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24화 (124/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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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공적

사흘 뒤.

이봉결정전의 마지막, 일봉결정전이 열리는 날이 되자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비록 이전 2만 명보다는 훨씬 적은 수가 모였지만, 그들의 눈에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혹시나 또다시 비무를 해주지 않을까?

태극화, 그리고 소공녀.

검을 놓고 권을 선택한 사공희와 무림 정파 수준의 쌍검을 휘두르는 소공녀의 비무는 사람들을 충분히 만족시켰다.

오죽하면 경기 당일 불미스러운 일로 경기장이 무너졌는데도 만족하며 떠나간 사람이 있었겠는가?

- 솔직히 기대는 안 되는데 흑백이화 한 번 더 보러 가는 거지.

- 이 사람아. 아미파에 실례야.

- 아무렴 그것만 기대되는가? 육봉 사이에도 순위를 다시 재야지!

구룡의 으뜸이 남궁패인 것처럼, 육봉도 새로 순위를 정렬해야 한다. 누가 가장 으뜸인지 정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대했다.

- 독고연, 유설라. 과연 둘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

- 독고연이 만약 다른 4봉과 붙는다면 이길 수 있을까?

- 독고연이 태극화와 소공녀와 붙는다면, 과연 전부 이길 수 있을까?

모두의 기대감이 구름처럼 부풀어 올랐고, 일봉결정전이 열리는 당일. 무림맹의 비무장으로 들어가는 관객들은 철저한 검사를 거친 뒤에 객석에 앉으며, 각 자리에 놓인 소책자를 집어 들었다.

"""독고연이랑 유설라 비무 떴소?!?!"""

1. 일봉결정전 개막식.

2. 무림맹주 훈화

3. 아미파 장문인 훈화

4. 개방 방주 훈화

5. ....훈화

.......

8. 하남성주 훈화

9. 유설라 대 정자 사태

10. 폐막

"""없...다고...."""

양심상 자리를 지키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다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아! 맹주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하는 것이오!

- 이야, 하마터면 크게 속을 뻔했군!!

- 흐허허! 맹주도 장난이 심하지.

그렇게 모두가 껄껄 웃으며 아미파 제자들의 대결에 환호를 보냈다. 예상외로 두 여인의 비무는 접전이었고, 유설라가 정자 사태를 힘겹게 이기는 것으로 비무는 끝났다.

빙백봉, 유설라.

검봉, 독고연.

이봉은 결정되었고, 모두가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정작 이미 5번째 봉황이 된 독고연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섭점검을 향해 눈을 돌렸다.

"어, 음. 검봉 독고연은 몸이 좋지 않아 자리를 비웠습니다."

독고연이 아프다? 그럴 수 있다. 그녀는 환자였으니까. 오히려 지금까지 각혈 한번 없이 싸워온 게 장할 정도였다.

그럼 자리를 비운 삼봉은?

"...연희봉 모용란은 가문에 일이 생겨 어제 급히 떠났습니다. 와백봉 제갈선 또한 일신상의 사유로 요양 중입니다. 어, 음, 산주봉 방철수는 녹림채에 산불이 나서 녹림왕과 함께 급히 돌아갔습니다."

삼봉, 부재.

저마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지만 과연 누가 그걸 믿어줄지. 사람들의 눈은 비어있는 나머지 자리에 크게 실망했다.

-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 어떻게 되기는 뭘 어떻게 돼. 여기서 끝난 거지.

빙백봉이 된 유설라는 비무장 한 가운데 홀로 멍하니 서 있었다. 섭점검은 금방이라도 폭동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에 또다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제가 상대해드리죠."

철컥. 철컥. 철컥.

관객석 한쪽에서 검 세 자루가 날아와 유설라를 에워쌌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어검술에 모두 환호성을 내뱉었다.

출렁, 출렁.

비무장 한쪽에서 거대한 존재감과 함께 그녀가 나타났다. 비무장을 가린 구름이 반으로 갈라지며, 태극화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비췄다.

"한 때. 아주 잠깐이나마 태극봉이었던 자로서 빙백봉에게 비무를 청하고자 합니다."

우오오오오오!!

모두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삼봉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던 태극화-백도제일화가 빙백봉에게 직접 비무를 신청했다?

"우오오오!! 사공희! 사공희! 사공희!!"

태극호의 이름을 광적으로 연호하는 사람 중에는 하남성주도 있었다. 그의 뒤에 호위로 선 무장들은 창끝에 '중원 최고 미녀 태극화'라는 기를 달고 펄럭거리고 있었다.

철컹.

유설라 또한 검을 뽑았다. 자신감 넘치는 사공희와 달리, 유설라는 거의 반쯤 울상이었다.

"흑,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니고...."

유설라는 태극화의 눈동자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다. 북해빙궁의 전 빙궁주이자 어머니가 남편이 첩질할 때 눈을 부라리던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 내 남편한테 꼬리친 년이 너구나!

자신이 꼬리친 게 아니라 색마가 양물을 곧추세우고 쑤셔 박았지만, 상대는 논리와 이성으로 진정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무공의 급이 아니라, 무붕 의원의 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유설라 임시 명명 '붕가장(鵬家場)'의 안주인 중 한 명이 바로 태극화였다.

