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28화 (128/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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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공적

무붕이 떠난 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일어나지 못한 둘은 서로 손을 잡고 일어난 것에 무안해졌다.

"...흠흠."

"잘 주무셨어요, 언니?"

"그래. 누구누구 덕분에 아주 기절했었지."

"정작 그 분은 자리를 비우셨지만요."

둘을 하룻밤 행복과 쾌락의 도원으로 안내했던 남자는 자리를 비우고 사라졌다. 둘은 쓰게 웃다가 금방 일어나 몸단장을 했다.

"의원님께서 준비는 다 해두고 가셨어요. 금방 밥 해드릴게요."

"응."

당연하게 부엌으로 들어가는 독고연과 당연하게 거절하지 않는 이시아. 둘의 관계는 일견

"내가 부엌에 들어가서 도와줄 거라도 있어?"

"안 돼요. 의원님께서 언니 부엌 들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칫. 나중에 두고봐."

독고연은 부엌의 입구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에휴, 그나저나 너도 참 대단하다. 나야 아버지가 그 모양이니까 그렇다 쳐도, 너는 그래도 아버지가 너 그렇게 아껴주셨는데 그래도 돼?"

"일주일에 두 세 번 얼굴 볼까말까했는데요. 그리고 아버지한테는 좀 그래도 돼요. 왜냐면...."

탕. 독고연은 칼로 채소를 내리치며 옅게 웃었다.

"아버지는 저를 다른 세가의 남자와 결혼시켜서 독고 세가를 이어나가려고 했으니까요. 아버지한테 저는 가문을 이을 후계자일 뿐이랍니다."

"그건 무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 막 병을 고친 딸을 바로 혼인시키려고 든다고?"

"병을 고쳤으니까 이제 혼인시키려고 하는 거죠. 정략결혼. 아마 한 달 내로 구룡 중 한 명이랑 약혼했을 걸요? 그리고 애 낳으라고. 막 하실 거고."

"와...."

오해일까, 아니면 통찰일까? 이시아는 독고연의 회한 섞인 눈빛에 그만 질려버렸다. 맹주와 독고연 중에 누구의 편을 들라고 한다면, 이시아는 독고연의 편이다.

"그래. 잘 했네. 세가의 대를 이을 거라면 솔직히 막말로 무림맹주가 후처를 들여서 자식을 낳으면 되는 거 아니야?"

"아버님은 데릴사위에요. 엄밀히 따지면 독고세가의 피를 이어받지는 않았죠."

"아 참, 그랬지. ...그럼 네가 지금 살아있는 유일한 독고세가의 사람이라는 거네?"

"그렇죠."

방긋. 독고연은 웃으며 칼을 내려놓았다. 보글보글 끓는 국 앞에 선 그녀는 손을 아랫배에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독고 세가의 사람들도 늘어날 거예요. 후후. 조상님들도 이해해주실 걸요? 폭룡이나 다른 잡룡의 아내가 되느니, 천하제일인의 아내가 되어서 독고세가의 미래를 더욱 찬란하게 만드는 거예요. 후후. 아이는 몇 명이나 낳으면 좋을까요?"

독고연은 행복한 꿈에 부풀어있었다.

"흐흥. 10달이면 아이를 낳는다고 하던데. 그럼 10년이면 12명...! 와!"

"12명이나 낳으려고?"

"아. 말 실수에요. 죄송해요."

독고연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을 공기에 수북이 쌓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의원님이 원하시는 만큼 낳으면 되겠죠?"

"만약에 걔가 아이를 낳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럼 아이 없이 사는 거고요. 저는 제가 원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지, 마음도 없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아요. 언니는 달라요?"

"......."

이시아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시 머리를 손으로 비비 꼬던 그녀는 독고연이 평상위에 올린 상 앞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나로서는 조금 미루고 싶은데."

"왜요?"

