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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원이 된 이유
이봉결정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제18회차 용봉지회가 막을 내리고, 비어버린 두 자리의 봉황을 찾기 위해 새로운 비무 대회가 막을 열었다.
장소는 무림맹이 위치한 하남 성.
용봉지회가 끝난 뒤 약 반년의 준비 기간을 거친 끝에, 무림맹에서 직접 이봉결정전을 치르기로 하였다.
왜냐? 무림맹이 하남 성에 있으니까!
혹자는 말한다.
-맹주 딸이 아파서 멀리 못가니까 무림맹에서 하려는 거 아니냐?
-맹주가 딸을 육봉으로 넣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이 미친놈이?!'
...라고 말한 이는 숱한 이들에게 구타당하여 정의구현을 당했다. 어감의 문제도 있거니와, 맹주사 사사로이 제 딸을 위해 맹주로서 권위를 사용하는 건 권력 남용의 온상이었다.
-그래도 맹주 딸을 보고 싶기는 하다.
-그래도 독고자영의 딸인데 강하겠지? 독고구검을 배웠을 텐데 최소한 육봉 말석 정도는 될 거 아냐.
-나이가 어리긴 해도 소천마도 20...이제 21살인데 그 경지 아니냐. 맹주 딸, 이제 성인인데.
봄.
겨울이 지나 꽃이 화사하게 피어오르는 시기.
봉황이 내려앉은 화단의 남은 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중원 전역의 꽃들이 하남 성, 무림맹이 자리 잡은 허창에 모이기 시작했다.
* * *
"비천, 맹은 왜 허창에 있는지 아세요?"
"관의 시선이 그나마 덜한 곳이니까."
이시아의 질문에 나는 즉답했다.
"허창만큼 맹이 자리잡기 좋은 곳이 또 없지."
허창, 과거 허도라고 불린 곳에 무림맹은 자리 잡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후삼국 시대 이후 쇠퇴의 길을 걸었으나, 무림맹이 위치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조위 시절 이후로 쇠락한 이후, 그 어떤 나라도 제대로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왈패 집단이 맹이랍시고 지역 유지 노릇 하기에 최적의 장소지."
"백도 정파 무인들을 왈패라고 하다니. 간이 크시네요."
"간만 크랴. 크흠. ...그래서 적당히 관과 떨어진 곳 중에 규모는 큰 도시를 찾다 보니 허창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오."
중원에 있지만 관과는 멀리 떨어진 곳. 그러면서도 적당히 위세를 떨칠 수 있는 곳. 관무불가침이라는 이유로 사실상 '무림'의 수도가 되기에 적합한 곳.
"망한 옛 도읍만큼 좋은 곳이 또 어디있겠소?"
황실에서도 무림맹이라는 존재에 대해 껄끄럽게 생각하지만, 망한 도시에 자리 잡아 도시를 번영시켜주겠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는 없었다.
"만약 무림맹이 반역을 일으켜 나라를 일으키려고 한다고 합니다. 어차피 망한 도시, 왈패 소굴이 반역 도당이 되는데 여차하면 쓸어버리면 그만 아니겠소? 관에서 그럴 힘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희한하고도 재미있는 접근방식이네요. 사람들은 독고 세가가 거기 있어서 그렇다고 하던데."
"그것도 있고."
독고세가. 현 무림맹주 독고자영의 가문인 독고 세가는 허창에 자리를 잡았다.
하북 팽가나 안휘 남궁가처럼 오래전부터 오대 세가로 역사가 깊은 가문은 아니지만,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무공 '독고구검'의 힘으로 매 세대가 천하 오대 검객을 배출한 희대의 가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림맹주는 백도제일이어야 하오. 그대도 한 번 직접 봤으니 알 것이오. 독고자영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네. 아버님께서 막상막하라고 하신 이유를 알 것 같더라고요."
독고자영은 천마조차도 인정하는 불세출의 천재다. 사실상 천하제일인이 아니냐 하는 말도 듣는 남자답게, 그는 몹시 강했다.
