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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색마-92화 (9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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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원이 된 이유

빙궁주 유설라.

그녀는 빙마(氷魔)이며, 오랜 기간 야인삼마로 지내온 존재다.

정확히는 8대 빙마다. 십마 중에는 마의 칭호를 대대로 이어받는 존재가 한 둘 있고, 과거 북해빙궁이 마교의 신세를 진 이후 빙궁주는 십마의 일원으로서 충성을 다했다.

당연히 중원은 북해빙궁이 사파인 줄 알고 있다. 애초에 빙궁에서 사람이 내려올 일이 잘 없기도 하고, 북해빙궁을 한 번 오다니려면 왕복에 최소 반 년 정도는 각오해야한다.

저 멀리 세외 북쪽에 있는 빙궁주를 대공자는 끌어냈다. 아마도 예전부터 이미 내려와있었거나, 모종의 이유로 중원에 남아 돌아가지 않은 게 분명했다.

"소공녀, 그대는 한 번도 빙궁주를 본 적이 없소?"

"응. 야인삼마가 다른 삼마에 비해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북해빙궁주라니.... 이런 생각 하면 안 되는데, 나랑 엄청나게 비교되는 걸. 그...."

이시아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왠지 장원 주인들끼리 누가 더 큰 장원을 가지고 있는지 내기하다가 비교당해서 침울해진 것만 같았다.

"비천삼마가 더럽게 약한 건 사실이지."

"윽."

지린삼마 대 비천삼마. 볼 것도 없이 지린삼마의 압승이었다.

절정 둘에 초절정 하나. 굳이 따지면 십마 중 6위(환), 8위(적), 9위(도)가 소공녀를 지지하고 있던 셈이다. 그나마 가장 강했던 환마도 염마(4위)에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밀리는 존재였다.

'실제로 천산에 비천삼마보다 강한 마인이 아예 없는 게 아니지.'

십마는 무위도 무위지만 천마가 호칭을 내린다는 점이 가장 크다.

천마가 비천삼마에게 '마(魔)'의 칭호를 내린 이유는 그들의 무공 수위가 아닌 천산마교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자질'이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도마나 적마, 환마 모두 화경 고수로 올라갈 수 있는 자질은 가지고 있으니. 그건 내가 보장하오. 단지 그들에게는 계기가 필요할 뿐."

"계기? 뭔데?"

"그건 비밀이오. 아무튼 비천삼마의 전력은 약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가 채울 수 있소."

"든든해서 좋네."

천하제일인을 옆에 두었으니 당연히 든든할 수밖에. 나는 이시아와 잔을 부딪혔다.

"그래서 대공자의 계획은 뭐야? 이번에도 천천히 알아내야 해? 수수께끼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럴 필요 없소. 그대가 할 일은 두 가지뿐. 하나는 태극화와 마찬가지로 '흑도제일화'로서 시선을 끌어주시오."

"...공식적으로 얼굴을 보이란 소리야?"

"물론이오."

적진 한가운데 홀로 선 소공녀. 화제의 중심이 되리라.

바야흐로 용봉지회의 재탕이었다.

다른 점은 비천삼마가 아니라 비천색마라는 점. 비천색마가 바로 곁에서 지킨다는 점. 그리고 평소에는 그녀를 지킬 존재가 따로 있다는 점.

"태극화, 사공희가 그대를 지킬 것이오. 그대도 사공희를 지킬 것이고."

사공희라는 말에 이시아는 아련한 눈빛으로 술잔을 쳐다봤다.

"...무인으로서 선의의 경쟁자로인 줄 알았는데, 설마 여인으로서 경쟁자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몰랐는걸. 태극화는 당신과 내 관계를 알아?"

"물론. 애초에 그대를 얻기 위해 태극화에게서 잠시 떠난 몸이었소."

"흐흥, 그래?"

내가 자신을 위해 사공희로부터 떠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시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럼 누가 언니고 동생인지 정해야겠다는 걸?"

"당연히 사공희가 그대보다 나이가 많으니 언니 아닌가?"

"뭐래. 무림은 더 센 사람이 형님하는 거라고 아버지가 그러셨어. 나이로 따질 거면...."

이시아는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리며 쓰다듬었다.

"너부터 나보고 누나라고 해야지?"

"오호. 조금 체력이 회복되었다고 지금 덤비는 것인가?"

"......칫."

내가 은근한 눈빛으로 엉덩이를 만지자, 이시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술을 들이켰다. 다시금 덤벼도 어차피 한두 번 가버리고는 기절할 거라는 걸 알기에 이시아는 내 도발에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언젠가 꼭 혼자서 이겨버리고 말겠어."

"기대하도록 하지. 그대가 천마가 되면 능히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오."

