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33화 (33/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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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봉을 찾아라

자보검.

무당파의 전설 속 무기인 의천검에는 비록 미치지 못하나, 세상 내로라하는 명검을 앞에서부터 줄 세우면 족히 100등 안에 들어갈 검이다.

'자색 보검이라는 의미에서 자보검.'

현재 무당파 장문인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검이며, 검신이 짙은 보라색인 것 가장 큰 특징이다. 그다음으로 큰 특징은 칼날이 날 일 자가 아닌 열 십자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고, 칼날의 두께가 생각보다 상당히 두껍다.

진짜로 그냥 자색의 보검인가? 자보검에 혹시 다른 의미는 없는가? 다른 의미는 없다.

딱히 무당파의 내기가 잘 들어간다거나 태극의 묘리가 스며든다거나 하는 일은 없고, 보기 아름답고 제법 예리하며 단단하다.

나름 보검답게 자보검보다 훨씬 거대한 중검을 상대로 칼날을 부딪쳐도 중검을 깨뜨리기 일쑤였고, 몇 대 이전의 장문인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상징적인 무기였다.

'사실은 그게 검집인데 말이지.'

자보검은 검이되 검이 아니다.

'보라색으로 된 금속이 어디있어? 녹슨 거라면 모를까.'

세상 어떤 철이 보라색을 띠겠는가. 오래전 장삼봉의 제자가 요괴를 잡고 뼈를 깎아 칼로 만들었다는 전설도 있지만, 그 전설이 맞기는 해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뼈를 깎아 만든 것은 칼날이고, 놈의 강철같은 껍질을 잘 다듬어 만든 것이 검집이다. 현자오공(玄紫蜈蚣)이라는 초거대 지네 요괴를 잡고 난 뒤, 보라색 껍질을 검집으로 만들어 안에 씌웠다.

검 안에 검이 있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칼날이라고 생각한 부분은 검집이다.

'어검술이 아니면 뽑아내지 못하도록 만들어놨지.'

훗날 태극혜검을 사용하는 이를 위한 선배 도사의 안배는 갑자가 서너 번을 돌고 나서야 태극검후의 손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자보검은 태극혜검의 진기를 불어넣는 순간 진면목이 드러나게 되고, 현자오공의 뼈 색깔과 똑같은 묵빛의 색을 드러내게 된다.

-이 검의 봉인을 풀 때는 무림에 큰 재앙이 닥쳤을 때, 그리고 무당을 구할 영웅이 나타날 때가 되리라.

장문인에게 암암리에 전해지는 전승이 진실이었을 뿐.

단지 아무도 태극혜검을 익히지 못했기에, 아무도 태극혜검의 비급이 숨겨진 곳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자보검은 칼집째로 수백 년 동안 장문인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무기란 자고로 필요한 자에 의해 사용되어야만 진정한 가치를 가지는 법.

'미래에 태극검후가 쓸 무기니까 지금 사공희가 쓰는 게 맞아.'

무기에는 주인이 있고, 자보검의 주인으로 가장 어울리는 존재는 사공희다. 현기도사가 아무리 가지고 있어 봐야 그냥 보라색 지네 가죽 덩어리에 불과하므로, 자보검은 내가 가져가야 한다.

"내놓거라."

"안 됩니다!"

설령 그게 무당의 신물이라고 한들. 나는 현기도사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그와 의견 대립이 발생했다. 내 말이면 껌뻑 죽던 현기도사도 어째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작 장문인 대대로 내려오는 검이라는 이유로 태사부의 명을 어기려고 드느냐!!"

"크윽, 무붕 태사부시여!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주십시오!!"

"닥쳐라! 내 대의를 위해 도리를 다하고자 함이거늘, 어찌 속세의 논리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려고 하는 것이야!"

수컷이 암컷에게 잘 보이기 위해 멋을 부리는 건 당연지사. 남자가 여자에게 점수 좀 따보겠다고 선물 좀 챙겨가겠다는데 저항이 거세다.

