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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원이 된 이유
개방의 5결 제자, 대취타 한구만은 허창의 북문 근처에 돗자리를 깔고 지나가는 이들을 모두 관찰했다.
'아까 들어간 자들이 남궁이었지? 폭룡이 앞에서 마차를 몰고 무사들이 대거 뒤따라온다.... 그러면 남궁유린이 참전한다.'
남궁유린, 참.
긁적, 긁적.
한구만은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은밀한 곳 근처를 긁었다.
지나가던 이들은 한구만을 향해 혐오 어린 시선으로 째려보고 돌아갔지만, 한구만의 손은 날카로운 숯으로 허벅지 아래에 글을 적는 중이었다.
마침 북문에서 새로이 들어오는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정체를 숨긴 채 홀로 북문으로 들어왔고, 허리에는 검 한 자루를 보자기로 휘감아놓았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여고수. 복면 위로 보인 눈가에는 10대 후반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약간의 주름이 있었다.
또각, 또각.
그리고 특유의 걷는 법을 본 순간, 한구만은 누군지 대번에 파악했다.
‘옥선루도 왔군.’
선루필승도, 참전.
한구만이 이렇게 사람들의 정보를 모으는 이유는 단 하나.
원래 개방의 일이 정보를 모으는 일이지만, 5결 제자가 굳이 나서서 정보를 모을 필요는 없었다.
'영감들이 맹에 돈만 안 받아 처먹었어도.'
하지만 정식으로 무림맹에서 개방에 지원을 요청한 만큼, 그의 일은 거지인 척 허창을 방문하는 이들의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어머...불쌍해라. 소면이라도 사드셔요.”
“아이고, 누님! 감사합니다!!”
지나가던 옥선루는 한구만의 바가지에 은자를 두 개 내려놓았고, 한구만은 넙죽 절을 하며 옥선루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우신 분의 미모에 홀린 이놈의 눈이 멀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아, 서시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겉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눈처럼 고우시군요!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부디 좋은 일 가득하십시오!”
“아, 네, 네.”
한구만의 감사에 기겁한 옥선루는 급히 자리를 떠났다.
옥선루가 인파 속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던 한구만은 은자 두 냥을 바지 적삼 안으로 밀어 넣으며 다시 정보를 기록했다.
‘주변에 항상 뒤따르는 제자들이 없음. 홀로 단독 출전하려고 하는 것으로 추정됨.’
한구만은 옥선루의 나이를 떠올렸다.
엄연히 과년한 나이가 된 여인이 이봉결정전에 참가하는 것이 가능한가 싶기도 했지만, 무림맹주의 삿된 욕망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30세 이하도 참가할 수 있도록 합시다!
- 딱 30까지만 봐줍시다! 작년까지는 29살이었잖소!
본래 29살까지였던 기준이 한 해가 지남에 따라 30살로 늘어나게 되었다.
무림맹주의 의도는 최하기준을 없애는 것이었고, 많은 30세 여인들의 강력한 찬성에 따라 나이 기준은 크게 완화되었다.
원래 나이는 29살인데 일부러 한 살 올려서 나이를 퍼뜨렸다는 설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그녀는 이봉결정전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30세에 육봉이라. 칠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제자가 모용란의 도에 패배한 것이 그리도 억울했던 걸까? 아니면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걸까.
한구만은 후자에 걸었다.
'올해로 30. 육봉의 별호를 얻어 거대 문파에 시집가는 것 이외에는 더는 길이 없군.’
육봉이라는 자리는 무림에서 가장 강한 여섯 여인을 꼽는 자리인 동시에, 많은 문파들에 ‘결혼 시장 최고의 매물’을 널리 알리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문파의 문도와 혼인을 맺게 하여 자식을 낳으면 다음 대 구룡육봉은 따놓은 당상이지.’
또는 본인들의 세력에서 구룡육봉을 배출하지 못한 경우, 그들을 자신들의 혈연으로 만들어 문파의 일원으로 만들려는 경우도 허다했다.
즉, 옥선루는 결혼을 위해 참전했다. 상대 남자가 어떤 문파든 세가든, 일단 육봉에 들어가면 구룡과도 만날 계기가 생기게 된다.
'혹시 모르지. 구룡중에 그런 쪽으로 취향인 남자가 있을지도.'
연상, 과년, 미부인. 노산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취향만 잘 맞는다면 나쁜 것도 없다.
‘당장 무림 맹주만 하더라도 그렇지.’
실제로 무림 맹주 독고자영의 경우도 그러했다.
원래 독고세가의 사람이 아니었던 그는 자신의 검법 하나만으로 당대 구룡의 으뜸이었고, 그의 재능을 높이 산 독고세가가 데릴사위로 들여 ‘독고’의 성을 이어받았다.
이미 아내는 죽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을 낳고 죽었다고 하더라. 아내를 잃은 독고자영은 독고세가의 가주이자 무림맹주가 되어 독고세가를 이끌고 있으며, 숱한 과부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구룡육봉 중에 결혼 못 한 남녀는 한 명도 없었다.'
