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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
“젠장, 젠장!”
현타도사 사정후는 숲을 헤치며 무당산 아래로 쏜살같이 달렸다. 그의 뒤를 따르는 무당파의 제자들은 긴가민가 하는 얼굴로 연신 뒤를 돌아봤다.
“장로님! 비급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리석은 놈! 비급이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더냐!!”
현타는 제자들에게 일갈하며 검을 뽑았다. 마침 개울가에는 얼굴을 물에 처박은 남자 하나가 있었다.
“이 놈!”
“히이익?!”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사정후는 남자의 찢어진 옷깃을 붙잡고 뒤로 던졌고, 무사들은 남자를 검으로 겨누며 제압했다.
“사, 살려주시오!”
남자의 얼굴에는 노란 종기가 맺혀있었다. 무사들은 종기 가득한 남자의 얼굴에 인상을 찡그렸고, 사정후는 제자로부터 밧줄을 건네받아 남자를 구속했다.
“노, 놓아라! 어찌 정파의 무인들이라는 자들이 죄 없는 사람을 이리 겁박하는 것이냐! 관, 관아에 신고하겠다!!”
“마교가 수작을 부려 천화에 걸린 이들을 사방으로 퍼뜨리려고 한다. 어찌할 테냐? 선량한 피해자가 될 테냐, 아니면 마교의 끄나풀이 될 테냐?”
현타의 협박아닌 협박에 남자는 순순히 고개를 떨궜다.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천화에 걸린 것, 그리고 천화에 걸리고도 도망치려고 했다는 것뿐.
“나, 나는 그냥 집에 연락하고 싶었을 뿐인데….”
“끌고 가라.”
사정후는 남자의 혈을 짚었다. 제자들은 남자를 이끌고 산에 올라갔고, 다른 제자들은 입을 가린 복면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곳을 살폈다.
“현타 장로.”
중후한 목소리와 함께 거구의 노인이 사정후의 앞에 섰다. 사정후는 그를 향해 깍듯한 예우를 표했다.
“최고 장로님.”
“제자들은 모두 마인 수색에 나서라. 나는 현타 장로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합류하겠다.”
최고 장로는 제자들을 모두 떠나보냈다. 둘만 남게 된 사정후는 고개를 푹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최고 장로님.”
“둘이 있을 때는 편히 얘기해도 된다, 현타야.”
“...현원 사형. 그.”
사정후는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꺼렸다. 눈앞의 사형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 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네가 기절한 인근의 전투 흔적을 살폈다. 상대의 검 또한 태극검이더구나.”
“...그냥 태극검이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내가 너와 따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원도사는 제자들의 보고가 적힌 서찰을 꺼내 사정후에게 건넸다.
기절했다가 깨어난 이후 산으로 돌아온 다른 장로들과 협력하여 마인과 천화 보균자들을 쫓느라 정신없던 천화로서는 처음 보는 글이었다.
“습격을 받은 마인들 대부분 태극검에 당했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나는 직접 몇 군데를 돌아보고 왔어. ...그건 태극검이 아니었다.”
“태극혜검.”
태극검이 무당파의 기초를 다지는 무공이라면, 태극혜검은 반선의 경지에 오르게 해준다는 전설적인 무공이었다.
현원과 현타는 태극혜검의 초식에 대해 약간은 알고 있기에, 검의 흔적이 단순한 태극검이 아님을 한눈에 파악했다.
“어느 분이시더냐?”
“처음 뵙는 분이었습니다. 소년의 외형을 하고 계셨고, 반로환동을 하신 것 같았습니다.”
“반로환동?”
“예. 그게 아니면 약관도 되지 않은 소년이 저희의 몇 배나 되는 중후한 내공을 가졌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영약의 힘이었지만, 사정후는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던 태극혜검의 주인을 떠올렸다. 자신의 검까지 빼앗아간 그는 천화에 걸린 ‘마인’들을 제압하고 등에 칼을 꽂는 것으로 쓰고 사라졌다.
“필히 그분께서 없었으면 큰 화를 입었을 것이야. 아아, 내 생각이 맞아서 다행이다. 대선배께서 도와주셨어.”
“그….”
말해야 하나. 미묘하게 신경 쓰이는 문제에 대해 보고하기가 두려웠다.
“무슨 일이냐? 기탄없이 말해라. 태극혜검을 익히고 돌아오신 분의 심기를 건드려선-”
“......그 분께서는 마공을 사용하셨습니다.”
“뭐?”
“마공이요. 월영신교의 경신법을 사용하더이다.”
그림자 속에 숨어 적을 암살하는 건 마교 중에도 암살집단 월영신교의 수법이었다. 과거 수십 년 전 스승을 살해했던 이의 마공을 본 사정후는 손이 벌벌 떨렸다.
“어찌 된 영문이겠소?”
“......자네가 무공을 잘못 봤을 리는 없으니, 태극혜검의 은자께서 어쩌다보니 마공을 익히신 것이지.”
