 눈을 가늘게 뜨며 현철 도사를 노려봤다.
태극화라는 이유로 현철 도사는 무당에 최대한 이득이 되도록 사공희를 움직였으나, 사공희는 장문인이라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알겠습니까, 장문인?"
"...알겠네."
배분 상, 사공희는 공식적으로는 현자 돌림보다 한 단계 낮은 항렬이다. 하지만 태극화는 무당파 내에서 여러모로 특별한 존재였고, 항렬과 배분에서 초월한 존재였다.
"더는 저를 이용하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아쉬운 건 무당파지 태극화가 아니다. 사공희의 엄포에 장문인은 침음성을 흘렸다.
"...알겠소. 그러면 화산에 답장을 주리다."
"네. 하지만 호위단은 필요 없어요."
"희야, 그게 무슨...?"
놀라는 사정후를 향해 사공희는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색마에게 걸리지 않게, 조용히 암행으로 다녀올 테니까요."
* * *
"또 둘이 남게 되었네요, 시아 언니."
"그러게."
비천궁의 침대 위, 알몸이 된 독고연은 마찬가지로 알몸의 이시아와 손을 잡고 누워있었다. 둘의 전신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실례하겠어요, 부인 분들."
진사월은 익숙한 손길로 둘의 땀을 닦아냈다. 너무나도 익숙하면서 섬세한 손길에 둘은 진사월에게 알몸을 맡겼다.
"진 가주님, 엄청 익숙하신 것 같아요."
"희가 상공을 모시고 나면 제가 자주 몸단장을 해줬으니까요."
진사월은 사공희와 비천색마의 일화를 간단히 읊었다. 이시아와 독고연은 진사월이 밝히는 과거사에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희 언니 가슴이 예전에는 지금보다 작았다고요?"
"네. 예전도 물론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훨씬 더 커졌죠."
"...도대체 비결이 뭐지? 우리보다 나이도 많은데."
이시아는 손톱을 깨물었고, 독고연은 우울한 듯 고개를 떨궜다. 유감스럽게도 이시아와 독고연의 넷을 합쳐도 사공희의 하나에 비빌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음...비결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진사월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상공께서 1년 동안 매일매일 커지라고 직접 만져주셨답니다."
""......!!""
* * *
달그락, 달그락.
말은 천천히 흙길을 나아가고, 나는 마차를 몰며 갓을 들어 올렸다. 태양 빛은 제법 강했지만, 구름이 많고 바람이 선선하여 날씨가 산책하기에는 정말 좋았다.
"둘이서 이렇게 여행하는 건 처음이로군."
"그러게요. 이렇게 원래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도 처음이고요."
마차 뒤에 앉은 사공희는 인피면구를 벗고 바람을 만끽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면사포를 쓰기는 했지만, 피부에 덧씌워놓은 인피면구보다는 훨씬 편할 것이다.
"하남성에 간 것 말고는 무당산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상공."
"무엇이 말이냐?"
"제게 천하를 보여주셔서."
사공희는 이시아처럼 중원 곳곳을 돌아다니지 않았다. 독고연도 마찬가지지만, 사공희도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무르고 다른 곳은 자주 돌아다녀본 경험은 없었다.
"섬서는 처음이지?"
"네. 무림맹으로 갈 때는 바로 북쪽으로 올라갔으니까요."
화산파는 무당파가 있는 호북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가는 길이 2/3가량은 언덕 하나 없는 평야가 이어지지만, 화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제법 산세가 험했다.
"굳이 낙양으로 돌아갈 것까지는 없을 것 같아요. 시아랑 연이한테 미안하지 않게, 빨리 다녀와요."
사공희는 혼자서 나를 독점한다는 것이 다소 미안한지, 화산파까지 직선으로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나 또한 아무리 천가장이라고 해도 둘만 호북에 두고 오는 건 다소 불안해서 빨리 돌아가고 싶기는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우리의 정체를 몰라야 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놈들이 '찾았다, 태극화'와 같은 말을 하는 일이 없어야 했다.
"응? 어디서 오시는 길인가?"
"호북에서 서안으로 가는 길이오. 능선을 따라 가로지르려고 하는 중이오만, 형장은 어디로 가시오?"
"하하! 우리는 호북에 출몰한다는 색마를 잡기 위해 모인 야우오협(野友五俠)이라고 하네! 가는 길에 녹림의 왈패들이 출몰한다고 하던데...."
"이래 봬도 검 좀 쓴다 하는 자이니, 걱정 마시오."
나는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은 다섯 남자를 한꺼번에 압도할 만큼의 기를 내뿜었다. 야우오협의 대표로 보이던 남자는 표정이 굳으며 좌우로 물러났다.
"하하, 하. 그 정도 검기라면 걱정하지 않을 만 하군. 살펴 가시오."
"실례하지."
야우오협은 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만약 원래의 모습-독고연에게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의원의 모습이었다면 아마 시비가 제대로 걸렸을 게 분명했다.
불편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우리는 변장을 했다. 내가 마부 겸 호위무사가 되고, 사공희는 마차에 타서 내 호위를 받는 아가씨가 되었다.
"그런데 견희야,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변장할 필요가 있느냐?"
인적이 드문 논길에 이른 나는 마차를 몰다가 몸을 돌려, 볼록하게 솟아오른 사공희의 배를 눈으로 가리켰다.
"아가씨와 호위무사인 것도 모자라, 임산부와 남편이라니. 허허. 이래서야 꼭 호위무사가 세가의 금지옥엽을 임신시키고 데리고 도망가는 것 같지 않느냐."
