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67화 (67/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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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무환

적을 눈앞에 두고 등을 돌린 이유는 단 하나.

"끝나셨습니까?"

아래에서 소공녀가 빗장까지 열고 나왔기 때문. 마침 당문의 가주까지 합세하여 더 귀찮아지기 딱 좋은 때에 소공녀는 나를 찾았고, 나는 적당한 연기와 함께 철문 아래로 숨었다.

"암호는? 나는 소공녀 그대와 무엇을 하고 싶다고 했지?"

"닥치십시오."

"소공녀가 확실하군."

나는 소공녀와 문 안쪽으로 들어간 뒤 다시 빗장을 걸었다. 비고 안은 여전히 어둑어둑하여 잘 보이지 않았고, 아주 작은 촛불에 의지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앞이 잘 안 보이는데."

"그런 척하면서 은근슬쩍 제 엉덩이 만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럼 대놓고 엉덩이 만지면서 가도 되나?"

"...하아. 마음대로 하세요."

물론 나도 소공녀도 어둠 속에서 주변을 훤히 볼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모른 척 소공녀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더듬으며 소공녀의 인도에 따라 앞으로 걸었다.

"당신이 말한 것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적마의 안배를 염마가 알게 되었고, 그걸 대공자가 이용하여 소란을 일으켰다."

"정답이오."

아직 중간중간 비어있는 연결 고리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맥락을 정확히 짚어냈다. 어차피 결과만 망가뜨리면 되는 이상, 중간 상황을 일일이 확인하며 나아갈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대공자와 염마가 꾸미는 소란이 무엇인지도 알겠군."

"소열제의 검을 두고 세 세력이 서로 싸우게 되는 것."

"정답이오. 맹의 사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중재할 수 없는 문제로 커진다면 사천 일대가 들썩일 것이오."

"무림맹의 군사조차 중재할 수 없는 문제...누구 하나는 죽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엉덩이를 움켜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사이 비고 안쪽으로 나를 데려온 소공녀는 자신이 발견한 증거를 가리켰다.

"이것을 잠깐 봐주시겠습니까?"

"볼 것도 없소.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창천화두. 내가 호북성에 퍼진 천화가 마교-대공자의 수작임을 알아챈 계기인 질병의 제조법이 서책으로 남아있었다. 나는 서책을 뽑아 들었고, 동시에 옆에서 '딸칵'하는 소리와 함께 장치가 열렸다.

"사천당문은 온갖 독을 연구하기로 소문난 곳이지. 정파라는 이름 아래 숨어 금지된 독을 연구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오. 전염병을 연구하여 인공 전염병을 만드는 것 또한 마찬가지지."

"가문 내에서만 비밀리에 이루어진 연구일 테니 비밀도 유지될 터. 정말...지독하기 짝이 없습니다."

"대부분 극독이니 지독하기 짝이 없지. 내가 호북에 갔던 이유도 이것이오."

거짓말이다.

"아무리 봐도 자연 발생인 천화가 아니었거든. 그래서 살펴봤더니 이 병이 퍼져있던 게 아닌가? 거기서 알게 되었지. 검마가 이 병에 걸린 채 장문인과 생사결을 벌였음을. 그리고 그 여파로 천화가 사방에 퍼졌다는 것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원인을 되짚어가면-"

"사천당문이 만든 창천화두에 검마가 걸렸다. 그대는 그걸 말하고 싶은 것이오?"

끄덕. 소공녀의 눈빛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나는 그녀의 엉덩이에서 손을 떼어낸 뒤, 어깨를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얼마든지 화를 내시오. 대신 화풀이를 할 원흉이 누구인지 잘 생각하시오. 검마에게 창천화두를 뿌린 자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검마는 어느 날 병에 걸린 채, 천산에 살려달라고 요청했으니까요."

용의자는 셋.

