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28화 (28/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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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제자, 사공희

인간은 누구든 첫 경험을 잊지 못한다.

처음 먹어본 음식, 처음 가본 여행지는 잊어버릴 수 있어도 처음 여자를 안은 경험은 잊지 못할 것이다.

살인도 마찬가지.

성적 흥분과는 다른 감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는 살인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나를 확실한 마(魔)의 길로 인도한 경험이라면 더더욱.

- 네게 첫 임무를 주마! 너는 일주일 내로 마교의 행적을 좇아 다니는 자를 죽여야 한다!

내가 마교에 투신하여 받은 첫 임무는 감찰관이라는 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무공이라고는 정파의 무공 삼류 수준으로 익힌 남자가 어떻게 관아의 사람을 죽이느냐고 따졌지만, 못하겠으면 때려치우고 떠나라는 말에 나는 목숨을 걸었다.

'생각해보니 그때는 혼자 다녔던 것 같은데.'

일주일 동안 무슨 연유인지 혼자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었다.

나는 당시에 다른 건 몰라도 찌르기 하나는 하루에 천 번 넘게 수련했고, 일주일 기한의 마지막 날에 감찰관을 뒤에서 찌르는 데 성공했다.

'새삼 반갑네.'

핏빛으로 일그러졌던 감찰관의 얼굴이 아직도 떠오른다.

혈강시로 얼마나 많은 자를 죽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첫 살인의 경험을 하게 해 준 감찰관은 내 전생에 있어서 손에 꼽을 수 있는 살인의 기억 중 단연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존재였다.

'굳이 마교 들어갈 이유도 없으니까 지금은 죽일 이유도 없는데, 이놈 하는 말이 조금 신경 쓰이네.'

나는 신창의 감지 반경 밖에서 둘의 대화를 귀담아들었다. 둘은 전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나는 신창 몰래 둘의 대화를 얼마든지 엿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선배, 저를 좀 믿어주십시오. 제가 어디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제가 입이 무겁지 않았으면 진작에 팽가에서 추살대를 보냈을 겁니다."

"그래, 그래. 팽가 여식이 추소광 자식도 아닌데, 추소광 자식인 척하고 추소표국의 유산을 전부 차지했다는 것 말이지. 나 참, 말이 돼야지."

"아, 진짜 못 믿으시네.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팽유월 아가씨도 인정한 증거가!!"

"나는 그런 거 못 믿는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누군가가 추소광을 죽이고 추소광인 척했다는 말 아니더냐? 그것도 팽유월이 표국에 들어간 시점부터. 네 추리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느냐?"

뜨끔. 나는 팽유월이 추대광과 추소광을 구분한 것도 놀라웠지만, 감찰관이 거짓의 장막을 들춰내고 진실을 밝혀낸 것에 더 놀랐다.

'저놈 머리 진짜 똑똑한데?'

신창조차 믿지 못하는 추리를 확신하는 증거가 무엇일까. 나는 무당산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목적을 잠시 보류하고 뒤를 밟았다. 둘은 근거지로 보이는 객잔의 방 안으로 들어갔고, 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아래층에 술 마시러 간다."

"다녀오십시오."

신창이 자리를 비웠다. 나는 신창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방으로 잠입했다.

"씁, 분명 내 예상이 맞는데....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겠단 말이야...."

감찰관은 내가 들어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벽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천화', '사공희', '마인', '장문인' 등 온갖 단어들을 펼쳐놓은 그는 벽을 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감찰관의 목덜미에 칼을 들이밀었다.

"물어볼 것이 있네. 움직이면...알지?"

"......."

감찰관은 순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신창을 부르려는 듯 손에 걸어둔 실을 당기려는 움직임이 살짝 엿보였으나, 이미 나는 검을 겨누기 전에 그의 혈을 찔렀다.

"운룡반월창의 아이를 부르려거든 불러보아라. 무공의 대가 끊길 테니."

"신창의 무공을 아시다니, 오래전에 은거하신 분입니까? ......고인께서는 어인 일로 저를 이리 위협하시는 겁니까? 저는 관아의 사람입니다."

노인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신창의 무공을 일부러 말한 덕분인지, 다행히 감찰관은 똑똑한 머리로 나를 은거 고수로 착각했다. 이래서 똑똑이들과는 대화가 편했다.

"오랜만에 산에서 내려왔는데 제법 재미있는 얘기가 들려서 말이야. 그래, 팽가의 여식이 외인의 아이를 들였다?"

"...고인께 부탁드리옵니다. 그건 제 추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디 어디 가서 말씀하여 주시지 말아주시옵소서."

"그냥 물어보는 걸세. 내 어디 가서 말하겠는가? 껄껄. 증좌가 있다면서? 말해보시게."

"끙. 진짜 믿습니다. 아주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고인께서는 어찌 이런 일에 관심을...?"

"호기심일세. 껄껄! 됐고 말이나 하게. 내 호기심이 그대를 죽이기 전에."

