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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
“가가, 어딜 다녀오셨어요? 어머, 피가..!”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진사월은 내 도복에 묻은 붉은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나는 피가 흠뻑 묻은 옷을 전부 벗어 던진 다음, 장독 안에 길어둔 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썼다.
“개 세 마리가 날뛸 것 같아서 잠깐 다녀왔다.”
“세상에...물린 곳은 없으세요?”
“당연하지.”
피는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땀을 시원한 물로 전부 씻어낸 다음, 진사월이 가져온 천으로 물을 닦아냈다.
“오랜만에 몸 좀 썼더니 피곤하구나. 사월아, 여기 앉아봐라.”
나는 진사월을 평상에 앉게 한 다음 그녀의 허벅지에 머리를 이고 누웠다. 포근한 여인의 향과 따스한 햇볕이 나를 감싸, 나의 피로를 녹아내리게 했다.
“결과는?”
“났어요. 용봉지회도 끝났죠.”
“.......”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던 걸까. 아니면 그만큼 비천삼마가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서 그런 걸까.
내가 우리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천하제일봉황 결정전은 끝났고, 지금쯤 무당파는 새로운 여고수를 찬양하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사월아, 네 표정이 상당히 애매하구나.”
“...그, 그게.”
진사월은 내 눈을 피했다. 봉긋한 가슴으로 내 눈을 가린 건 분명 효과적인 술책이었지만, 나는 당장 결과가 궁금했다.
“어떻게 됐어?”
“......둘 다 이겼고요, 둘 다 졌어요.”
“......뭐?”
난 진사월의 말에 화들짝 놀라 몸을 퍼뜩 일으켰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러니까….”
* * *
고오오.
비무장 위에 퍼진 흙먼지에 사람들은 좀처럼 눈을 열 수 없었다.
두 여인이 최후의 초식을 사용한 것까지는 눈으로 확인했지만, 충격파로 인해 결착이 어떻게 됐는지는 보지 못했다.
“누가 이겼어…?”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인영이 보이는 곳 주변에 햇빛에 비친 강철이 보였다.
“태극무봉의 검이…!!”
“세 자루나 바닥에!”
정파의 무인들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직 흙먼지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검사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건 하나의 의미뿐이었다.
“설마 진 건가?”
“아니오, 아직 한 자루가 남아있소!”
사람들은 눈이 보이지 않자 비무장 안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더는 싸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두 여인이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흙먼지 속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하아.”
머리가 헝클어진 소공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아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이 지친 모습이 엿보였고, 붉은 안광은 다 타들어 가는 재처럼 희미했다.
“소공녀가 진 건가…?”
“아냐, 아래를 봐!!”
흙먼지가 옆으로 밀려나자, 소공녀의 아래에는 여인이 바닥에 대자로 쓰러져있었다. 태극무봉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공녀보다 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소공녀가 태극무봉의 배 위에 올라탔다.”
객석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보이는 게 그랬고, 그게 진실이었다.
“그럼 소공녀가 이긴 건가?”
“아니, 저걸 보시오!”
흙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자, 사람들은 두 사람이 아직 서로를 향해 노려보고 있음을 확인했다. 둘은 서로에게 무기를 겨눈 채 가만히 있었다.
소공녀의 주먹은 태극무봉의 밑가슴 바로 위에 살포시 올려져 있었다.
태극무봉의 검은 소공녀의 목을 아래에서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서로 조금만 더 들어갔으면 죽였을지도 모르는 상황.
일촉즉발의 상황이 일어나기 직전, 두 무인은 살초를 거두었다. 덕분에 더는 비무는 이어지지 않았다.
“이러면….”
“비긴, 건가…?”
관중들이 하나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비무대회에서 승패를 가리지 않고 끝낸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차라리 구룡육봉의 순위를 매기지 않았더라면 친선 비무로 끝낼 수 있었으나, 지금은 봉황 중 으뜸을 정하는 자리였다.
“이거 다시 싸워야 하는 거 아니야?”
“비기긴 뭘 비겨. 지금 장난해?!”
둘 중 한 명은 일등이, 한 명은 이등이 되어야 한다. 관중들은 하나둘 목소리를 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거...큰일인데.”
장문인들이 객석의 소란에 난감해하던 찰나, 비무장 전체를 뒤덮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하하하하!!!”
무림맹주, 독고자영의 광소가 널리 퍼져나갔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객석의 모두가 그를 바라볼 정도였다.
“무림의 홍복이로다!!”
타앗. 무림맹주는 객석에서 한걸음에 비무장까지 뛰어내렸다. 허공을 밟듯 뛴 그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어린 나이에 벌써 이런 성취에 이르다니! 정과 마를 떠나 무림 전체에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구려!”
짝, 짝짝, 짝짝.
무림맹주는 손뼉을 치며 두 팔을 펼쳤다.
