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41화 (14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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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의 사정

"이런 미친놈이!"

부우욱.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제는 무림맹으로부터 전해진 소식을 거칠게 북북 찢어버렸다.

"아버님, 무슨 일입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맞은 편에 앉아 가문의 일을 처리하고 있던 모용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지만, 모용제는 차마 답하지 못했다.

어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독고연, 을소미, 팽신혜를 범한 색마가 모용세가로 오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놈이 노리는 자가 바로 연희봉, 모용란이라는 것을!

"젠장, 젠장.... 끄응! 잠깐 검을 휘두르고 오마!"

모용제는 검집을 들고 집무실을 떠났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는 분명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분노를 풀려고 했을 것이다.

"......."

모용란이 곁눈질로 이미 어떤 내용인지 대충 파악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모용제는 딸을 범하러 오겠다는 색마의 존재에 광분한 나머지, 딸이 바로 옆에서 자신을 몇 번 눈으로 흘기고 있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씁."

모용란은 손으로 입술을 쓸었다. 그녀의 손에는 세가의 일을 처리하느라 먹이 잔뜩 묻어있었다.

"......."

모용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문밖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 ...호위를 늘리게! 무조건! 란이가 어디에 있든 열두 시진 동안 계속!

"......."

모용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연 호위를 늘린다고 해결이 되는 걸까?

아니다. 하북팽가의 적녀 또한 팽가에 있다가 겁탈당했다. 그러면 세가에서 가만히 있겠다고 한들, 아무리 호위가 많다고 한들 효과는 없을 것이다.

자신보다 강한 독고연이 게 눈 감추듯 납치당했다.

가주보다 강한 무림맹주가 딸의 납치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다면...."

모용란은 붓을 다시 들어 올렸다. 상단에 세가의 창고에 물품을 비축하는 주문서에 새로 한 줄이 추가되었다.

흑의, 세 벌.

"......흥, 내가 당할 줄 알고."

독고연처럼 납치당하기 전에 세가에서 도망친다.

팽신혜처럼 가만히 앉아있다가 겁탈당하기 전에 도망친다.

다른 여인들처럼 세가에 구속당하기 전에, 빨리 이곳을 도망친다.

"아버지...죄송해요."

모용란은 열심히 자신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부친을 향해 사죄했다.

"소녀는...겁탈당하기 전에 가출하겠습니다."

* * *

"흥, 흥흥...."

마검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대전을 빠져나왔다. 다른 원로들과는 달리, 그녀는 미염신공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천마신공의 부작용은 그녀의 머리에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검붕, 검담, 검제.... 그럼 당연히 검마 해야지."

마검비의 머리를 가득 채운 생각은 과연 소공녀를 보좌하는 비천색마라는 자를 어떻게 하면 '비천검마'로 만들 것인가.

비천이든 지린이든 야인이든 뭐가 되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반드시 '검마'라는 이름은 들어가야 했다.

비천삼마, 도(刀)-적(賊)-환(幻).

지린삼마, 염(炎)-수(獸)-뢰(雷).

야인삼마, 빙(氷)-광(狂)-그리고 검(劍).

마지막 한자리, 무마(無魔)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천마만 알고 있는 존재이며 절대 변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지금까지 숱한 마들이 십마의 자리를 오다녔지만, 단 한 순간도 검마가 없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현재 검마는 1년 넘게 공석이 되었다.

가장 최근의 검마, 마검비의 제자였던 남자는 천화에 걸린 몸으로 무당파의 장문인과 동귀어진을 노렸다. 여동생에 관한 은원으로 복수를 꿈꾸던 그의 사망에 따라, 검마는 현재까지 공석이 되었다.

정파가 용봉지회와 이봉결정전으로 한창 떠들썩했다면, 마교는 비어버린 검마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마인들이 자신의 힘을 뽐내느라 난리가 났다.

"흥, 제깟 것들이 감히 검마의 자리를 넘봐...?"

마검비는 어중이떠중이들이 검마에 오르는 걸 용서할 수 없었다.

검마의 스승이자 이전 대의 검마로서, 자신의 뒤를 이어나갈 존재들이 잡초보다 못한 수준으로 검마의 이름을 잇는 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견딜 수 없는 굴욕이었다.

최소한 초절정은 되어야 한다.

최소한 십마 중 으뜸은 되어야 한다.

최소한 자신의 검을 10초는 버텨내야만 했다.

