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56화 (56/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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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내린 뒤

용봉지회가 끝난 뒤.

무당파의 장로들은 한자리에 모여 급한 회의에 들어갔다.

"현철 사형, 어쩌자고 그러셨소?"

"시끄럽네. 내가 장문인이라고 했나? 맹주가 장문인이라고 했지."

방 안에 모인 장로들은 모두 현철도사를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현철도사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누구 하나 현철도사가 장문인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공식적으로 '현재'의 장문인은 현기도사 만사용이다.

아직 현철도사가 장문인이 된 것은 아니고, 현철도사에게는 아직 엄청난 약점이 남아있다.

- 현철도사가 1년 전에 마교 끄나풀이랑 내통했다던데....

- 능력은 좋은데 저 사형 인성이 그다지....

- 장문인은 무공의 수위도 높아야 하는 게 아닌가? 조만간 현타한테 따라잡힐 것 같기도 하던데?

장로들의 눈빛에 현철도사는 자격지심으로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번 용봉지회를 성공적으로 운영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거가 발목을 잡고 있었다.

- 지가 벌써 장문인인 줄 알아!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어쩌다 보니 장문인인 척 사칭을 하게 되었다는 것.

항상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장문인 대리라고 밝히고 다녔지만, 용봉지회의 결말에서 맹주가 장문인 (대리)라고 말하는 바람에 세상 사람들은 이미 무당의 변화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전대 장문인이 물러나고 새로운 장문인이 나타나는구나!

물론 그건 사람들의 기대이며, 장문인은 어디까지나 전대 장문인이 인정하는 자가 장문인이다. 현철도사는 주먹을 꽉 쥔 채, 멀리서 방을 향해 다가오는 이를 기다렸다.

"사형."

현타도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에 다른 장로들은 환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현타왔는가!"

"어서 오시게."

이전만 하더라도 현타도사를 놈팡이 바라보듯 하던 장로들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인 이상 양심에 찔려서 어디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한량이라고 비난하던 자가 사실은 모종의 안배로 태극혜검의 전수자를 기르고 있었다. 자신이 받는 모든 오욕을 감내하며 지도한 태극혜검의 주인은 무당의 자존심을 확실하게 세웠다. 구룡에 도전한 자가 1회전에서 탈락한 것 정도는 몹시 사소했다.

"희 소저는 지금 어디 있소?"

"은거지를 정리하고 있소. 무당에서 기거할 곳은 어디로 정하셨소?"

"장로들을 위해 따로 마련되는 별실이오. 그녀의 요청대로 가사관리는 진사월이라는 여인에게 맡기기로 하였소."

"잘 선택하셨소. 과거에 어떤 존재였다고 한들, 새로이 마음을 먹고 새 출발을 하려는 이를 돕는 것이야말로 무당의 넓은 배포라고 할 수 있지. 암."

태극화, 태극무봉, 백도제일화는 이미 대제자를 뛰어넘어 무당의 장로급 존재가 되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그녀는 자신의 방을 다른 제자들에게 맡기지 않고 진사월이라는 여인을 고용하기로 했다.

"크흠. 아무리 그래도 기루의 여인은 조금...."

"현질 사매.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가? 태극화를 만난 이후, 그녀가 진심으로 태극화를 위해 정성껏 보살핀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그대가 이리도 편견이 있을 줄은 몰랐군."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태극화에게 전하도록 하지. 태극화의 방을 정리하는 일은 그 누구도 맡지 않게 됐-"

"아, 아녜요!!"

비록 그녀는 기루에 입적한 여인이었으나, 1년간 그 어떤 남자도 '받지 않고' 태극화를 곁에서 성심성의껏 돌봤다는 것으로 정상참작이 되었다. 여전히 전직 기녀가 문파의 한복판에 드나드는 것을 꺼리는 이들도 있었으나, 결국 갑은 태극화였다.

"그리고 현철 사형, 현기 사형이 찾고 있소."

"장문인께서?"

"...비고로 가시오."

흠칫. 모두가 경악했다. 오직 장문인만이 출입할 수 있는 무당의 비고로 호출을 받았다는 것의 의미는 단 하나뿐이었다.

"......."

현철도사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숙원이 이루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는 자신의 어긋난 행동을 알면서도 눈감아준 사제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모두 따라오시오. 비고로 들어가는 건 장문인뿐이지만, 장로는 뒤에서 봐도 좋으니."

"예? 하지만 그건 규칙을-"

"장문인께서 괜찮다 하셨소. 오히려 보시구려, 장문인의 마지막 회광반조를."

"......!!"

무당파의 장로들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비고를 향해 달렸다. 장로들의 선두에 선 현철도사는 비고 앞에 도착하마자마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숙님들을 뵙습니다."

"태극화...!!"

비고의 앞에는 처음 보는 여인이 서있었다. 하지만 장로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녀의 기품을 바탕으로 그녀가 누군지 금방 깨달았다.

"얼굴이...?"

"인피면구였습니다. 너무 얼굴을 못생기게 하면 오히려 의심을 산다고 하셨고, 이제는 백도제일화가 되었으니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도 되겠지요."

