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86화 (86/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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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담, 사천에 서다

쿠구구구.

동굴 안쪽, 제단 방향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급히 앞을 향해 화염을 뿌리며 안쪽의 상황에 집중했다.

한 명의 기는 거의 죽어가고 있고, 다른 한 명의 기도 가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기기는 이긴 게 확실한데.'

염마는 졌고, 이시아는 이겼다. 양쪽에 내 내공을 다 불어넣어 놓았기에, 나는 어느 쪽이 죽어가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도 슬슬 한계다.'

비천삼마와 태극검후로서 싸웠던 날 이후, 이렇게까지 힘을 사용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진득하게 물고 늘어지는 적은 또 처음이었다.

"하아, 하아....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이 색마아아...!"

'발정 났군.'

멸색사태는 헝클어진 머리로 얼굴을 숨기며 내게 검을 겨눴다. 나를 귀찮게 굴면 범해줄 거라고 생각이라도 하는지 제대로 망상에 빠져있었다.

이미멸색사태는 먹어봐서 굳이 범할 것도 없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허억, 이 열 손가락이 남아있는 한, 커흑, 오란지병은 쓰러지지 않는다...!"

'이놈은 너무 진지하고.'

당가에서 유일하게 암기 없이 싸울 수 있는 존재, 당오독은 지풍으로 화염을 뚫고 나를 번번이 위협했다. 자신이 열심히 싸울수록 당가와 검담 사이의 연결이 희미해질 거라고 착각에 빠져있었다.

검담은 적마가 아닌데.

"우, 우리 청성도 마찬가지다! 네놈, 검담은!"

"나 벽암자가 용서치 않겠다!"

"나 벽흑자가 용서치 않겠다!"

"나 벽삼자가 용서치 않겠다!"

"나 벽연자가 용서치 않겠다!"

"나 벽성자가 용서치 않겠다!"

'한 놈만 말해.'

벽암자, 벽흑자, 벽삼자, 벽연자, 벽성자....일일이 이름과 얼굴을 연결해 기억하기도 힘든 청성의 장로들이 일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벽치자나 다른 장도들은 이미 무기가 박살 났거나 내공을 잃고 멀리 쓰러져있었다.

검담 토벌대라고 온 자 중 절정 이하는 대부분 쓰러졌고, 남은 이들의 상태도 딱히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대로 계속 싸우는 것도 무의미하다."

이미 안쪽에서 결착은 났고, 나는 승리를 움켜쥔 이시아를 맞이하러 가야 했다.

"아니, 싸울 것이다."

하지만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덤비는 것이 무인이다. 금의위에 있다고 한들, 나라의 장군이라고 한들, 이미 절반이나 잘린 철봉을 든 신창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반드시 이길 것이다!!"

신창은 철봉을 내게 집어 던졌다. 나는 괜히 안쪽에 닿지 않도록 철봉을 향해 와룡검을 수직으로 놓았다.

"반드시 지는 게 아니고?"

철컹! 와룡검에 부딪힌 철봉이 맥없이 옆으로 떨어졌다. 강기조차 집어넣지 않은 철봉은 타오르는 검강 앞에 한낱 고철 조각에 불과했다.

"군신이시여! 내게 힘을 주소서!!"

신창은 무릎을 낮추며 창의 자루를 움켜쥐는 자세를 취했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진 그의 손에는 진녹색과 황색이 어우러진 강기가 8척이 훨씬 넘는 창으로 변했다.

"내공으로 무기를 형성하는 것만큼 내공 소모가 빠른 게 없지."

"내공으로 불꽃을 피우는 것보다 내공 소모가 더 많을까?"

"장강의 물이 어디 마르더냐?"

"유감이군. 나도 그 말을 하고 싶었는데."

신창은 한 마디를 지지 않았다. 무능삼장군이라고 불렸지만 심성만큼은 착한 남자답게, 그는 진심으로 나를 상대로 1:1 비무를 펼치고 싶어 했다.

"신창! 우리도 가세하겠소!"

하지만 주변에 자리 잡은 이들이 신창을 가만두지 않았다. 본인들이 현경 고수들간의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검을 꺾지 않았다.

"...참으로 고맙소, 무림의 무인 여러분!"

신창은 이를 악물고 합격을 허용했다. 무림의 사람이 아닌 무관으로서, 그는 여러 문파를 습격한 검담을 체포하러 온 자로서 최선을 다해야만했다.

"쯧. 알아서 떨어져 나갈 것이지."

개인적으로 신창과 순수하게 검제의 무공으로 붙어보거나, 중려신화정을 운용하며 '나의 검술'로 싸워보고 싶었다.

"그럼 강제로 떨어뜨려 주지."

하지만 나는 이 대치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무림인들이여, 오늘의 일을 기억하시오. 더는 고대의 비밀을 찾지 마시오. 하늘에서 벌을 내릴 것이니."

"뭐, 뭐라...!!"

"네 놈...무슨 소리를!!"

모두가 당황하는 사이, 나는 눈을 감고 아주 낮게 속삭였다. 그 누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그리고 조용하게.

"천마용제검."