아무튼 구룡육봉의 칭호는 누군가에게는 명예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성공적인 혼약을 위한 발판이기도 했다.
과연 이봉의 마성에 홀려 허창에 들어오는 자들은 또 누가 있을 것인가.
“...응?”
순간, 한구만은 차가운 한기를 느꼈다. 갑자기 발이 시린 듯한 기분에 한구만은 천천히 기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히이익!!”
바로 앞에 흑발의 여인이 쪼그려 앉아있었다. 비단처럼 고운 머리칼이 눈썹 아래까지 내려온 여인은 하관은 검은 면사포로 가리고 있었다.
“뭐, 뭐요?”
“거지.”
"뭐, 뭐요?!"
"거지다."
여인의 담담한 말에 한구만은 괜히 울컥했다. 일부러 두 번 말한 것 같아 더 억울했다. 거지가 맞기는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거지라고 들으니 괜히 억울했다.
“불쌍해.”
짤랑짤랑. 여인은 품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 들어 한구만에게 적선했다. 구슬은 안이 투명하여 반대쪽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거 줄게. 가서 소면 사 먹어.”
“아, 아이고. 감사합니다.”
옥선루가 은자를 동냥했을 때보다 훨씬 덜 적극적이고, 더 기계적인 반응이었다.
"아름다운 분이 주신 돈 잘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장 가치를 파악할 수 있는 은자와 달리, 쓰레기일 확률이 높은 구슬은 섣불리 고급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금자를 꺼냈다면 팔을 땅에 디디고 다리를 수직으로 세워 천지가 뒤집히도록 절을 했을 테지만, 아직 유리구슬의 가치는 확인할 수 없다.
“잘 쓰겠습니다. 덕분에 오늘도 일용할 양식 값을 얻고 갑니다.”
“힘내. 아무리 세상 사는 게 힘들어도 집 나와서 힘들게 사는 거 아니야.”
“...고맙소?”
한구만은 갑작스러운 설교에 떨떠름해졌다. 이런 설교를 바란 것이 아니다. 설교할 거면 돈이라도 더 주고 하든가.
“그래. 이렇게 빌어먹을 게 아니라, 제대로 직장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게 어떠니?”
“큭.”
“부모님께서는 여기서 남들에게 빌붙어 사는 걸 아셔?”
“커헉.”
“옆에 보니까 동냥 받은 거로 술을 사서 마신 것 같은데, 설마 동냥 받은 거로 술 사 마시고 그러는 건 아니지?”
“.......”
대답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일단 뭔가 받기는 받았으니 대답은 해야 한다. 한구만은 뒤틀린 속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조아리며 엎드렸다.
“아이고, 쇤네가 하는 일이 이겁니다요. 남에게 빌붙다니요? 저는 단지 수많은 강호 여러분들의 동정을 사는 게 제 일입니다.”
“그래? 그럼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고 있는 거였구나. 그렇구나…. 거지도 직업이었구나!”
여인은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손뼉을 치며 자문자답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미친 년인가.”
고작 구슬 하나 주고 사람을 이렇게 깔볼 수 있는가? 한구만은 돗자리와 호리병, 그리고 동냥 받은 돈들을 스멀스멀 챙겨 자리를 정리했다.
“젠장, 텄군.”
기분이 더러우니 계속 구걸을 하려고 해도 영 시원찮다. 한구만은 개방 분타로 돌아가 몸을 말끔히 정돈한 뒤, 그래도 제법 번듯한 모습으로 은자와 구슬을 챙겨 보석상을 찾았다.
“이보시오, 주인장. 이거 혹시 감정 가능하오?”
“응? 뭔데? ...이거 한옥(寒玉) 아닌가?”
“...한옥? 그게 뭐요?”
“북해빙궁에서 주로 유통되는 구슬인데, 내가 살다 살다 이런 걸 보게 될 줄이야….”
꿀꺽. 한구만은 손발이 덜덜 떨렸다. 여인에게서 빙궁이 물건이 나왔다는 것에 개방의 거지로서, 그리고 유리구슬의 주인으로서 흥분되기 시작했다.
만약 상대가 빙궁의 높은 사람이라면 분명 금자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격이 얼마요?”
“은자 20냥.”
“.......”
미묘하면서 높은 가격에 한구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자 20냥으로 그랬으면 인정이지.’
"나한테 팔게. 그래도 예쁘기는 하니 우리 딸 주면 좋아하겠구만."
"...30냥."
"이 거지새끼가. 어디서 후려 처먹으려고? 22냥. 더는 안 된다."
"젠장, 주기나 하시오. 가는 길에 탁주나 마실 터이니."
한구만은 한옥을 팔아 은자를 챙겨 바로 분타로 향했다. 억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공돈이 생긴 만큼, 그는 기쁜 마음으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훗날.