"허어...."

장로들은 다시 인피면구를 뒤집어쓰는 태극화에 탄식을 내뱉었다.

"현기 사숙께서 안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

저벅, 저벅.

현철도사는 비고 안에 가부좌를 튼 채 앉아있는 백발의 노인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장문인, 현철이 왔습니다."

"......이곳은 무당의 역사가 잠든 곳이다. 하지만 모든 역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철컹! 무당 장문인의 상징, 자보검이 하늘 높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태극화가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누가 사용하는 것인가? 답은 불 보듯 뻔했다.

"사형...!"

"선배님께서는 그 어떤 무공도 명맥이 끊기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네 생각대로, 무공비급들을 새로이 필사했다. 반년. 생각보다 길더구나...."

비고 안은 새롭게 정돈된 서책으로 한가득 쌓여있었다. 그리고 현철도사의 앞에는 네 글자 적힌 검법의 비급이 놓였다.

"태극혜검!"

"일인 전승으로 실전될 무공이라면 차라리 비급으로 남겨 익힐 수 있는 이가 익히도록 하라는 것이 전승자의 의지다. 태극화에게 감사하라."

"큭...!!"

실전된 전설의 무공을 되돌려준 이가 어찌 무당의 일원이 아닐 수 있으랴. 현철 도사는 땅에 머리를 찧으며 외쳤다.

"제 딸아이처럼, 제 제자처럼 아끼고 보살피겠습니다!"

"...그래. 선배님께서도 떠나기 전에 많이 걱정하셨다."

현기도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보검 안으로 들어가는 음양의 기운이 보라색 껍질을 서서히 갈라지게 했다.

"!!"

검안에 검이 있다. 허공에서 위로 뽑혀 올라가는 묵빛의 검은 자보검 이상으로 예리하고 아름다웠다.

"장문인의 상징은 이제 자보검 따위가, 그리고 도복 따위가 아니다. 장문인이 되고자 하는 자...."

철컹! 묵검이 태극검을 펼치기 시작했다. 장문인은 가만히 선 채로 의념으로 검을 휘둘렀고, 허공에 붓을 그리듯 유려하게 흘러가는 검로에 현철도사는 눈물이 주룩 흘렀다.

태극.

현기도사가 마지막 불꽃을 태워 만든 태극은 현철도사가 살아오면서 본 그 어떤 태극보다도 완벽했다. 현기도사는 천천히 현철도사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당의 미래를 부탁하오, 장문인."

"사형!!"

파스스.

무언가가 연기처럼 현기도사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어깨에 올려진 손은 너무나도 가벼우면서도 무거웠고, 현철도사는 목놓아 꺼이꺼이 울었다.

현기(玄記), 만사용.

등선(登仙).

* * *

"무당의 장문인이 등선했소."

적마가 가져온 소식에 다른 두 마인은 몸이 움찔거렸다.

"장문인? 그 망할 색마 놈이 아니고?"

"장문인이 확실하오. 검마와 은원이 있던 현기 만사용. 그가 등선하고 현철도사 중검이 장문인의 자리를 이어받았소."

"곧 호북 전체에 장례식이 펼쳐지겠군."

호상이라면 호상이었다. 용봉지회가 끝나기 전까지 마지막 생명의 의지를 불태우던 그는 용봉지회가막을 내리고 난 뒤에 붙잡고 있던 생명의 끈을 놓아버렸다.

"쯧, 색마도사 그놈이나 등선하지."

"속세에 대한 오욕칠정이 그리도 강한 자가 어찌 등선할 수 있겠느냐."

귀천삼마는 자신들의 이름을 빼앗아 간 색마를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행장을 꾸렸다. 갑작스러운 마인의 등장에 천마가 자신들을 구원해주지 않을까 약간의 기대는 했으나, 천마는 색마의 말대로 자신들에게 색마의 지시를 따르라고 명을 내렸다.

"젠장, 당장 찾으러 갑시다! 발로초인지 뭔지!"

"천마지루. 하늘을 날아다니는 말의 눈물이라는 것인가...."

"끌끌, 다들 동병상련이고만."

천마신공을 이어받았기에, 언젠가 들이닥칠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마는 몸단장을 마친 뒤 서로를 향해 포권을 나눴다.

"갑시다."

"물론. 어차피 기한이 있는 임무 아닌가? 실패해도 부담 없이 돌아갈 수 있고. 애초에 천마께서도 딱히 성공을 바라는 눈치가 아닌 듯하니."

"우리가 실패하면 그 책임을 물어 색마 놈을 상대로 추궁을 하시겠지. 그걸 빌미로 한 번 제대로 붙을 것이다. ...흐흐흐, 놈이 깨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삼마는 몸을 돌렸다. 왠지 모르게 객잔에 모여든 여인들의 눈이 자신들을 자꾸만 따르는 것 같아 셋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흠흠, 나름 괜찮게 다듬어지지 않았나?"

"어르신, 괜히 기대하지 마십시오. 저들은 이 얼굴을 보고 반한 겁니다."

"예끼. 네 얼굴이 아니라 이 몸의 간드러지는 수염을 보고 눈길을 떼지 못하는 것이니라."

