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32화 (13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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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가의 두 여인(彭二)

객실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은 나는 괜히 허탈했다.

'완전히 안주인이 다 되셨군.'

허영과 사치를 부리며 악사를 데려온 팽신혜.

악착같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지출을 줄이려는 팽유월.

둘 중 누가 더 가문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는 명약관화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이 무례한 자가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를 팽가에서 내보내려고 했다.

'일부러 자기가 욕먹을 각오하고 팽가에서 내쫓으려고 한 이유가 있다면....'

사락.

나는 새롭게 칠해진 벽에 손을 올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보이지만, 실상은 외형만 그럴 분 몇 년이 지나면 금방 삭아 문드러질 싸구려 도료였다.

"하이고. 가문에 완전히 망조가 들었군."

팽가는 가난하다. 가난하게 되었다.

가주인 악즉참 팽이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나머지 재산을 모두 약값으로 탕진하게 되었다.

'팽유월 혼인 보낸 것도 가문에 망조가 들어서 그런 거지.'

내가 추소포국의 남은 재산을 팽유월에게 가도록 안배를 해뒀어도, 그걸로 무너지는 세가를 완전히 일으키기란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추소광의 유산 덕분에 팽가는 간신히 살아났다. 아사 직전의 사람이 벽곡단 한 알을 먹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팽유월이 아니었으면 하북팽가는 진짜로 망했다. 그건 미래라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왜 자기 덕분에 세가가 부활했다고 얘기를 안 하지?'

겸손일까, 아니면 굳이 말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팽유월의 성격을 생각하면 후자일 것이다.

가문의 손님을 상대로, 그것도 직계의 여인인 팽신혜의 손님에게 굳이 팽가의 비화를 말할 필요는 없을 거로 생각한 게 틀림없다.

성격상 딸을 모욕하자마자 뚜껑 열려서 냅다 팽신혜의 목을 조르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세상 어떤 어머니가 자식이 욕을 먹었는데 참을 수 있겠는가?

팽신혜, 유죄. 학혈마녀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일단 유죄다.

그런 죄인과 팽유월, 둘 중 대외적으로 누가 더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유감스럽게도 팽신혜다.

- 팽유월 아가씨가 팽신혜 아가씨를 욕보이셨다더군....

- 너무한 거 아니냐? 방계 주제에....

지나가는 하인들조차 뒤에서는 팽유월을 두고 곱씹고 있었다. 무림의 생리상, 그들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가문의 치부나 마찬가지니.'

팽유월은 팽가의 구원자이자 동시에 그들이 나약한 모습을 보였던 치부다. 그리고 치부라는 건 들춰낼 필요는 없었다. 팽유월 본인도 그걸 이해하고 조심조심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모든 진상을 알고 있는 비천색마로서는, 팽유월이 팽신혜의 앞에서는 확실하게 거들먹거려도 된다고 생각했다.

팽가의 몰락은 팽신혜의 허영과 사치 덕분이고, 팽가의 부활은 오롯이 팽유월 덕분이다.

팽유월이 천환단을 가져와 가주를 살려 팽이왕이 가세를 다시 바로잡을 수 있었고, 팽유월이 추소표국의 자본을 챙겨와 팽가의 창고를 잠시나마 가득 채웠다.

'양심이 있으면 팽유월한테 그렇게 말 못 하지.'

사실상 가주 다음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팽유월에게 감히 막말한다?

'양심도 없는 년 같으니라고.'

역시 혈교의 잔당답다. 학혈마녀는 뿌리부터 썩어있었다. 결코, 더러운 피 운운해서 그런 건 아니다.

'일부러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하겠지.'

팽유월이 추소광에게 혼인당했던 것도 어쩌면 팽신혜가 종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가문의 여러 여인 중 하필 방계인 팽유월을 고른 것도, 팽이왕이 쓰러진 사이 직계들끼리 논의하는 과정에서 은연중에 팽유월로 몰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고 내 선입견에 의한 판단이지만, 팽신혜는 진짜로 그럴 사람이다.

'아기색마에게 묻는다. 이 여자는 색마짓을 해도 되는 여자인가?'

발기조식.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외투를 벗어 가벼운 복장을 걸쳤다.

"후우."

지금부터 시작이다. 나는 팽가 전역에 내기를 뿌려, 암행을 위한 출입구를 찾았다.

"실례합니다."

내 음공으로 인해 도망쳤던 팽신혜가 올 때까지.

* * *

"유월아, 이번 한 번만 용서해다오."

"가주님, 팽신혜에게 한 마디 해주십시오. 이 시국에 식객이라니요."

남들에게는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팽가 가주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가주인 팽이왕은 방계의 여인, 그것도 한 번 출가했다가 남편을 잃고 돌아온 미망인에게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미안하다. 하지만 그 아이도 결코 나쁜 마음으로 들인 것은 아니야. 색마 때문에 한참 하북이 난리가 아니더냐. 그런데 여인 혼자 여행하고 있으니, 마음 약한 신혜 그 아이가 어찌 가만히 두고 볼 수 있겠느냐."