"나는 어머니가 되기 전에 먼저 한 남자의 여자이자 천마가 되고 싶거든. 누가 그러더라고. 아이를 낳으면 뼈가 뒤틀리고 몸이 변해서 무공을 익히는데 어려워진다고 하더라."

이시아는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부작용을 우려했다. 독고연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는 말이에요. 결혼한 여고수 중에 엄청 강해졌다고 소문이 난 여인은 없잖아요? 아이 낳은 여인 중에서도 마찬가지고요."

"......."

이시아는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나 지금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어."

"갑자기 왜요?"

"뭔가 말이야. 꼭 절대 안 될 것 같다거나 이건 일어날 일이 없지 싶은 일들은 항상 생기기 마련이더라고."

"에이, 그런게 어디있어요."

둘은 수저를 들어올렸다. 둘밖에 없는 식사였지만, 나이대와 사회적 위치, 그리고 살아온 환경이 어느정도 비슷해서인지 대화는 끊어지지 않고 잘 이어졌다.

"아이를 안 낳으면 강해진다? 경험이 없을수록 강해진다? 흐응. 처녀면 강해진다는 논리랑 비슷한 걸까? 아닌 것 같은데."

"제 경우도 나름 맞지 않을까요? 선녀가 아니라 인간으로 약화된 셈이니까? 처녀를 그대로 유지했으면 선녀가 되는 거였잖아요."

"네가 비천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는 근거가 참 궁금하지만 일단 넘어갈게. 그래서 뭐야, 남자들 동자공 익히는 것처럼 여자도 관계를 안 맺을 수록 강하다 이거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네. ...저희는 그 분과 관계를 맺을 수록 강해지니까요."

최소한 내공에 있어서는 확실한 성장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성관계는 강해지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음...뭔가 애매하네요. 관계를 맺을수록 강해진다고 하기에는 애매하지 않아요? 천하제일의 여인이 미혼이니까."

"그렇긴 해. 결혼도 안 해, 남자 추문도 없어. 확실히 그 여자 만큼 깨끗한 여자가 없지. 탕녀가 천하제일의 여인이 되었다면 지금쯤 그 여자는 새까맣게 되었을 걸."

콰득. 이시아는 설삼절편을 입으로 씹으며 중얼거렸다.

"곤륜파 장문인, 처녀일까?"

"제 생각에는 맞는 것 같기도 한데...그래도 천하십대고수잖아요. 나이도 제법 있고."

"그렇겠지? ...설마 그 인간, 하북으로 간다면서 곤륜파로 가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요. 그 분은 천하삼강 중 한 명인 걸요."

제 일 강, 무림맹주 독고자영.

제 이 강, 천마신교 천마.

그리고 제 삼 강. 곤륜파 장문인.

"아무리 그래도 섣부르게 곤륜파 장문인을 건드리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도 그럴게, 곤륜파가 무너지면 바로 마교가 중원으로 공격할 거잖아요?"

"그래. 아버지는 분명 그러실 거야. 지금 가만히 있는 이유도 곤륜파가 앞에서 막고 있으니까."

마교가 전력을 쏟아내면 곤륜파를 봉문을 넘어 멸문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곤륜파의 장문인이 있기에, 마교는 잘 해봐야 양패구상이다.

구파일방 중 하나와 양패구상을 해봐야, 뒤에 기다리고 있을 온갖 문파들을 상대할 전력이 없다면 무의미하다.

"조용히 하북을 다녀올 것 같지는 않은데...과연 2주동안 가만히 있을까? 참새가 방앗간 지나치는 거 본 적 있어? 분명 돌아다니면서 여자들 겁탈하고 다닐 거야. 그래야 '색마는 하북으로 도망쳤다!'하고 행적을 속일 수 있으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독고연은 천으로 입술을 닦았다.

"제가 제안했어요. 색마의 움직임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

"......뭐?"

"여인들을 범하는 거 말이에요. 근데 이왕 범할 거라면 죄없는 아녀자들 말고, 무림의 평화에 해가 될 법한 여인들을 범하라고요. 제가 그분께 말씀드렸답니다. 그분도 흔쾌히 수락하셨고요."