당장 창천화두를 만든 사천당문, 이곳에 안배를 설치해둔 적마, 그리고 직접적인 관계는 없어 보이지만 일련의 사건에 발을 걸치고 있는 염마.

당문이 범인이면 은원관계의 해결을 위해 당문을 쓸어버리면 그만이고, 적마가 범인이라면 배신자를 처단하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만약 염마가 범인이라면, 염마를 죽이고 대공자의 계략을 모조리 박살 내면 되는 일이다.

"소공녀, 그대라면 범인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겠지?"

"적마의 안배를 염마가 알았다. 적마의 안배는 창천화두의 서책을 집어 드는 것으로 발견할 수 있다. 염마는 적마의 안배를 이용했다."

소공녀는 입술을 깨물며 붉은 안광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염마 또한 창천화두를 한 번은 본 적이 있다."

"그렇소. 정답이오."

범인은 염마다. 동기는 몹시 간단하다.

"검마는 그대와 유일하게 비무를 해주던 자. 그자가 죽으면 당연히 그대는 비무 상대가 없어질 것이고, 나날이 성장하던 무공도 정체하게 될 터."

"이 개 같은 새끼들이...!!"

소공녀의 순수한 분노는 대공자와 지린삼마를 향했다. 하지만 아직 그녀는 대공자보다 약했다.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내가 돕겠소, 소공녀. 우선 염마부터 처리합시다."

"갑시다. 당장. 염마를 죽이러."

소공녀는 천마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당장 이곳을 무너뜨리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고, 당문의 비고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려고 했다.

"비천, 당신은 내게 말했습니다. 작전 결행일까지 염마가 숨어있는 세력을 찾으라고. 염마는...당문입니까?"

"진정하시오, 소공녀.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니니."

"당신은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오. 알고 있는 것만 알지. 오만가지 무공을 안다고 한들, 50001번째 무공은 나도 모르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나와 함께 알아봅시다. 과연 어떤 자가 염마인지."

나는 적마의 안배가 담긴 보물 지도들을 가리켰다. 소공녀는 발견하지 못한 듯 보였고, 나는 보물 지도가 들어 있는 공간의 천장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역시, 없군. 혹시 이곳은 살펴보셨소?"

"거긴 왜...?"

"한 번 만져보시오."

나는 소공녀의 손등에 손을 포개어, 내가 짚었던 곳을 손가락으로 쓸게 했다. 소공녀는 흠칫 놀라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

"뭔가 붙어있던 흔적이...?"

"천상천하유아독룡 다운 생각이로군. 아래에 가득 쌓아놓은 보물 지도는 그의 기준으로 치면 일류. 하지만 자신이 가장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건 여기다가 안 보이게 숨겨둔 것이지."

아래에 가득한 보물 지도에 미혹되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정신으로 한 번 더 살펴볼 수 있는 침착함을 가진 이만 발견할 수 있도록.

"소공녀, 갑시다. 확인은 모두 끝났소. 남은 건 하나뿐이오."

나는 소공녀에게 비고 안쪽을 가리켰다. 우리가 빗장을 걸어놓은 문은 덜커덩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벌써 당문의 놈들이...!"

"이곳에는 염마가 없소. 그러니까 지금부터 확인하러 갑시다. 아미파, 청성파, 또는 또 다른 세력. 과연 그곳의 어떤 자가 '중려신화정(重黎神火井)', 염마가 자칭하는 무공-지옥화염대법을 사용하는지."

"...당신, 설마."

나는 소공녀의 손을 잡고 눈을 찡긋였다.

"내가 염마의 실체를 까발릴 테니, 그대는 염마를 죽이시오. 나는 그대의 편이니, 그대가 바라는 대로 하겠소."

"...풉. 가는 길에 소열제의 검도 챙기시려는 겁니까?"

"물론. 만약 아미와 청성에 그런 자가 없다면...."

나와 소공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씩 들어 올렸다.

