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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에서의 부름
하나의 문파에서 특정 문파의 누군가를 초청하는 건 그다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하지만 딱히 화산파가 무당파의 사람을, 그것도 장로들도 아닌 태극화를 콕 집어서 초청하는 건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화산파와 무당파가 지금까지 관계가 좋았던가? 아니다. 그저 구파일방이라는 이유로 묶여있기는 하지만, 화산파와 무당파는 그다지 교류가 없었다.
특히 무당파에서 퍼진 천화 사건 이후, 화산파는 무당파와의 교류를 거의 끊다시피 했다. 용봉지회가 아니었다면 화산파의 무사들이 호북에 방문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후 무당파가 태극화와 태극혜검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화산파는 같은 구파일방의 하나로서 순수하게 손뼉을 쳐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태극화를 초청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걸 확인하기 위해 현타 도사를 추궁했다.
"나도 모르오. 장문인에게 전해진 편지인데, 장문인이 입을 닥치고 있으니."
기껏 무당파까지 잠입해 자고 있던 현타 도사를 깨웠더니, 본인도 모른다고 하더라.
화산파에서 온 소식은 장문인에게 직접 전갈이 들어갔고, 장문인은 자신만 화산파의 전갈을 아는 상황에서 사공희를 호출했다.
"견희야, 이유가 뭐라든?"
"이유는 정확히 얘기 안 해주던데요."
"그 새끼, 장난하나?"
이제는 자랑하던 무공도 현타 도사보다 못한 자가 어떻게 이유도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고 화산파까지 가라고 하는가? 이건 결코 그냥 넘어가선 안 될 문제다.
"견희야. 한 번 가서 확실하게 답을 듣고오...아니다, 내가 가마."
"네? 상공께서 같이 오신다고요? 무붕 도사가 나온다고 하면 기겁할걸요?"
"아니, 나 혼자 다녀온다는 말이다. 걱정 마라. 들킬 일도 없으니."
역체변용술도 신분위장도 필요 없다.
"놈은 내가 자기 방에 다녀간 지도 모를걸?"
몸에 태극신공을 두른 채 자연에 깃들어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지우면 그만이니까. 무당파 장문인이 내 기척을 눈치채기에는 아직 무공 수위가 매우 낮았다.
"내가 존재감 지우는 거 하나는 일품이란다."
"아...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자연과 하나가 되는 건가요?"
"비슷한 효과기는 한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니고."
호연지기를 바탕으로 자연과 물아일체가 되는 경지는 현경을 뛰어넘는 단계다.
내가 아직 그곳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무당산과 무당파, 그리고 무당파의 중심이라는 요소와 태극신공의 힘이 그걸 일시적으로 가능하게 해준다.
"나보다 태극신공 더 잘 운용하는 놈이 아니면 나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잠시 다녀오마."
나는 사공희에게 독고연과의 비무를 맡긴 뒤, 무당산을 달렸다.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돌아다니며 중간중간 약초를 수집하고, 무당산 정상에 올라 장문인의 방까지 단걸음에 숨어들었다.
'현철 도사, 중검.'
한 때 마교의 앞잡이와 손을 잡아 현기 도사의 장문인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던 자.
자존심 때문에 태극혜검을 직접 배워 익히지 않고 장문인만 출입 가능한 무당파의 비고에 들어가서 현기 도사가 죽기 전에 남긴 걸 보고 무공 수련을 하는 자.
장문인으로서의 능력은 뛰어나 무당파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지만, 뒤로는 음모를 꾸며 사공희를 이용해 무당파의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자.
아직 정당한 명분은 없지만, 빨리 치워버리고 사정후를 장문인에 앉혀놓고 싶었다. 그래야 천가장도 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
'다행히 지금 집무실에는 없군.'
아마 봤다면 뒤통수부터 후려치고 편지를 찾았겠지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일단 현철 도사는 자리에 없었다.
'그럼 나야 좋지.'
나는 몰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화산파에서 왔다고 하는 서찰을 찾았다.
"스으읍."
나는 태극신공을 극성으로 일으키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눈으로는 용안의 힘으로 주변을 훑으며, '매화향'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찾았다.
'저기 있군.'
나뭇잎을 숨기려면 숲에다가 숨기라고 했던가.
화산파에서 온 것으로 예상되는 서찰은 다른 문파들에서 오는 편지와 뒤섞여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중 화산파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는 편지를 두 개 찾아냈다.
'두 개?'
하나는 장문인인 현철 도사 귀하.
또 다른 하나는 태극화 사공희가 받는 이였다.
'이 새끼가?'
