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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날다
개막식이 있는 날이라고는 하지만, 개막전이 없는 건 아니다.
총 8개 조로 편성된 꽃들의 전쟁은 용봉지회와 마찬가지로 며칠에 걸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지금 어딘가 창고에서 격하게 숨을 헐떡이고 있는 이가 다음 날 1경기가 있다면, 오늘 당장 비무가 있는 사람도 있는 셈이다.
- 개막전에 앞서서, 이 자리를 빛내주신 수많은 문파의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무당파의....
여러 문파에서 참가한 수많은 내외빈을 소개하느라 한 시진 가량 누군가가 목 아프게 열심히 외치는 동안, 독고자영은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핑계로 잠시 빠져나왔다.
[맹주 특별 대기실.]
무림맹주 이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방 안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독고자영은 바로 특별 대기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아!"
"아버지."
연보라색 무복을 차려입은 독고연은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독고자영을 맞이했다. 전체적으로 하얀 무복에는 각혈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몸은 괜찮느냐?"
"네. 의원님께서 이런 것도 주셨어요. 이걸 입안에 넣고 있으면 각혈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독고연은 자신의 손안에 있던 당과를 하나 꺼내들었다. 독고자영은 달콤한 당과의 향에 속으로 부글부글 끓었다.
각혈하지 않는다면서 당과를 줘? 이거 그냥 동네 사이비들이 약이랍시고 주는 거 아닌가? 연이를 속인 건가?
의심암귀는 점점 깊어지고, 의원 무붕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려던 찰나.
"그렇구나. 정말로 괜찮느냐? 뭔가 독이라도 든 건 아니고? 내가 검사를 해봐도 되겠느냐?"
하지만 속내를 숨기고 인자한 미소를 짓는 것이야말로 무림맹주로서 가져야할 기본 중의 기본. 독고자영은 독고연의 손을 잡으며 당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요. 이거 제 거예요."
"여, 연아?"
"의원님께서 저를 위해 만들어주신 거라고요. 아버지, 이건 안 돼요."
"뭐가 들었는지 알기나 하니?"
"인형설삼이요."
"......."
무붕에 대한 신뢰와 의심이 더욱 깊어졌다.
'누가 인형설삼으로 당과를 만들어?'
맹에서 인형설삼을 따로 내어주지 않았으니 가지고 있던 약재를 털었다는 것에 신뢰감이 들었고, 아무리 불치병이라도 인형설삼을 당과로 만들어 약재로 줬다는 것에 의구심이 들었다.
아무리 신의의 제자라고 한들, 어디서 인형설삼을 구해왔단 말인가? 진짜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형설삼을 사용한 건가? 아니면 오기 전부터 독고연을 위한 약을 만들었던 걸까?
"그, 그래. 네가 몸이 괜찮다면 다행이다. 아픈 곳은 없지?"
"네. 의원님께서 돌봐주신 뒤로 한 번도 각혈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독고연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기수식에 독고자영은 침을 꿀꺽 삼켰고, 독고연은 대기실 벽을 향해 검을 가볍게 튕겼다.
서걱!
"!!"
벽에 아주 작은 자상이 생겼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지도 못했을 쾌검이었으나, 독고자영의 눈에는 검의 궤적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잘 보였다.
"파검, 태극?!"
그림이 그려졌다. 무당파의 태극검을 상대로 독고구검이 빠르게 검을 찌르고 들어가, 원을 그리며 수세를 이어나가는 태극검을 강제로 깨뜨리는 것이 눈에 훤했다. 독고자영은 입을 쩍 벌리며 독고연의 성취에 깜작 놀랐다.
자신이 20살에 닿지도 않은, 초절정의 경지에 이미 딸은 올라가 있었다.
"이렇게 검을 사용해도 아프지 않아요. 의원님 덕분에."
독고연은 얼굴을 붉히며 당과를 어루만졌다. 독고자영은 한 번 더 소름이 돋았다.
'한 손으로!'
독고연은 한 손은 당과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만 검을 검집에서 튕겨올리듯 뽑아들고 검을 잡아 베어그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눈 깜빡할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사공희 언니와 소공녀 언니께서 도와주셨어요. 멋대로 비무를 해서 죄송해요, 아버지."
"허...."
'계획대로다!'
은근히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여 기대하고 있었건만, 설마 진짜로 그런 일이 있을 줄이야. 독고자영은 딸에게 너무나도 좋게 흘러가는 상황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무붕 의원의 힘으로 병이 점점 나아가고, 젊은 여고수들이 서로 무를 나누는 벗이 되어 함께 성장하며, 흑백이 한데 어우러져 평화를 추구하고, 이왕이면 그 중에서도 딸이 가장 으뜸이 되는 상상이 현실이 되어가는 것에 독고자영은 괜히 울컥했다.
딸에게 너무 좋게 흘러가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딸이 남들 앞에서 자신의 미모와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연아, 혹시 두 소저와 비무는 어떻게 되었느냐?"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독고자영은 호기심을 참지 못했고 질문했으나, 독고연은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밀이에요. 그건 언니들한테 실례에요."
