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69화 (69/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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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

"못 볼 꼴을 보였군! 서로 부끄러웠으니 없던 일로 합시다! 하하."

"......."

누가 더 부끄럽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당히 소공녀라고 할 수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보인 것과 눈물샘이 터진 걸 보이는 건 다르니까.

'나는 울고 싶어서 운 게 아니라, 눈물샘을 잠그지 못해 눈물이 나온 것이다.'

어렸을 때는 너무 많이 맞아서 매일매일 눈물을 흘렸지만, 성인이 된 이후 백가를 탈출하고 나서 진심으로 울었던 건 딱 한 번뿐이었다. 그때는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렸었고, 다른 때는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살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이번이 처음인 것 같군. 아, 어쩌면 지금까지 눈물을 한 번도 안 흘려서 흘러나온 걸지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지 마십시오. 반로환동을 한 고수가 살면서 한 번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 나 반로환동 아닌데?"

"예?"

나는 소공녀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마저 대답했다. 악몽 때문에 감수성이 풍부해진 건지, 아니면 소공녀에 대한 신뢰가 생긴 건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보자. 나이를 계산해보면...내년이면 21이로군!"

"......거짓말."

"내가 소공녀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근데 내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으니...이제 사흘 뒤인가."

밤공기는 차갑고, 속은 뜨겁다. 가볍게 넘긴 술기운이 나를 따뜻하게 데웠다.

"소공녀와 함께 새해를 맞이한다니, 이 얼마나 기분 좋은 밤이란 말인가."

"잠시만요. 자, 잠깐만. 진짜로 그 나이라는 말씀입니까?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걸 거짓말할 이유가 없지. 설마 믿지 못하는 것인가? 고작 이 나이에 이 정도 무공을 얻었다는 것을."

끄덕. 소공녀는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삼구에게 사기를 칠 때도 나는 반로환동을 한 노인네라고 말했고, 사공희도 나를 그렇게 이해했다. 애초에 사공희는 나를 주인에서 상공에서 남편으로 받아들였으니, 나이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소 놀라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걸로 마지막에는 좋아했지.'

떠나기 전날 밤. 나는 이름을 밝히고, 나이를 밝혔다.

전생에 혈강시였니 타인의 피를 취하여 무공을 익혔니, 회귀 전생을 했니 하는 것은 밝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이름과 나이를 밝힌 것으로 나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

- 상공께서 하시는 말씀이 설령 거짓이라고 한들, 상공께서 제게 말씀하신 거니 믿겠습니다.

'...라고 한 뒤에 그럼 자기가 연상이니까, 누나가 알아서 다 해줄게라면서 위에서 올라타 흔들던 모습이 아직도 새록새록 하군.'

처음에는 믿지 않았던 사공희는 증거를 보여달라면서 나를 추궁했고, 나는 네가 나이상으로는 연상이니까 네가 나를 이끌어보라면서 벌러덩 누워버렸다.

결국 위에서 열심히 허리를 흔들며 연상의 힘을 보인 그녀는 내 한 마디에 인정하고 말았다.

- 사공희 누나...나 죽을 것 같아요....

- 으허어엉...! 상공, 계속, 조금만 더 해주세요...!!

뭐라고 해야 하나. 그때의 사공희에게는 광기 같은 것이 엿보였다. 진사월이 나를 상대로 연상의 매력을 뽐내는 걸 부러워하던 게 아니었을까.

- 하아, 상공! 누나, 누나한테 좀 더!

그 뒤로 나는 내 얼굴값을 하는 걸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다.

20세에 현경 고수가 된 애늙은이 색마 보다 역시 반로환동을 한 능구렁이 색마 고수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이 몸이 조금 어려 보이는 얼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어린 건 아니다. 이제 곧 수염도 자라고 할 테니, 그때가 되면 수염을 길러-"

"아뇨. 기르지 마십시오. 명령입니다."

"왜?"

나는 천마심안까지 번뜩이며 명령을 하는 소공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수염이야말로 남자의 상징이 아닌가?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자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는 말이지. 자고로 색기 넘치는 남자란 근육질에 남성미가 넘치는 자가 아니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환마를 보셨잖습니까? 그가 수염을 기른다고 어디 남성미가 넘치던가요?"

"가만히 있던 환마를 때리는군. 물론 그의 수염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수염은 포기할 수 없네. 근처에 수염을 기른 미중년을 보지 못해서 그래. 예를 들어...흠...그래."

우득, 우드득. 나는 역체변용술의 힘을 이용해 내 얼굴을 뒤틀었다. 하지만 추소광이나 적마의 모습으로 변한 것과 달리,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보시게. 이런 얼굴에 수염이 없다면 되겠는가?"