거슬리는 게 있다면 편지 봉투가 이미 뜯겨 있었다는 것.
그리고 편지를 꺼냈다가 다시 넣은 흔적이 있다는 것.
'사공희한테 오는 편지 내용을 봐버렸어?'
장문인이라면 으레 당연히 확인해보는 게 당연하지만,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기분이 언짢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사공희에게 직접 전하는 편지 내용을 확인하고 사정후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뭔가 있다.
나는 천천히 편지의 내용을 살폈다.
"허, 씨발."
읽다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쌍욕이 튀어나왔다. 나는 편지를 구겨버릴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 ...하여, 태극화에게 정식으로 부탁을 하고자 하오. 나의 제자가 상사병으로 죽기 전에, 한 번만 만나주시면 안 되겠소?
"이 개새끼가?"
* * *
잠시 뒤.
나는 사공희를 급히 데리고 천가장으로 돌아왔다.
"희 언니, 언니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나야 상공이 하라는 대로 하는 거지."
사공희는 판단을 오롯이 내게 맡겼다. 괜히 내가 선택을 내림으로써 그녀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조차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너무나 기특했다.
"안 가면 견희만 나쁜 년 되는 건데."
솔직히 말해서 갈 사공희가 화산까지 갈 이유는 없다. 상사병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공희를 화산에 불러들이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만약 상사병에 걸린 매화검수가 죽기라도 한다면 욕을 먹는 건 사공희가 된다.
"상공,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거절할 명분은 없는데 거절하고 싶구나."
마음 같아선 죽이고 싶지만, 그럼 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게 되니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좋다.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슬슬 움직여봐야지."
"상공, 그 말씀은...?"
"오랜만에 외식 나가지."
나는 화산에서의 초청에 응했다. 세 여인은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를 할 생각에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대신 연, 시아. 둘은 여기에 계시오."
"뭐?"
"...네?"
이시아와 독고연의 표정이 굳었다.
"이건 화산파의 정식 초청. 괜히 그대들과 함께 움직이다가 들킬 염려가 있으니, 나와 견희 둘이서 조용히 다녀오리다."
"끙. 맞는 말이긴 하네."
"워낙 예뻐서 얼굴을 면사포로 가린다고 한들 분명 지나가는 모두가 다 보고 갈 테지. 까딱 잘못하면 마교 소공녀에 이목이 끌릴 수도 있고, 독고자영에게 들킬 수도 있지 않겠소? 당분간은 천가장 안에서 무공 수련을 해주시오."
"아...."
둘은 몹시 아쉬워했다. 나도 둘을 데리고 갈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둘을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우리도 그냥 근처에 있으면 안 돼? 나 노숙에는 익숙한데."
"그건 안 돼요. 지난번에 하남성 근처에서 숨어 지내는 것도 둘이서 많이 힘들어하지 않았소?"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뭣보다 나랑 사공희는 화산파 안에서 호의호식하면서 둘은 지난번처럼 어디 허름한 버려진 집에 계속 둘 수 없었다.
이왕 어딘가에 있을 거라면 천가장 안이 가장 적합했다.
"금방 다녀오리다. 어차피 그놈 얼굴만 보고 올 거라서."
사공희의 모습을 보고도 미적대면 섭혼술이라도 걸어서 과감히 치워버리리라.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 잠시 기다려주시오."
"네. 저도 화산까지 멀리 다녀오는 건 바라지 않아요."
"그런 거라면...."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둘은 다행히 순순히 이해해줬다.
"대신 가기 전에...알지?"
"희 언니, 이제 혼자서 가가를 독점할 텐데 잠깐 저희에게 시간을 내어주시면 안 될까요?"
둘은 사공희의 눈치를 봤다. 사공희는 여유롭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상공, 저 무당파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가서 얘기하고 오려고?"
"네. 그럼 금방 이야기하고 올게요."
사공희는 둘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천가장을 떠났다. 나는 그녀를 배웅하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등 뒤에서 내 팔을 좌우로 휘감는 둘에게 붙잡혔다.
"금방 다녀온다잖아. 지체할 시간 있어?"
"가가, 그냥 가시려는 건 아니죠?"
"......저녁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두 시진."
사공희는 무조건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니, 이제 사공희가 돌아오기까지 제법 시간은 넉넉했다.
"시간 없으니 둘이 같이하도록 하지."
나는 둘을 안고 비천궁으로 들어갔다.
* * *
마교의 십만 마인, 그중에서도 원로들이 모인 천마신궁은 현재 축제의 분위기로 가득 찼다.