나의 머리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화염검으로 가린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있었다. 얼굴은 사천당문의 적마를 닮았는데, 금발적안의 미청년이 되어버렸다.

'적마 놈이 얼굴 하나는 반반해서 다행이구나.'

이상한 머리색과 눈동자에도 제법 어울렸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와룡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삼위일체!"

내공, 염마 당서희의 중려신화정.

초식, 검제 제갈건담의 천상용제쌍고검.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두 무공을 하나로 잇는 연결 고리.

천마 이시아의 천마신공.

"비천(飛天)! ...마붕파(魔崩破)!!"

세 가지 힘이 내 육신에 어우러져 와룡검에 깃들었고, 나는 전방을 향해 와룡검을 휘둘렀다.

서걱.

협곡이, 반으로 갈라졌다.

* * *

협곡 위.

검은 깃털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독수리는 햇살을 등진 채 협곡 아래의 싸움을 유심히 지켜봤다.

다리에 묶인 염마의 편지를 전해야 하지만, 독수리는 아래에서 펼쳐지는 전투에 그만 넋을 잃었다.

"싸움 수준 실화인가?"

독수리의 입에서 고운 미성이 흘러나왔다. 협곡의 틈으로 보인 전투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화려하고 비현실적이었다.

"이 싸움은...전설이다."

신창과 검담, 두 사람의 전투 만으로도 사천-아니 중원 전체가 한 달은 떠들썩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창에 더불어 사천의 대표 백도 문파 셋의 장문인급 존재들이 모인 토벌대가 구성되었고, 그들이 고작 한 사람을 이기지 못해 패배하기 일보 직전이다?

까마귀는 절로 가슴이 웅장해졌다.

이야기가 토벌대의 패배로 끝나도 좋고, 의외로 검담이 내공이 다해 쓰러져도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그리고 싸움이 길어지면서 용제검의 주인이 불꽃을 뿜어내며 본색을 드러낸 순간, 까마귀 그만 지려버리고 말았다.

"축융!"

소열제의 무공을 사용할 때만 하더라도 고대의 무장이 살아서 나타난 것 같았는데, 이제는 신화 속 신이 지상에 강림한 것 같았다.

불꽃을 사용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검담처럼 정순한 불꽃을 뿜어내는 일은 드물었다. 심지어 와룡검에 불타는 강기를 담아 쌍검인 척 휘두르는 것에 까마귀는 매료되고 말았다.

"이건 꼭 보고해야겠어."

또 다른 숨겨진 길로 염마가 들어가고 난 뒤, 약속 시각이 한참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았다는 건 사소한 일이었다.

"적일까, 아군일까."

고대의 무공과 신화 속 힘을 사용하는 자는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까마귀는 점점 지쳐가는 토벌대의 모습에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이제 볼 것도 없...끼아악!!"

까마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올린 검담의 눈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 또한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하단전에서 상단전까지 치솟은 하늘의 기운이 협곡의 틈 사이로 올라 천지가 연결되기 시작했다.

"저, 저자는 설마…!"

까마귀는 검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날아가지 않으면 목적지에 시간에 맞게 도착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까마귀는 협곡에 앉아버리고 말았다.

"전설에서나 나오던 걸 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주룩. 까마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물에 비친 검담은 머리뿐만 아니라 전신이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초마교인…!!"

탈마, 진정한 의미에서 탈모를 극복한 마인.

전설 속에서나 보던 이의 등장에 까마귀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협곡이 무너지고 무너지는 자갈들이 떨어지며 설령 자신에게 위험이 닥쳤어도, 독수리는 신창과 숱한 무인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지켜보며 날개를 펄럭였다.

"이, 이럴 게 아니야. 대공자께 가서 말씀드려야 해!"

무너지는 협곡 사이로 빠져나온 까마귀는 자신의 다리에 묶인 염마의 보고와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인 동쪽을 번갈아보며 갈등에 빠졌다.

"......여, 역시 안 되겠어! 대공자에게 말할 게 아니라...."

까마귀는 몸을 돌려 서북쪽, 천산을 향해 날아올랐다.

"천마님! 나타났습니다! 자기 머리가 변하는 초마교인이!!"

* * *

협곡을 부숴 길을 막았다. 내기를 진정시킨 나는 곧장 제단 안으로 들어와 내부 상황을 살폈다.

"윽."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공기가 덥고 탁했고, 짙은 혈향이 코를 찔렀다.

"...왔어?"

무너진 제단 위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며 나를 맞이한 자는 당연히 이시아였다.

"너...!!"

"너라니, 소공녀한테 말본새가 왜 그래?"

"장난칠 시간 없다, 가부좌를 틀어!"

피부 전신에 붉은 기운이 역력하다. 나는 그녀의 상태를 보고 바로 그녀에게 달려가 등 뒤에 앉아 단전 부근에 손을 갖다 댔다.

"내기를 돌려 진정시켜라."

"조금...객기 부렸네."

"어서!"

이시아는 순순히 내가 손으로 넘겨주는 내공을 운용하며 호흡을 골랐다. 벌겋게 익은 피부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고, 약 한 시진 가량 가만히 운기조식을 취하고 나서야 이시아는 안정된 호흡을 취할 수 있었다.