용봉지회에서 내가 그의 눈길을 피해다녀야 했을 정도로.
'그때 청낭신공을 돌리고 있었으니 안 걸렸지. 다른 거 쓰고 있었으면 분명 시비 걸렸다.'
그날. 용봉지회에서 내가 의원으로 뛰어다니던 때.
독고자영은 나를 유심히 지켜봤다.
내가 진짜로 신의의 제자인지 의구심을 가지고 나를 주시했고,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환자를 돌보며 청낭신공을 운용하는 나를 보고 의심을 거뒀다.
'하하! 무당의 선배에게 인사를 드리오! 본인은 무림맹주! 비무를 청하오!'
만약 태극신공을 운용하고 있었다면 '인사'를 핑계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하! 정체 불명의 고수가 용봉지회에는 무슨 일인가! 비무로 정체를 밝혀내겠소!'
만약 다른 무공을 사용하고 있었다면 '불미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시비가 붙었을 것이다.
'서로 실력 3할을 숨기기는 커녕 전력을 쏟아내야 했을 거다.'
독고자영은 천마급 강자다.
그의 독고구검은 능히 천하제일이라 칭함에 손색이 없고, 나 또한 내가 익힌 무공 중 독고구검은 천마신공과 더불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력한 무위를 자랑했다.
내가 내 전력을 숨기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둘 중 하나는 죽었다.
'근데 지금은 딱히 중요치 않지.'
하지만 내가 관심이 있는 사람은 독고자영이 아니다. 내가 익힌 독고구검은 독고자영의 독고구검이 아니다.
<후맹주>. <신녀>. <파천신검>. <천하제일검>.
"독고연."
훗날 부친의 뒤를 이어 무림 맹주의 자리를 이어받은 그녀는 미래천마와 함께 나를 몇 번이고 상대했던 천하제일검이었다.
현재 나이, 20세.
때마침 해가 바뀌어 그녀는 성인이 되었다!
지난번 용봉지회에 나왔다면 분명 19세의 나이에 초절정의 기량을 뽐내며 천하제일봉에 올랐을, 부친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재능과 오성이 뛰어난 '초'천재다.
단 하나의 약점만 없다면.
"소공녀. 내가 왜 신의의 제자로서 세상을 주유하는지 아시오?"
"의원인 척 혈을 풀어주겠다면서 여자 엉덩이 만지거나 어떻게 해보려고요."
"정답이오. 이번에도 마찬가지지."
나는 이시아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이제는 엉덩이가 잡히는 것 정도는 익숙하지만, 다른 이들도 지나가는 대로에서 대놓고 붙잡힌 건 조금 부끄러워했다.
"색마, 죽고 싶어요?"
"천마에게 죽는 거라면 얼마든지."
"...숙소 들어가면 죽을 줄 아세요."
그것도 일부러 의복 등허리에 트임을 넣어, 내가 손을 안쪽으로 집어넣어 생살이 그대로 잡혔다. 이시아는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독고연에게 의원인 척 접근하시겠다?"
"그렇소. 나는 독고연을 취할 것이오."
이시아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암만 내가 다른 여자 품어도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화단 안에 넣었다고 확신하자마자 다른 꽃 보러 다니는 건 염치 없지 않아요?"
"나란 남자가 이런 걸 어쩌겠소? 반한 사람 잘못이지."
"세상에. 반하게 만들어놓고 그런 말을 하는 건 협박 아니에요? 나 참. 말이라도 못하면."
이시아는 툴툴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투기를 부려도 이 정도면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었다. 여자는 자고로 투기를 부려야 매력이 넘친다고 혈교주가 그랬다.
- 그냥 좋다고 헤벌레 가랑이 벌리면 창녀지. 질투도 좀 하고 튕기는 맛이 있어야 여자 아니겠냐?
......아무튼 그랬다.
"그런데 있잖아요, 맹주가 그렇게 아끼는 여식인데 만나기 쉬울 것 같아요?"
"물론."
독고연은 반드시 신의의 제자와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그녀는 진정한 천하제일검으로 각성할 수 있다.