"......그건 누구 얼굴입니까?"

"내 미래의 모습?"

나는 술잔에 비친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미래의 얼굴에서 다친 부분만 다듬었으니까 맞겠지.'

백가에서 얻어터졌던 그때, 적어도 얼굴만큼은 보호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했으니 이 얼굴이 맞을 것이다. 무너진 콧대를 세우고 뒤틀린 턱을 교정하고, 상처 하나 없는 말끔한 얼굴로만 만들었을 뿐 큰 토대는 건드리지 않았다.

'제발 이대로 자라주기를.'

남성미가 그득히 흐르는 미중년 색마의 길을 위하여. 나는 술잔을 깔끔히 털어 넣었다.

"꼬, 꼴도 보기 싫습니다. 당장 원래대로 돌아가 주십시오."

"그건 좀 실망인데."

나는 소공녀의 말대로 원래 얼굴로 되돌렸다. 하지만 소공녀는 내게 다가와 볼을 양손으로 붙잡고 늘어뜨리며 화를 냈다.

"이런 사기가 아니라, 진짜 얼굴을 보이란 말입니다!"

"지금 역체변용술 안 쓰고 있소만."

"거짓말!"

"진실이오. 만약 내가 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면, 내 좆을 자르리다."

"......."

소공녀는 다시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가 그리 억울한지 나를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깔끔하게 술잔을 비웠다.

"그래서 진짜로 며칠 뒤면 21세라는 겁니까?"

"그것참 사람을 믿지 못하는군. 천마도 25세에 탈마에 올랐지 않소. 난 그보다 조금 더 빨리 경지에 올랐을 뿐이오. 이 넓은 중원 땅에 나 같은 천재도 한 명 있어야지."

나는 소공녀를 향해 잔을 들었다.

"어쩌면 그대도 내년에 이 경지에 오를지도. 봄이 오기 전에 초절정으로 꽃을 피우고, 여름이 오기 전에 열매를 맺고, 다시 겨울이 되어 해가 지는 즈음에 씨를 뿌릴지도 모르지."

"뭔가 그때 얘기했던 암호 같은 말투지만 따지지 않겠습니다. 저만 머리 아파지니까."

배도 아파 질 테고. 나는 뒷말을 술과 함께 뱃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래서 자신을 20세라고 주장하는 비천색마,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언제 아미파로 갈 겁니까?"

"소동이 충분히 전해진 뒤에."

당가에서 황룡이 승천했다더라. 전염병보다 더 빨리 퍼져나가는 것이 소문이고, 특히 사람들의 관심사가 높을수록 더 많이 퍼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사천 땅을 넘어 저 멀리 천산에 닿을지도 모른다.

"우선 그대가 걱정하는바, 적마가 소열제의 후손이라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당가에서는 적마가 용제검을 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테니."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당문세가는 자기네 사람들에 대한 애착이 가장 짙거든. 그게 삐뚤어진 방향이라고 한들."

"적마 당이정이 소열제의 무공을 이은 걸로 사천당문이 이곳에서 궐기라도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가문이 멸망하겠군요. 알겠습니다, 이해하도록 하죠."

내 의도대로 다행히 소문은 다음과 같이 퍼져나갔다.

"신원미상의 남자가 사천당문의 '독귀'를 습격했고, 용제검의 힘을 보이며 자신이 소열제의 후손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거짓이 퍼졌습니다. 진실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는 사람은 모두 입을 닫을 테고, 우리는 거짓을 통해 뒤에 숨어있는 염마를 끌어내야 하오. 그런 의미에서 벌써 염마 후보가 몇 명 사라지는군."

"독귀 당사림, 오란지병 당오독."

"그렇소."

독귀나 오란지병이 염마라고 한다면 전력으로 나를 막았을 것이다. 지옥화염대법을 사용해서라도 용제검을 사용하는 나의 정체를 추궁했을 것이다.

용제검을 사용하는 나를 주살하여, 세 세력이 용제검의 주인을 두고 혈전을 벌이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용제검의 주인이 당가의 사람이라고 인식하여 진실을 은폐했다.

"참 이상하군요. 저는 당가의 사람이 가장 염마에 가까울 거로 생각했는데."

"...후후, 그건 모두 확인해보고 나면 알게 되겠지. 소공녀의 감이 맞았는지, 아니면 용의주도한 염마가 그렇게 느끼게끔 공작을 펼쳤는지."

마침 술도 다 떨어졌고, 나는 소공녀와 나의 잔에 마지막 잔을 채웠다.

"한 잔 마시고 푹 잡시다. 내일 새벽, 아미파로 떠나야 하니."