즉, 상대는 소공녀와 배분상 같은 항렬의 존재다.

"그렇다고 마냥 질 수는 없지."

고고고고.

유설라의 눈동자가 백색으로 물들었다.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빙백신공을 일으킨 그녀의 검에서 한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제 걸 빼앗아가셨으니, 제가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우오오오오오!!

패기 넘치는 도전자의 말에 모두가 열광했다. 모두가 바라던 그림이 서서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자고로 무림인이란, 최강에 도전하는 자들의 모습에 열광하기 마련이다. 백도제일화에게 도전하는 아미파 신진 여고수를 향해, 태극화를 응원하는 자들조차도 환호하며 빙백봉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훗."

태극화는 한 손을 단전 위에 올리며, 다른 손을 옆으로 뻗어 검을 움켜쥐었다. 다른 두 자루의 검은 흑백의 봉황이 날개를 펼치며 검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제 것이었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일봉결정전의 마지막.

모두가 학수고대하던, 백도제일화 별호 방어전이 시작되었다.

* * *

"연, 아쉽지 않소? 그대가 나가면 백도제일화는 그대의 것인데."

나는 침대에 누운 독고연의 옆에서 혈맥에 침을 꽂으며 물었다. 십팔음뇌절맥은 치료되었지만, 아직 그녀의 몸에 남아있는 선기의 잔재는 침으로 빼내야만 했다.

"괜찮아요. 그건 희 언니 몫인걸요."

독고연은 웃으며 백도제일화의 호칭을 사양했다. 이미 그녀는 십팔음뇌절맥을 치료하기 전에도 전력을 다한 사공희를 일검으로 쓰러뜨렸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소?"

"저는 별호에 딱히 욕심이 없답니다."

몸에 남아있는 선기의 영향일까? 무림인이 모두 목말라하는 별호에 초연한 그녀의 모습을 보니 해탈한 도인 같았다.

"그보다 저는 다른 걸 가지고 싶어요."

"뭘 가지고 싶소? 혹시 그대도 쌍고응검 같은 검이 필요하오?"

"네.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커다란 육검(肉劍)이요."

"......."

해탈이 아니다. 지상에 묶인 선녀는 인간의 오욕칠정을 깨닫는 거로 모자라, 관심의 방향이 다른 곳으로 향했을 뿐이다.

"그거야 뭐 앞으로 평생 가질 건데 뭘 또 그리 원하시는가."

"부으우."

독고연은 볼을 부풀리며 투정을 부렸다.

"아직 저는 그걸 완전히 소화해내지 못했는걸요."

"어머, 얘 좀 봐라. 지가 부족해서 양물 반도 못 먹은 걸 두고 끼 부리네?"

싸아아.

갑자기 방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빙마도 없고 빙백신공도 없지만, 설산 꼭대기보다 더 추운 하늘에서 내려온 소천마가 훼방을 놓았다.

"야. 이 건 내 거야. 비천색마는 소공녀 거라고."

"야박하시네요, 언니."

"야박...?! 너 지금 나 작다고 놀린 거지?! 내가 모를 줄 알아?"

"헤에, 아무도 그런 얘기 안 했는데...."

짧은 대화 사이에 몇 번이나 합이 오가는지 모를 정도다. 나는 흥분해서 화를 내기 직전인 이시아를 옆에 앉혔다.

"진정하시오. 그대의 마음이 장강처럼 넓은 건 내가 잘 알고 있소. 연, 자꾸 시아를 자극하지 마시오."

"네, 의원님. 의원님 말씀대로 시아 언니는 참 넓은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에요."

콩. 나는 침을 놓던 손으로 독고연의 정수리를 쥐어박았다. 그리 아프지는 않겠지만, 머리를 붙잡으며 눈을 깜빡이는 그녀는 몹시 놀랐다.

"서로 싸우지 마라. 머리 아프다."

"...피. 서로 싸우게 만들어놓고는."

"그건 공감이야."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기껏 둘의 싸움을 중재하려고 들었더니, 독고연과 이시아는 서로 편을 먹고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연. 어떤 놈이 말이야, 자기는 여러 여자 가지고 싶어 하면서 여자들은 자기만 바라보기를 원하는 놈이 있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이기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네요. 여러 여자 울리고 다닐 것 같아요."

"그렇지?"

"저는 그런 거 좋아해요."

"야! 그럴 때는 나랑 같이 이거한테 압박을 하는 거야!! 딴 여자 그만 좀 늘리라고!!"

이시아가 빽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내 귀에는 인간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 죄송해요. 정정할게요. 역시 그런 남자는 싫어요."

"그렇지? 이거 봐. 너도 이제 좀 절조를 지킬 필요가 있어."

"하지만 의원님이 그러는 건 딱히 싫지는 않네요."

"...얘 지금 나 놀리는 거 맞지?"

"후훗."