“모두, 이 두 사람에게 박수를 주시오! 자신의 모든 힘을 펼쳐 정정당당히 승부를 겨룬 무림의 미래를 향해 힘찬 박수를!!”
짝짝짝짝. 모두가 손뼉을 치며 무림맹주에 호응했다. 하지만 개중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누가 이긴 거냐고.
“소공녀, 천마일권을 멈춰줘서 고맙소. 마찬가지로 견희 소저도 태극혜검을 마저 찌르지 않아서 고맙소. 즐거운 축제에 우리가 피를 볼 수는 없지. 아니 그런가!!”
칼에 찔린 이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그런 눈빛을 무시하며, 무림맹주는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열변을 터뜨렸다.
“백도제일화!! 흑도제일화!! 감히 누가 이들을 두고 구룡육봉에 둘 수 있겠는가! 누가 이들을 후기지수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건 맞지. 관중들은 맹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폭룡도 탈 일류라고 한들 절정고수 초입에 들어가지 못한 상황에서, 어지간한 절정고수는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존재를 육봉에 놓는다?
급에 맞지 않는다.
“용봉지회는 정사마가 한데 어우러져 서로 친선을 교류하는 자리! 우리는 비무로 두 여고수의 배려를, 그리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볼 수 있었소!
검과 권을 주고받음에 있어서 한 치의 비열한 행위도 없이 정정당당히 싸웠으며, 서로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음에도 상대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기 위해 손을 거두는 모습까지! 아아, 이것이야말로 선배들께서 바라신 용봉지회의 진정한 모습이리라!!”
맹주는 장문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특별 객실에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가 한 명 있었다.
“맹주의 말이 옳소!!”
타--앗! 맹주보다는 못하지만 깔끔한 동작으로 비무장에 뛰쳐나온 도사, 장문인 대리 현철도사는 포권을 취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는 서로 살생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이 아니오! 이 현 모, 무당에서 용봉지회를 주최하게 되면서 감히 무당산에 피를 뿌리게 될까 솔직히 두려웠소!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소! 최후의 최후까지, 우리는 무사히 ‘친선비무’를 성공적으로 치른 것이오!”
“장문인의 말씀이 백번 옳소!”
현철도사는 장문인 대리다. 하지만 무림맹주는 마치 실수인 양 그의 말에 힘을 보태었다.
“우리는 모두 무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벗! 서로 걸어가는 길이 다를 뿐! 두 후배께서는 일어나주시오! 그대들이 오늘의 승자요!”
맹주는 간절한 눈빛으로 두 여인에게 눈빛을 보냈다. 소공녀와 태극무봉-사공희는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끝날, 줄이야.”
먼저 일어난 건 소공녀였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굳세게 일으켜 세우며, 사공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어나실 수 있으십니까?”
“...고마워요.”
사공희는 소공녀가 뻗은 손을 맞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권풍에 찢어진 도복 앞이 슬쩍 스치며 남성들의 이성을 앗아갔다.
“아….”
소공녀는 머리를 손으로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사공희는 소공녀를 가슴에 끌어안으며 그녀를 부축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아아, 이 얼마나 멋진 우정이란 말인가! 그렇소! 우리는 모두가 이긴 것이오! 그럼 이걸로 용봉지회의 막을-”
“그럼 육봉은 사봉이 되는 건가?”
누군가가 흘리듯이 말한 목소리에 맹주는 숨이 턱 막혔다. 말한 본인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말이었으나, 소리는 사방으로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저 두 명이랑 다른 4봉은 급이 다른데.
-봉은 꼭 여섯이 되어야 하는 거 아냐? 그게 전통이잖아.
-그냥 저 둘이 계속 싸우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관중들의 목소리에 상황은 점차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다음 회는 구룡사봉이 되겠군’하는 빈정거림에 맹주조차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며 입이 바싹 말라갔다.
애초에 임기응변으로 튀어나와 상황을 급하게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게 실패한 이상, 맹주도 군중들의 혼란을 쉽게 잠재울 수는 없었다.
“패자부활전.”
저벅, 저벅. 무당의 도포를 입은 중년 남자가 비무장 가운데로 걸어왔다.
“현 장문인 현철도사의 사제이자 태극화 견희의 사숙, 현타도사라고 합니다. 저는 감히 맹주께 싹을 피우지 못하고 져버린 꽃들에게도 한 번의 기회를 주는 건 어떨까 제안합니다.”
“패자부활전...이라고…?”
용봉지회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진 사람은 한 번 진 것으로 끝이고, 기회는 끝이었다.
“예. 봉황의 좌가 두 자리가 비었으니, 반드시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옳습니다!!”
아미파의 멸색사태가 쩌렁쩌렁 목소리를 높이며 소리쳤다.
“꽃들에게 희망을! 시일이 지난 뒤, 남은 2좌를 두고 다시 비무대회를 여는 것입니다!”
