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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제자, 사공희
세가의 주인은 누구인가.
가주다.
마교의 주인은 누구인가.
교주, 천마다.
그렇다면 문파의 주인은 누구인가.
사람마다 이견은 있을 수 있지만, 역사가 깊은 문파일수록 장문인이 문파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주인이라고 하기보다는 문파의 대표에 가깝지만, 장문인에게 주어지는 권위와 권력은 무소불위라고 할 수 있다.
장문인의 말 한 마디에 문파간의 전쟁이 발발하기도 하고 봉문을 하기도 하니, 한 문파에 발을 담근 사람에게 있어 장문인은 문파라는 작은 나라의 황제나 마찬가지다.
"아아...무붕 태사부시여!"
"그래. 본좌를 무붕이라 불러라."
그러니 장문인이 인정한 존재라면 모든 문제는 일사천리로 해결된다.
나는 백발 성성한 노인을 무릎 꿇렸다. 황제가 와도 무릎을 꿇지 않을 남자가 단지 나를 태사부라는 것만으로 극존칭을 사용하고 예의를 갖췄다.
'이거 좀 짜릿한데.'
팔대세가를 상대로는 불가능한 짓이다. 거기는 족보라는 게 있으니까. 문파도 마찬가지로 항렬이 있고 기록이 있지만, 세가보다는 상대적으로 속이기 쉽다.
"무당의 세는 날로 커지고 강대해지고 있으나, 그를 질시한 무리의 간계에 당했구나. 현기야, 네 몸에 사이한 기운이 느껴진다."
"......!!"
"나는 이미 천상에 발을 반쯤 걸친 몸. 천화로 썩어가는 네 겉을 정화할 수는 있어도, 이미 진탕이 된 네 속은 내가 어찌해줄 수 없다."
화르륵.
나는 다짜고짜 삼매진화를 일으켜 현기도사의 팔을 불태웠다. 그의 팔에 남아있던 마기의 흔적과 천화의 잔재는 말끔히 사라졌고, 현기는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소리쳤다.
"반선에 오르신 분께 업을 쌓게 하여 송구합니다!!!"
"......?"
"이 놈이 불민하여 등선하실 분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아아...선배님들과 시조님을 어찌 봐야 할 지...!!"
"아, 아아.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선택한 일이니. 나는 도인이기 이전에 무붕이다."
쿵, 쿵쿵!
기껏 팔을 치료해줬더니 흙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감격하고 있다. 저러다 뇌진탕으로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석고대죄를 하느라 내가 괜히 불편했다.
'노인네가 힘도 좋아.'
어째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놈들이 이제는 이마로 땅까지 치고 있으니 내가 다 무서울 지경이었다. 나는 현기도사가 나보다 먼저 우화등선하기 전에 헛기침으로 본론을 끌어냈다.
"흠흠.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따로 있노라. 네가 짐작하다시피 나는 등선을 앞둔 몸. 허나 무당에 드리운 암운을 두고 가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구나. 그래서 내 안배를 하나 해두고 가고자 한다!"
"안배라 하심은...?"
"태극혜검!!"
쾅쾅쾅!
"놈! 그러다 죽겠다! 한 번만 더 땅에 대가리를 찍으면 혈을 누를 것이야!"
"죄, 죄송합니다!!"
현기도사는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정좌했다. 이마에는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지만, 나름 그래도 한 문파의 수장인만큼 큰 상처는 아니었다. 단지 나를 향해 보이는 상징적인 상처일 뿐이었다.
"흠흠. 아무튼 내게 전해진 태극혜검을 무당에 전하고자 한다."
"아아...드디어 태극혜검의 비급이 무당에...!!"
"아니, 사람이다."
나는 현기도사의 착각을 바로잡았다.
"나의 진전을 이어받은 여인이 언젠가 강호에 나타날 것이다. 그녀는 네 개의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어검술의 달인이며, 태극의 극의를 깨우친 자.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를 혈겁에서 무당의 선봉에 설 것이니라."
"여인...여인이란 말입니까?"
"그래."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거야 내가 여아를 거두어 키우고 있기 때문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키우는 게 맞다. 땡전 한 푼 받지 않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는 걸 생각하면 나는 사공희를 키우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아...이 놈이 태사부님의 뜻을 오해했습니다! 태사부께서 직접 거두신 아이라니...!"
"오해?"
"부끄러운 말씀이오나, 본 파의 기강은 무너졌습니다. 제 사사로운 은원으로 인해, 야욕이 넘치는 사제가 장문인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있사옵니다."
귀찮은 이야기는 질색이다. 하지만 저런 노인네를 상대하는 특성상,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 대화가 빠르게 이루어진다.
