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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무환
"흐아암."
야심한 시각.
당가의 무사, 가라(假懶)는 하품을 하며 졸았다. 하늘에 떠오른 달은 만월이었고, 밤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쥐새끼 한 마리 없군."
가라는 몸을 으스스 떨며 내기를 운용했다. 그다지 중요한 임무가 아니라면 술 한 모금 입에 털어 넣어 뱃속을 뜨겁게 만들겠지만, 지금 그는 술조차 입에 대지 못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으으. 어차피 아무도 여기에 오지 않을 텐데."
그의 임무는 사천당문의 비고 근처를 지키는 것.
정확히는 아무나 비고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화골산우진.
비고로 향하는 주변에는 피부에 닿기만 해도 생살이 녹아내려 사람을 뼛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독이 비처럼 내리는 진법이 설치되어있다.
침입자는 물론이거니와, 당문의 호기심 많은 몇몇 이들도 화골산우진의 뼛더미가 되어 죽었다.
가주 급 존재에게만 전해지는 생로를 밟아 들어가지 않는 이상, 화골산우진은 만독불침 이외에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니 침입자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무공의 수위가 이류에 불과한 가라가 이곳에서 일할 수 있는 것도, 어디까지나 비고에 함부로 접근하는 이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사락.
"...응?"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접근하는 침입자를 눈치채지 못할 이유는 없다. 가라는 등 뒤로 놓은 손에 암기를 꺼내, 달빛의 그림자 속에 숨어 저벅저벅 걸어오는 상대를 예의주시했다.
'두 명.'
인영으로 보아 한 명은 남자고 한 명은 여인으로 보인다. 앞에 선 남자가 먼저 달빛 아래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오랜만에 와도 여전하군."
"......정체를 밝히시오."
"침입자가 나타났거늘 어찌 이리 태평하지?"
"정체라도 알고 가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거든."
암행복에 삿갓을 쓴 흑의인은 아무리 봐도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여인의 무공 수위는 대략 느낄 수 있었다.
최소 절정. 가라로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러니 죽기 전에 정체를 가르쳐주지 않겠소? 알려주는 김에 이곳에 온 목적도."
"목적이야 간단하지. 사천당문의 비고에 잠시 들어갈 일이 있어서 그런다."
"흥. 그건 불가능하오. 화골산우진에 누가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나니까."
흑의인은 삿갓을 슬쩍 들쳤다. 달빛에 비친 익숙한 얼굴에 가라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세상에...!!"
"나를 아는가?"
"어, 어떻게 도련...당신이 여길?!"
"몰래 온 손님일세. 따로 초대받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이 몸에 흐르는 피에 이끌려서 말이야."
흑의인은 품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가라는 한 손으로 약병을 받았고, 약병을 감싼 문구에 화들짝 놀랐다.
"인면지주의 내단...?!"
"오는 길에 주웠소. 내가 쓰는 것보다 필요한 자들이 쓰는 게 좋겠지."
흑의인은 품에서 몇 가지 서책을 꺼내 들었다. 가라는 서책의 표지를 보자마자 눈물이 글썽거렸다.
"도련님...!! 역시 세가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그런 건 아닐세. 단지 내게 필요 없는 걸 버리려고 하다가 버리기에 아까워서 그런 것일 뿐."
흑의인은 다시 삿갓을 눌러썼다. 가라는 감격한 얼굴로 허리를 구십도로 숙였다.
"저는 아무것도 못 본 거로 하겠습니다. 조심히 다녀가십시오."
"고맙네, 그럼."
흑의인은 뒤따르는 여인을 향해 턱으로 눈짓을 하고는 비고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복면으로 얼굴은 가린 여인은 가볍게 가라에게 고개를 숙인 뒤, 흑의인의 뒤를 따라 당당하게 안으로 입성했다.
끼이익.
문이 닫혔다. 가라는 품 안에서 진득하게 풍겨오는 인면지주의 기운에 침을 꿀꺽 삼켰다.
"참...도련님도 역시 당가의...."
가라는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 * *
"그냥 색마가 아니라 위마(僞魔)라고 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건 안 되오. 이미 나는 비천색마의 길을 걷기로 했거든."
쏴아아아.
사방에 독기운이 가득하다. 나는 소공녀의 손을 꼭 잡고 화골산우진의 생로를 걸었다.
푸쉬이이-!
닿으면 금방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극독이 옆에서 튀었다. 내가 조금만 더 앞으로 발을 디뎠다면 분명 발끝부터 녹아내렸을 것이고, 조금만 덜 앞으로 발을 디뎠다면 발바닥이 녹아내렸을 것이다.
"적마가 독공의 고수이나 비적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나 또한 천하제일의 무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색마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지. 그러므로 위마라는 건 성립하지 않소."
"참으로 광오한 말씀이십니다."
"왜? 천마가 천하제일이라서?"
"천하제일은 접니다."
소공녀의 당당함에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역시 이래야 천마지.'