- 이런 명검은 처음이에요, 상공. 이런 좋은 선물을 받았는데 제가 뭘 해드릴 수 있을까요? ...부디 상공께서 지니신 그 우람한 검으로 저를 찔러주셔요.

- 안에 진기를 불어넣어 보아라.

- 진기요? ...어맛, 너무 멋져.... 지려버릴 것 같아요, 아흥?!

응기잇.

선물을 받고 기뻐할 사공희의 모습을 생각만 해도 하초가 뻐근해졌다. 나는 당장이라도 자보검을 가지고 싶었으나, 현기도사는 내게 순순히 검을 내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야, 장문인에게 전해지는 보검이라고 했지. 내가 장문인 하랴?"

"태사부!! 지금...지금은 드릴 수 없습니다! 아, 아니. 최소한 3개월까지는 제가 사용하고 드리겠습니다."

"지금? 3개월? 왜?"

"...조만간 호북성에서 큰 행사가 있습니다. 무림정파들의 후기지수들이 모이는 행사입니다."

"후기지수? …아! 설마 구룡육봉(九龍六鳳)?!"

"용봉지회(龍鳳之會)입니다."

용봉지회. 4년마다 아홉 명의 용과 여섯 명의 봉황을 겨루는 정파 최대의 비무대결.

각 문파와 세가에서 내로라하는 29세 이하의 무인들이 서로 용과 봉황의 별호를 얻기 위해 싸우며, 여기서 별호를 얻는 자가 곧 무림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신성으로 칭송받게 된다.

대부분의 문파 절정고수나 백대고수들은 대부분 다들 용과 봉의 이름을 잠시 가졌고, 여기에는 정사마를 가리지 않는다.

'혹시?'

내가 기억하고 있던 숱한 젊은 고수들의 어렸을 적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마지노선이 서른 전이니, 아홉수로 꺾이기 전의 파릇파릇한 신진여고수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꽃잔치로군.'

나는 자보검을 당장 취하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남자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깨에 힘 좀 넣겠다는 걸 어떻게 막을 수 있으랴. 나는 이미 현기도사에게서 장문인의 증표를 하나 가져갔다.

'장문인 도포를 서책 보자기로 쓴 것도 모자라 사공희랑 처음 할 때 깔개로 썼었지.'

덕분에 무당파 장문인의 도포에는 사공희의 처녀혈과 애액이 흥건하게 묻게 되었다.

이후 사공희가 빨래를 한답시고 넝마주이를 만들어, 현재 나의 방을 청소하기 위한 걸레로 잘 사용하고 있다. 사공희가 입고 있는 것은 입기 위해 받은 여벌이다.

"용봉지회라.... 무당에서도 혹시 누구 나가는 놈 있냐?"

"예. 제 직전제자가 나갈 예정입니다."

"그럼 놈이 자보검을 쓰기라도 하느냐?"

"그, 그건 아닙니다. 단지 제가 다른 장문인들이나 세가주들의 앞에서…."

"갈!"

나는 내기를 담아 호통을 쳤다. 내가 생각을 접은 건 접은 거고, 자보검 대신에 다른 검이라도 가져가야한다. 내 호통에 현기도사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태극혜검이 이제 1성에 이르렀거늘 어딜 감히 비고를 벗어날 생각을 하는 것이냐! 남들의 앞에서 장문인이라고 당당히 서고 싶다면 태극혜검부터 익혀라!"

"하, 하지만 제가 장문인입니다! 애초에 용봉지회를 앞두고 잠시 폐관을 그만둘 생각이었습니다! 몰랐다면 모를까, 지회가 열린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너 없어도 잘 돌아가던데? 장문인 자리 사실상 현철 그놈이 꿰차고 잘하던데?"

"예?"