“아니오. 나는 반대라고 생각하오.”
사정후는 직접 검을 마주했던 자로서 자신이 느낀 바를 분명히 언급했다.
“마인이, 태극혜검을 익힌 것이오. 사형.”
“허튼소리. 그럼 그 마인이 왜 다른 마인들을 태극혜검으로 기절시키고 다닌단 말인가??”
“그건….”
사정후는 대답하지 못했다. 최고 장로 현원의 말대로 마침 무당산에 돌아온 반로환동의 고수가 태극혜검을 익히고 마인들을 괴롭혔다는 것이 생각하기에는 편했다.
하지만 그 반대, 극강의 암살술을 사용하는 마인이 태극혜검을 익혔다면 자신은, 그리고 무당은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일단 산으로 올라가세. 가서 내공을 다스린 장문인께 의견을 구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사형, 그러면 지금은…?”
“죽은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야지.”
현원은 몸을 돌려 제자들과 합류했다. 주먹을 움켜쥔 사정후는 고개를 하늘로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
“정녕 그것이 진실이란 말인가…?”
무당산으로 돌아온 장로들이 무사들과 함께 개미 한 마리조차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는 동안, 그 누구도 현타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못했다.
* * *
무당산 인근 객잔.
무당산을 수월하게 빠져나와 장강으로 들어가는 포구 근처의 객잔에 들어온 우리는 어머니와 남매로 변장하여 방을 잡았다.
“딸아이와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저는 사월이라 하옵니다.”
비구니처럼 두건으로 머리를 가린 여인은 내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상처를 말끔히 치료한 사공희는 모친인 사월의 옆에 함께 엎드려있었다.
“구명의 은혜,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몸으로 갚을 것이다. 네 딸, 사공희가 이미 몸을 바치기로 정했다.”
나는 사월에게 사공희와 내가 한 거래를 명명백백 밝혔다. 사공희가 나와 거래를 통해 자신이 노예가 되기로 했고, 나는 반대급부로서 사월을 구했다.
“감사합니다. 딸아이의 천화까지 치료해주셔서.”
딸을 몸종으로 부리겠다고 선언했건만 사월의 목소리에는 동요가 없었다. 똑 부러지는 목소리에는 오히려 확신과 기회를 잡은 것에 대한 열망이 서려 있었다.
“대협, 잠시 딸아이와 이야기를 나눠도 좋습니까?”
“내가 잠시 자리를 피해달라는 말이렷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이 아이의 얼굴을 밖에 보이는 건 대협께도 큰 낭패가 생기지 않을까 저어되옵니다.”
“...그래. 잠시 밖에 다녀오기로 하지.”
나는 순순히 사월의 말을 따랐다. 내가 그녀의 털을 모조리 태워버린 것도 미안하기는 했지만, 딸에게 유언을 남기려는 어미의 비장한 각오를 옆에서 드르렁 코를 골며 초를 칠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대협께 폐는 아닐 것이 옵니다.”
“믿겠다.”
나는 창문을 통해 방을 빠져나왔다. 밖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밤이 되었고, 나는 객잔 위의 천장에 앉아 술병의 뚜껑을 열었다.
“오랜만에 답지 않게 착한 일을 했군.”
넘치는 나의 양기는 마인 하나 정화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무릇 남자가 여자의 앞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를 좋아하듯, 나는 사공희 모녀의 앞에서 내 무위를 보여주고자 산 곳곳을 뛰어다니며 마인들을 태우고 다녔다.
'딴 놈은 몰라도 대공자 그 새끼 짓이라면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자세한 중간과정은 모르지만 일반인이든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든 천화에 중독시켜 무당산 인근을 쑥대밭으로 만들려는 수작임은 알 수 있었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대공자에게 쌓인 은원이 너무 깊었다.
'그나저나 무슨 말을 하려고 나를 쫓아낸 거지?'
나는 모녀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딸을 취하려는 음적에게 자리까지 피하게 만들려는 지 호기심이 들었다.
- 희야. 네 아버지를 처음 만난 건 내가 호북에 임무로 왔을 때의 얘기란다....
"쯧. 괜히 마음 싱숭생숭해지게."
신파극은 사양이다. 나는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객잔 근처의 골목길로 몸을 날렸다.
"어머, 여긴 무슨 일이니? 꽃 사러 왔어?"
골목 안에는 분내를 풀풀 날리는 여인이 나를 향해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웃었다. 나를 미아처럼 대하는 무례한 태도에 여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얼마냐?"
"뭐?"
"너 얼마냐고."
"...풉. 상당히 건방지네. 한 시진에 은자 하나. 그거 아니면 나 못 만진...."
덥석. 나는 여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은자도 내지 않고 자신을 만지는 것에 여인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나는 내 품에서 은자를 두 개 꺼내 그녀의 가슴 속에 찔러넣었다.
"...어머, 얘. 농담이었어. 아무리 내가 그래도 어린애 돈을 받기에는...."
