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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공적
나는 몸을 돌려 독고 세가를, 무림맹을 떠났다. 밖에는 무붕 의원을 찾는 수많은 이들이 즐비했지만, 나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의원님, 이쪽입니다."
"고맙습니다."
무림맹 무사들의 호위를 받아 인적이 드문 길로 빠져나갔기에, 나는 사람들의 이목에서 벗어나 무사히 허창을 탈출했다. 무사들은 나를 향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안내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오."
무사들을 이끄는 대장, 부총관이 나를 숲속 인근으로 인도했다.
"감사합니다, 부총관님."
"별말씀을. 내가 더 고맙소."
왠지 모르게 그는 내게 뜨뜻미지근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존경을 표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상당히 낯익은 남자였다. 독고 세가의 먼 친척이라기보다는....
'남궁유린을 닮은 것 같기도?'
무공을 사용하고 있지를 않으니 무공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훤칠한 얼굴 덕분에 금방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남궁세가.
"조카의 구명지은을 잊은 건 독고 세가 뿐만이 아니오. 대 남궁 가 또한 잊지 않을 것이오. 악독한 소공녀로부터 조카를 치료해준 것도, 그...일도."
"......글쎄요. 소공녀에게 입었던 부상이야 응당 제가 치료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것 말고도 또 제가 한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군요."
내 말에 부총관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남궁이 무붕 의원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건 여러 의미가 있지만, 그래도 안 좋은 일을 굳이 언급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하지만...잊지 않겠소."
꾸벅. 부총관은 허리까지 숙이며 나를 배웅하고 되돌아갔다. 나는 아무도 없는 산속에 홀로 남겨진 채, 산길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무림맹의 무사들이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한들 결국 문파로서 묶인 자들이다. 마교 수준의 은밀함은 당연히 기대도 안 했고, 나는 멀찍이 수풀에 숨어 숨을 죽여야만했다.
"젠장! 어디 갔어?!"
"분명히 이 근처까지 왔었는데?"
"신출귀몰하다더니...역시 무공을 익혔다! 경신법을 써서 사라진 거야!"
내가 사라진 인근에 한 무더기의 무사들이 나타났다.
"의원님!! 어디 계십니까! 부디 저희 혼가장에 와주십시오!"
'그런 세가는 없다.'
"의원님!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부디 제발, 제발!!"
'딸내미여도 갈까 말까인데, 아들이라고 구라를 쳐? 발기부전인 놈이.'
아무도 내 흥미를 끌지 못했고, 아무도 내 발걸음을 되돌릴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천마대팔식."
나는 그들의 눈을 피해 급히 남서쪽으로 달렸다. 일부러 발길이 드문 산세를 밟아, 허창성을 빙 둘러 호북으로 향하는 남서쪽대로 인근으로 향했다.
찾아야 하는 것은 사람이 며칠은 지낼 수 있을 법한 폐가. 다행히 나는 사람이 몸을 오랫동안 숨기기에 적합한 곳을 하나 알고 있다.
'분명 이 근처에 있었는데.'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적당한 집이 나타났다. 인적이 끊겨도 10년은 넘게 끊긴 듯한 폐가는 조금만 손을 봐도 사람이 이 주일 정도는 숨죽이고 지낼 수 있을 법했다.
"완벽하군."
주인은 이미 죽었다. 이제 내가 주인이다.
"천마구궁진, 개진(開陣)!"
나는 그곳에 미혼표식구궁진을 설치했다.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드는 데 하루면 충분하지."
그리고 내공을 최대한 활용하여만 하루 동안 폐가를 고치고 깨끗이 정돈한 다음, 제법 그럴듯한 초가집으로 개축하는 데 성공했다.
'여자 둘이 잠시 살기에는 충분.'
독고연과 이시아, 두 여인은 이곳에서 잠시 머물게 될 것이다.
이시아는 아무 의심 없이 허창을 빠져나오는 것으로.
독고연은 빙색마인에게 납치당하는 것으로.
그리고 나는 빙색마인으로서, 무림맹의 탐지를 망가뜨리기 위해 둘의 은신처와 정반대인 하북으로 달릴 것이다.
'둘이 잘 지내겠지? 살림살이 다 차려놨는데 알아서 잘하겠지.'
독고연이 이시아를 일방적으로 보살피고 살겠지만, 미리 음식도 한 상 차려놓고 떠나는 만큼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시아나 독고연이나 함부로 진의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아니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장치는 남겨둬야겠군.'
나는 목판 하나를 찾아 위에다가 강기로 글귀를 적었다. 이걸 보고 나면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으리라.
- 나가면 대머리.
아무리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도, 행동이 사랑스럽지 않은 여인을 어찌 계속 품고 지낼 수 있으랴.
기껏 열심히 나가지 말라고 준비를 다 해놨더니, 며칠을 참지 못하고 약속을 어긴다?