"이래야 얼굴을 드러내고 다녀도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 거 아녜요."
사공희는 무당파에서 받아온 여벌의 옷으로 자신의 배를 꽁꽁 휘감았다. 그게 진짜로 아이를 가진 것처럼 묶어둔 바람에, 우리는 지나가던 인심 좋은 농민들로부터 과일을 받기도 했다.
"이 부풀어 오른 배야말로 제가 상공의 것이라는 뚜렷한 증거가 아니겠어요?"
임신.
내가 그녀의 곁에 있다면, 어떤 누가 봐도 내가 사공희의 남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공희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이미 부부지연의 분위기를 풍길 수 있었다.
단지 하나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사공희는 배만 옷을 채워 넣은 본모습인 데 반해, 나는 내 나이의 모습이 아닌 '중년의 비천색마'로서 모습을 바꿨다는 것이다.
"하아. 정체를 숨기는 것도 정말 피곤한 일이구나."
"그렇다고 저를 안고 빛처럼 날아가실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일부러 변장까지 하며, 동선을 속여가며 화산으로 가는 이유는 내가 사공희와 '둘이서 여행'을 가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 여럿을 만나고, 자연을 벗 삼아 마차로 먼 거리를 도보로 여행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상공. 저, 연인끼리 한 번은 꼭 이렇게 여행을 해보고 싶었답니다."
어려서는 갇혀 지냈고, 나를 만나고 나서도 호북에 있던 시기가 엄청나게 길었다. 그래서 사공희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나와 함께 여행하기를 바랐다.
"흐흥, 용봉지회 끝나고 저는 홀라당 무당파에 두고 시아랑 같이 떠나는 날, 제가 얼마나 속으로 울었는지 아시나요?"
"그건 정말 미안하다."
사공희는 뒤끝이 강했다.
"후훗, 괜찮아요. 이렇게 돌아와 주셨으니까. 약속도 지켜주셨잖아요?"
"이해해줘서 고맙다, 견희야."
내가 그녀를 무당파에 놔두고 이시아와 함께 비천색마로서 돌아다닌 것을 마음에 두고, 자신도 나와 둘이서 중원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싶어 했다. 이번 여행은 사공희의 부탁도 있었지만, 용봉지회 이후 나를 묵묵히 기다려준 사공희에 대한 답례였다.
"아, 상공. 잊으시면 안 돼요. 저랑 같이 여행 가신 뒤에, 그다음에는 연이랑 같이 다녀오시면 돼요. 알겠죠?"
"후우, 알았다."
...그리고 사공희는 본인뿐만 아니라 독고연도 챙겼다. 동병상련을 겪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막내를 챙겨주고자 하는 연상의 배려심이었다.
'근데 그러면 천가장은 어떻게 하지.'
...독고연이 빠진 천가장을 진사월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
"희야. 연이랑 갈 때면-"
"흐하하하!"
멀리서 광소가 울려 퍼졌다. 나는 내 말을 끊으며 나타난 무리의 옷차림을 보고 바로 기분이 더러워졌다.
언짢아진 것도 아니고 더러워졌다. 그들의 옷은 이 더운 날씨에도 호피나 털가죽으로 뒤덮인, 전형적인 '산적'의 복장이었다.
"웬 놈들이냐."
"흐하하!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녹림72채, 호골채의 채주이니라!"
"그래서 원하는 바가 무엇이냐?"
나는 기세를 끌어올리며 녹림의 왈패들을 압박했다. 그러자 호골채의 채주라는 자는 거대한 철편을 들어 올리며 사납게 웃었다.
"우리는-"
"기다리세요."
쿵, 쿵.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 그리고 익숙한 기운.
나는 산적들을 가로지르며 다가온 거한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다른 이들보다 몇 장은 더 큰 거한은 고대에 태어났다면 번쾌나 장비와 같은 무장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꿈틀꿈틀.
가죽옷 사이로 숨길 수 없는 근육이 꿈틀거렸다. 나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기세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절정.
이것은 무인으로서 느낀 직감.
그리고 색마로서 느낀 감각에 따르면, 눈앞 나보다도 더 키가 큰 거한의 실체는...처녀...?
"너...누구냐?"
"나?"
쿵!
여인-놀랍게도-은 사람 머리통만한 주먹을 부딪치며 사자후를 터뜨렸다.
"녹림왕의 딸, 방영희-----!!"
이봉결정전, 독고연에게 패배한 외공의 초고수.
지금의 육봉 중 한 명인 산주봉 방철수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이 바뀐 게 아닐까 싶은, 비사문천을 연상케 하는 녹림왕의 딸.
"무슨 목적이지?"
나는 검집에 손을 올렸다. 만약 사공희를 겁탈하려고 드는 거라면, 녹림왕의 딸이라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두근, 두근, 이두박근.
...범하는 건 조금 그렇고, 그냥 본때를 보여주는 정도로 끝내리라. 그렇게 마음을 먹으며 검을 뽑아 든 순간-
"너, 잘생겼군! 내 신랑이 돼라!"
"......뭐?"
방영희의 선전포고에 나는 검에 손잡이를 올린 채 굳었다.
"어머나.... 이런 건 전혀 예상 못 했는데."
철컥.
내 등 뒤에서, 등허리에 소름이 돋을 살기가 흘러넘쳤다.
[작품후기]
방영희 양 내공없이 삼대 천근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