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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내린 뒤
하늘에 벼락이 친다.
땅이 뒤집히고, 피바람이 폭풍처럼 몰아친다. 회색 도복은 검붉은 물로 가득 차오르고, 산 곳곳에 선혈이 튀어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쿼어어어!!
산에 짐승의 포효가 울려 퍼진다. 태극의 문장을 등에 수놓은 회색 도복의 무사들을 두 손으로 찢어 죽이는 괴물은 기세를 멈출 기미도 없이 무인들을 쳐 죽이며 살겁을 이어나간다.
무당산에 비명이 끊이질 않는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끊이질 않지만, 무당의 절정 고수들은 산의 정상에서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막아라!! 검후께서 회복하고 돌아오실 때까지!!"
백발이 성성한 무당파의 장문인, 현타도사 사정후의 호령에 무당의 모든 제자가 결연한 의지로 검을 움켜쥐었다.
"이곳이 뚫리면 장강에 피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무조건 막아야 해!"
죽는다는 건 안다. 이미 수많은 문파가 한 명의 괴인에게 살해당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이 자리에 모인 무사 중 가장 강한 장문인조차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아무리 무당파의 모든 고수가 한자리에 모였다고 한들, 이미 곤륜파가 똑같은 방식으로 옥쇄를 각오했으나 무너졌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무당의 무인들은 모든 걸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이미 도망칠 자들은 도망쳤고, 남은 이들은 죽을 각오로 검진 위에 섰다.
살아남기 위해.
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다는 건 역설이었으나, 죽음으로서 시간을 버는 것이 곧 살아남는 길이었다.
"대구궁검진을 펼쳐라!"
사정후의 사자후와 함께 도사들이 거대한 원을 그렸다. 최외곽부터 안쪽까지 펼쳐지는 아홉 개의 동심원은 중앙을 수호하는 강력한 보호막이 되었다.
흑과 백의 선이 물결을 그리듯 유려하게 펼쳐지고,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소용돌이치는 것 마냥 두 가지 색이 회전하고 있었다.
고오오오.
"우리가 태극이 된다!!"
바닥에 펼쳐진 흑백의 면이 교차하듯 서로 섞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류 고수 이상만 모인 도사들이 일제히 태청강기를 운용하기 시작하자, 아홉 개의 동심원은 커다란 태극을 그리며 완벽한 구를 갖췄다.
무림맹주나 천마조차 감히 도모하기를 꺼릴 무당의 전력.
옥쇄를 각오한 도사들은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죽음을 맞이했다.
저벅, 저벅.
가벼운 발걸음 소리에 무사들은 입술이 바싹 말랐다. 산 아래로 내려간 무당의 무사들이 족히 천 명이 넘건만, 산에 올라오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온다!"
짙은 혈향이 울려 퍼진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악취가 들끓고, 정신이 아찔해지는 피비린내가 속을 뒤집는다.
질질질.
산 아래, 무언가가 흙길에 질질 끌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최전방에 선 무사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검을 벌벌 떨었다.
"겁천혈귀…!"
"갈!!"
태극의 중앙에 서 있던 현타도사는 사자후를 터뜨려 불안감을 억눌렀다.
"놈은 그냥 혈강시일 뿐이다! 겁먹지 마라! 우리에게는 태극검후가 있다!"
[그 태극검후를 죽이러 왔소.]
쿵.
산발의 혈귀가 정상으로 향하는 길 한 가운데 우뚝 선 채 입을 열었다. 푸르게 변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혈귀 본인의 목소리가 아닌, 혈귀를 조종하는 자의 경박한 목소리였다.
[길을 비켜라. 순순히 태극검후를 내놓으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닥쳐라, 혈교주! 네놈의 간악한 짓을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으냐!!"
[내가 뭘 한다고?]
"간살!!"
사정후는 스스로 이야기를 하고도 치를 떨었다. 혈귀는 무엇이 그리 우스운 건지 고개를 숙이며 꺽꺽 숨넘어가듯 웃고 있었다.
그게 마치 살아있는 사람인 것 같아 더 소름 돋았다.
[간살이라...그래. 그러면 긴말할 필요는 없지. 어서 내놓아라. 피를 보고 싶지 않으면.]
"무당의 피를 밟고 가라!! 사제들이여! 제자들이여! 미안하네, 그대들의 목숨을 빌려주시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태극의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무당의 무사들이 지키던 작은 창고에서 나온 여인은 얼굴에 태극 모양의 면사포를 두른 채 손을 들어 올렸다.
"장문인과 사형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호남으로 가셔요. 그리고 무림맹주와 합류해주세요. 저자가 노리는 건 접니다."