"그대도 알다시피 독고연은 병자요."
"...그건 지나가면서 지난번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병은 알려져 있지 않잖아요. 도대체 무슨 병이에요? 신의의 제자가 꼭 나서야 하는 병인가요? 뭐 구음절맥이라도 되나?"
"비슷하오. 하지만 오직 나만이 치료 가능한 병이지."
어느덧 마차는 대로를 따라 허창성 근처에 다다랐다. 우리 주변에는 이미 숱한 무인들이 여무사를 호위하며 성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 아는 얼굴들이로다."
"다 먹어본 여자들이 아니고요?"
"소공녀. 꿀벌이 열심히 꽃들을 돌아다니며 꿀을 모으는 걸 나무라지 마시오. 그대라는 여왕벌에게 먹일 맛있는 꿀을 정제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이시아는 내 허벅지 위에 손가락을 올리며 간질였다.
"그렇군요. 독고연을 취하려는 것도 다 저한테 독고연의 내공을 넘겨주려고 하는 거죠? 설마 당신이 꽃들에게서 가져온 꿀을 반반씩 나눠 먹으라?"
"크흠. 틀렸소."
"진짜요?"
"...삼분지일이오."
찰싹. 이시아는 등뒤로 손을 뻗어 내 손등을 후려친 뒤, 엉덩이를 붙잡고 있던 내 손을 강제로 떼어내게 만들었다.
"또 어떤 년이에요? 내가 아는 사람입니까?"
"...태극화."
"아."
이시아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난 또. 염마처럼 급에 맞지 않는 여자였으면 진심으로 화내려고 했어요. 태극화 정도면 인정이죠."
어라. 분명 화낼 거로 생각했는데. 왜지?
"흐흥, 그렇구나. 태극화구나…."
이시아는 상쾌한 미소로 내 손을 붙잡았다.
"일단 숙소부터 먼저 들어갈까요?"
"......."
"벌써 열흘 가까이 못 하기도 했고...조용한 객잔 잡아서 쌓인 것도 풀어야 하잖습니까."
아니었다. 내 자존심을 배려해서 남들 앞에서 혼을 낼 수 없으니, 따로 숙소에서 나를 혼내려는 심보였다.
'화난 건 나도 마찬가지다.'
천하제일인에게 안기면서 어찌 독점하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아기 색마, 분개.
"좋소. 서안에서 한 번, 낙양에서 한 번. 그 뒤로 한 번도 안 했지? 어디 들어가 봅시다."
숙소에 들어간 우리는 며칠 동안 이어진 긴 여장을 풀고 목욕재계를 한 뒤 분노 겨루기를 시작했다.
세 시진 뒤.
"......염마를 데려올 걸 그랬어."
얼굴이 시뻘게진 채 이불을 꼭 붙잡은 이시아는 울상을 지었다.
"호, 혼자서 어떻게 이걸 감당하라고. 흐끅."
"왜 그러시오? 아까는 본인만 바라보게 만든다고 하더니. 나 아직 화가 안 풀렸소."
아직 아기색마는 건재하다. 이시아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양물을 보더니 나지막하게 웃으며 눈을 깜빡였다.
"...기, 기루 좀 다녀오실래요? 저 슬슬 기절할 것 같은데."
"싫소. 한 세 번 정도는 가도 버틸 수 있으니 걱정마시오."
"내, 내 몸을 왜 당신이 더 잘 아는 건데!!"
"내 여자니까."
나는 화가 풀릴 때까지 이시아를 울렸다. 이시아는 정확히 세 번을 지리고 난 뒤에 자지러지며 기절했고, 나는 그녀의 몸에 가득한 흔적을 깔끔히 지웠다.
"동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
아무리 소천마라도 열흘 동안 한 발도 안 뺀 색마를 이기기는 무리였다.
* * *
"부디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오."
"물론입니다, 성주. 맹주의 이름을 걸고 결코 그런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무림맹주, 독고자영은 맹에서 하남성의 주인을 맞이했다. 정주에서 내려온 성주는 맹의 일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나, 차마 자신이 기거하는 정주에서 비무대회를 열어달라고 하지는 못했다.