괜히 흑도제일화가 아니다. 자신의 무공에 대한 확신과 자존감은 그녀의 말대로 천하제일이었고, 실제로 천하삼대고수로 손꼽히는 존재로 성장하기도 했다.
"자신감 하나는 확실히 태극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군."
"그럼 손색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
나는 몸을 돌려 지긋이 시선을 내렸다. 소공녀는 한 손을 어깨에 올리며 나를 쏘아봤다.
"신장은 제가 더 깁니다. 내공은 제가 더 많습니다. 얼굴은 제가 더 예쁩니다!"
"그거 인피면구요. 신장과 내공은 인정하지만, 얼굴은 비교하기 어렵군."
"뭐..라고....."
소공녀는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게 진실입니까? 인피면구로 추한 얼굴을 가린 게 아니라??"
"그러면 내가 왜 소공녀에게 그런 거로 거짓말을 하겠소? 태극화에게 실례라오."
"당신이 그런 몸에 얼굴까지 저와 비등한 태극화를 취하지 않았을...설마...이미 다 끝내놓고...?"
역시 소공녀다. 나는 미소로 그 답을 대신했다.
"세상에.... 뒷 일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태극화가 당신보다 강해져서 검 네 자루를 들고 당신을 쫓아와서 칼침을 놓으면 어쩌려고 합니까?"
"그때는 얌전히 잡혀서 기둥서방이나 해야지. 소공녀, 그대도 마찬가지오. 언젠가 내가 그대의 마음을 취하고도 다른 여자를 탐하려고 떠난다면...."
나는 소공녀의 손을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뒤로 화골산이 튀었고, 나는 소공녀를 품에 안아 속삭였다.
"내 다리를 분질러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어도 좋소. 대신 허리와 남근만큼은 살려두시오. 그건 그대에게도 손해일 테니."
"이, 이...!"
"크하하! 물론 당분간 내가 그대를 떠날 일은 없으니 안심하시구려. 마저 갑시다."
나는 소공녀를 잡고 다시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소공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진절머리 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사천당가의 화골산우진을 이리도 긴장감 없이 지나가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일 겁니다, 비천."
"정답을 아는 미로만큼 재미없는 길이 없지."
나는 화골산우진의 생로를 정확히 알고 있다. 언제 어디서 독이 튈지, 생로 가운데에서도 밟아서는 안 될 곳은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진법 또한 무공이오. 그럼 내가 모를 수 없지."
"허, 이번에는 당가의 무공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겁니까?"
"물론이오. 이 세상에 내가 사용할 수 없는 무공이 손에 꼽을걸?"
얼마나 많은 무림인의 피를 머금었는지 모른다. 당연히 당가의 무공도 존재하며, 사천당문 중에서 화골산우진의 파훼법을 아는 이의 무공도 알고 있다.
'독선(毒仙).'
성도에서 멀리 떨어져 사천 어딘가 야산에 틀어박혀 있을 은거기인. 한 세대 전의 존재로 사천당문을 멸망시키러 가던 혈강시의 앞을 가로막아서 당문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었던 현경의 고수였다.
"입구를 지키던 무사도 느낀 것이오. 내가 사천당문의 무공을 익힌 것을."
"비천이 지금 적마인 척 사칭을 하고 있기 때문 아닙니까?"
"흥. 아직 멀었군. 사람 만져보기로 사파 못지않게 만져본 당가의 인간들이 인피면구도 구분하지 못할까? 물론 나는 역체변용술까지 동원했지만, 고작 얼굴과 비슷한 목소리만으로 속인 건 아니오. 자고로 무가를 상대로 사칭하기 위해서는 이것만큼 확실한 바가 없지."
타앙!
나는 소공녀를 향해 날아오는 암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내가 손에 붙잡은 독침을 전방으로 날렸다.
키에엑!
"허...."
독기를 가득 머금은 뱀의 미간에 독침이 꿰뚫렸다. 만약 내가 죽이지 않았다면, 당장 머리를 위로 들어 올려 경종을 울렸을 터.
"화골산우진은 뱀의 독을 근간으로 하고 있소. 그리고 당문에서 키우는 저놈을 반드시 죽여야만 진을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되어있지."
"그런...끔찍한."
"당가니까."
가장 정파답지 않지만 일단 정파에 속한 가문이 바로 사천당문이다. 무림맹에서 정마대전이 일어났을 때 독공에 죽어 나가는 게 두려워 자신들의 편에 끌어들인 게 아닐까 싶지만, 당문의 존재들은 하나같이 손속이 잔혹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화골산우진은 진법의 근간이 되는 뱀, 화골산을 뿜어내는 뱀이 튀어나왔을 때 죽여야만 생로가 마저 열린다. 안 그러면 경종이 울리게 되고 무사들이 달려오게 된다.
"가주 이상의 존재가 생로를 틀릴 리가 없으니, 뱀을 죽이지 못하고 경종이 울렸다면 당연히 침입자가 비고 근처까지 도달했다는 것 아니겠소?"