적마와 환마는 서로 티격대격하며 주변을 훑었다. 여인들의 놀란 시선은 적마도 환마도 아닌, 막 삿갓을 벗어 손부채질하는 도마를 향해 있었다.

"어우, 덥군. 가는 길에 부채 하나 사서 갑시다."

"......."

"......."

도마의 머리에 비친 태양 빛은 동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 * *

"......."

소공녀는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아침햇살을 즐겼다. 따사로운 햇살에 전신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고, 소공녀는 새벽부터 몸단장을 마치고 떠나갈 채비를 마쳤다.

흑도제일화.

비록 육봉의 일좌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가치 있는 별호를 손에 넣었다. 은근히 별호에 집착하는 마화(魔花)가 알면 필히 이를 악물고 부들거릴 것이다.

"훗."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소공녀는 갑자기 머릿속에 까맣게 타들어 갔다.

자신의 지지자인 비천삼마는 천마의 명령으로 발로초를 찾으러 떠났다. 괜히 자신의 사람을 셋이나 잃은 것에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발로초는 천마신공을 익히는 자들 모두의 공통 관심사인 만큼 포기할 수 없는 영약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마교가 있는 신강과 호북 사이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다. 마교에 초대장이 오고 제법 전력으로 달려왔음에도 서류 마감 하루 전에 도착할 정도였으니, 느긋하게 가면 최소 달은 넘게 걸릴만한 먼 거리였다.

'대공자가 가만히 있을까?'

결코.

대공자는 호북성 밖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지린삼마까지 대동하여 주살하려고 할 것이나, 계속 호북성 안에 있자니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많았다.

'언제 오시려나.'

상황을 타개할 자는 오직 한 명. 삼마를 대신하여 자신을 지켜줄 새로운 호법이 없는 이상, 삼마의 자리를 채워줄 또 다른 존재가 필요했다.

"저런. 설마 벌써 떠날 채비를 마쳤을 줄이야."

"......!! 당신은!"

소공녀는미혼탈영구궁진의 생로를 정확히 밟아 들어오는 청년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청년은 단환 하나를 장난스럽게 손에서 튕겼다 잡으며 소공녀의 앞에 섰다.

"이거 참 난감하군. 모처럼 소공녀께서 몸으로 사신 천환단이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비겼으니까 그건 아닙니다."

"훗. 하지만 이 천환단은 소공녀가 산 것이 아니오? 태극화에게는 쓸모가 없어졌으니, 대금을 치르려면 그대를 따라가야 하는 방법밖에 없지."

소공녀는 청년을 위아래로 훑으며 한참을 고민했다. 흰색 도복을 차려입은 그는 마치 선인과도 같은 별난 기운이 가득했다.

"어쩐지. 그대는 단 한 번도 신의를 스승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죠. 이상하리만큼 마교 사정을 잘 안다 싶었습니다. 당신이 비천삼마를 떠나게 한 장본인입니까?"

"그렇소. 이제는 내가 비천(飛天)이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마교의 존재라는 것은-"

"이것으로 되랴?"

파---앗! 비천이라 칭한 청년의 눈에 붉은 안광이 터져 나왔다. 소공녀는 청년에게서 들끓는 정순한 마기에 입술을 깨물었다.

천마와 비등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공력을 가진 존재다. 도대체 이 자는 누구란 말인가.

"...정식으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마교 소공녀, 이름은-"

"이시아(李施娥). 내 어찌 그대의 이름을 모를 수 있겠소?"

"......십마 이외에는 알지 못하는 이름을 어찌 아십니까?"

소공녀, 이시아의 추궁에 청년은 활짝 웃으며 손을 들었다.

"무마(無魔)라는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 마. 자리가 없다는 건 누구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지. 만나서 반갑소. 내가 그대를 지킬 자, 색마(色魔)요."

"...어쩐지 여인의 몸을 그리도 탐하더라니. 그날도 책상 아래에 여인을 숨기고 계시지 않았잖습니까?"

"흐흐, 눈치채셨는가? 그래. 백도의 꽃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지. 그래서 이제 흑도제일화를 취하려고 하는데...."

"이대로 겁탈당하면 꼼짝도 못 하고 당하겠지요."

이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붉은 안광이 스쳤다.

"얼마든지 해보십시오. 제 몸은 가질 수 있어도, 제 마음은 가질 수 없을 테니."

"크게 오해를 하는군. 내가 그대에게 받은 은혜가 있는데, 어찌 그대를 짓밟겠소?"

청년은 이시아의 앞까지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이시아의 왼손을 당겨 그녀의 약지에 입술을 맞췄다.

"그대의 마음을 얻으면 자연히 몸이 딸려오는 것을. 기대하시오. 내 이번 생, 당신을 위해 일할 터이니. 그대가 바라는 지존의 자리까지 밀어 올려주리다."

"...당신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 그래, 굳이 말하자면...."

청년은 몸을 일으켜, 이시아와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비천색마(飛天色魔). 그대를 저 하늘로 날려 보내줄 자지."

[작품후기]

하늘로(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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