"당연히 자기 계획이 망가진 염마가 소열제의 검을 빼앗기 위해 검의 주인을 습격하러 오지 않겠소?"

* * *

한 시진 뒤.

정신을 잃었다가 기력을 회복한 독귀 당사림은 가주 당오독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눴다. 무사들을 모두 화골산우진의 밖으로 내쫓은 둘은 비고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술상을 놓고 술잔을 비웠다.

"이정이가 소열제의 무공을 얻은 것이 틀림없소."

"......정황은 그러합니다. 이정이의 실력이라면 능히 화골산우진을 드나들 수 있지요."

독룡 당이정. 호적에서 사라진 방계, 아니 당문 최고의 후기지수는 오성만큼은 가주를 뛰어넘었다. 당연히 어린 나이임에도 화골산우진을 스스로 돌파할 수 있는 능력 정도는 얼마든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이가 당가의 비고에 보물 지도를 숨겨뒀단 말입니까? 왜?"

"......."

두 남자는 침울한 목소리로 숨을 삼켰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라고, 비록 당가를 떠났지만, 가문을 향한 마음은 변치 않은 청년의 마음에 둘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형님. 이정이...호적에서 다시 살리는 건...?"

"그건 안 되오. 그 녀석은...이미 마인이 되었소. 만약 녀석이 가문에 먹칠을 하려면 당당히 당가의 일원이 마교에 들어갔음을 알렸겠지."

"그렇다면...."

"스스로 숨긴 것이오. 여태껏 적마가 당가의 무공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그 아이는 철저하게 자신을 지웠소. 만약 우리가 그 뜻을 어긴다면, 그 아이의 마음을 짓밟는 것이오."

두 형제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사천당문을 위하여, 건배."

"비록 길은 다르지만...소열제의 뒤를 이어 검제가 될 그 아이를 위하여, 건배."

원형의 상에는 주인 없는 잔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둘은 잔을 꿀꺽 비웠다.

"이정이...아니 적마가 나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본인이 찾고자 하는 것을 찾았다면 분명 밖으로 나올 겁니다. 우리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확인만 하면 됩니다."

과연 그는 당이정으로서 소열제의 무공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것인가, 아니면 적마로서 사천당문의 무공을 훔치기 위해 온 것인가. 전자라면 같은 피를 나눈 이로써 보내줄 것이며, 후자라면 피를 뿌리며 보낼 것이다.

"...그런데 좀 늦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래서야 마치-"

"아버님!"

"...!! 건면이, 네가 미쳤느냐?!"

철문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당오독은 부리나케 몸을 일으켜 철문을 열어젖혔다.

"화골산우진을 멈췄다고는 하지만 곳곳에 화골산이 가득하다! 네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여기...어?"

철문 밖에 서 있는 당건면의 몸은 말끔했다. 아무리 화골산우진을 멈춰놓았다고 한들, 바닥에 흩뿌려진 화골산의 흔적을 피해 진의 정중앙까지 다치지 않고 온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아버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닥쳐라! 그 누구도 진 안으로 오지 말라고 했거늘-"

"가주. 들어봅시다."

당사림은 처연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건면아, 무슨 일로 이곳까지 목숨을 걸고 왔느냐?"

"죄, 죄는 나중에 받겠습니다. 하지만 꼭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어서...."

당건면은 얼굴을 찡그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비, 비고 안에는 밖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뭐? 그럴 리가 없다! 가주인 나도 모르는 것을 어찌-"

"그, 그야...!"

당건면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이정이 형님이 파놓은 굴이니까요...!!"

* * *

"후아! 살았다."

나는 기나긴 토굴을 빠져나와 기지개를 켰다. 토굴은 성도의 성벽 너머에 이어져 있었고, 나는 뒤따라오는 소공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어당겼다.

"콜록. ...당문에 이런 비고가 있을 줄은."

"어떤 곳이든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기 마련. 특히 당문처럼 적이 많은 자들은 탈출구를 만들어놓기 마련이지."