감찰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대상으로는 그냥 순순히 목적을 들어주는 편이 더 나았다.

"추소광은 하인들 사이에서 작다고 정평이 난 남자. 하지만 팽가의 아가씨께서는 추소광의 양물이 자신의 팔뚝만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에 타죽은 추소광의 것은 몹시 작았지만, 두 명의 정사를 엿본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주 거대했다고 하더이다.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누군가가 추소광으로 변장했을 가능성이 있지요. 그리고 추소광인 척 팽가의 아가씨에게...크흠."

"오호.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성기차이."

'일단 확실한 정황증거군.'

과연 끼워맞춘 건지 아니면 진짜로 진실에 통달한 건지는 잘 모르지만 확실한 건 이 남자의 통찰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

'추대광의 존재를 알아차리다니, 역시 팽유월이다.'

전생에 내가 처음으로 죽였던 남자가 사실은 엄청 유능한 존재였다는 것에 나는 기분이 괜히 싱숭생숭했다.

"과연...알겠네. 흥이 식었다. 속세에 흔히 있는 일이군. 그보다 감찰관이여, 내가 이리 찾아온 목적은 네가 찾는 이에 대해 한 가지 알려주기 위함이다."

"역시...뭔가 알고 찾아오신 거군요."

"대공자."

"......!!"

감찰관의 귀가 쭈뼛 섰다.

"마-"

"쉿."

나는 단지 대공자 석 자만 말했을 뿐인데, 그는 마치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한탄을 내뱉었다.

사락.

나는 일부러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낸 뒤, 그가 책상 위에 올려둔 사공희와 사월에 대해 적힌 종이를 태워버렸다.

"이, 이럴 수가.... 역시 마교가...."

"허튼사람 찾지 말고 그놈을 쫓아라. 본좌가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해.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그, 고인께서는 그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감찰관은 내게 의견을 구했다.

나는 그냥 대공자의 흔적이 아닐까 싶어서 대충 던져본 거지만 딱히 그들의 노림수가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 지 몰라 난감했지만, 만약 대공자의 수작이라면 의도가 대충은 엿보였다.

"...천마에게는 후계자가 둘이 있지. 마화를 찾아라."

나는 적당히 정보를 흘리고 방을 빠져나왔다. 내가 창문으로 빠져나오자마자 귀신같이 신창의 일격이 날아왔고, 나는 강기로 만들어진 창을 태극혜검으로 후려쳐 감찰관을 향해 튕겨냈다.

"큭!"

신창은 감찰관을 지키느라 나를 쫓지 못했고, 나는 신창이 쫓아오기 전에 무당산으로 몸을 돌렸다. 망가진 유리창 너머, 두 사람의 언쟁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역시!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어!! 선배님! 들어보십시오!"

"미친놈아, 너 지금 저 정체불명의 노괴한테 뒤질 뻔했어!!"

"그분께서는 제게 가르침을 주신 겁니다!"

"이런 미친 새끼!!"

감찰관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신창을 상대로 신명 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무당산으로 올라가는 산기슭에서 기지개를 한 번 펴며 숲내음을 크게 들이마셨다.

"끄아아, 착한 일 하나 했다."

한 번 죽였던 이를 죽이지 않았다. 마교의 흔적을 찾는 이에게 "사공희->모친 사월->마인 폭주->천화 발병->근원은 마인->배경은 마교 대공자의 수작"이라는 문제의 연환을 끊고 정답부터 가르쳐줬다.

따라서 감찰관이 굳이 사공희를 찾을 이유는 없게 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천화의 발병 원인을 탐색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뒷배경으로 있을지 모르는 '마교의 존재'를 확인하는 거니까.

'단서는 줬으니 알아서 무당산을 떠날 것이다.'

마화(魔花).

고기 썩은 내를 풀풀 풍기는 대공자의 추종 마인. 그녀를 쫓다 보면 분명 대공자로 바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후...중원의 평화를 위해 힘쓰는 나란 남자. 멋져."

나는 스스로 칭찬을 한 뒤, 검은 복면을 둘렀다.

"착한 짓 한 번 했으니, 나쁜 짓 한 번 해도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군."

나는 곧장 산길을 올라갔다.

'무당 비급 털러 가야지.'

* * *

"들어보십시오. 여기서 검마의 흔적이 끊겼습니다. 검마는 무당의 장문인과 은원관계가 있죠. 그리고 장문인은 호북성주가 무당파의 사람들을 초대한 날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게 무엇을 말하느냐! 현기도사가 검마랑 제대로 붙었다는 겁니다!"

"근데 다른 놈도 아닌 검마가 천화에 걸린 장본인이다? 그게 무당산에 퍼졌고, 그게 마교의 노림수다? 이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맞다니까요! 마교의 놈들은 산에 올라간 환자 중에 마인을 투입하여, 천화에 걸린 환자들을 무당산 곳곳으로 퍼뜨린 게 틀림없습니다! 역병을 옮기는 건 들짐승이기는 하지만, 미친 인간들도 그에 못지않잖아요! 역병은 마교가 퍼뜨린 겁니다!"