"크...!"
부친에게도 말하지 않는 이 착한 심성을 보라! 병약이라는 요소만 빼면 '완벽'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어울리는 딸은 이제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로다!'
항상 자랑스러워 했던, 하지만 그 뜻을 펼치지 못해 아쉬웠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독고연이 하늘을 향해 비상하려는 날갯짓에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부인, 보고있소? 우리 딸이 드디어 천하 사람들의 앞에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되었소.'
백발자안? 모발의 변화는 초절정 고수의 상징과도 같은데 그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연이, 이제 어엿한 여인이 되었어! 시집을 가도 되겠구나!!"
"네?!"
의젓하게 검기를 다잡던 독고연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항상 병약하고 죽을 것만 같았던 독고연이 그 나이대 여인답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독고자영은 괜히 흐뭇해졌다.
"하하, 우리 연이도 이제 봄을 탈 나이가 되었구나. 부끄러워하기는."
"그, 그럼 혹시.... 무붕 의원님을 보내신 것도 그런 의도가 있으셨던...건가요?"
"뭐? 무붕 의원? 그 이름이 갑자기 왜 나와?"
설마 시집을 무붕 의원에게 가라는 거로 오해한 건가? 독고자영은 심사가 순식간에 뒤틀렸다.
'감히 내 딸을?'
신의의 제자? 그딴 건 지금 전혀 중요치 않다. 감히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과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다? 본인들의 생각이 없어도 그런 그림이 그려지는 것 만으로도 불쾌하고 짜증나고 화가 치민다.
하지만.
- 상공께서 제 생명을 구하셨으니, 저를 책임지셔야 합니다.
구명지은을 입은 여인이 남자에게 반하는 것은 독고자영이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독고자영은 독고연의 모습에서 사별한 아내의 모습이 비쳤다.
"......연아, 무붕 의원이 마음에 드느냐?"
"마음에 들고 안들고를 떠나서...저를 구해주실 지도 모르는 생명의 은인이 되실 분인 걸요."
독고연은 고개를 푹 숙이며 당과를 만지작거렸다. 아직 독고연의 병은 완치된 것이 아니며, 무붕은 병세를 억눌러 줬을 뿐이다. 하지만 독고연은 지금 누가봐도 정상인이었다.
만약 진짜로 병을 고친다면-
"...마, 만약 아버지께서도 좋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도...."
그것만으로도 독고연이 반할 요소는 충분했다. 날개가 부러져 날아오르지 못하는 제비가 날갯짓을 할 수 있게 해줬는데, 어찌 제비가 은인을 위해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으랴?
'그녀도 그랬지.'
독고자영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독고연과 시선을 맞췄다. 이들 가족에게 있어서 금기나 다름없던 이야기지만, 짙은 피의 인연에 독고자영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참으로 네 어머니를 닮았구나."
"어머니요...?"
"그래. 그녀도 내게 구명지은을 입었지. 생명의 은인에게...반했었다. 녹림의 무리가 춘약으로 그녀를 어떻게 하려던 걸 내가 지나가다 우연찮게 구했지."
독고연은 당과를 품에 끌어안으며 배시시 웃었다. 독고자영은 독고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때는 바야흐로 용봉지회가 열리기 전. 등용문에 오르기 위해 꿈을 품었던 나는-"
"맹주님, 계십니까."
밖에서 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창 과거를 향해 파고들어가던 독고자영은 급히 몸을 일으켜 목소리를 깔았다.
"무슨 일이더냐."
"슬슬 개막전이 시작될 때라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대기실에 따로 없어서 찾으러 왔는데.... 혹시 독고연 아가씨와 같이 계신지요?"
"그래. 여기있다. 금방 채비를 해서 보낼테니 걱정말거라."
"...!! 크흑, 알겠습니다."
군사는 울컥한 목소리로 몸을 돌렸다. 그 또한 독고연이 무대에 선다는 것에 감격스러워했다.
"연아."
"네, 아버지."
"아프면 중간에 기권해도 좋다. 그 누구도 네게 뭐라고 하지 않아. 나는 애초에 단 한 번. 한 번이라도 비무장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천지신명님께 감사하단다."
"아버지."
독고연은 상냥한 미소로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감사는, 무붕 의원님께 하셔야죠."
"...크흠."
맞는 말이긴 한데, 왜 갑자기 신경이 쓰이는 걸까.
"그리고 걱정마세요. 기권도 없을 거고, 중간에 지지도 않을 거니까."
독고연은 입안에 당과를 집어넣으며,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개막전, 당당히 우승하고 올게요. 아버지를 위해서, 저를 위해서, 그리고 저를 고쳐주신 무붕 의원님을 위해서."
그러니까 왜 자꾸 무붕을 언급하는 것인가. 독고자영은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진짜로?'
토끼 한 마리 잠든 사육장에 늑대를 들인 것이 아닐까. 독고자영은 핏기가 싹 가셨다.