"검후!! 그대를 버리라는 것이오!?"
"버리라는 게 아닙니다. 시간을 끄는 건 접니다."
철컹, 철컹. 창고 안에서 검 네 자루가 솟아올랐다.
장문인의 상징이기도 한 자보검 안에서 묵빛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고, 다른 세 자루의 검과 함께 태극검후의 사방을 지키듯 떠올랐다.
"혈귀를 막을 수 있는 건 무림맹주와 천마뿐입니다. 그들과 합류하여 시간을 벌어주세요. 저는 혈귀로부터 시간을 끌겠습니다."
이긴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끈다고 말했다. 모두가 비통함에 입술을 깨문 사이, 혈귀는 검 한 자루를 손에 쥐고 몸을 좌우로 설렁설렁 흔들었다.
[일 각을 주마. 무당산에 태극검후 이외의 존재가 남는다면, 호북성 아래로 내려가 무차별 학살을 하겠다.]
"그런 협박을...! 무림의 일이다! 백성들을 건드리지 마라!!"
[어쩌라고.]
"장문인!!"
태극검후의 호통에 사정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서 피가 뚝뚝 흘러나왔다.
"무당은 장소가 아닙니다. 그걸 가르쳐주신 건 장문인이시잖아요? 걱정 마셔요. 쉽게 지지는 않을 겁니다."
"공희야...!"
"희라니까요. 장문인. ...아니, 대부님. 제 마지막 청을 들어주셔요."
철컹!
네 개의 검이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 태극검후의 도포가 흩날리기 시작하며, 대구궁검진의 모든 기운이 태극검후의 검에 모이기 시작했다.
"혈귀는 제가 막겠습니다."
[태극혜검! 그래, 그걸 찾고 있었다!!]
혈귀는 광소를 터뜨렸다. 산발 사이로 드러난 일그러진 면상에 무인들은 헛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크아아아아아!!
혈귀는 괴성을 터뜨리며 살기를 폭발시켰다. 목줄이 채워진 사나운 짐승처럼 내짖는 포효에 무사들은 하나둘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가세요!!"
태극검후의 외침에 무사들은 진에서 자리를 이탈했다. 가장 바깥 원부터 안쪽으로 점점 면적이 좁아지는 대구궁검진의 태극은 마치 압축이라도 되듯 태극검후의 발치에 모였다.
"큭...."
태극검후는 손으로 면사포를 눌렀다. 몸을 돌리려던 사정후는 흠칫 놀라 표정이 굳었다. 면사포는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검후, 내상이...!"
"괜찮습니다. 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아직 움직일 수 있어요."
"하지만...!"
[10, 9, 8-]
일 각은 커녕 조금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걸 따져서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사정후는 태극검후를 향해 짧게 허리를 숙였고, 자리를 이탈했다.
[0. 끝. 유언은 없나?]
"유언?"
태극검후는 슬픈 눈으로 혈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죽지 않을 것이니 유언은 필요 없다."
[허세는. 야, 우냐?]
"......그럴 리가."
태극검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불쌍한 사람."
[흐흐, 어디 제발 죽여달라고 울게 해주마. 미쳐버려, 추마귀.]
크어어어어어어!!
아흐레 뒤.
내상을 치료한 무림맹주와 천마가 급히 무당산의 정상까지 달려왔으나, 그곳에는 피에 젖고 찢긴 도포가 자보검 손잡이에 걸려 펄럭일 뿐이었다.
* * *
"......꿈?"
아침 해가 밝았다.
항상 아침에 일어날 때는 나의 양물이 가라앉아있었지만, 오늘은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서 있었다.
'안 빼니까 악몽이나 꾸지.'
새액. 새액.
악몽의 근원은 양기가 방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매일 아침 넘치는 양기를 빼주던 사공희가 잠들어있기 때문이었다.
"...후후, 자는 모습조차 아름답구나."
나는 지쳐 잠든 모습조차도 아름다운 사공희의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돈했다. 눈가가 부어있었지만 크게 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여울 정도였다.
'무당에 오길 잘했어.'
수많은 여인 중에 사공희를 선택한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세상 여러 여인 중에서 태극검후는 우선순위가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지금의 사공희는 내게 최고의 존재였다.
'처음에는 내공 때문에 왔는데.'
막대한 내공을 무작정 쌓기만 하려면 아무 여자나 범하고 다니면 된다. 하지만 그러면 정순한 내공을 쌓지 못했다.
시간은 걸려도 천천히 정순한 내공을 쌓기 위해, 나는 음양합일과 동시에 내공을 쌓기 위해 사공희를 택했다.