- 호북성이 아주 살판났다더라!
- 태극화 한 명 보러 가는 사람들로 객잔들이 좋아서 비명을 지른다고 하더라!
- 호북성주가 늘어나는 수입에 기뻐서 각혈했다고 하더라!
무림맹은 지극히 귀찮고 짜증 나는 소란 덩어리지만,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모이는 행사를 치르는데 도움이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혹시나 이 도시에서 수용할 수 없으면 정주로 사람들을 보내시오. 허창 바로 윗동네이니, 허허허!"
"물론입니다. 여인들이 많이 찾아올 것으로 예상되오니, 성주님의 많은 도움을 바랍니다."
용봉지회특수.
15명을 뽑는 용봉지회에 비해 단 두 명의 봉황을 뽑는 대회라 오는 사람은 다소 적을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많은 사람을 불러모을 계기가 되었다.
- 이봉결정전? 어차피 용봉지회에서 다 본 얼굴들이잖아. 뭐하러 본 사람들을 또 봐?
- 참가 자격이 모두에게 열려있어서 지난 번에 참가못한 이들도 온다더군!
- 맹주 딸이 이번에 참전한다더라!
- 당장 맹 근처에 객잔 예약하러 가세.
이봉결정전으로 허창에 오는 이들은 여성 무인들만 오는 것이 아니다. 꽃들을 보기 위해 오는 자들도 많았고, 사실 남자들 대부분 그 목적으로 이미 진작에 맹에 진을 치고 있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돈이 돌아다니기 마련. 하남성주는 호북성이 그랬던 것처럼 무림맹의 비무대회를 통해 바짝 돈을 벌어들일 꿈에 부풀어있었다.
"크흠. 성주로서는 소란을 바라지 않으나, 아름다운 여인들이 서로 전력을 다하는 것을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오. ...흠흠, 그나저나."
성주는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맹주에게 물었다. 지금까지의 대화가 성주로서 한 대화라면,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성주가 아닌 한 명의 남자로서 묻는 것.
"그...태극화께서도 온다는 게 사실인가?"
"......."
맹주가 착 가라앉은 눈으로 차를 마시자, 성주는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아, 아니! 내가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는 게 아니라! 우리 딸이 태극화의 열렬한 추종자일세. 태극매화(太極妹花)! 맹주도 들어봤지 않은가. 스스로 봉황의 자리를 포기하고 한 떨기 꽃이 되기로 한 태극혜검의 계승자! 우리 딸이 하도 닦달을 해서 말이야. 크흠, 내가 꼭 보고 싶다는 건 아니고."
"예, 잘 압니다."
모를 리가 없다. 백도제일화 사공희-견희라는 이름은 가명이었다고 하더라-와 흑도제일화 소공녀와의 비무를 중재한 장본인이 바로 맹주였으니까.
"제 딸도 태극화와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래? 으하하! 그대의 딸도 태극매화인가? 흐흐, 내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 좀 하지. 태극화와 혹시 자리 한 번 만들어줄 수 있는가? 아, 당연히 독대라거나 그런 음습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 딸아이와의 식사 자리를 조금...."
"그건 무당파의 장문인 대리와 논의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장문인 대리...?"
성주는 흠칫 놀랐다.
"하필 장문인 대리...?"
"예. 무당파."
아무리 하남성의 성주라도 거대 문파의 장문인은 직접 상대하기 껄끄러웠고, 특히 호북성을 다시 일으켜준 계기나 마찬가지인 무당파의 장문인이라면 더더욱 어려운 존재였다.
하물며 용봉지회를 통해 현 구파일방 중 '최강'의 문파라고 떠오른 무당파라고 하면 더더욱 껄끄러웠다.
그런데 '대리'?
"무당파에서는 이번 이봉결정전을 지원하기 위해, 장문인과 같은 항렬의 절정 고수를 대거 파견하였습니다."
"...왜?"
"태극화를 지키기 위해서."
[작품후기]
1:1 최강자, 무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