* * *
"선배님, 일어나세요.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다 끝났냐? 내빈 축사 한 번 더럽게 길군."
신창은 하품을 길게 하며 기지개를 켰다. 구파일방에 팔대세가, 그리고 온갖 문파들의 장로나 장문인들을 모두 소개하고 그들의 축사를 듣다보니 벌써 지쳐서 돌아간 이들도 일부 있었다.
"크하아. 귀찮아 죽겠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봐야하는 건지 모르겠어."
"마교의 계략이 있을 수도 있는데 당연히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참가자들 중에 정체를 숨긴 마두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너 무림맹주 무시하냐? 참가한 사람들 당연히 한 번씩 훑어봤을 거다. 조금만 어색한 게 있어도 바로 잡아냈을 걸?"
"없던 사람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 있던 사람을 바꿔치기 했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감찰관과 신창, 둘은 관객석에 앉아 사방을 예의주시했다. 변장을 하기는 했지만, 이곳에는 신창과 감찰관 뿐만 아니라 금의위나 동창의 무사들도 일부 위장하여 객석에 앉아있었다.
"소공녀도 온 마당에 대공자라고 오지 않을 이유가 없죠. 선배, 놈은 분명 뭔가 수작을 부렸을 겁니다."
"글쎄다. 우리가 파악한 그 놈이라면 자기는 다른 곳에서 본격적으로 계략을 펼치고 있을 걸? 이쪽에는 자기 부하를 보내거나 했을 거다."
"역시 선배도 누가 여기에 있다는 건 부정하지 않으시는군요!"
"...아무렴. 뭔가 끈적하고 찝찝한 기운이 계속 느껴저서 말이야. 아까 화장실 가는데 으으, 갑자기 어디서 물이 툭 튀더라고. 나 참."
둘이 마교의 음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 드디어 첫번째 비무장에 두 명의 여인이 발을 디뎠다.
쿵, 쿵!
"우, 우오...."
8척이 훌쩍 넘을 것만 같은 압도적 거구. 여자가 올라온 건지 녹림의 사내가 올라온 건지 모를 정도로 탄탄한 근육 덩어리의 등장에 관객석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저 아가씨는 설마...!"
"녹림왕의 차녀, 방영희입니다. 장녀인 방철수가 산주봉이 되었으니, 언니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참가한 게 틀림없습니다."
관객들의 시선이 비무장과 육봉의 자리를 수 차례 돌아갔다. 녹색 머리띠를 머리에 묶은 산주봉 방철수는 체구는 조금 컸지만, 다른 봉들에 비해 뒤쳐지지 않는 야생화같은 매력이 철철 넘쳤다.
그에 비해 방영희는 뭐랄까, 야생화라기 보다는 야생짐승과도 같은....
"장녀와 차녀...? 둘이 자매라고?"
"장녀는 모친의 피를 많이 이어받았고, 차녀는 부친인 녹림왕의 피를 많이 이어받은 셈이죠."
"영희야----!! 꼭 이겨라----!!"
반대쪽 객석에서 사자후가 터져나왔다. 객석 한 켠을 차지한 산적 무리들의 중앙에는 누가봐도 방영희의 가족으로 보이는 거구의 근육질 사내, 녹림왕이 있었다.
"...딸이겠지? 아들 아니고."
"딸 맞다니까요. 선배, 그거 들으면 녹림왕이 바로 선배한테 몽둥이 휘두를 겁니다."
"그럼 내가 억울한 거지. 솔직히-"
저벅, 저벅.
관객석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방영희의 맞은편에서 나온 백발의 여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병약했다.
"미친, 개막전 수준보소."
"저 여아가 바로...!"
"독고연. 무림맹주의 금지옥엽."
6년간 단 한 번도 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독고연은 제비꽃처럼 사뿐히 비무장에 도착했다. 신창이 눈대중으로 확인한 바로는 정확히 체구가 3배 정도 차이가 나는 수준이었다.
"이거...괜찮은 건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비무, 시자-----악!!
"크하하하하하하하!!"
방영희가 움켜쥔 권갑에 녹색의 사자형상이 깃들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양 손에 기를 일으키는 방영희의 압도적인 힘에 모두가 전율했다.
"역발산기개세---!!"
방영희는 독고연을 향해 달렸다. 너무나 맹렬한 기세에 녹림왕이 오히려 놀라 식겁하며 관객석에서 뛰쳐나올 정도였다.
"선배! 저거 위험-?!"
"아니다."
신창은 소름이 돋았다. 방영희가 내지른 투기는 강대했으나, 신창은 투기의 아래에 깔려있는 감각을 읽어냈다.
상위 포식자에 대한 두려움. 방영희는 작은 제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스릉.
독고연은 천천히 검을 앞으로 겨눴다. 백도, 아니 무림 전체가 알고있는 검술의 기수식과 함께, 독고연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파, 산.(破山)."
서걱.
단 일 검.
연보라빛 궤적과 함께, 산을 뒤집으려던 장사는 산이 파괴되는 듯한 충격과 함께 튕겨나갔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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