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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
"어쩌다 사람이 이 지경이 되었단 말입니까?"
"그게, 싸우다가 그만...."
"마교의 소공녀가 이런 잔인한 손속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진 남궁유린의 몸 위에 약초를 덕지덕지 바르고 전신을 붕대로 휘감았다. 남궁유린을 처음 의원으로 데려왔던 여무사는 내게 자초지종을 읊었다.
제2차전.
1차전을 손쉽게 승리로 따낸 남궁유린은 마교에 대한 복수심으로 끓어 넘쳤고, 마침 2차전에 마교 소공녀를 상대하게 되었다. 소공녀는 1차전을 부전승으로 올라와-상대가 기권했다고 한다-첫 비무였고, 팔 하나로 상대하겠다고 도발했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남궁유린은 소공녀에게 '네 미래 대머리'를 펼쳤고, 소공녀는 심판이 제지할 때까지 남궁유린에 대한 연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게 이 참상의 전말이었다.
"고작 3초 만에 이 꼴을?"
"예...."
3초. 심판이 마교 소공녀에게 이미 기절했음을, 그 이상 때리면 살초를 쓴 것으로 생각하고 실격패시키겠다는 말에 소공녀는 주먹을 거둬들였다.
'천마연속중타권이라도 썼나?'
천마신권에서 중간 정도의 파괴력으로 무한히 상대의 전신을 가격하는 기술. 권 하나하나에 살의를 담아 전신을 두드리는 강력한 공격에 남궁유린은 처참히 패배했다.
꽃이 사정없이 짓밟혀 잡초만도 못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의원님, 얼굴...돌아올 수 있을까요?
"몸의 상처는 얼마든지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설마...."
"이걸 써서요."
나는 제법 그럴듯하게 생긴 단환 하나를 꺼냈다. 여무사는 감격한 얼굴로 연신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를 위해 천환단을 써주시다니!"
"필요한 환자에게 필요한 약을. 약은 사용되지 않으면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게 신의의 가르침이죠."
"흑...!"
무사는 감격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의원 밖에서 대기 중이던 남궁의 무사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남궁은 은혜를 잊지 않겠소---!!'라며 소리를 질렀다.
"귀청 떨어질라."
나는 병동 안에 수면향을 뿌렸다. 남궁유린은 이미 잠들었지만, 더 깊게 잠들라는 의미에서 향을 뿌렸고, 나는 무사에게 보여준 단약을 손으로 짓이겼다.
"천환단 아닌데."
천환단은 모두 안휘에 두고 왔다. 내가 만든 경단은 그냥 약재를 곤죽으로 짓이겨 만든 작은 덩어리였다.
천환단은 필요 없다. 붓기를 가라앉게 하고 뒤틀린 뼈를 맞추는데 필요한 건 극강의 무공과 막대한 양의 양기뿐.
'괜히 천환단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나?'
천환단을 가지러 가는 것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몹시 귀찮다. 당장 호북을 떠날 수도 없을뿐더러, 먼 거리를 몇 시진 만에 다녀오기란 쉽지 않다.
'그 시간에 사공희랑 밤일을 하고 말지.'
나는 용봉지회의 대진표를 다시금 확인했다. 96강, 48강, 24강으로 이어지는 대진표는 좌우로 갈려있었고, 마지막에는 여섯 명의 봉황이 될 이들의 명단만 남아있었다.
'무림맹주 성격이라면 분명 순위를 매겨보자고 할 터.'
본인은 짐짓 허리에 손을 올리고 아닌척하며, 행동대장과 바람잡이들을 객석에 집어넣어 1등부터 9,6등을 가려보고자 할 것이다.
'소공녀도 분명 성격상 허투루 하지는 않을 테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소공녀와 정파 최강자의 1:1 대결이 펼쳐질 게 분명하다. 높은 확률로 사공희가 소공녀를 상대하게 될 것이며, 현재로서는 사공희의 패색이 다소 짙었다.
'내 몸종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이냐, 아니면 전생의 탈동정 은혜를 갚는 것이냐.'
"으으...."
남궁유린의 신음이 내 상념을 일깨웠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남궁유린의 단전에 손을 올렸다.
'하긴 이런 거 생각해봐야 아무 소용없지.'
현재 나의 몸종은 사공희. 그러므로 사공희에게 모든 전력을 집중한다. 내가 소공녀와 남녀지간이라면 모를까, 전생의 인연 때문에 현생의 삶을 그르칠 수는 없다.
'대신 다치면 내가 꼭 치료는 해주겠소, 소공녀.'
탈동정의 은혜는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갚을 수 있고, 또 비무는 신성한 것이기에 내가 따로 참견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중립의 입장에서 의술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가만히 여기 앉아서 오는 꽃빵이나 먹으면 그만이지.'