"잔말이 길다."
나는 여인의 뒤에서 옆이 트인 치마를 뒤에서 들추며 바지를 벗었다.
"한 시진 동안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다른 여자 찾으러 갈 거거든."
모녀의 신파극이 일각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테니.
- ...네 아버지는....
'멀리서도 다 들리는 구만.'
어차피 들리는 대화, 옆에서 가만히 듣기보다는 여자를 안으면서 듣는 게 더 낫지 않은가. 나는 모녀의 대화를 엿들으며 기녀를 골목 한가운데에서 취했다.
"어머, 너 지금 무슨, 어고곡?!"
"크으, 떡감 좋고."
* * *
"...그런 사정이 있으셨군요."
사공희는 글썽이는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마교 내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던 여인이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와 사랑의 도주극을 벌인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장편 대하소설이었다.
"그런데 어머니, 제게 이런 얘기를 해주시는 건...."
"그래. 네 직감대로, 나는 이제 살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이다. 쿨럭!"
사월은 튀어나오는 기침을 손으로 막았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고, 사공희는 어쩔 줄 몰라하며 소매로 그녀의 피를 닦았다.
"어머니!"
"...후후, 폭혈에 잠식된 데다가 천화까지 걸렸는데도 외면하지 않는구나. 희아야. 너는 이렇게 착한 아이다. 어려서부터 내가 네 얼굴을 숨겼는데도 불구하고 군말 없이 잘 따라준 착한 아이지."
"그렇게 곧 돌아가실 것처럼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놓거라."
사월은 사공희의 손을 뿌리쳤다. 마기와 천화는 사라졌지만, 그녀는 딸에게 자신의 피를 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후우, 그래. 숱한 남자들이 네 미모에 홀려 이성을 잃었을 때, 나는 언제나 너를 지켜줬다. 네 아비가 감옥에서 금수만도 못한 짓을 저지를 뻔했을 때도, 나는 너를 데리고 도망쳤다."
"흑, 흐윽...."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로구나. 나는 이제 더는 너를 지켜줄 수 없게 되었어. 하지만 네가 괜찮다면, 나는 너 자신을 지킬 힘을 가질 수 있게 해줄 수는 있다."
피 묻지 않은 손으로 사공희의 앞머리를 쓸어올린 사월은 자신을 쏙 빼닮은 딸의 얼굴에 활짝 웃었다.
"어차피 범해질지도 모르는 운명이라면, 단 한 사람 말고는 너를 범할 수 없게 차라리 천하제일인의 여인이 되어라. 그의 옆에서 무공을 익혀, 그 누구도 너를 범접할 수 없는 여인이 되어라!"
"네?"
"세상 모든 남자는 짐승들이다! 짐승의 세계에서 사람의 도리로 살아가기에는 너는 너무 여리고 약하단다. 간사한 땅뱀들에 물려 죽느니, 차라리 용의 위에 올라타거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왜 그러느냐! 나는 내 딸이 이런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고 생각한, 쿨럭!"
사월은 검은 피를 왈칵 쏟아냈다. 사공희는 전신에 피가 튀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고 사월을 돌봤다.
"의원, 의원을 불러올게요!"
"아니다....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다. 이미 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이렇게나마 네게 말을 전달하고 갈 수 있어서."
사월은 활짝 웃으며 사공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어미의 죽기 전 마지막 부탁이다. ...우리 희아는 착하니까 들어줄 수 있지?"
"아...."
사공희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사월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꺼억."
한 시진 뒤.
나는 내가 뿌린 씨와 은자더미에 파묻혀 기절한 기녀를 뒤로한 채, 몸에 내기를 둘러 분내를 지운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에는 썩어가는 듯한 혈향이 짙었고, 한가운데에 사월이 무릎을 꿇고 내게 엎드려 절했다.
"딸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대협. 이 못난 것의 마지막 청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무엇이냐?"
"대협 이외의 그 어떤 색마도 제 딸에게 손을 대지 못하도록, 강하게 만들어주시옵소서."
"...그건 곤란한데."
내 말에 사월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침대로 다가가 침대 위에 다소곳이 앉아 울고 있는 사공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잠재웠다.
"이 아이가 내 아들을 낳으면, 아들이 어미조차 만지지 못할 패륜을 저지르게 하라는 말이더냐?"
"......하, 하하."
사월은 헛웃음을 지었다.
"대협께서는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죽어가는 이에게 그런 농을 하십니까?"
"아무렴."
사공희를 침대에 눕힌 나는 사월을 향해 다가가 머리에 손을 올렸다.
"안타깝군. 며칠만 더 빨리 왔으면 모녀를 전부 취했을 것을."
"......참으로 당신은. 하아. 하지만 이 또한 운명이겠지요."
"그래. 내 죽기 전에 하나 약속하마."
나는 사월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쪼그려 앉아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네 딸, 내가 반드시 검후 소리 듣게 만들어주마."
사월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작품후기]
유언을 안 지키면 패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