적어도 '검술'에 있어서, 현재 마검비는 마교 최강이니까.

"천상용제쌍고검이라...후후후."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검객의 등장은 마검비를 들뜨게 만드는 희소식이었다.

심지어 정파의 추살대를 역으로 제압했다고 했다.

심지어 운룡반월창을 극성으로 사용하는 신창을 상대로도 호수비로 막아냈다고 했다.

심지어, 천마신공을 동시에 운용하며 모발이 온전한 상태로 초마교인에 들어갔다고 했다.

"하아...."

초마교인에 이른 탈마의 검사.

생각만 해도 지릴 것 같았다. 그와 검을 맞대고 싸울 생각만으로도 마검비는 입술이 바짝 말랐다.

"마검비."

그래서 뒤에서 감히 자신의 별호를 함부로 부르는 남자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공자만 아니었으면 너는 내 검에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허. 내 진짜 힘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가?"

대공자, 주지는 자신의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금빛 전격을 가리켰다.

"다음 대 천마에게 예를 갖춰라, 마검비."

"지랄."

주지를 향해 한껏 비웃은 마검비는 대공자를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나는 나보다 약한 놈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더니."

"미안하군. 나는 아직 한참 때라서."

"풉!"

주지는 대놓고 마검비를 비웃었다.

"그 나이에 그런 얘기를 하면 부끄럽지 않나? 그대의 호적수였던 아미봉도 그런 얘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앞에서 그년의 얘기를 하다니, 배짱은 그분의 핏줄답군. 하지만 어리석은 녀석아. 그걸 알아야지."

마검비는 주지를 향해 검지 손가락을 하나 까딱거렸다.

"검마의 뒤를 이을 새로운 십마가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만약 검마라면 내 인정 없이는 검마가 될 수 없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말 안 해도 알 텐데?"

"흥. 지금 협박을 하는 거요? 검마는 지린검마가 안 될 거라는?"

"협박으로 듣다니, 아직도 애송이로군. 멍청한 놈과 이야기를 할 가치도 없다."

"...내가 천마가 되면, 원로원부터 꼭 갈아치울 것이오."

"뜻대로 하소서, 소천마시여. 하하하!!"

마검비는 주지를 비웃으며 전각을 떠났다. 주지는 한참 동안 주먹을 부들대다가 몸을 돌렸다.

"......썩을 년 같으니라고."

마검비를 노려보는 주지의 눈동자에는 명백한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 * *

"다 갔군."

"그렇네요."

넓은 대전에 천마와 마화 둘만 남게 되었고, 천마는 마화를 품에 안고 옥좌에서 일어났다.

"다시 침대로 가지."

"어머,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여기서 하는 건 어때요?"

다른 이들이 모두 사라지자 바로 교태를 부리는 마화에 천마는 눈을 깜빡이다가 옥좌에 다시 앉았다.

"그대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네. 원로들한테도 무마의 존재를 계속 숨기실 거예요?"

무마.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자리라는 건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었다. 원로들조차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무마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자였으니까.

그리고 그게 마검비를 오해하게 했다.

"따지고 보면 공백의 자리에 색마가 들어간 거니까, 검마는 여전히 비어있잖아요. 괜히 마검비가 오해하게 했으니,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면 크게 화를 낼 거예요. 그녀의 검각(劍閣)은 마교 오 대 문파 중 하나잖아요."

"그렇긴 하지."

마교에도 엄연한 문파가 있다. 마검비는 검마의 자리를 제자에게 넘겨준 뒤, 마교의 검수들이 구 할 가량 모인 검각의 주인으로서 후진 양성에 힘을 쓰고 있었다.

즉, 마검비는 쉽게 무시하거나 할만한 존재가 아니다.

"마화. 그녀는 검각의 명예보다 자신을 더 중시하는 자다."

"그 말씀은?"

"출교는 마검비가 그냥 검으로 싸우고 싶어서 그런 거다. 색마 그놈, 자신을 검담이라고 칭하면서 정체불명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더냐. 그냥 핑계다, 핑계."

"비무를 하고 싶은데 적당한 이유를 마련했다는 말씀이신가요? 후후."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 꽤 쓴다 싶으면 습격하던 게 어디 한두 번이더냐."

"그렇네요. 후훗. 그런데 그러다가 색마가 검으로 마검비를 이기면요?"