현기도사가 비고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오 개월. 서서히 쇠락하지 않을까 싶었던 무당은 현철도사를 중심으로 오히려 더욱 세력이 강고해졌다.

"제자들 진짜 많이 강해졌더라. 역병으로 봉문한 다음 세가 기울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잘하더라? 고작 반년 만에 봉문의 여파를 모두 수습했어."

"태, 태사부?"

"자보검을 나나 네가 가질 게 아니라 현철 그놈이 가져야 하는 거 아닌지 몰라."

무사들의 평균 무위도 올라가고, 현철도사 본인도 무공의 경지가 나날이 올라갔다. 그에 반해 현기도사는 기만 쇠할 뿐 딱히 강해지지는 않았다. 사공희도 3성까지 익힌 태극혜검을 장문인이 1성밖에 익히지 못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는 녀석이라고 애원해서 한 번 보여줬더니...쯧쯧. 내게 괜히 너에게 헛바람을 집어넣었구나. 분수에 맞지 않는 무공을 보여줬어. 미안하다."

"태사부! 제발 한 번만 더 보여주십시오!"

현기도사는 하늘을 가리키며 시연을 애원했다. 천장에는 내가 남겨놓은 태극혜검의 구결이 적혀있었으나, 그는 구결만으로 익히지 못했다.

"싫다. 내가 네 놈 앞에서 왜 검을 휘둘러야 한단 말이냐?"

무공을 한 번 시연하면 그만큼 끓는 양기를 풀어야 한다. 상대가 사공희라면 몇 번이고 보여주고 몇 번이고 박고 싸면 되지만, 현기도사 앞에서 보여봐야 허공에 좆질하는 것만도 못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후배에게 부디 가르침을 하사하여 주시옵소서!! 무붕 태사부!"

"하아. 이것 참...."

입꼬리가 씰룩인다. 하지만 나는 속내를 감추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좋다. 내 보여주도록 하지. 좋은 검 네 자루를 가져와라."

"네...자루나 말씀입니까?"

"그래. 지금 당장.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가져와야 할 것이다."

짝! 나는 바닥에 흙먼지를 일으킨 다음 비고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현기도사, 무당의 장문인조차 모르는 비밀통로에 숨은 나는 그가 검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렸다.

"......현타야, 현타 왔느냐!!"

언제나 허드렛일은 아랫사람의 몫. 나는 현타도사가 검을 네 자루 들고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용봉지회."

설마 무당에서 열릴 줄이야.

* * *

"맹주, 이건 수긍할 수 없습니다."

백우선을 쥔 남자는 녹색 도포를 입은 중년인에게 종이 한 장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하얀 종이에 박힌 큼지막한 두 글자는 무당(武當)이었다.

"무엇이 수긍할 수 없다는 말인가?"

"역병이 돌았던 지역입니다. 마교의 잔당이 드나들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용봉지회를 개최할 장소라니요."

반년 전, 무당산에는 큰 역병이 돌았다. 지금은 비록 환자 한 명 없이 말끔히 역병이 가라앉았지만, 사람 심리상 굳이 선택할 수 있다면 호북성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선택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무림맹주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무당파가 있는 호북성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다들 장강 구경하기에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용봉지회라는 것이 결국 무엇인가? 우리가 싸우면 혈겁이 일어나니, 제자들에게 대신 싸우게 하는 대리전이 아닌가."

"맹주. 그 말씀은 많은 정파인들의 전의를 꺾는 말씀이십니다."

"내가 틀린 말을 했나? 절정, 초절정의 고수들이 붙으면 둘 중 하나는 죽게 되지. 하지만 평균적으로 일류 수준인 후계자들끼리 붙여놓으면 서로 다치는 선에서 끝나게 되지 않나."

"용봉지회의 본의를 묻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화제를 돌리지 마십시오. 왜 하필이면 호북성을 선택했냐고 묻는 겁니다."