"현타...라는 자는 아니겠지.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했으니. 그럼 현철이라는 자 말이더냐?"
"......!!"
변화구를 넣는 척하며 정확히 찔렀다. 현기도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놈의 기에서 야욕이 들끓더구나. 하지만 네 녀석 다음으로 강한 무인이기도 하지. 네가 죽으면 다음 장문인은 그놈이 되겠구나. 혹시 배분상 놈보다 항렬이 높은 이가 있느냐? 아니면 산 밖에 출타한 이들 중 무공이 더 뛰어나거나."
"...없습니다. 제 다음이 현철입니다."
"그럼 끝났군. 배분은 어쩔 수 없지."
태사부조차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게 배분과 항렬이다. 그걸 단번에 엎을 방법은 강대한 무공뿐인데, 심지어 현기도사 다음가는 무인이 현철도사다.
'그 새끼 마교에 빌붙는데?'
장문인이 되어 무당의 모든 비급을 챙겨 마교에 투신했다. 덕분에 무당은 봉문은 커녕 멸문의 직전까지 몰리지만, 기연으로 등장한 태극검후 덕분에 무당은 몰락하지 않았다.
'그림 한 번 그려봐?'
위기에는 항상 기회도 함께 찾아오는 법. 사공희의 화려한 등장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내가 무당파를 먹으려면 반드시 내 말을 듣는 자들이 있어야 한다.
"현기야. 네가 앞으로 살날이 몇 년 남은 것 같으냐?"
"......앞으로 3년은 족히 더 살 것 같습니다."
마인과의 전투로 내상을 입은 그에게는 하루하루 내공을 소실하며 노환으로 사망하는 미래만 남았다. 도중에 암살이라도 당하지 않는다면, 현기는 본인 말대로 3년 정도 지나면 자연으로 돌아가게 될 운명이다.
"좋다! 마침 시기도 비슷하니, 내 등선하기 전 나의 제...."
"제...?"
"...제, 제...크흑."
몸종인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사공희를 내 제자라고 부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사공희는 내게 몸종이며 밤일꾼이며 무공 좀 쓰는 경비원이며 시녀이며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톡 까놓고 말해 제자는...제자라고 하기에는....
"......내 제자를 무당제일검으로 만들어놓으마. 오늘 온 이유도 그걸 위해서 잠시 들린 것이니."
나는 현실과 타협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태사부님. 말씀하십시오. 저, 장문인입니다."
"그래? 그러면 말이다...."
나는 비어있는 천장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천장에 태극혜검을 남겨둘 테니, 비급 좀 가져가자."
"태사부님."
현기도사는 형형한 기운을 뿜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태사부라도 모든 비급을 전부 챙겨가겠다는 건 너무 과했나 괜히 뜨끔했지만, 내 직감은 틀렸다.
"이곳에 있는 모든 비급을 제가 직접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일각만 기다려주시옵소서."
특급배송이었다.
"그럴 필요없다. 보자기 하나만 있으면 된다. 내가 직접 가져가겠노라. 그런데 보자, 어디 좋은 보자기 없나?"
"여기있습니다."
현기도사는 장문인의 옷을 벗었다.
* * *
"장문인께서는 어디로 가셨느냐?"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허어, 내게도 말을 하지 못하겠다?"
현타도사, 사정후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기를 뿜어냈다. 장문인의 직전제자이자 모든 제자에게 대사형이라고 불리는 청년은 땀을 뻘뻘 흘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장문인께 급히 전할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놈!!"
"현타야, 여기서 무슨 소란이냐!!"
뒤에서 노성이 울려 퍼지자 사정후는 몸을 돌려 허리를 숙였다. 맞은편에는 씩씩거리며 얼굴을 붉히고 있는 현철도사가 있었다.
"장문인께서 함구령을 내리셨다! 그러면 그런 줄 알아!"
"현철 장로님, 급한 일입니다."
"장문인의 명을 거스를 정도로 급해? 그렇다면 내가 자조치종을 듣겠다! 무슨 일이냐!"
"......."
사정후는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현철도사의 제자들이 마교의 끄나풀과 손을 잡은 것 같다는 첩보를. 장문인이 자신에게 비밀리에 준 임무의 보고는 현철도사의 감시와 증좌 확보였고, 당연히 현철에게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내게는 말하지 못하고, 장문인께는 직접 말해야 하는 문제렸다? 그런 문제가 도대체 뭐지?"