"너...그게 무슨...."

"후훗."

독고연의 의뭉스러운 미소에 이시아는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산해진미라는 건 말이에요. 매일 맛봐서는 질리는 법이에요."

"와, 와...."

이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동감이야."

너무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 * *

"크허어. 이제 좀 살 것 같다."

"흐어엉...."

을소미는 고개를 떨궜다. 나는 일부러 그녀의 꽃잎에서 흘러내리는 겁간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채음보양 달달하구나. 역시 혈교의 잔당이야. 아니지, 혈월녀인가? 네 년은 몇 월(月)이냐?"

"!!"

쾌락에 정신이 없던 을소미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동시에 흰자가 붉게 변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의 목을 손가락으로 눌러 혈맥의 움직임을 멈추게 만들었다.

"왜? 내가 그냥 너를 선택한 줄 아느냐? 허창성 숱한 미인들 중에 왜 내가 너를 범할 대상으로 골랐을까?"

"...네놈은 누구냐."

혈귀(血鬼)로 변하려던 을소미의 기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편보다 더한 남근맛을 본 여인의 태도는 아니었다.

"너를 범한 색마."

"장난치지마라!"

"크흐흐. 어차피 그것만 기억하면 될텐데 뭐가 문제냐? 나는 네가 '혈교의 존재'인지 확인만 하면 되는 것을."

"!!"

을소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 말대로, 혈교는 아직 존재가 드러나면 안 될 조직이다.

"이, 이런...."

"걱정마라. 어디 까발리지는 않을 터이니. 혈영대주가 너를 찾아와 죽이게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너...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모든 것."

혈교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있던 혈강시가 바로 나였으니까. 혈교주의 옆에서 모든 순간을 함께 했으니, 내가 모르는 것은 없다.

"너는 그저 빙색마인에게 겁간당했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어떠냐? 좋은 거래지?"

"...이런 건 협박이 아닌가."

"협박이지. 하지만 죽기 싫으면 그래야겠지?"

"...좋다. 불가항력이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잊지 마라."

을소미-언젠가 혈소미라고 불리게 될 여인은 내게 증오어린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언젠가, 혈세가 도래할 것이다! 장강이, 핏빛으로 물들 것이다! 천하가 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흐흐, 기대하지."

나는 을소미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지금부터 너와 내가 나눈 이야기 중, 혈교에 관한 건 모두 잊는다. 너는 내게 혈교의 잔당이라는 진실이 들켰음을 잊어버린다. 알겠느냐?"

"자, 잠깐.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다."

"뭔데?"

"내, 내 기억을 지우는 걸 막을 수 없지. 하지만...."

을소미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거, 겁간당한 기억은 지우지 마라...! 네놈에게 범해진 것을 떠올리며, 언젠가 네놈을 꼭 죽이러 갈테니...!!"

"흐흐흐."

나는 을소미의 앞에 양물을 흔들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다시 돌렸다.

"뭐? 죽은 남편이 들어가지 않던 곳까지 닿아? 솔직하게 얘기해라. 좆맛은 남겨달라는 거 아니냐?"

"......."

침묵.

나는 그녀의 머리에 내공을 밀어넣었다.

"하여튼 혈교 년들. 죄다 발랑까져가지고는. 남근에 충성을 다하는 탕녀들 같으니라고."

"새, 색마가 그런 말을 해봤, 응기잇?!"

파지직.

내가 불어넣은 진기에 을소미는 몸을 떨며 기절했다. 나는 그녀를 창고 벽에 눕혀놓은 뒤, 다시 사람 크기의 인형이 든 봇짐을 챙겼다.

"노계보다는 완숙계도 제법 맛있군. 오랜만에 옛날 생각나서 즐거웠다."

나는 종이 여러 장을 날렸다. 찢어져 나신이 된 을소미의 몸 위에 부착된 종이는 땀에 절어 은밀한 곳을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소소하게 맛있었다."