이시아는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 여자다. 즉, 이길 때까지 함부로 덤비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대가 두 번째로 할 일을 알려주겠소."

"뭔데?"

"합공."

끼이익.

나는 창문을 열어 숙소에서 보이는 대로 아래, 회색 도복에 태극 무늬를 박아넣은 도사들을 향해 술잔을 들어 올렸다. 마차 아래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인이 면사포를 쓴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흑백제일화, 둘이서 나를 상대해보시오."

"...어디서? 비무장, 아니면 침대?"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소?"

둘 다.

* * *

아쉽게 봉황이 되지 못한 수많은 뱁새는 자신들이 노릴 비어있는 두 자리를 살피기 전에, 먼저 이미 자리를 차지한 네 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제갈 세가의 기녀, 와백봉(臥白鳳) 제갈선.

팔관필과 백우선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그녀는 빠른 경신법으로 상대를 점혈하여 제압하는데 특화되어 있다. 용봉지회에서 그녀의 경신법을 따라갈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모용세가의 검수, 연희봉(燕姬鳳) 모용란.

모용세가의 가전무공을 주력으로 쓰는 그녀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도(刀)'를 사용하는 도객이다. 도라고 하면 가장 유명한 하북팽가는 용봉지회에 참석하지 않았기에, 사실상 모용란이 도를 쓰는 자들 중 제일이라고 칭송받았다.

녹림왕의 장녀, 산주봉(山主鳳) 방철수.

녹림왕의 장녀답게 풍채가 큰 그녀는 6척에 이르는 장신으로, 무거운 쇠봉을 다루는 걸 주력으로 삼았다. 중후한 내공에 여성답지 않게 외공을 가진 그녀는 성별이 반대로 태어나지 않았나하는 무례한 의심이 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그리고 문파가 드러나지 않은 수수께기의 미녀, 스스로를 중원 최고 미소녀 무인이라고 칭한 중최미봉(中最美鳳).

경극을 하는 것 마냥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으면서 이름을 중최미봉이라고 한 정체불명의 미녀는 적어도 맵시 만큼은 아름다웠다.

다른 이들과 달리 가벼온 무복도 아닌 비단옷을 입고 나타난 그녀는 늘어나는 연접검 한 자루로 자신의 아름다운 무위를 뽐냈다.

이상 네 명 중 으뜸은 단연 모용란이며, 그 뒤를 중최미봉과 제갈선, 그리고 방철수가 차례를 지었다. 원래라면 여기에 태극무봉-마암봉이 앞서 자리를 차지하겠지만, 둘은 봉황이 아닌 제일화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하여 이미 봉황에 올라 하늘을 날아다니는 네 봉황과 천상에 피어오른 두 꽃을 바라보는 뱁새들은 선망과 질시의 눈길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뻐했다.

- 일단 네 명은 제쳤다!

뱁새들은 위협적인 경쟁자를 제친 것에 기뻐했다.

육봉의 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다 평범한 일류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었고, 용봉지회 도중에 비무를 거치며 깨달음을 얻어 절정 초입에 이르렀다. 만약 다시 싸우라고 한다면 패색이 짙거나 기권을 해야할 지도 모르는 난적이었다.

시작부터 절정 중반을 넘어 초절정이 아닐까 의심되었던 두 꽃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분명 4봉은 상대하기 껄끄러운 강자들이었다.

- 쟤들이랑 안 싸우면 나도 할만하지!

하물며 백도제일화, 흑도제일화가 된 태극화와 소공녀가 굳이 다시 육봉이 되겠다고 나설까? 천만에.

사실상 7,8위 결정전이지만 그럼에도 육봉이라는 영예를 얻을 기회는 인생에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하물며 나이가 차는 바람에 다음 기회가 없는 이들에게는 인생의 마지막 기회였다.

- 나보다 어린 년들은 꺼져! 내가 육봉 중 한 사람이 되서 결혼할 거야!

- 꼬우면 다음 회차에 나오든가!

- 결혼 못하고 나이만 찼으면 그냥 조용히 독수공방 할 것 이지, 어디서 육봉 별호를 달고 결혼 은퇴를 노려?!

...사리사욕에 찬 욕망이지만, 사람의 욕망은 강대한 의욕과 의지로 거듭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여기, 그 누구보다 강력한 의지를 가진 한 명의 여인이 절치부심하며 칼을 갈고 있었다.

"이건 기회야, 오빠."

"유린아. 진정해라."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이봉에 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남궁유린은 두 눈에 불꽃을 활활 태우며 강렬한 의지를 내비쳤다.

"모용란이랑 제갈선 두 년이 육봉을 차지했어!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대 남궁세가의 유린이 육봉에 들어가지 못하는 게 말이 돼?!"