의심스러운 눈빛이 점점 불신을 띄기 시작했다. 사정후는 자신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가 하나둘 늘어나는 것에 이를 악물었다.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럴듯한 변명을 하거나 꾸며 말하는 건 사정후에게 쥐약이었다. 어쩌면 최악의 선택이 될 수 있는 '침묵'을 선택해버렸고, 사정후는 스스로 덫에 발을 들이미는 것을 알면서도 묵비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놈! 네 놈 설마-"
"현철, 현타 왔느냐."
자리를 비운 당사자, 장문인 현기도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장포를 벗고 하얀 내의만 입고 돌아온 그는 어딘가 개운해 보였다.
"자, 장문인."
"내 시름시름 앓던 것을 문제를 해결하고 오느라 조금 시간을 지체했다. 그래, 이곳에는 둘 다 무슨 일로 왔느냐?"
"예. 현타 장로가 장문인께 급히 전할 것이 있다하여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말하지 못하겠다 강짜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오호? 그래? ...현타야,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겠느냐?"
"...지금은 곤란합니다. 그, 그것이."
무엇으로 의심을 벗어나야 하는 걸까. 사정후의 눈이 좌우로 굴러다니다, 장문인의 하얀 내의에 수놓아진 태극 무늬를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소 남들에게 부끄러운 말이 오나, 그날 저를 습격했던 자에 대해 짚이는 바가 있습니다. 습격자가 보인 무공에 관해 장문인과 긴히 상의하고자 하여...."
"뭣이?!"
거짓말입니다. 사정후는 너무나도 놀라는 다른 이들을 보고 속이 타들어갔다. 거짓은 금방 들통날 테고, 자신은 더욱 수렁에 빠질 것 같았다.
"허허허! 그래, 그것이라면 응당 그럴 만 하지. 하지만 걱정 마라. 내 당사자를 지금 만나'뵙고' 오는 길이니."
현기는 일부러 힘을 주어 말했다. 당연히 다른 무인들은 장문인이 높여 부르는 상대에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분에 관한 것이라면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 오해가 있었고, 너그러이 용서해주셨다. 껄껄껄."
현타도사를 습격한 자를 두고 장문인이 극존칭을 한다? 무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현기도사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모았다.
"내 깨우침이 있어 몇 주간 비동에서 나의 무공과 일생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3년은 족히 넘을 듯하니, 현철아. 네가 그동안 장문인의 대리를 좀 해다오."
"예?!"
현철도사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잽싸게 표정을 숨겼지만, 예상치 못한 말로 인한 기쁨은 숨길 수 없었다.
"부탁한다, 잘 할 수 있지? 쿨럭...!"
"무, 물론입니다. 잘 할 수 있습니다."
병든 장문인이 장문인 대리를 맡겼다? 사정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무공이 조금만 더 높았으면 모를까, 무당의 무사가 순리와 이치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현타는 나를 잠시 따라와라. 그리고 나의 폐관을 돕거라."
"...예, 사형."
사정후는 씁쓸함을 느끼며 현기의 뒤를 따랐다. 멀리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수풀까지 따라온 사정후는 그제야 불만을 토로했다.
"이게 최선입니까, 사형?! 저놈이 사형과 무당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괜찮다. 그분께서 모두 해결해주실게야."
"그분이라뇨! 그자는-"
사락.
현기는 검을 뽑아 들고 일검을 그었다. 밤공기를 가른 장검은 청명한 소리와 함께 앞으로 뻗어 나갔다.
단 한 동작.
한 동작이었지만, 사정후는 깨달았다.
"설마...!"
"그분께서 가르침을 주셨다. 그리고 내게 마지막 임무를 주셨어. 정후야, 이게 네게 주는 마지막 부탁일지도 모르겠구나."
현기는 검을 집어넣고 사정후의 어깨를 두드렸다.
"...빈 서책을 한 백 권 정도만 구해주겠느냐?"
"빈...서책이요?"
"그래. 빈 서책. 혹시 누가 물으면 내가 나의 무공을 비급으로 정리하겠다고 하고."
비공을 나왔다. 장문인의 장포는 없다. 갑자기 빈 서책을 가져와달라고 한다.
그리고 잠깐 나갔다 온 사이, 태극혜검의 1초를 흉내 냈다.
"...사, 사형.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요? 하하, 설마 그 젊은 놈이 진정으로 태극혜검을 이은 태사부십니까?"
"현타야. 혹시 천기를 읽는 능력을 가졌느냐?"
사정후는 강한 탈력감에 혼이 나갔다.
* * *
"태극검법부터 양의신공, 십단금, 제운종, 등평도수.... 젠장, 더럽게 많네. 와, 이거 태극혜검 빼고 거의 다 있는 거 아닌가?"
나는 태극혜검 하나로 무당의 모든 비급을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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