"...미안."

들끓는 천마신공과 전신의 화상 흉터를 진정 시켜, 간신히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온 그녀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사과였다.

"고작 절정 고수가 화경을 상대로 이겨보겠다고 한 게 잘못이었네. 내 억지를 들어줘서 고마워."

"도대체 무슨 용기로 불덩어리를 직접 마주할 생각을 한 거요?"

"안 그러면 못 이길 것 같았거든."

이시아는 허공에 주먹을 날리며 배시시 웃었다.

"누가 나체로 있는 거 적응교육 시켜줘서 부끄럽지는 않았네. 고맙게도."

속옷조차 너덜너덜해져서 중요 부위만 간신히 가리는 전라에 가까웠지만, 이시아는 오히려 그걸 자랑스러워했다.

"그래도 있잖아, 내가 염마 이긴 거 맞지?"

전신의 피부가 화상을 입어 벌겋게 익었어도, 옷이 전부 불타버렸어도, 그녀는

"모든 공격을 목숨 걸고 피했고, 녀석이 내공을 전부 다 소모해서 폭혈까지 사용해야 했을 정도로 몰아붙였어. 그리고...중단전을 부숴버렸지."

이시아는 바닥에 쓰러진 염마 당서희를 가리켰다. 박살 난 제단의 흔적에 파묻혀 대자로 누워있는 그녀는 피범벅이 되어 기절해있었다.

"이 정도면...내 승리 맞지?"

"그렇소. 그대가 이겼소, 소공녀."

"그래...."

긴장이 풀린 이시아는 바닥에 자빠질 뻔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고, 나는 그녀를 부축하여 조금 평평한 바닥에 앉도록 했다.

"강적과 싸우고 나면 깨달음을 얻어서 더 경지가 상승한다고 하던데, 그런 건 모르겠고 지금 피곤해 죽을 것 같아."

"이시아."

"나 그래도 제법 잘 싸웠거든? 이것 봐. 상처 하나 없잖아?"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지 마시오."

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쓸었다. 이시아는 흠칫 놀랐다가 담담히 눈을 감았다.

"미안하오. 아무래도 내 예상보다 염마는 더 강한 존재였나 보군."

"아니. 내가 약해서 그래. 초절정만 됐어도 상처 하나 없이 강했을 거야."

즉, 그녀는 상처를 입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비어있었다. 흑단 같던 머리칼은 한 뼘 이상 사라졌었다.

"......염마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감히 소천마의 머리카락에 상처를 입히다니."

"나는 저년 중단전 박살을 내버렸으니까 괜찮아."

"......."

중단전만 박살 낸 게 아닌 것 같기는 하지만, 나는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와룡검을 움켜쥐었다.

"다듬어주겠소. 기다리시오."

"잠깐만. 내가 이번 전투로 크게 깨달은 게 있거든? 그러니까 분위기 쇄신을 위해, 조금 더 짧게 다듬어줘. 이참에 아미파 비구니인 척해도 되겠다."

"...이시아, 그건."

"괜찮아. 머리카락이야 금방 자라니까. 몇...년 정도만 기다리면. 다 익어버려서 이대로 두면 어차피 빠질 거잖아."

담담하게 웃으면서 말하지만 얼마나 속으로는 울고 싶을까. 나는 이시아를 가슴에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이시아. 그대가 부작용을 감당할 수 있다면, 한 가지 내공심법을 알려주겠소."

"뭔데?"

"미염신공(美髥神功)."

운룡반월창을 사용하는 신창의 내공심법. 효과는 신공의 이름에서 잘 알 수 있다.

"여인이 기를 돌린다고 수염이 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단, 부작용이 있다면 절정을 느끼거나 흥분하면 다소 얼굴이 붉어질 것이오. 물론 대춧빛까지는 아니고...그냥 평소보다 조금 더 상기되는 정도?"

"효과는?"

"모근강화."

"......그럼 어쩔 수 없네."

이시아는 내 품에서 작게 흐느끼며 웃었다.

"근데 내공심법이면 말이야.... 가르쳐 줄 필요 없이 넣어주면 되는 거 아니야? 당신이 쓸 수 있다면."

"...바닥이 조금 딱딱할 테니, 내 위에 걸터앉으시오."

나는 이시아를 내 허벅지 위에 대면좌위로 앉혀놓은 다음, 그녀가 입은 상처를 보듬었다.

"아직 내공도 넣지 않았는데 붉어지셨군."

"......화, 화상 때문이야."

"그럼 잘 됐군. 나는 여인전문의원, 무붕. 화상도 기가막히게 치료하지."

"흡...!"

이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터지려던 웃음을 막았다. 나는 아직도 붉게 익은 그녀의 화상자국을 혀로 가볍게 핥았다.

"내게 모두 맡기시오. 이미 사라진 머리카락 빼고 모두 치료가능하니."

지린염마, 당서희 격퇴.

우리는 당서희의 옆에서 승리를 자축하며 상처를 치료했다.

[작품후기]

염마 안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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