"......."

팽유월은 차마 진실을 꺼내지 못했다. 당신의 딸은 마음이 약하지도 않고, 식객으로 여인을 들인 게 결코 색마를 걱정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팽이왕이 만약 딸의 이면-여성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큰 충격을 받으리라.

팽유월이 알기로, 팽신혜는 동성애를 즐기는 여자다. 정작 팽이왕은 일부러 외면하는 건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가주님. 그렇다면 더더욱 팽신혜에게 한 마디 하셔야 합니다. 또 지난번처럼 최고급 객잔에 데려가 식사를 한다거나, 악단을 부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크흠, 유월아. 우리가 자존심이 있지, 손님이 왔는데-"

"그럴 돈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자존심은 있지만, 돈이 없다. 냉혹한 현실에 팽이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팽가가 재산을 탕진하게 된 이유의 7할은 팽이왕의 약값과 진료비였으니까.

"걱정 마라. 모자란 금액이 있다면 내 자금을 융통해오마."

"그게 다 빚이지 않습니까.... 또 지난번처럼 혼담을 청하거나 하면 어쩌실 겁니까? 결국 급하게 도장 하나를 정리해서 돈을 물어주지 않았습니까."

"끙...."

팽이왕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호탕하게 하북을 호령하던 악참도는 이빨과 손발톱 모두 빠진 늙은 호랑이가 되어버렸고, 무공조차 사라진 그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무력도 권력도 자금력도 없는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팽가의 가주라는 명예뿐. 그마저도 가문 내에서는 가문의 실세로 떠오른 팽유월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가주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유산도 4할밖에 남지 않았어요."

"뭣...?!"

팽이왕은 대번에 사색이 되었다.

"그, 그 많던 유산이 4할밖에 안 남았다고...?"

추소표국의 비밀 창고에 있던 온갖 보물들은 하북팽가의 재산이 되었다. 팽유월의 주도하에 헐값, 또는 제값에 현금화된 보물들을 정리하고 나니 성 하나는 1년 거뜬히 운영하고도 남을 재산이 남아있었다.

"예. 빚을 갚고, 가문을 재건하고, 뭐 그런 건 굳이 말씀드리지 않을게요. 하지만 그건 아셔야 해요. 팽신혜가 탕진한 자금만 유산의 1할이라는 걸."

"......."

팽이왕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가주로서 세가를 운영하던 사람이기에, 팽유월이 말하는 1할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고 있었다.

팽신혜 한 명이 사치를 부리는 돈을 모두 되돌릴 수만 있다면, 하북 안에 팽가의 도장을 다섯 개는 더 짓고도 남았으리라.

"...유월아. 이번 한 번만 용서해다오."

하지만 팽이왕은 팽유월에게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가주인 동시에 팽신혜의 아버지였으니까.

"네게 정말 미안하다는 건 안다. 네가 일부러 악역을 자처하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주겠느냐? 내 신혜에게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일러두마."

"...알겠어요."

결국 팽유월은 백기를 들었다. 가주의 약한 모습에 차마 끝까지 독해지지는 못했고, 팽유월은 너무나도 유약해진 팽이왕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팽가는, 부활했다.

다만 다시 살아난 팽가의 모습은 지금의 팽이왕처럼 너무나도 약했다.

조금만 방심해도 금방 숨이 끊어질 것처럼.

* * *

"세상에, 이게 바로 그 북경 이과두주에요?"

"호호, 네. 시중에 도는 싸구려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랍니다. 한잔하시겠어요?"

어찌 명주를 마다하리. 세상 널린 게 이과두주라고 하지만, 북경의 이과두주는 이과두주 중에서도 최상의 품질을 자랑했다.

"고마워요, 신혜."

"......."

내가 이름으로 부르자, 그녀는 게슴츠레 웃으며 내 잔에 술을 따랐다. 나 또한 그녀의 잔에 술을 채웠다.

잔? 그릇? 사발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과두주 한 병을 두 잔에 넣으니 금방 병이 비었다.

캉.

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화기에 나는 절로 온몸이 짜릿해졌다.

"후후, 역시 좋은 술이네요."

"그렇죠? 팽가에서는 이거 못 먹으면 팽가 이름 성씨를 떼라고 할 정도랍니다. 그리고...."

팽신혜는 자신의 옆에 쌓아둔 나무 세 상자를 가리켰다. 하나의 상자에 병이 열 개씩 들어 있는 상자는 전부 이과두주로 채워져 있었다.

'역시 팽가.'

다른 세가라면 초고가의 술을 한 모금씩 마시며 술맛을 즐길 테지만, 팽가는 다르다. 팽가는 술을 양으로 마신다.