화권(花券)에 고추잡채가 빠질 수 있으랴. 나는 붕대에 휘감긴 남궁유린의 단전을 손으로 팡팡 두드렸다.
"에이, 일일이 뼈 맞추고 천환단 만들기 귀찮다. 그냥 다시 태어나라."
약식환골탈태.
결과적으로 원래의 몸으로 다시 돌아가면 그만 아닌가?
'환골탈태시켜놓고 한 번 더 먹어야지.'
으득, 으드득!
하얀 붕대에 피고름이 묻어나오기 시작했고, 나는 잠깐의 시간을 기다려 삼매진화로 붕대를 모두 태워버렸다.
"캬."
잡티 하나 없어진 매끈한 피부, 망가지기 이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진 미모, 그리고 생기가 가득 넘치는 화사한 연분홍 꽃잎까지. 남궁유린은 내 극양지기로 다시 태어났다.
'환골탈태 값은 받아야지.'
찌걱.
'음기 달달하고.'
채음보양.
의원 병동에 누운 여인들에게 예외는 없다.
* * *
용봉지회는 제법 기간이 길다.
4년에 한 번 오는 비무대회인 만큼 참가자들도 넘쳐나고, 당연히 이들이 싸우는 시간도 길어지게 된다.
"죽을 것 같다."
덕분에 나는 늘어나는 환자들로 피곤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용봉지회가 벌써 2주일이나 지났으나, 아직 결승전이 끝나려면 2주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잠들고 발정 난 꽃들을 대하는 것도 이제 질렸다. 견희야, 우리 그거 하자."
"상공, 끝나고 두 배로 해드릴게요. 내일은 제 비무가 있는 날이라."
"싫다! 네 상대는 못생겼단 말이다! 너보다 얼굴이 예쁘냐? 너보다 몸매가 좋으냐? 너보다 밤일을 더 잘하냐? 내가! 왜! 그런! 추녀와! 해야 한단 말이냐!!"
"흥, 그럼 소공녀가 박살 낸 여인이랑 하시던가요. 환골탈태도 시켜주시고."
사공희의 말에 나는 괜히 뜨끔했다.
"삐졌냐?"
"병동에 누울 때는 피떡이 된 사람들이 병동을 나오는 순간 하나같이 다들 천상미인으로 태어나더라고요. 그런데 사용하실 양기가 있으면 저한테 넣어주시지."
"잠깐만.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구나. 환골탈태에 사용한 양기는 다시 내가 가져왔다. 채음보양으로."
상대의 몸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데 양기를 사용하고, 소모된 양기는 채음보양으로 갈취하여 회복한다. 남궁유린을 비롯하여 소공녀에게 전신이 망가진 여인들의 몸에는 내기가 충만했고, 나는 음기를 강제로 끌어당겨 내가 사용한 만큼 다시 회수했다.
"그러니까 그냥 치료만 해준 셈이라니까?"
"그러고 안 박으셨으면 제가 더는 말 안 할게요."
"일각 동안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들어주마."
다만 환골탈태 과정에서 피가 흐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피가 어떤 피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상공, 그러면 저와 비무를 해주셔요. 다음 상대인 화산파의 매화검수를...."
사공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각 동안 상대와의 가상전투를 말로 설명했다. 나는 그녀의 가상 비무에 있어서 화산파의 매화검수가 되어 언검으로 사공희의 검을 베었다. 사공희는 눈을 감고 나는 의념으로 매화를 피우며 사공희를 압박했다.
"상대는 숙녀검을 사용하는 무인으로...."
"그렇다면 오행검진을...?"
"태극혜검은 꺼낼 생각이냐?"
"아뇨. 태극검으로 최대한 패를 숨기는 게...."
그렇게 가상의 비무를 하며 내일 있을 전투를 대비한 우리는 시간을 살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저녁이 되었다.
"이쪽은 준비가 다 되어있는데 빨리 싸우지. 쯧."
"저야 괜찮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잖아요."
"거참 그냥 하루 싸우고 또 싸우도록 해야 진짜 무인이지, 언제 상대가 사흘 뒤에 다시 온다고 봐준다더냐. 으어, 진짜 싫다."
"그렇지만 그래야 정정당당한 승부가 되지 않겠어요?"
"몇 번 정정당당히 싸워서 정파 무림인들의 사상에 물들었구나. 견희야, 정정당당히 싸우는 게 밥 먹여주더냐?"
"별호는 얻었는데요. 태극화(太極花)라고요."
현재 사공희(견희), 24강. 앞으로 두 번만 더 승리를 쟁취하면 육봉의 안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고, 또한 결승전에 오르면 소공녀와 1:1 비무대결로 천하제일봉을 가리게 된다.
- 무당의 신진고수 등장!