"...후후, 그럼 비천. 혼자 자는 거 무섭나요? 제가 같이 옆에서 자드릴까요? 울면 또 제가 안아드리겠습니다. 혼자서 자기 혹시 무섭습니까? 제가 옆에서 손잡고 자드릴까요? 후훗."

소공녀는 고개를 치켜들며 나를 도발했다. 하지만 소공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그렇군. 소공녀를 지키려면 바로 옆에서 지키는 게 맞지."

"네?"

우지끈. 나는 검을 휘둘러 내 침대를 쪼개버렸다. 그리고 나는 소공녀의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가 빈자리를 손으로 팡팡 두드렸다.

"이걸로 침대는 소공녀의 것밖에 남지 않았군. 자, 들어오시오. 어디 내가 자면서 우는가 바로 옆에서 지켜보시구려."

"...후우, 후우. 좋습니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봅시다."

소공녀는 마지막 술을 비운 뒤 과감히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나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감히 어여쁜 저를 보고도 어디 덮치지 않을 수 있나 봅시다. 누가 잠자지 못하나. 흥, 제가 이런 것에 두근거릴 것 같습니까?"

"...그걸 승부를 보려고 한 건 아닌데."

소공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그녀의 위에 이불을 살포시 덮었다.

역시 이시아. 내가 바로 옆에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를 '믿고' 잠들었다. 내가 자신의 마음을 얻을 때까지 덮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며.

새액. 새액.

"......예쁘긴 진짜 예쁘단 말이야. 오늘 자기는 글렀군."

나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잠든 그녀의 얼굴을 마음껏 만끽했다.

* * *

"서희야. 당가에서 들어온 정보는 없느냐?"

하오문 사천성 성도지부의 지부장, 석개는 답답함에 미쳐 돌아갈 지경이었다.

"지난 밤에 황룡이 사천당문에서 승천했다. 이것이 진정 새로운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영웅의 탄생인지, 아니면 진짜로 소열제의 무공이 황룡을 부리는 힘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그래야 정보를 팔 수 있으니까요?"

"그래! 동시에 하오문의 명예를 위해서!"

석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기녀, 서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오문에 명예가 어디 있습니까?"

"서희야, 그걸 문주님의 제자인 네가 말하면 되냐?"

"문제가 있나요? 전 술 팔고 웃음 팔고 몸 파는 계집이 아닙니까. 그리고 당문의 손님이라고는 당가의 도련님 한 분뿐인데, 이런 시국에 저한테 오시겠어요?"

"당가의 사람들이 오지 않는 건 그게 아니라...."

싱긋. 서희의 날카로운 웃음에 석개는 뒷말을 삼켰다.

"됐다. 아무튼 네 연줄을 통해서 한 번 알아보도록 해라. 여러 손님 받으면 다양한 정보가 나올 거 아니냐?"

"글쎄요. 요즘 손님 한 분밖에 받지 않아서...."

서희는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리저리 머리를 쥐어짜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석개가 고뇌에 찬 사이, 문이 열리며 기녀 한 명이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왔다.

"서희 언니, 황금거목이 왔어요."

"어머, 진짜?!"

서희는 깜짝 놀라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고, 석개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희야, 황금거목이라는 자가 혹시 지난번에 말한...."

"예, 그자가 맞아요. 지부장님, 저 몸단장 좀 하고 올게요."

서희는 몸을 일으켜 동경 앞에 앉아 몸단장에 열중했다. 지부장은 방 안에 향을 뿌리며 자리를 피했고, 암막이 쳐져 있던 방은 기녀가 남자를 맞이하는 방으로 탈바꿈했다.

"흠흠."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서희는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상대는 '천상용제'를 처음 입에 담았던 존재로, 하오문 내에서 가장 유력한 쌍고응검의 주인 후보였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서희는 다소곳하게 몸을 돌리며 고개를 숙였다.

"가가, 오늘도 저를 찾아주셨군요. 먼저 술상을-"

우뚝.

서희의 눈앞에 열기를 가득 머금은 거목이 솟아있었다. 남자의 냄새를 가득 풍기는 상대에 서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가, 가가? 아무리 그래도 순서라는 게-"

"아까부터 화가 나서 못 참겠더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서 한 걸음에 달려왔다."

"예?"

"한 발, 아니 최소 열 발은 빼줘야겠다. 벌려."

"가, 가가! 저 그러면 죽, 읍!!"

뜨거운 거목이 서희를 짓눌렀다.

[작품후기]

주인공과 소공녀 사이에 알콩달콩하고 좀 더 풋풋한 관계를 쌓아나가고 싶었지만, 여러분이 찌걱질컥 거리고 퓻퓻한 관계를 보고 싶다니 어쩔 수 없군요.

거사는 75화 경.

그래도 플롯상 꼭 먹고 갈 둘은 먹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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