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34화 (34/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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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봉을 찾아라

육봉지회에 대한 소식은 분명 예상외였지만, 그렇다고 내가 현기도사에게 요구한 바를 철회할 이유는 없었다. 현기도사는 현타도사에게 지시를 내려 검을 네 자루 들고 오게 하였고, 나는 검 네 자루를 비고 바닥에 꽂아 진을 펼쳤다.

"밖에 있는 녀석도 들라 해라."

"예? 현타에게도 보여주시겠다는...말씀이십니까?"

"이런 명검 네 자루를 들고 왔는데 그러면 보여주지 않으면 도리가 아니지."

신외지물까지는 아니더라도 태극혜검을 연습하는데 최소 5년은 부러지지 않고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명검이다.

또한 밖에서 안의 상황을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으니, 괜히 보여주지 않았다가는 흑화할 수 있다.

"내가 그에게 사죄할 것도 있으니, 태극혜검을 펼치는 걸 보여주는 거로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겠다. 그리고 이걸 보여준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지. 안 그런가, 현타도사?"

"......태사부 님을 뵙습니다."

검을 들고 온 장본인, 현타도사는 비고의 입구에서 나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절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나에 대한 의심을 아직도 거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너의 눈에는 내가마공을 사용하는 마인으로 보이느냐?"

"...그렇진 않습니다. 천장의 태극혜검이 증명하고 있지요. 하지만 마공을 사용하셨던 건...."

"그래. 사용했다."

나는 시원하게 인정했다. 그에 현기도사가 화들짝 놀라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태극이란 본디 음양의 이치를 다루는 것.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고, 하늘에 태양이 떠 있으면 바닥에 그림자가 지기 마련. 나는 한때 생각했다. 정파의 무공만 익히는 것이 과연 능사일까. 빛이라는 정파의 무공을 익혔다면, 어둠이라는 마공을 익혔을 때 진정으로 태극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개소리 일발장전. 나는 검 네 자루를 향해 기를 불어넣었다.

서서히 위로 떠 오르는 네 개의 검에 두 도사는 입을 벌리며 멍하니 태극혜검의 검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태극, 양의, 오행, 구궁. 온갖 검을 익히고 배웠고,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태극에 이를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의 몸에 어둠을 담은 것이야. 그리고 그 결과...."

사락. 네 개의 검이 서로 춤추기 시작했다. 무당의 온갖 검법의 정수가 녹아 들어간 태극혜검은 굳이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알아서 무당의 검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태극혜검은 무당의 모든 검법을 하나로 뒤섞었다.'

그야말로 혼돈이라고 봐도 무방했지만, 혼돈 속에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태극검과 양의검을 동시에 펼치며 가상의 적을 베고, 두 개의 검으로 오행검진을 동시에 그리며 적의 공격을 받아냈다.

태극검후가 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는 가만히 서서 무당파 무공의 집대성을 둘에게 과시했다. 내가 쌓은 깨달음은 아니지만, 태극검후가 태극혜검을 익히며 쌓은 모든 정수를 보였다.

카랑!

네 자루의 검이 서로 부딪히며 원래의 자리에 꽂혔다. 나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현타도사에게 나의 검을 가리켰다.

"보았느냐?"

"지금까지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무붕 태사부!"

쿵! 현타도사는 엎드려 절하며 이마를 땅에 찧기 시작했다. 그 자리가 하필 현기도사가 예전에 머리를 박았던 곳이라 나는 살짝 웃음이 나왔고, 현기도사도 민망한지 고개를 돌렸다.

"그래. 사람은 살면서 실수를 할 수 있다. 충분히 의심할 수 있지. 무당의 태사부라는 자가 마공을 익혔으니."

"태, 태사부. 그럼 저희도 마공을...?"

"응?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굳이 안 그래도 되더라고! 하하."

둘의 표정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마공을 익히면 태극에 이르지 않을까 싶었지만,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마공은 자연의 흐름에 편승하지 않아 태극에 담을 수 없었어.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마가 태극에 섞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오히려 더욱 정순한 길을 갈고 닦을 수 있었다."

"아...!"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 법. 흙탕물을 걸러낸다고 뭔가 다른 걸 넣어봐야, 결국 정순한 물은 아니게 될 뿐이었지."

내가 깨달은 무리(武理)인가? 아니다. 태극검후가 깨달은 무리인가? 아니다. 그냥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이다.

"아아...과연...!"

"태사부님의 가르침...!"

하지만 이렇게 자기들 알아서 깨닫는 똑똑한 멍청이들이 있기에, 나의 헛소리는 진실이며 이론이 되었다.