24강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사공희는 사람들에게 태극화라는 판에 박힌 별호를 임시로 받았다. 꽃이 아닌 봉황을 뽑는 자리에서 다른 별호를 먼저 받았다는 것이 사공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말해주고 있었다.
"좋겠구나. 차기 장문인도 너를 정식으로 인정해줬으니."
"도사가 실적을 따져서 정말 괜찮은 걸까요? 그분."
"그게 어차피 나 중가면 자기 실적으로 돌아가니까 아무 문제 없다. 면도 세울 수 있지 않느냐? 무당파 남자 대표로 나선 놈은 1차전에서 탈락했는데."
무당의 대표로 나온 두 명 중 한 명은 무당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
물론 상대가 구룡의 제 1후보인 남궁패이기는 하지만, 무당파와 남궁세가 간의 대리전에서 놈은 잘 싸웠으나 졌다. 현기도사의 직전제자가 용봉지회에서 패배했으니 사실상 무당파 내의 파벌 싸움은 끝장이 났다.
"견희야, 네가 없었으면 무당 진짜 어떻게 할 뻔했냐?"
"다 상공 덕분이죠."
그나마 현타도사가 현철도사에게 소개하여 데려온 사공희가 없었다면 무당은 4년간 구파일방에서 물러나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 부닥친 셈이었다.
"네가 무당을 대표하게 되다니, 참 감개무량하구나. 무당파에 쫓기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꼭 그렇게 어디 떠날 것처럼 말씀하시지 마셔요. 괜히 불안해지니까."
"그냥 감상을 말하는 것도 안 된단 말이더냐? 끙, 네가 내 마누라도 아니고."
"......."
불평불만으로 구시렁거렸더니 사공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돌리고 있는 모습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태극화가 이런 말로 부끄러워한다고?"
"부, 부인이라니요.... 그런 말씀은...."
"무당파 장문인이 밥 짓는 것까지 잘하면 내가 기둥을 박지. 근데 넌 화식(火食)은 개판이잖느냐."
"......두고 보셔요. 흥."
사공희는 태극혜검의 어검술로 과일을 깎아 내 앞에 내어놓았다. 채소와 과일로는 동물을 조각할 정도로 요리 실력이 많이 늘었건만, 아직 불을 쓰는 건 설익거나 다 태우거나 둘 중 하나였다.
'태극이라고 양극단을 달리는 구만.'
원인을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이기는 하다. 그녀의 안에 너무 많은 양기를 불어넣어서, 화기에 대한 조절감을 떨어뜨린 것도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다.
'근데 그게 아니더라도 원래부터 개판이긴 했어.'
사공희의 요리 실력은 내 양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부터 나빴다. 그러므로 내 잘못이 아니다.
"그래서 무당의 꽃으로 태어난 희야, 소공녀와의 대결은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지금은 삼 대 칠 이에요."
사공희는 좀처럼 승리를 확신하지 못했다. 숱한 신진 여고수들을 상대하며 실전 감각을 익혀나갔지만, 역시 천마신공이라는 규격외의 무공을 상대로는 계산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천마신공으로 비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게도 천마신공이 있다. 하지만 딱 한 명, 탈마(脫魔)의 경지에 오른 마인에게서 빼앗은 무공이다.
즉, 사공희에게 천마신공을 보여주는 즉시 나는 천마가 된다. 무림맹주가 허겁지겁 달려와 나를 상대로 살검을 날릴 것이며, 신강에서 자고 있던 천마가 머리를 번쩍이며 나타나 내 무공의 출처를 물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공희가 소공녀와의 비무를 가상으로 점치는 건 오직 소공녀의 비무를 관찰하는 것뿐.
"과연 태극화는 삼초무적화(三秒無敵花)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것인가!"
"그러지 마요, 풉. 삼초무적화라뇨, 그래도 여잔데...."
"내가 붙인 별호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붙인 별호다."
정파 무인에게는 태극화라는 좋은 별호를 붙여줬으면서 마교의 존재에게는 삼초무적화 같은 요상한 별호를 붙였다. 백도 무림의 사람들이 얼마나 좀생이 같은 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희야. 내일 비무도 어느 정도 승리를 확신하겠다, 조금 정도는...?"
"어머, 상공. 그러다 저 지면 책임지실 거예요?"
"내가 키운 몸종이 질 리가 없지. 여차하면 내가 객석에서 투명검으로 어검술을 날려주마."
"참...알았어요. 대신 너무 심하게 하시면 안 돼요? 내일 다리 절면서 나갈 수는 없잖아요."
"걱정마라. 여차하면 내가 궁극의 체력회복술을-"
"실례합니다-"
밖에서, 옥구슬 같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마교의 소공녀가 나를 찾아왔다.
비천삼마의 호위도 없이.
[작품후기]
환골탈태 -> 맛집인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