별이 세개 반.

나는 삼매진화로 종이위에 별을 그리며 종이를 태운 뒤, 미혼표식구궁진을 해제했다.

"열, 아홉, 여덟...."

하나까지 헤아린 순간.

쾅!

문이 열리며, 머리에 흰 띄를 두른 청년이 나타났다.

"대모님-우웁?!"

"기다리느라 지루했다."

나는 비천빙마, 빙색마인으로서 창고를 습격한 무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침 눈앞에 나타난 이는 을가장의 청년인 듯, 을소미와 상당히 닮아있었다.

"친척인가? 선룡은 아니군."

"이, 이 악적!!"

"잘 먹고 가노라! 으하하!!"

나는 창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었다. 주변에는 무사들이 한참 난리를 피우고 있었고, 나는 빙백신공을 한껏 활용하며 산을 오르듯 발을 디뎠다. 뒤에 사람이 갇힌 듯한 보따리를 흔들어주는 것 또한 잊이 않았다.

"허공답보?!"

"크하하하!!"

광소를 터뜨리며 허공을 달린다. 을소미로부터 빼낸 내공을 마음껏 사용하며 하늘을 달린다. 내가 허공에 발을 디딜때마다 얼음 발판이 생겨났다 사라지며 흩어졌다.

"쫓아올테면 쫓아와봐라, 애송이들아!"

하늘을 얼어붙게 만들어 달리는 색마를 누가 잡을 수 있을까? 나는 천마신공까지 극성으로 일으키며 허창성의 마지막 성벽을 뛰어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 너머에는, 황하를 너머 뻗어나가는 하북이 보였다.

'다음 표적을 향해.'

2주.

호북으로 돌아가는 짧은 기간 동안, 나는 하북에서 색마로서 또 한 명의 여인을 범할 것이다.

하북팽가.

그곳에 있는 또다른 혈교의 잔당을 죽일 것이다.

* * *

허창성 인근.

전각 위에서 허창의 소란을 내려다보는 중년 사내의 뒤로 검은 제복의 남자가 무릎을 꿇으며 부복했다.

"대주. 첩보입니다. 비천빙마라고 하는 자가 독고연을 납치하여 하북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무림맹은 빙색마인을 무림공적으로 지정했다고 하고요."

"비천빙마? 빙마는 야인삼마가 아니던가. 소공녀의 아래에 들어갔다고?"

대주라 불린 중년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우리의 예상이 어긋났다? 지린빙마가 아니고?"

"소공녀의 말에 따르면 빙마는 비천여라고 합니다. 소공녀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빙마는 소공녀의 편이 되었고, 비천빙마라고 하는 남자는 아마도 마교를 사칭하는 자가 아닐지?"

"어디 보자."

대주는 흑의인이 가져온 첩보를 훑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마신공을 익혔다는 것으로 보아 마교의 존재는 확실하다. 빙백신공까지 사용해. 하지만 지금의 빙마와는 명백히 다른 존재다.... 전대의 빙마인가? 마교에 한 번 알아보도록 하시게."

"존명. 참, 그리고 빙색마인이 을소미를 겁간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대주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우리의 존재가 들키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정보를 실토한 흔적은 없었습니다. 겁간이야 당했지만."

"그럼 됐다. 색마에게 당한 거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인이 겁간을 당했음에도 대주는 오히려 기뻐했다.

"오히려 좋지. 흐흐, 여아라도 생기면 제물이 늘어나는 거 아니겠느냐?"

"존명. 추후 임신하는 지, 만약 생긴다면 여아인지도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잊지마라. 교주님의 염원을 위해, 우리는 그 날까지 정체를 숨겨야 함을."

"알겠습니다. 혈세."

흑의인은 사라졌다. 대주는 밤하늘에 걸린 달을 향해 두 팔을 치켜들었다.

"혈세. 그 날, 월녀(月女)가 지상에 현신하는 날.... 온 천하가 피로 물들 것이다."

[작품후기]

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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