그것이 동장군(冬將君)이라고 불리는 최고급 보석으로 황궁에서 거금을 주고 구매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보석상이 하남성에서 사라진 이후였다.
* * *
“오랜만에 만나는군. 다시 이렇게 만나서 반갑소, 장문인 대리. ”
“맹주를 뵙습니다.”
“현지 도사도 마찬가지요, 지난번 용봉지회에서 그대가 중재를 서준 덕분에 화산과 공동의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었소. 현질 도사도 구면이지? 이거 참, 젊은 시절에 언제 결혼하냐고 닦달하던 사람이...으하하! 현주 도사는….”
사공희는 무림맹에 온 도사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는 무림맹주를 보며 낮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림맹이라는 거대 집단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그는 자신이 마주친 강호의 수많은 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하! 내 어찌 잊겠소. 그날 호북에서 그대와 벌였던 비무는….”
상대방에게 내가 당신을 잊지 않고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대화를 이끌어나간다. 과거의 사소한 인연들을 언급하는 맹주의 대화 흐름에 사공희는 그의 화법을 마음속에 잘 새겨넣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저렇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언젠가 자신이 무당파의 장문인이 된다면 마주치는 상대도 저렇게 대해야 하는 걸까. 사공희는 어느덧 자신의 차례가 되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소, 태극화! 먼 길 어려운 발걸음 해주어 영광이오.”
“맹에서 백도제일화를 초청했는데 제가 어찌 아니 올 수 있겠습니까.”
“흐하하! 역시 그대는 자신감이 대단하군!”
“여러모로 대단하지요.”
사공희의 말에 맹주는 순간 흠칫 놀라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리 가정이 있고 자기 절제력이 뛰어난 중년이라고 한들, 사공희의 대단함 앞에서는 다소 평정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자, 자. 일단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를 나눕시다."
"""오오!"""
도사들은 환호했고 사공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눈앞의 요리들은 자신이 아직도 극복할 수 없는 강적이었다.
그렇다면, 먹어서 제거해주마.
사공희는 조신하게, 하지만 그 누구보다 빠르고 은밀한 속도로 젓가락을 놀렸다. 젓가락을 놓는 걸 태극혜검의 어검술로 놓으며 소리 없이 먹는 모습에 무림맹주는 표정이 굳은 채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한 시진, 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며 담화를 나눈 뒤, 무림맹주는 본론을 꺼냈다.
“크흠. 무당파의 손님들께는 미안하지만, 숙소는 맹 내부의 별장을 제공하고자 하오.”
“예? 맹주님, 그것은 특혜가 아닙니까?”
무림맹주의 과도한 환대에 사정후가 먼저 나서서 넌지시 거절했다.
“아무리 초청받았다고 한들 이 인원이 전부 별장에서 지낸다면 큰 소란이 일 수 있습니다. 맹주께서 걱정하시는 건 태극화를 보기 위해 꼬이는 수많은 이들 때문에 그러시지요?”
“그렇소. 실제로 하남성주도 그녀를 보고 싶어 하며, 맹의 사람들 대부분이 태극화를 만나고 싶어 하지.”
육봉 중 한 사람만 와도 인기가 하늘을 찌를 텐데, 다른 누구도 아닌 백도제일화가 허창에 응원차 왔다?
“분명 귀찮은 일이 자주 발생하게 될 거요. 무당에서는 부디 사양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다른 문파에서도 현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오.”
“하지만 맹주, 그렇다면 태극화만 별장에 기거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장로들은 따로 숙소를 잡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명씩 번갈아 가면서 무당에서도 별장을 지키는 호법을 서도록 하지요.”
“음…. 현타 도사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별장을 무당 전부가 이용한다는 부담감.
한 번 별장을 들어가면 따로 숙소를 잡기 어렵다는 부담감.
그리고 모처럼 호북에서 하남까지 왔는데 별장 안에 갇혀있게 된다는 부담감.
'하남까지 왔는데 갇혀 지낼 수는 없지!'
여러모로 장로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도시 내부에 펼쳐진 호수 한가운데 섬처럼 놓인 별장과 장원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귀찮은 이들이 사공희를 괴롭힐 일도 없을 것이다.
"사질, 미안하오. 어쩔 수 없지만, 여기에 있는 동안은 맹주의 별장에서 지내주시오."
"괜찮습니다."
"안내하겠소. 그럼."
도사들은 숙소를 잡으러 맹을 떠났다. 맹주는 식사 자리를 나와 별장으로 통하는 기다란 다리를 가리켰다.
"이곳으로 쭉 가시면 별장이오. 그곳에 있는 아이에게 자세히 일러두었으니, 당분간 말벗이 되어주셨으면 하오."
"말벗.... 알겠습니다."
사공희도 이미 알 건 알고 있었다. 포권을 취하고 몸을 돌린 사공희는 별장, 호수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넓은 섬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섬의 중간 즈음에 다다른 시점.
"......!!"
누군가가, 사공희를 뒤에서 덮쳐 입을 막았다.
[작품후기]
사공희, 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