"...금방 다녀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하루가 지나고, 약속된 시간이 되었다. 나는 미혼표식구궁진을 빠져나오기 전, 역체변용술로 약속된 외형으로 바꾸었다.
우둑, 우두둑.
나는 물가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완벽히 만족했다. 이시아의 주문이 섞인 외모는 내게 너무나도 이상적인 중년 무붕. 내가 상상한 나의 30~40대 나이의 얼굴.
내공이 중후하여 미중년 같으면서도 수염을 깎으면 30대 초반-아니 20대 후반이라고 봐도 무방할 싱그러운 젊음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이시아는 굳이 자신을 지켜줄 '호법사자'로 중년 무붕을 택했다.
"이시아도 참 솔직하지 못하지. 흐흐, 역시 이게 나한테는 잘 어울린다니까."
철컹.
나는 인근 민가에서 훔친 검 두 자루를 허리에 채운 뒤, 미혼표식구궁진을 떠나 초상비로 하늘을 날았다. 천마대팔식으로 순식간에 도착한 대로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역시.'
허창성 인근, 북문으로 빠져나가는 길의 가운데.
"흐하하! 마교 소공녀, 네년도 오늘로 끝이다!!"
홀로 당당히 허창성을 빠져나온 이시아의 근처에는 그녀를 포위한 괴한들이 한가득 깔려있었다.
* * *
백도에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한다.
그 중 마교에 은원을 가진 이들도 존재한다.
천산에서 튀어나온 몇몇 마인들에 의해 가족, 친구, 사제를 잃은 이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중원 백도 무림인의 마교인에 대한 증오는 좀처럼 가라앉힐 수 없다. 현재의 천마 또한 현역 시절에 한창 날뛰며 은원을 만들어놓았기에, 풀리지 않는 원한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짙어져 왔다.
"잡았다, 소공녀!"
스승을 십마에게 잃은 종남파의 무사부터 시작하여 온갖 무인들이 소공녀를 에워쌌다.
그들 중에는 소공녀에 대한 음심(淫心)을 품은 이들도 있었다. 복수감으로 활활 불타는 무인들의 틈에 섞인 그들은 소공녀의 잘 빠진 몸을 구경하며 침을 뚝뚝 흘렸다.
"제가 만든 은원은 딱히 없습니다만."
"닥쳐라, 이 마녀!"
"아하, 그대는 남궁세가의 무사입니까? 그렇다면 인정합니다."
지난 용봉지회, 소공녀는 대전 상대들을 거의 재기불능의 피떡으로 만들어놓았다. 의원 무붕이 그들을 전부 치료하긴 했으나, 많은 이들이 피해를 본 것 또한 사실이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좀 너무 강해서. 그런데 그런 거로 저를 어떻게 해보려하시다니...풋."
소공녀의 눈에 붉은 안광이 스쳤다. 동시에 그녀는 땅을 가볍게 굴렀다.
쿵---!!
한 번의 진각에 포위망의 절반이 무너져내렸다. 순식간에 땅을 짓눌러버린 소공녀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손으로 정리하며 이죽거렸다.
"천마천근추."
"이, 이 년!"
"누구 보고 감히 이 년이라고 부르는 겁니까? 죽고 싶어요?"
"힉...!"
잘근잘근. 소공녀는 진각을 밟은 발을 좌우로 비틀었다. 마치 벌레를 짓밟는 듯한 행동에 무인들은 모두 침을 삼켰다.
"절정 고수...!"
"흐흐, 하지만 우리도 절정 고수가 있다!"
"음!"
복면에 흑의까지 본격적으로 정체를 감추기 위해 나선 남자는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마교 소공녀! 형님의 복수를 하러 왔다!"
"......?"
소공녀는 이상을 감지했다. 걸걸한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남자 같지는 않았다.
"하하, 다들 저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것 같은데...."
소공녀는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며-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모든 무사의 무장이 해제되었다.
"크아악!!"
검이 잘려 나가는 건 예사로, 검을 쥔 손을 얻어맞거나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 깜짝할 새 30명 넘는 무인들이 일제히 쓰러지자 포위망은 완벽하게 무너졌다.
"죽일까요, 소천마?"
갑작스럽게 난입한 흑의의 중년남성은 소천마를 호위하듯 옆에 섰다. 소공녀는 그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담긴 눈빛으로 눈을 반짝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러지 마요.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네, 네 놈은 누구냐?!"
"나? 알려줄 이유는 없지."
철컥.
중년남성은 검을 설렁설렁 휘둘렀다. 하지만 달려드는 어떤 무인들도 남성의 간격에 들어가지 못했다.
"초절정!"
"이 무슨 무위란 말인가.... 설마 말로만 듣던 사천 검담...?!"
"갈-----!!"
중년 남성은 호통을 치며 살기를 뿌렸다.