실제로 혈강시가 사천당가를 습격한 날, 가문의 주요 인원들은 이 비밀통로를 이용하여 몰래 성도를 빠져나가 탈출했다.

"또한 탈출구는 반대로 입구가 될 수도 있지. 여기를 보시오, 소공녀."

나는 우리가 빠져나온 곳 근처의 비석 하나를 가리켰다. 잘 다듬어진 비석을 본 소공녀는 손으로 입을 막고 끅끅대기 시작했다.

"천상천하유아독룡! 이곳에 죽다. 다음에 적마를 만나면 꼭 여기로 데려와야겠군."

"그, 그만두십시오. 그러다 적마가 주화입마로 죽을, 아하하!"

결국 소공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타인이 겪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는 것만큼 우스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휴우, 정말.... 적마는 저를 떠나고 나서도 제게 웃음을 주네요."

"정체를 숨겨도 천성은 숨길 수 없지. 그런데 소공녀, 우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소."

화륵. 나는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조금 전 염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 바로 불을 일으킨 것에 소공녀는 움찔거리며 긴장했다.

"화골산의 기운이 옷에 남아있는 이상, 우리가 이대로 돌아가면 의심을 사게 되지. 그러니 옷은 전부 태워버려야 하오."

"......예?"

화륵. 나는 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고 삼매진화로 태워버렸다. 웃옷, 바지 할 것 없이.

덜렁덜렁.

"힉?!"

소공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으나, 손가락 사이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그게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벗으시오, 소공녀. 이미 알몸 정도는 조금 전에 보지 않았나?"

"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중간에 누군가를 습격해서 옷이라도 구하지 않는 이상, 옷을 입고 가지 않으면 알몸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근데 굳이 습격할 이유가 있소? 숙소까지 일각만 달려가면 되는 것을."

나는 성벽 너머를 가리켰다. 사람을 습격할 필요 없이, 성벽만 넘으면 바로 우리가 잡은 숙소가 있었다.

"다, 당신 설마 일부러 숙소를!!"

"설마 그럴 리가. 내가 그렇게까지 계획적인 인간으로 보입니까?"

화륵! 나는 삼매진화로 소공녀의 옷을 전부 태워버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게 된 소공녀는 붉은 안광을 터뜨리며 울먹거리며 나를 노려봤다.

"여, 염마를 죽이기 전에 당신부터 죽여버릴...!"

나는 소공녀를 향해 등을 보였다.

"업히시오, 나를 믿고. 내가 설마 소공녀의 아리따운 몸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게 하겠는가? 내 아이의 어머니가 될지 모르는 여자를? 하하하!"

나는 소공녀를 향해 검지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검지랑 같이 다른 것도 껄떡거렸다.

"나만 볼 거요! 으하하하!"

"이, 이...색마! 감히 마교의 소공녀를 상대로 이런 능욕을!!"

"어찌하겠소? 슬슬 해가 뜨려고 하는데."

"이...!!"

선택지는 없었다. 소공녀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내게 다가왔다.

"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죽여버릴 겁니다!!"

"걱정마시오. 이런 걸-"

소공녀는 내 앞에 서서 가슴과 음부를 가렸다.

"업히지 않고 왜?"

"...닿지 않습니까!"

소공녀는 입술을 뻐끔거리며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앞으로 안으면 그나마 덜...."

"가시지요, 공주님."

나는 소공녀를 단번에 안아 들었다. 내 목에 팔을 걸지도 않고 손으로 중요 부위를 가리는 데 집중했고, 나는 소공녀를 위해 내 남은 내기를 폭발시켰다.

"하늘로! 허공답보! 새벽하늘을 마음껏 만끽하시오!"

"에? 꺄아아악!!!"

바야흐로, 비천색마.

[작품후기]

네? 소공녀가 불쌍하다고요?

아직 아미파랑 청성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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