“멸색사태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소공녀와 태극무화께서 감히 두 분이 다녀가신 봉황의 좌에 후배들이 도전하기를 허락해주신다면, 이 옥선루!! 선루필승도는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남궁세가 또한 지지합니다!!”
폭룡, 남궁패가 일어나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쉽게도 이번 용봉지회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 이들을 위해서라도, 모두가 평등하게 참여하는 새로운 <이봉지회>를 제안하는 바이오! 만약 자금이 필요하다면 남궁이 지원하겠소!!”
“갑자기 그런 말을 해도...핫!”
맹주는 무엇인가 깨달은 듯 눈을 빛냈다. 그리고 내공을 실은 헛기침으로 좌중을 진정시켰다.
“...새로운 대회를 준비한다고 한들 아무리 빨라도 최소 반년은 걸릴 터. 좋소! 다만, 이건 허락이 필요한바.”
맹주는 두 봉황에게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후배님들, 부디 부탁드리오.”
소공녀와 사공희, 두 여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육봉의 자리를 포기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수많은 이들의 환호와 함께, 용봉지회는 막을 내렸다.
* * *
“대단하군. 역시 맹주는 아무나 못 해. 이빨까는 솜씨가 천하제일이로다.”
“가가께서도 입담은 뛰어나지 않으세요?”
“나는 혀를 잘 놀리지.”
“어머, 그럼 제가 더 잘 놀리겠는데요?”
나와 진사월은 서로 농을 주고받으며 요리를 했다.
“사월아, 물 넘친다.”
“네? 아직...어머!”
부엌에 남자가 들어와 여인과 함께 요리하는 걸 보면 뭇 많은 이들이 양물을 자르라고 하겠지만, 천하제일숙수가 보조요리사를 두고 요리를 한다는 데 과연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그래서 두 여인은 육봉에 오르지 못했다라. 참 슬픈 결말이군.”
“하지만 제일화라는 별호를 얻었잖아요? 그것도 백도, 흑도 제일화.”
“그래. 아주 난리가 나겠지. 누구네 꽃이 더 예쁘냐를 두고 치고받고 싸울 것이다.”
사공희가 더 예쁘다. 소공녀가 더 예쁘다. 나조차도 결론을 내리기 힘든데, 세상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리고 둘이 물러난 봉황의 자리를 두고 각축전을 벌이겠지. 특히 이번에 둘에게 패배한 여자들, 다 똑같은 생각 하고 있을 걸?"
"나는 우승자한테 졌으니까 본 실력을 제대로 드러낸 게 아니다? 대진 운이 나빴을 뿐이다?"
"그럼."
남궁유린, 정조사태 등 실제 육봉의 자리에 오를 재목은 많았다. 단, 그들은 단 한 자리를 두고 서로 치열한 혈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다음 비무대회가 반년 뒤라고? 맹주가 참 팔불출이야. 딸내미도 한 번 내보내게 하려고 난리도 아니군."
"그러고 보니 맹주한테 딸이 한 명 있었죠?"
"그래. 독고연. 이번에 나왔으면 아마 견희나 소공녀가 2위 자리를 두고 싸웠어야 했을 걸?"
"어머...나이도 희보다 훨씬 적은데요?"
"나이와 무공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니지. 세상에 천재가 얼마나 많은데."
초절정.
'그러고 보니 안 나올 이유가 없는데 왜 안 나왔지. 설마 병이 도졌나?'
무공은 강한 대신 몸이 약하다. 무공을 익히며 얻은 병으로 그녀는 호북까지 오지 못한 게 틀림없다.
지글지글.
기름에 통으로 굽는 소의 안심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간다. 나는 안쪽까지 화기가 들어가도록 불길을 인도한 다음, 진사월에게 물었다.
"검은 소가 맛있을 것 같으냐, 흰 소가 더 맛있을 것 같으냐?"
"글쎄요. 어차피 비교하려면 둘 다 먹어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역시 사월이로다."
이렇게 또 삶의 지혜를 하나 얻었다. 나는 큼지막한 고깃덩어리 근처에 술을 부어 가마솥을 흔들었다.
촤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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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안심의 잡내를 지우며, 나는 입구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어서 오너라."
"상공!"
사공희는 울 듯 웃을 듯 나를 향해 달려왔-
"소고기에요?! 와!"
"......어서 인피면구나 뜯고 와!"
나는 부엌 입구에 선 사공희의 궁둥이를 걷어찼다. 사공희는 울상을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가마솥의 손잡이를 잡았다.
"젠장. 주인보다 소고기가 더 소중하다 이거지?"
"가가. 부끄러워서 그런 거랍니다. 그도 그럴 게...."
진사월은 방안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일부러 지나치면서, 눈은 계속 상공을 보고 있었는걸요?"
"......역시 얼룩소부터."
츄릅.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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