"그건 그렇지. 그래서 이렇게 하남까지 온 거 아니겠냐."

남궁유린, 이봉결정전 참전.

그녀는 지난 용봉지회에서 겪은 좋지 않은 일에도 불구하고 절치부심하여 무공을 늘리는 근간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오빠, 그거 하자!!"

"뭐, 뭘?"

"비무!"

남궁패는 기함할 뻔 하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안도는 곧 탄식으로 변했다.

"...벌써 몇 번이나 했는 지 아냐? 너 지금 많이 강해졌다. 폭룡과 10번을 싸워 2번을 이길 정도면 충분히 강한 거야."

"아냐, 부족해! 또 어떤 년들이 튀어나올 지 모른다고!"

탕! 남궁유린은 두꺼운 책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용봉지회에서 남궁패가 구매했던 꽃도감의 새로운 판본이었다.

"이거 봐! 여기 이 년들! 상대하기 힘든 여섯 명 제쳤다 이거지!! 전에는 감히 신청서도 내지 못할 깜냥의 잡것들이 벌써부터 자기가 육봉이 된 줄 알잖아!!"

"자리는 두 자리밖에 없어서 네 자리가 적지만, 강적은 여섯명이나 사라졌으니 상대해볼만 하다 이거군. 전략적인 선택이야."

"그래! 딱 한 년만 피하면 내가 우승이라고! 그 년만 결승에서 만나면 되는 거야. 알아?"

남궁유린은 도감 한 가운데를 펼치며 손바닥을 팡팡 두드렸다.

"독고연, 그 년만 없으면 나도 육봉이라고!"

"......."

독고연이랑 결승에 오르기 전에 만나면 육봉에 오르지 못한다는 말이었지만, 남궁패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 * *

저벅, 저벅.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작은 체구의 여인이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연보랏빛 소복을 입은 여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근처 정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하아, 하아."

그리 멀지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차오르는 숨에 여인은 가슴팍이 쓰라렸다. 습관적으로 소매를 입으로 가린 여인은 콜록거리며 기침을 토해냈다.

"콜록, 콜록! ......."

소매 끝은 검붉은 피로 물들어있었다. 한 차례 각혈을 한 여인은 정자 아래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왜 나는."

수면에 비친 여인의 머리칼은 눈처럼 하얀 백발이었다. 눈동자는 옷 색깔과 맞춘 듯한 제비꽃과도 같은 연보라색이었다.

"......."

여인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에 걸린 보름달은 하얗게 차올라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마성이 깃들어 있었으나, 매일 밤 단 하루도 변하지 않는 밤하늘은 여인에게 아무런 감흥도 줄 수 없었다.

한 순간도 바뀌지 않는 밤하늘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1년 전에 봤던 밤하늘의 모습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태어난 이래, 여인은 단 한 번도 이 정원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아."

변화가 생겼다. 밤하늘에 기다란 무언가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다 사라졌다. 여인은 서고에서 봤던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여인은 두 손을 모아 이마에 놓고 기도를 올렸다.

"부디...하게 해주셔요, 천지신명 님."

"그리도 이봉결정전이 기대가 되느냐, 연아?"

여인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맞은편에서 웃으며 걸어오던 중년 남자는 소매에 묻은 피에 마찬가지로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연아!"

"...괜찮습니다, 아버님. 하루 이틀 일도 아닌 걸요."

여인은 애써 활기찬 모습을 보이며 활짝 웃었다. 그게 오히려 중년인, 독고자영의 마음을 아프게했다.

"정말로 괜찮겠느냐? 지금은 몸을 가누고 다음 용봉지회에 나가보는 건 어떠냐? 이제 갓 성인이 되지 않았느냐."

"아니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비록 말석이기는 하지만...이길 수 있어요."

무공에 있어서 여인은 자신감이 넘쳤다. 독고자영은 여인, 딸의 실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먼저 들어가도 될까요?"

"그, 그래. 어서 들어가거라. 내가 괜히 방해를 한 것 같구나."

의젓한 딸의 행동에 독고자영은 독고연을 오히려 몹시 어려워했다. 독고연은 어색한 부친의 행동에도 자애로운 미소로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려 천천히 방으로 돌아갔다.

"......지금이 아니면, 쿨럭."

독고연은 한 번 더 각혈하며 난간을 붙잡았다. 다행히 아주 조용히 기침을 한 덕분에 독고자영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조용히 홀로 아픔을 다스리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하아."

수면에 비친 밤하늘은 여전히 별빛의 궤적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천지신명님, 부디."

독고연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이 새장을 벗어나...저를 하늘로 날게 해주셔요."

부디 기도가 하늘에 닿기를.

독고연은 바스라질 듯이 비틀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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