"소설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천화를 퍼뜨리는 미친 새끼들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 새끼들 마교잖습니까!"

"야! 마교도 사람 사는 곳이야!!"

객잔의 방에서 시비가 붙었지만, 전음으로 싸우느라 아무도 듣지 못했다.

"너는 아까 그 노괴의 정체나 생각해라! 너를 죽이려고 한 자인데 뭘 그렇게 태연하게 싱글벙글 웃어?!"

"에이, 은거기인들 늘그막에 제멋대로 사는 이들이 한둘 입니까? 그리고 선배님께서도 딱히 더 추격은 안 하셨잖습니까. 마인이면 바로 저를 버리고 싸우러 가셨을 분이."

"...그래, 젠장. 누군지는 몰라도 무당산에 저런 노괴가 숨이었을 줄이야. 아까부터 느껴지던 이상한 시선이 저 자였구나."

"시선이 느껴졌는데 저를 버리고 술 마시러 가신 겁니까?"

"그, 미안하다. 웬 소저가 추파를 던지는 바람에...크흠."

* * *

무당은 넓다.

그리고 역사도 상당히 오래된 곳이다.

시조 장삼봉으로부터 이어진 문파는 그간 무당에 발을 들인 사람의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며, 그중 무사들이 익힌 무공과 비급도 상당한 양이 될 것이다.

'태극비고.'

나는 무당에서 고서를 보관하는 장소가 어디인지 알고 있다. 무당파 내부로 숨어드는 것은 한 손으로 여인의 속옷을 벗기기보다 쉬웠고, 나는 금방 태극비고의 문 앞에 도착했다.

'역시 진을 쳐놨군.'

거대한 석벽으로 된 문의 중앙에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무당파답게 무당파의 내공심법 없이는 힘으로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그러니까 태극혜검.'

구구구구.

석벽이 좌우로 열렸다. 곡옥 모양으로 반씩 갈라지는 태극 너머에는 낡은 흙먼지 냄새가 폐부를 가득 찔렀다. 나는 머리에 쌓이는 먼지를 털어낸 다음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크흠."

비고 안의 공동에는 비교적 낡은 서책이 가지런히 정돈되어있었다. 서책에는 육양신공이니 칠성검진이니, 양의검이니 하는 온갖 무공들의 비법이 담겨있었다.

사실상 무당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곳.

하지만 단 하나의 무공만은 존재하지 않는 곳.

'태극혜검.'

사공희가 태극혜검을 얻은 곳은 무당파가 아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절세고수의 십중팔구가 그러하듯, 기연으로 어느 산 중턱의 골짜기에 숨겨진 동굴에서 태극혜검을 손에 넣었다.

'일단 뭐부터 챙겨갈까.'

심법은 태극신공 이외에는 필요 없고, 검법은 태극혜검과 오행검진으로 충분하다. 그렇다면 역시 진법이나 보법, 그리고 권법을 챙겨가면 될 것 같았다.

'역시 무당하면 태극권이지.'

태극검후는 태극권을 몰랐다. 정식 제자가 아니었던 그녀는 한정된 무공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태극권을 알고 있다. 태극권을 알고 있던 다른 무당파의 무인을 죽여 그 피를 흡수했다.

"느리구나, 권을 뻗는 것조차."

"큭...?!"

그래서 뒤에서 날아오는 정권을 태극권으로 받아낼 수 있었다. 일부러 태극권을 사용해 적의 공격을 흘렸다. 손속이 가벼워 일류고수급 태극권을 사용한 것만으로 충분히 기습을 흘려낼 수 있었다.

"......!"

기습을 건 상대는 화들짝 놀랐다. 나는 그를 속이기 위해 검을 뽑아, 태극혜검의 이기어검술로 검을 날렸다.

"태사부!"

노인은 냅다 바닥에 엎드렸다. 역시 머리 좋은 이들을 상대로 하는 사기는 편하다.

"현기, 만사용이 태사부님을 뵙습니다!!"

"그래.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구나."

처음 와본다. 나는 은은한 미소로 태극신공의 기를 뿌리며 몸을 돌렸다.

"산의 정기가 흐트러져 잠시 와봤더니 큰일이 일어났더구나. 네가 고생이 많다."

"크흑...태사부님...!!"

노인은 감격한 얼굴로 눈물까지 흘렸다. 나는 괜히 잘못 건드렸나 싶어 괜히 뜨끔했지만, 헛기침으로 남자-무당의 장문인에게 나를 소개했다.

"별호와 이름은 옛 저녁에 버렸다. 너는 본좌를 무붕(無朋)이라 불러라."

태극혜검을 쓰는 반로환동의 초고수를 앞에 두고, 어찌 무당 장문인이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으랴.

[작품후기]

없을 무

벗 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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