마화의 질문에 천마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검으로 이기는 자에게 처녀를 바치겠다고 마검비가 말했고, 당신께서도 마검비는 검으로 이기지 못했잖아요. 당신께서는 검사가 아니라 권사(拳士)니까."

"......."

천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구시렁거렸다.

"쯧. 거 주먹으로 이기든 자지로 이기든 어차피 둘 다 이긴 건데, 쪼잔하게 검으로 이긴 거니 뭐니 따진 게 아니냐. 흥, 어차피 관심 없다. 지천명을 넘겨서도 처녀인 여자 따위."

"색마가 만약 검으로 그녀를 이긴다면, 마검비를 범할 텐데요?"

"알게 뭐냐."

천마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여자도 아닌데. 오히려 좋지. 비천색마에게 마검비가 힘을 실어주면, 다음 대 검마도 시아의 편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

"어머, 그 말씀은...."

"그래."

천마는 마화를 끌어당기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비천삼마가 천마지루를 진짜로 가져온다면, 시아를 후계자로 정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지금 소공녀는 대공자보다 약한데도요?"

"천마는 모두의 위에 군림하는 자. 강한 수하를 두는 것 또한 자신의 힘이다. 천하제일인을 수하로, 남편으로 들였다면 곧 시아가 최강인 거지. 흐흐."

"그건 또 새로운 접근이네요."

마화는 천마와 얼굴을 마주 보며,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면 어디 천하제일인의 사위를 둘 남자의 정력은 어떤지 한 번 시험해볼까요?"

"흥. 나 아직 안 죽었다. 누가 더 강한지는 직접 붙어봐야 아는 법."

천마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마화를 잡아당겼다.

"천하제일은 나다."

* * *

깎아지른 절벽 위, 아슬아슬하게 지어진 누각.

봉우리에 끼어있는 흰 안개보다도 더 높은 곳, 산의 정상이 훤히 보이는 절벽 위에 지어진 누각에는 긴 흑발을 휘날리는 미녀가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또 천기가 뒤틀렸어."

여인의 고운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피처럼 붉고 도톰한 입술도 파르르 떨렸다.

"하늘이 노하셨는가."

여인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은 맑고 청명했으나,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하늘의 기운은 꼬이고 비틀려있었다.

정해진 운명은 어긋나고, 궤도를 이탈했던 운명은 다시 제자리를 되찾기 시작했다. 실타래처럼 엉키고 설켜 혼란은 가중되었지만, 대승적인 차원에서 큰 흐름은 변하지 않았다.

장강 물결이 아무리 굽이친다고 한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결은 바뀌지 않는다.

"...결국 혈란은 막을 수 없단 말인가?"

여인은 질린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깎아지른 낭떠러지가 모이는 난간에 몸을 기대며 앉은 여인은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여인의 안색은 몹시 좋지 않아 보였다. 숨을 쉬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독이 되는 것 같았고, 실제로 여인은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쿨럭. ...흐으."

손으로 입을 가린 여인은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해냈다. 붉은 피는 그녀의 하얀 도복을 가득 적셨고, 그녀의 도복은 혈화가 피어오른 것만 같았다.

"아직은...안 돼. 하아."

여인은 가슴을 쥐어뜯었다. 길쭉한 손으로 붙잡아도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았지만, 왼쪽 가슴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격통에 여인은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조금만, 하아, 더 버텨주기를...."

여인은 격통이 줄어들 때까지 주저앉은 채 숨을 고르다가, 격통이 멎어들고 나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후우, 후우."

"사부님---!!"

누각 아래쪽에서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헐레벌떡 달려오는 남자는 여인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중년의 도사였다.

"헉...사부님?! 피, 피가?!"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여인의 매정한 목소리에 중년의 도사는 침음성을 흘렸다.

"알아보라고 한 것은 어떻게 되었느냐?"

"예! 정황상 독고연 소저는 병을 치료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비록 본인이나 맹주에게 직접 확인을 하지 못했지만...."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여인은 진심으로 이상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십팔음뇌절맥을 치료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신의의 제자라는 자가 치료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감감무소식입니다. ...한 번 수배해볼까요? 신의의 제자라고 한들 잘만하면 사부님의 병도-"

"아니, 쓸데없는 일이다. 그럴 시간에 무공이나 더 연마하라."

"...예, 사부님."

중년 도사는 우울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여인은 중년 도사의 뒤를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강호에...새로운 바람이 부는 건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인의 눈동자는 푸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작품후기]

사공희 이시아 독고연 팽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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