역시 선녀는 무섭다. 미래천마가 파천신검을 상대로 한 끗발 아래였던 건 미래나 과거나 현재나 어느 때든 비슷한 것 같았다. 독고연은 이시아보다 여러 면에서 아주 조금씩 앞서나가 있었다.

다만, 한 뼘을 훌쩍 넘는 키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완성되어가는 이시아의 몸과는 달리, 독고연은 아직 한참 자라야 했다. 현재 그녀는 이시아는 커녕 사공희의 눈높이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였다.

"에휴. 됐어. 어차피 밤 되면 내가 이기니까."

"읏...!"

정정. 독고연이 이시아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요소가 하나 있다. 이시아는 내 어깨에 기대듯 몸을 옆으로 놓으며 대놓고 내 고간을 향해 얼굴을 눕혔다.

"파, 파렴치해요!"

"뭐래. 요망한게."

"요, 요망?! 의원님, 언니가 저보고...!"

"......."

부정할 수는...없지 않나. 나는 입밖으로 튀어나오려던 생각을 간신히 속으로 꾹 집어넣었다. 그에 이시아는 피식 웃으며 의기양양해졌다.

"내 남편 양물 맛 한 번 보더니, 집 떠나려고 하는 공주님이 그러면 요망한게 아니고 뭐야?"

"남편이라니."

"뭐래. 그럼 나랑 결혼 안 할 거야?"

이시아의 말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애초에 내 아내로 삼겠다고 선언했던 만큼, 나는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독고연이 신경 쓰일 뿐.

"의원님."

"음."

"저는 아이가 둘 있었으면 좋겠어요."

"와, 얘 진짜!!"

이시아는 독고연을 삿대질하며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야! 이러고도 네가 요망하지 않다고 할 수 있어?! 아니, 요망을 넘어 음탕해!"

"색마의 부인이 되는 건데 음탕한 게 뭐 나쁜가요? 대신 한 사람한테만 음탕하면 되는 거죠."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모습에 이시아는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머리를 쥐어뜯으며 내 고간에 얼굴을 묻었다.

"비천, 나 얘 슬슬 무서워지려고 해."

"나도 마찬가지요."

"어머, 연이 왜 무서워요?"

끼이익.

문이 열리자, 독고연과 이시아는 숨을 멈췄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여인은 내 바로 뒤에 선 채 말을 이었다.

"전 귀엽기만 한데. 안 그래요, 상공?"

"...빙마는 어떻게 했나?"

"유설라요? 당연히 이기고 왔어요."

사공희는 엄지로 볼 근처를 가볍게 훔쳤다.

"주제도 모르고 제 자리를 넘보길래, 태극혜검으로 아주 본때를 보여줬답니다. 후후후."

사공희는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낮게 웃었다. 그 웃음에 나도, 독고연도, 이시아도 표정이 굳었다.

"어머, 왜 그러세요. 꼭 못 볼 걸 본 것처럼."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 참, 상공."

뭉클. 사공희는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내 볼을 쓰다듬었다. 무거운 가슴을 내 머리 위에 놓은 그녀는 나를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계획대로 하는 거지. 걱정 마라, 계획은 완벽하다."

"후훗, 그렇죠? 역시 상공이세요."

나는 사공희의 가슴을 아래에서 받쳐 들어 올린 뒤, 비어있는 내 옆을 가리켰다.

"저는 먼저 호북에 가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후후, 둘이 당분간 같이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사공희는 이시아와 독고연을 번갈아 봤다.

계획상, 우리는 셋으로 찢어져야 했다.

무당파와 함께 호북으로 귀환하는 사공희.

그리고 미혼표식구궁진에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버텨야 할 독고연과 이시아. 둘은 허창성 인근의 산속 폐가에 미혼표식구궁진을 설치하고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내가 무림맹의 시선을 돌릴 때까지.

"우으, 나 진짜 어떻게 하지.... 비천, 빨리 돌아와야 해. 안 그러면 나 혼자서 쟤랑 계속 있어야 한다고."

"걱정마세요. 제가 가사는 완벽하니까요."

"......."

사공희의 표정이 가히 좋지 않아졌지만, 독고연은 가사만큼은 우리 중 나와 견줄 만큼 뛰어난 존재였다.

아무렴 독고 세가, 무릉도원을 혼자서 관리하며 어여쁜 화단까지 만든 장본인이다.

빙마가 말한 '붕가장(鵬家場)'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인재다.

"그래서 말인데요, 상공."

"어디로 도망칠 거야? 그걸 얘기 안 해줬잖아."

좌시아, 우공희.

"저를 납치하기로 한 빙색마인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오...?"

정면의 독고연. 뒤는 등받이 의자라 퇴로가 막혔다.

"음...."

어디여도 상관은 없다. 하남 인근으로 도망칠 곳은 많다. 산둥도 괜찮고, 산서도 나쁘지 않다. 안휘는 내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 마침 호북과 완전 반대 방향으로, 무림맹의 포위망에 혼선을 주기에 안성맞춤이다.

"하북."

독고연을 납치한 비천빙마는 하북으로 도망칠 것이다.

[작품후기]

붕가장 가주 비천색마 무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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