"...정말 무서울 정도로 지독한 진법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뱀을 죽이고 다시 집어넣음으로써 알 수 있는 바가 있지."
"혹시 출입의 흔적...? 흠...수법은 잔인하지만 뱀이 죽었다는 거로 누군가 드나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답이오."
찰싹. 나는 소공녀의 엉덩이를 가볍게 손바닥으로 쳤다.
"비천!"
"다행히 긴장은 풀린 것 같군. 계속 앞으로 갑시다. 이제 다 왔소."
끼이익.
나는 화골산우진의 한가운데, 아래로 통하는 철문을 가리켰다.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문은 화골산에도 부식되지 않고 원래의 색을 간직하고 있었고, 나는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들어갑시다. 아, 혹시 약이 더 필요한가?"
"......아, 아직은."
소공녀는 쭈뼛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약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약을 마시는 방법이 부끄러워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무엇이 부끄럽소? 옷 안에 약을 끼얹기만 하면 되는 것을."
"이게 부끄럽지 않으면 정상입니까...?"
소공녀는 자신의 의복을 가리켰다. 나와 비슷하게 검은색 옷이기는 했지만, 도복의 형태인 나와 달리 몸에 착 달라붙어 전신의 굴곡이 잘 드러나는 재질이었다.
"제복이라는 것이 무엇이오?"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제복이라 함은 집단의 소속감을 고취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의복. 따라서 제복은 평상복과 달리 용도에 맞게 개조되기 마련이오. 그대가 입은 암행복도 그렇소. 만약 도포처럼 펑퍼짐하여 옷자락이 이런 곳에 닿으면 어찌 되겠소?"
나는 아래로 내려가는 입구를 향해 내기를 살포시 뿌렸다. 극강의 양기가 아래로 뻗어 나가기 무섭게 사방팔방으로 펼쳐져 있던 거미줄이 불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런 함정에 신체접촉이 최대한 이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오. 옷이 곧 피부가 되는 셈이지."
"하지만 이런 건 너무...."
소공녀는 허리 근처를 손으로 쓸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복숭아처럼 아담한 둔부와 달리, 유려하고 매끄럽게 잘 빠진 골반은 호리병과도 같았다.
- 지금부터 모든 여자 교인들의 복장은 몸에 착 달라붙는 재질로 변경한다.
혈교주는 말했다. 암행복이라 함은 남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기본이라고. 그렇다면 남에게 들켰을 때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복장으로 임무를 수행한다면 더욱 임무를 잘 수행해낼 수 있을 거라고.
"소공녀, 아래로 내려갑시다. 여기서부터는 그대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으니 먼저 가시오."
"비천이 말하니까 딱히 위험하다고 생각은 되지 않습니다만...잠깐. 저기는 엎드려서 기어가야 하지 않습니까?"
소공녀는 아래로 내려간 통로의 좁은 길을 가리켰다. 성인 남성이 네발로 기어가야만 할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다.
"......색마."
"크흐흐."
소공녀는 내게 눈을 흘기며 구멍을 향해 상체를 넣었다. 팔꿈치와 무릎으로 기어가는 그녀의 뒤태를 보며, 나는 호흡을 크게 가다듬었다.
"씁-하."
양기를 두 눈에 집중한다. 빛 한 점 없는 공간에서 어둠을 걷어내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전신의 내기를 안력에 집중시켰다.
용안(龍眼), 개방!
번뜩!
온통 검은색밖에 없던 공간에 움직이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용안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역체변용술로 얼굴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야 했지만, 정말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었다.
"하하,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 구려. 앞을 더듬어서 가는 방법밖에."
나는 상체를 앞으로 뻗어 물체를 향해 네발로 기어갔다.
푹신.
들어가자마자 이마와 코가 푹신한 무언가에 닿았다. 앞의 물체는 화들짝 놀라며 앞으로 튕겨 나갔다.
"미, 미쳤어요?!"
"흐흐, 소공녀. 이것도 시련이오. 앞에 함정이 있는 거지?"
쿵, 쿵쿵. 나는 얼굴을 세워 앞으로 들이받았다.
"빨리 가지 않으면 뒤에서 재촉할 것이오."
할짝.
나는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소공녀의 몸이 순간 움찔거리며 멈췄다.
"응? 왜 그러시오? 빨리 가지않고. 설마...."
두근, 두근. 나는 앞에서 전해지는 맥박에 쾌재를 불렀다.
"함정을...파훼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고작 당문의 함정을?"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렇소? 흠...알겠소. 그런데 왜 그렇게 긴장하는 거지?"
"......보, 보이는 건 아니시죠?"
"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가 말랑말랑한 엉덩이에 닿았다 떨어졌다.
"이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게 있겠소? 용안의 소유자가 아니고서야."
내 눈앞에는 그저 도끼에 파인 자국밖에 보이지 않았다.
[작품후기]
끼요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