나의 양기를 배출할 수 있는 육체가 만들어진 시점, 팽유월과 만난 나의 거점을 떠나 호북까지 온 이유는 오직 사공희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잘 선택했어.'
다른 여자에게 발길을 조금만 돌렸다면. 내가 미적거려서 천화가 이미 퍼질 대로 난 뒤에 도착했다면.
잡티 하나 없이 백옥같은 피부를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나만의 꽃은 망울이 터지듯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상공?"
사공희는 기어가듯 몸을 일으켜 내 고간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늦게 일어나서도 나의 끓어넘치는 혈기를 진정시켜주는 행동에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제처럼 가슴을 쓰지 그러냐?"
"그, 그건 부끄러우니까 이제 안 할래요."
"그건 좀 실망인데."
"...밤에만 해드릴게요."
"허허, 네 최고의 매력덩어리를 밤에만 맛봐라? 하긴, 하늘에 걸린 보름달은 야심한 밤에 봐야 아름다운 법. 괜찮다.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니니."
나는 옷 사이로 사라진 보름달을 앞섶을 여며 가렸다. 사공희는 내 행동에 섭섭함을 표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끝이군요."
"그래, 무붕의 몸종 견희는 어제 죽었다. 너는 이제 백도제일화, 태극화 사공희니까."
"상공, 설마?"
"이름을 자칭해도 좋다."
사공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녀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둘이 있을 때도 견희라는 별칭으로 불러왔고, 남들이 있을 때는 애써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내가 네게서 가져간 이름을 다시 돌려주었으니, 너는 이제 속세의 사람이 될 것이다. 무당파를 이끄는 신진여고수이며 태극혜검의 주인으로서, 무당에서 실력을 쌓거라."
"네. 상공께 어울리는 여인이 되겠어요. ...상공, 마지막으로 제 어리광을 들어주세요."
사공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절을 올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아홉 번. 구배지례.
"상공께서는 천화에 걸린 저를 치료해주시고, 부모를 잃은 저를 거두어주셨으며, 제게 살아갈 기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집안에서는 살림을 살아가는 살림을, 무림에서는 무인으로 살아가는 무공을, 밤에는 여인으로서 지아비를 섬기는 방법을 알려주셨죠."
"흥, 그저 네 몸이 목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시잖아요? 후후, 소녀도 마찬가지랍니다.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셨죠. 비참하게 몸을 팔아 목숨을 연명하느니, 천하제일의 남자에게 보호를 받는 여인이 되라고. 저는 그 유언을 지키고자...."
사공희는 마당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맨발에 고작 얇은 도포 한 벌 걸쳤지만, 따사로운 햇살 아래 손을 들어 올리는 그녀는 선녀가 내려온 것만 같았다.
"천하제일인의 곁에 어울리는 여인이 되고자 합니다."
창고 근처에 놓인 검 네 자루가 춤을 추듯 날아와 검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제각기 네 개의 다른 검법으로 움직이는 검에 나는 묵묵히 사공희의 검무를 눈에 담았다.
아름답다.
검무도 아름답고, 미려하게 움직이는 사공희도 아름답다. 정해진 초식 없이 그저 의념대로 검을 움직이는 몸은 화려한 검들 가운데 숨겨진 백로의 날갯짓처럼 가벼우면서 유려했다.
"진정으로 도달했구나. 내가 강제로 끌어올린 절정이 아닌, 너 스스로 절정의 단계에 이르렀어."
"이 모든 것이 상공의 가르침 덕분이어요."
사공희는 다시 내게 절을 올렸다.
"상공께서는 분명 소공녀도 옆에서 가르쳐주시겠죠. 그게 밤일이든, 아니면 마공이든. 소공녀는 분명 강해질 거예요. 하지만 저는 지지 않아요. 다음 용봉지회, 소공녀와 다시 싸워 승리를 쟁취하겠어요."
"허어. 이미 육봉의 좌는 너를 품기에는 너무 작은 그릇이 아니냐? 흐흐."
나는 사공희를 향해 다가가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태극혜검의 전수를 마친다. 사공희, 너는 나 ...의 몸종이자 아내이자 제자이니라."
"네!"
사공희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 참. 하여튼 제자라는 것들은 다들 구배지례를 못해서 안달인지."
"......제자...요?"
순간, 사공희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혹시 저 말고 다른 제자가...있는 건...아니지요? 그쵸? 그런 거죠......?"
"......."
"저보다 밥을 잘 하나요? 저보다 국을 더 잘 끓이나요? 저보다...상공? 상고오오옹?? 어째서 대답이 없으신 거죠???"
밤에 사공희의 음기를 너무 많이 갈취했던 걸까. 나는 괜히 등골이 오싹했다.
[작품후기]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