"검담과는 다르다, 검담과는! 나는 소천마를 지키는 마교제일검, 검붕이다!"
"검...붕!"
"검담이 아니고?"
"시 건 방 진!"
검담, 아니 검붕은 사자후를 내지르며 무인들을 압도했다. 칼날 같은 노성에 무인들은 모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고, 검붕은 금방이라도 살검을 휘두를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몸은 마교제일검! 감히 검담 따위와 비교를 하느냐!!"
"검붕."
천마신공을 일으키며 눈을 부라리던 검붕은 소공녀의 말에 바로 기를 잠재웠다. 미친개가 주인의 말 한마디에 헤실거리며 꼬리를 흔드는 모습에 무사들은 핏기가 가셨다.
"기절만 시키세요. 죽이지도, 아프게 하지도 말고."
"소천마, 하지만!"
"명령입니다."
어째서일까. 소공녀는 검붕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에 웃음을 참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공녀의 명령에 기세를 다잡은 검붕은 검 한 자루를 치켜들며 무인들을 겨눴다.
"소천마의 명을 따릅니다."
고고고.
흉흉한 기세가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인들은 저마다 침을 삼키며 검을 들었다.
"조심해라! 상대는 소공녀의 호법사자! 검붕인지 검담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필시 강한-"
빠아악---!!
"검담 아니다!"
검붕의 몸이 사라지기 무섭게, 무인들이 하나둘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각 뒤.
마교 소공녀를 쫓기 위해 달려온 무사들은 이마가 벌겋게 부어오른 무인들이 땅에 널브러진 것을 목격했다. 일 자로 눕혀진 자들은 한 명 한 명이 한자의 한 획이 되었고, 기절한 무인들로 만들어진 글자에 무사들은 치를 떨었다.
추(追), 살(殺).
"쫓아오면...죽인다?"
최후통첩이었다. 쓰러진 무인들의 목에는 나뭇가지로 긁은 듯한 혈선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를 이리도 허망하게...!"
마교 소공녀는 유유자적하게 허창성을 떠났다.
* * *
"마교 소공녀는 검붕...아마도 차기 검마로 추정되는 이의 호위를 받고 떠났습니다."
무림맹은 안도와 불편의 한숨을 동시에 내쉬었다.
소공녀가 진짜 별다른 의도 없이 이봉결정전의 자리를 빛내주기 위해, 자존심 때문에 왔다는 걸 확인해버렸기 때문에 안도했다.
"역시 소천마. 어린 치기로 자존심을 아직 굽힐 줄 모르는군요. 하하."
"음...."
독고자영은 또 다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입에 담지 않았다. 애초에 믿지도 않을뿐더러, 그걸 자신의 입으로 얘기하면 천산에 있던 천마가 길길이 날뛰며 유언비어를 퍼뜨린 독고자영을 죽이러 올 것이다.
- 내 딸이 여인과 사랑을 한다고?! 이놈! 고자영이 네 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때로는 진실이 목소리 큰 놈에게 먹혀 묻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럼 비천빙마와는 무슨 관계요?"
"아니, 빙마는 '비천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빙마는 여자입니다."
"소공녀의 말을 믿을 수 있어야지. 그럼 다른 십마도 비천여도마, 비천여적마, 비천여환마라고 부르는 거요?"
"아니, 그놈들은 남자니까 비천여가 아니지요! 만약 진짜로 여자인 마인이 있다면, 그때는 비천여염마든 비천여검마든 아무렇게나 부르지 않겠습니까."
"......."
독고자영은 묵묵히 눈을 감았다. 지리멸렬한 회의는 좀처럼 명쾌한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맹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붕 의원을 배웅하고 세가의 사람들을 배웅하기 위해 하루 휴가를 냈던 부총관이 급히 돌아왔다.
"저잣거리에 이런 게!!"
"!!"
맹의 사람들은 부총관이 든 얼음장처럼 빳빳한 종이에 소름이 돋았다. 독고자영은 급히 종이를 붙잡았다.
[네놈의 소중이를 훔쳐 가노라.]
"이, 이게 무슨...?!"
독고자영은 전신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
파지지직!!
독고 세가의 장원에 침입자를 알리는 기파가 울려 퍼졌다. 독고자영은 창문을 부수고 전각 지붕 위를 뛰어, 허공답보에 준하는 움직임으로 장원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연아!!"
무릉도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맹주에게 가장 소중한 것, 소중한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연아, 연아!!"
미친 듯이 장원 안을 뛰어다니다가, 핏방울이 굳어있는 곳을 따라 달려간 순간.
"뭐...라고...."
[고자영. 선생은 앞으로 아이를 볼 수 없는 몸이오. 의사, 백.]
얼어붙은 화단위에는 새하얀 머리칼 몇 가닥만 남아있었다.
[작품후기]
독고연, 납치를 당하다!
범인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