- 발상의 전환. 고리타분한 꼰대 정파 놈들은 사고가 유연하지 못해. 조금만 생각을 바꿔도 무공의 성취가 나날이 늘어날 수 있는데, 자신이 익힌 길이 진리인 것처럼 깊게 파고들더라고. 조금만 조언해 주면 다 넘어왔지. 그게 자신들을 첩자로 오해하게 만든 계기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를 속이는 데에 있어서 혈교주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혈교주는 그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혀를 움직였지만, 나는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혀를 나불거렸다.

"좋다. 현기와 현타 듣거라."

나는 네 검을 뽑아 들었다.

"무당의 무공은 정마가 섞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무당이 곧 중원은 아니다. 이 넓은 세상 전체를 아우르기 위해서는 마도 수용할 수 있는 관용이 필요해. 그것이 바로 용봉지회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무당의 무공을 익힐 때는 정마를 구분한다고 하더라도, 마공을 익힌 자들이라고 무조건 배척하지마라...."

"그들 또한 중원의 구성원.... 용봉지회가 열리는 장소의 주최를 맡게 된 무당파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에서 살펴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허세로 사기를 치는 자는 '그, 그렇다'와 같이 당황한다. 하지만 숙련된 사기꾼은 한순간도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는다.

"나의 가르침은 여기까지다. 나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태사부, 한 가지만...어음, 제자분을 이번 용봉지회에 보이시는 건 어떻습니까?"

"내 제자를?"

"예. 여기 현타가 비밀리에 기른 제자인 것처럼 용봉지회에나서는 겁니다. 어떠신지요?"

사공희를 세상 사람들의 앞에 본격적으로 보인다?

'썩 나쁜 선택은 아닌데.'

갑자기 뿅 하고 튀어나오는 것보다 별호와 명성을 다지는 것도 중요하다.

아름다운 신진 여고수의 등장에 발정 난 개새끼들이 주변에 코를 들이밀 가능성도 있지만, 사공희는 이미 내게 매료되어 다른 남자를 찾아보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언제까지고 사공희만 데리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고.'

사공희가 질렸다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 매일 채소와 과일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법. 나에게는 야들야들한 고기가 필요했다.

'한 명 더 키워볼까?'

사공희에게 선의의 경쟁자가 생긴다면 사공희도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될 터.

마침 몸종 후보들이 이곳 호북성에 모인다고 하니,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혹시나 내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무당에 사공희를 맡겨야 할지도 모르고.

"좋다. 내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도록 하지."

"예?"

"뭘 놀라느냐. 본인이 싫다고 하면 하지 않는 것이지."

"어찌 하늘 같으신 태사부의 명을-"

"갈!! 네놈은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을 것이냐!! 스승이라고 한들 제자에게 어찌 강요를 할 수 있단 말이더냐!"

나는 네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비고 안쪽의 비밀통로로 향했다.

"실망이로다, 현기 만사용! 당분간 이곳을 찾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 거라!"

"태사부! 무붕 태사부----!!"

나는 몸을 숨겼다. 그리고 한걸음에 비고에서 나의 거처까지 달려와, 창고에 네 개의 검을 쑤셔 넣었다.

"어머, 상공. 오셨어요?"

사공희의 곁에는 과도 두 자루가 두둥실 떠 있었다.

자습이라고 했더니 어찌나 열심히 훈련하는지, 사공희는 과도를 이용해 복숭아를 예쁘게 깎고 있었다. 집중하느라 전신에 흐르는 땀이 그녀의 소복을 축축하게 적셔놓았다.

"견희야."

"네, 상공."

"하자."

"네? 저, 아직 씻지도 않았...."

"갈! 주인이 하라고 하면 하는 거지 말이 많아!"

몸종의 의견은 필요 없다. 나는 사공희를 평상 위에 눕혀 도포를 벗겼다.

"사, 상공! ...저 땀 때문에 냄새가-"

"씁-하-."

나는 젖어서 번들거리는 사공희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서 더 좋아."

할짝.

* * *

용봉지회, 무당.

무림맹에서 퍼뜨리는 정보는 중원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정파에서 운영하는 행사이기는 하지만 참가에 사파와 마교도 제한을 두지 않은 만큼, 상인들을 통해 퍼져나간 소식은 천산에도 닿았다.

"호북...."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공녀."

공녀라고 불린 흑발의 여인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여인의 눈동자는 붉은색으로 반짝였다. 색목인의 외형도 아니건만 붉게 물든 눈동자는 천마신공을 익혔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마교의 소공녀.

천산의 서쪽 궁에 서는 공주라는 별호를 가진 소공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서찰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옆에서 보좌하는 이들은 소공녀의 고민에 서로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왜 하필이면 장소가 호북성일까."