"한 잔 바로 더 받으시겠어요?"

"좋죠. 제가 먼저 드릴게요."

나는 팽신혜의 술을 거절하지 않았다. 모처럼 공짜로 술을 마실 기회가 아니던가? 삼구와 지내던 시절 기루에서 마시던 싸구려와는 차원이 다른 깔끔한 맛이었다.

"아름다운 분과 함께 술을 마신다라.... 뭔가 악상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어머, 그러면 나중에 들려주셔요. 자, 자. 한 잔 더."

"......."

술에 취하게 해서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걸까. 내 미심쩍은 눈빛에 팽신혜는 사심 없는 눈빛으로 활짝 웃으며 내 잔을 다시 채웠다.

"호호호, 아까 전의 추태는 잊어주세요. 네? 네에?"

팽신혜는 나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시커먼 마음속에 감춰진 잔혹한 성정을 알고 있다.

팽신혜는 나를 술에 취해 쓰러지게 만들려고 하는 중이다. 내가 쓰러지고 난 뒤에, 그녀는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그럼 방법은 간단하지.'

"신혜, 한 잔 더 마실까요?"

일단 술부터 좀 즐기고.

'그래도 얼굴이랑 몸매는 예쁘니까 봐준다.'

"자, 자. 어서 마셔요. 그리고...취하는 거예요."

나는 팽신혜와 대작을 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 * *

"잘 자렴."

팽유월은 간신히 아이를 재우고 몸을 일으켰다. 누구를 닮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젖을 빨 때만큼은 정말 격렬히 빠느라 가슴이 뜯어질 것처럼 아팠다.

"후우."

밤은 늦었지만, 내공 수련을 멈출 수는 없다. 팽유월은 달빛이 가장 잘 드는 창가로 나와 밤공기를 마시며 내공을 쌓았다.

"......."

전신에 내공이 가득 차오르며, 팽유월의 몸에 활기가 돌았다. 아이를 기르는 데 정신적인 고통은 없잖아 있어도 육체적 고통은 내공 덕분에 피로를 싹 날릴 수 있었다.

"......."

다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어쩔 수 없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 무공 수련을 할 때마다 팽유월은 무언가 결여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하하하!

세가 안, 어디선가 여인의 경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팽유월은 대번에 짜증이 일었다.

"팽신혜이 년, 또 술 처먹고...!"

또다시 술병으로 얻어 터져봐야 정신을 차리는 걸까? 여인을 상대로 술에 취하게 만든 다음, 억지로 겁간하는 게 색마와 뭐가 다를까. 팽유월은 당장 밖으로 뛰어내리려-

"아가, 잘 자렴."

하기 전에. 깊은 잠에 빠진 딸에게 진기를 불어넣어 깊게 재운 뒤, 몸을 날려 웃음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오늘은 진짜-"

"하악, 하악, 하악."

안에서 거친 신음이 들려왔다. 팽유월은 술에 절어있는 신음의 주인공이 누군지 깨닫고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 년이 진짜 미쳤나?!'

신음이 들려오는 방 근처로 몰래 날아온 팽유월은 살짝 열린 문틈으로 손을 뻗었다. 언제든 '증거'를 찾으면 들이닥칠 수 있게, 팽유월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연붕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것이 좋은 기회가 되리라.

'팽신혜이 년이 기어이 살림을 거덜 내려고 하는구나.'

눈으로 목격한 뒤, 확실하다면 즉시 가주를 데려오리라. 팽유월이 마음을 다잡은 순간.

응애애애앵.

멀리서 들려온 우는 소리에 팽유월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문틈 사이로 보인 팽신혜는 의자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으으으...."

"...이번만 봐준다."

또다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세가의 재산을 탕진한 증거는 잡았으니, 내일 아침에 족쳐도 문제는 없으리라. 팽유월은 급히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

"응, 응. 그래. 엄마 보고 싶었어? 으읏...."

팽유월은 간밤에 깬 아이를 재우느라 진땀을 뺐다.

* * *

"...씨발, 걸리는 줄 알았네."

팽신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년. 내가 그냥 술만 마실 리가 없잖아. 흐흐."

팽신혜는 입가에 흐르는 군침을 닦았다. 침대에는 전신이 붉게 상기된 연붕이 낮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으흐흥, 맛있겠다. 하아. 잘 먹겠습니다."

팽신혜는 냅다 연붕의 하반신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두 손을 비비며 미소짓는 팽신혜는 보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연붕의 바지를 들쳐 올렸다.

"치마가 더 꼴리는데. 씁. 흐흥, 이런 거로 가려봤자-"

까꿍.

"지...."

팽신혜는 혼란에 빠졌다. 여인에게는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 자신의 이마를 '톡' 때린 것에 사고가 정지했다.

"이게 무슨-"

"역강간."

퍼--억.

팽신혜는 명치를 때린 발길질에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작품후기]

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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