"하하, 오늘따라 더욱 찰랑거리시는군!"
"그러게 말이오! 그대의 아미도 오늘따라 아름답구려! 하하!"
노마(老魔)들은 서로를 칭찬하며 화목해졌다.
신경질적이고 서로 옷깃만 스쳐도 싸워대던 마인들은 서로의 머리칼이 스쳐도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도 되는 걸까."
대공자 주지의 부하, 지린뢰마는 지나가는 마인들을 볼 때마다 어이가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뢰마는 초조해졌다. 마인들의 머리칼이 찰랑거리는 건 마교 전체의 호재였지만, 지린뢰마로서는 악재였다.
"하하, 설마 소공녀가 미염신공을 손에 넣을 줄이야."
"어허. 미염신공이라니? 그것은 신창의 독문무공이 아닌가? 소공녀가 찾고 천마께서 배포하신 무공은 미염신공이 아닐세."
"아차, 그렇지. 흐허허, 소천마 덕분에 마교에 흥복이 찾아왔군그래!"
고작 찰랑거리는 머리로 마교의 흥복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전대 십마들에게 있어 대공자와 소공녀 둘을 비교하면 소공녀 쪽이 더 지지율이 높았다.
그들 모두 천마신공을 익혀 젊었을 때 한참 이름을 날렸다가 은퇴 후 노년이 되어 부작용에 시달리는 이들이었다.
"선배님, 대공자께서 마교를 휘어잡으면 정마대전이 일어날 겁니다. 꼭 도와주십시오."
"정마대전! 듣기만 해도 설레는구나. 하지만 지금은 반백으로 벗겨진 내 머리가 더 설레지 않느냐?"
"...선배님, 곤륜을 무너뜨리려면 무슨 방법이 필요한 것 같습니까?"
"곤륜! 곤륜은 오랫동안 우리의 주적이었지. 함께 늙어가는데도 곤륜의 도사 놈들은 머리 하나 벗겨지지 않더군! 크으, 하지만 이제 우리 노마들도 자존심을 구기지 않을 수 있다 이 말이야!"
"......선배님, 고작 머리칼 좀 자라게 하는 거로 소공녀가 대공자보다 더 천마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갈! 머리칼이 자라는 게 아니라 남은 머리를 보호하는 무공이니라! 너는 우리를 기만하는 것이냐?"
뢰마는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는 노마들의 마음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천마께서 미염신공...아니 천마보염신공(天魔保髥神功)을 배포해주셨거늘, 그대는 아직 그 신공을 익히지 않았단 말인가?"
"저는 딱히 필요하지 않아서."
"어허. 전부 한 때니라. 그대도 언제든 훅 갈 수 있다는 걸 명심하여라."
전 현대 십마 중 유이하게 미염신공을 전수받지 않은 뢰마로서는 미염신공이든 천마보염신공이든 딱히 관계가 없었다.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고, 소공녀가 가져온 공적이라는 걸 생각하면 더욱 배울 필요가 없었다.
그건 지린뢰마로서 대공자에 대한 배신이 될 테니까.
"하아...."
"뭘 그리 한숨을 쉬고 있느냐?"
"아, 마검비 선배님."
뢰마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유이하게 마교에서 천마보염신공을 익히지 않은 마인을 만나 왠지 모르게 기뻤다. 그녀의 머리칼은 신공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선배님께서는 미염신공이 필요 없으신가요?"
"물론."
마화와 소공녀 다음으로 가장 아름답다고 불리는 여인다웠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마검비에게는 천마신공의 부작용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너도 고생이 많구나. 노마들을 대공자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거니? 호호, 원래 고생은 젊었을 때 사서 하는 거란다."
"...예. 조언 감사합니다. 선배님, 혹시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뭔데?"
뢰마는 서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대공자 님의 계획에 따라, 화산에 가려고 합니다."
"...화산에? 나는 딱히 내키지 않는데. 지금 꼭 찾아야 하는 놈이 있어서."
"그 '색마'라는 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흠, 좋아. 화산까지는 같이 가줄게. 사흘 뒤에 출발하면 되지? 후후."
마검비는 뢰마의 어깨를 두드리며 사라졌다.
"...이걸로 계획은 완벽."
뢰마가 든 책자에는 '무당재붕(武黨再崩)'이라는 제목이 박혀있었다.
"태극화, 당신에게 죄가 있다면."
'태극화 겁탈을 통한 화산과 무당의 자중지란'이라는 부제와 함께.
"가슴이 너무 예쁘게 큰 게 죄에요."
뢰마는 책자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작품후기]
중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