"에잉, 안 통하는구먼. 역시 제갈가의 사람이랑은 대화가 안 통해."

무림맹주는 혀를 끌끌 차며, 방 한가운데에 넓게 펼쳐진 지도를 가리켰다. 중원 전체가 그려진 지도에는 수많은 문파의 깃발이 땅에 꽂혀있었다.

"용봉지회가 정파만의 모임이라면 모를까, 사파와 마교에서도 오지 않는가? 그럼 그들을 배려해야지. 장강 따라서 쭉 내려오면 되고, 거슬러 올라오면 되고, 아무튼 3개월 안으로 모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그게 꼭 호북, 우한일 필요가 있냐는 말입니다."

"그만두시게. 이건 관과도 얘기가 된 사항이야."

관이라는 말에 백우선의 남자는 흠칫 놀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맹주는 이미 관, 황궁과 모든 것을 정해놓았다.

"관에서 잘도 허락해줬군요. 호북성을."

"오히려 관에서 적극적으로 추천하더군. 용봉지회가 코앞에 다가왔으니, 이왕 장소를 정할 거라면 호북으로 해달라고."

정사마가 한데 모일 때 가장 속이 쓰린 사람은 단연 그 장소의 영주다. 호북성에 모이기로 한다면 호북성을 다스리는 성주는 언제 어디서 무인들이 왈패처럼 서로 싸움박질을 할지 걱정하기 일쑤다.

특히 젊은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여 한곳에 모인 미꾸라지와 참새들이 서로 누가 더 잘났느니 아웅다웅 싸우는 동안 피해를 보는 이들은 객잔의 주인과 손님, 그리고 민간인이다.

그래서 용봉지회는 구파일방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성 내에 자리 잡은 팔대세가와는 달리, 주로 산에 자리 잡은 문파에 정사마가 모이게 된다. 최소한 싸움이 벌어지더라도 문파 내부에서 일어나 민간에 피해가 덜 가도록 하는 의도였다.

"도대체 무슨 의도입니까? 제 의견을 묵살하고 호북으로 선정한 것은 그만큼 중요한 요소가 있을 터. 맹의 군사가 제안한 바를 걷어차고 굳이 검증되지 않은 장소를 정하신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팽가 가주의 일이 기억나는가? 약 9개월 전."

"팽이왕...?"

"그래. 팽가 여식이 가주를 살리기 위해 표국 매매혼을 했었지. 해당 표국은 당시 마교의 고수를 살리기 위한 천환단을 가지고 있었으나, 소국주였던 이는 사모하는 연인을 위해 천환단을 팽가에 넘겼다. 결국 마교의 고수는 죽기 전 무당을 습격했고, 그게 역병의 전파와 무당의 봉문으로 이어졌지."

"그거야 이미 제가 보고드렸던 사안 아닙니까."

마교의 입장에서 보면 끄나풀이었던 남자가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그르쳤다. 팽가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천환단은 팽가의 손에 들어갔고, 마교로 흘러 들어가던 자금줄은 모두 팽가가 차지하게 되었다.

팽가의 번영과 반대급부로 무당의 세가 기울기는 했지만, 다행히 장문인 대리로 나선 현철도사의 기지 덕분에 무당은 나날이 강대해졌다. 무림맹주는 무당산에 자리 잡은 무당파의 깃발을 손으로 펄럭였다.

"마교가 수작을 부린 땅을 일부러 용봉지회의 장소로 선택했다? 설마...."

"...그래. 이건 마교에 대한 시위일세."

무림맹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인륜을 저버리고 역병을 퍼뜨린 사이한 마교의 무리들. 용봉지회에서 그들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낼 걸세."

"증거는요?"

"증거? 흐흐, 군사."

무림맹주, 독고자영은 마교의 깃발을 부러뜨렸다.

"오지 않으면 자신들이 저지른 일임을 시인하는 꼴이 아니겠는가?"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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