"그러게 말입니다. 그자가 행방불명이 된 장소도 하필이면 그곳...크흠."

말을 꺼낸 노인은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며 숨을 삼켰다. 소공녀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고, 노인은 자신의 말실수를 후회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새끼' 쪽에서는 뭔가 특별한 움직임은 없어?"

"소공녀, 아무리 그래도 대공자에게 그런 칭호는...."

"친오빠가 그 새끼지 그러면 따로 뭐라고 불러? 놈이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 검마 살리려고 아껴둔 천환단을 웬 이상한 새끼한테 넘겨줬다가 잃어버렸는데 내가 가만히 있어야 해?"

"...아직 대공자의 짓이라고 판명되지 않았습니다."

"정황이 그렇잖아! 그 새끼 짓이 맞아!"

소공녀는 찻잔을 부술 기세로 마기를 일으켰다. 천마신공 특유의 흉흉한 기세에 마인들은 부리나케 고개를 조아렸다.

"증거, 증거는 아직이야?!"

"예. 송구하오나, 호북은 무당의 영역입니다. 무당의 장문인 대리로 나선 현철도사는 철저히 마교의 잔당을 뿌리 뽑고 있습니다."

"젠장. 장문인 시켜달라고 우리 쪽이랑 내통할 때는 언제고.... 지금 자기 장문인 되기 일보 직전이라고 우리 엿 먹인 거지? 개 같은 늙은이."

현철도사는 본디 마교의 끄나풀과 연계하여 지금의 장문인을 죽여 장문인이 되려고 했다. 하지만 장문인은 죽지 않았고, 폐관이라는 명목으로 장문인의 자리를 사실상 양도했다.

"현기도사는 어떻게 된 거야? 죽을 때까지 현철도사에게 장문인 자리 절대 넘기지 않겠다고 했다며?"

"무, 무공에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젠장, 우화등선하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현철 그놈이 우리랑 손잡았던 흔적 지우려고 그렇게 지랄을 떠는구나."

예상치 못한 이른 때에 장문인 자리를 넘겨받은 현철도사는 자신이 마교와 내통하려고 했다는 증거를 지우고, 마교의 잔당을 이 잡듯이 잡아 소탕했다.

내통하려고 한 주제에 장문인으로서의 능력은 현기도사보다 더 뛰어난 게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검마가 대공자의 사주를 받아 무당파를 습격했다는 거, 증거를 알아내려면 역시 한 명밖에 없겠지?"

"예. 습격을 받은 당사자, 현기도사에게 묻는 것밖에 없습니다."

"미치겠네."

사면초가에 놓였다.

물론 검마가 소공녀의 지시를 어기고 병원을 탈출하여 무당산을 습격한 건 검마의 잘못이다. 하지만 소공녀의 명령이라면 껌뻑 죽는 검마가 천화에 걸린 몸을 일으켜 뛰쳐나가게 만든 자가 진정한 원흉이다.

무당파 장문인과 엮인 은원을 검마에게 속삭일 수 있는 자.

전염병에 걸린 이가 순순히 방 안에서 죽지 못하고 뛰쳐나가게 만들어 역병을 퍼뜨리려고 한 자.

결국 무당을 한 달 봉문시키고 천마에게 큰 칭찬을 받은 자. 단 한 명이다.

"대공자 그 새끼 말고는 없어. 그러니까 증거를 찾아내야 해."

콰직.

서찰 위에 단검이 꽂혔다. 검은 마기가 흉흉하게 들끓는 단검에 마인들은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내가 직접 가겠어."

"네?! 소공녀 님, 위험합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 팔대세가의 가주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곳에 마교의 소공녀가 나선다는 말이 돌면 놈들이 분명...!"

"흥, 어차피 언젠가 도모해야 할 자들이야. 얼굴 미리 봐서 나쁜 것도 없지. 그리고 가장 좋은 기회잖아? 나는 당당히 들어갈 수 있지만, 그 새끼는 이제 호북성에 들어갈 명분이 없어."

"...대공자가 올해 이립(而立)이기는 하죠."

"후후, 그에 비해 나는 이제 성인이 된 몸. 좋아, 아버님께 나의 패기를 보여드리겠어. 가서 허락받고 올게!"

소공녀는 당차게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육봉지회에서 내가 육봉 중 으뜸이 되어, 마황(魔凰)의 칭호를 손에 넣겠어! 그리고 무당의 장문인을 만나서 증거를 받아낼 거야. 전염병을 퍼뜨리려고 한 미친놈의 실체를 밝힐 증거를...!!"

콰득.

대공자라는 글자가 박힌 짚인형에 단검이 박혔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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