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병
정파.
마교.
혈교.
정,마,사에 한 번씩 몸을 담은 나는 혈교의 혈강시 시절을 가장 길게 보냈지만, 삶에 있어서 나의 가치관을 만들어 준 숱한 경험을 했던 건 당연히 정파 시절의 하급 무사였다.
혈통도 비천하고 무공의 수위도 낮아 허드렛일이나 주로 하던 꼽추.
마교의 졸개로 추마귀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기도 전에 이미 나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추한 존재로 불렸으나, 정파 시절의 나는 분명 정의감 넘치고 협과 의를 숭상하는 존재였다.
'오너라, 과거의 나!'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내가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파 시절의 내가 주격이 되고, 마교의 추마귀와 혈교 혈강시가 뒤에서 보조를 맞추며 도와야 한다.
'사공희는 제법 똑똑한 여자지.'
또한 내 뒤에는 사공희가 있다. 미래의 태극검후는 어지간한 오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머릿속으로 정리한 한 가지 가능성을 사공희에게 넌지시 물었다.
"마교의 수작이 아닐까 싶은데."
"마...교...?"
사공희의 목소리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빛이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너도?'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인위적인 전염병을 퍼뜨리는 것. 만약 천화가 일부러 퍼진 게 아니라면 사람이 퍼뜨린 것이지."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의 엉덩이가 왜 두 개로 나뉘어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사공희의 둔부를 좌우로 당겼다. 사공희는 고개를 내 어깨에 묻으며 이를 달달 떨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필히 두 개의 편으로 갈라지기 마련이다. 남녀가 그렇고, 노소가 그렇고, 정마가 그렇지. 마교 또한 마찬가지다. 마교는 현재 둘로 나뉘어 있다. 네 궁둥이처럼."
"비유를, 왜 하필...."
"하나로 합쳐질 수는 없으니, 하나로 만들려면 한쪽을 잘라내는 방법밖에는 없거든. 권력다툼은 으레 있는 일이 아니더냐. 흔한 일이지."
마교의 차기 교주 자리를 두고 첫째와 둘째가 싸운다.
첫째는 대공자고, 둘째는 소공녀로, 같은 배에서 태어난 남매는 서로를 죽여 자신이 마교 교주-천마의 자리에 앉기 위해 교주의 총애를 받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마교의 대공자라는 놈이 말이야, 아주 손속이 잔혹하고 더러운 놈으로 유명하지. 천마의 힘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도 마다하지 않을 놈이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아니까 아는 거지. 아무튼 놈의 수작이라면 이건 인위적인 방법이다. 중원에 천화를 일부러 퍼뜨리는 놈이 있다면 그놈 뿐이거든."
후에 마교 대공자보다 더한 여자가 하나 나타나지만 그건 나중의 일. 지금은 마교 대공자의 짓인지 확인하기 위해 사공희의 모친을 쫓아야 했다.
"어머니...."
"많이도 내려갔군."
산 아래로 향한 마인의 흔적은 참혹하고 처참했다. 비탈길은 거대한 낙석이 굴러가는 것 마냥 망가져 있었고, 나무나 숲에는 천화로 인한 피고름이 튀어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무당산 전체에 천화의 기운이 남는다. 어쩌면 무당은 무당산에서 문파의 대들보를 뽑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될 수 있다.
"혹시 의심 가는 것 있느냐? 사소한 거라도 좋다."
"...무사들이 중얼거리며 말하길, 마교의 마인이 장문인과 한 번 비무를 펼친 이후부터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했어요."
"전혀 사소한 게 아니잖아."
"어, 어떻게 알아요. 인과관계가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데."
"보통 그런 일은 무림에 닥칠 재앙의 전조가 되지."
사소한 복수로부터 시작된 싸움이 때로는 문파의 멸문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게 무림이다. 대공자의 성정과 수법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마인이 천화에 걸렸었다거나. 혹은 천화에 걸린 이의 사체를 무당산에 잠입하여 강물에 던져 오염시켰다거나. 또는 일반인인 척 무당파에 기부하러 왔다가 많은 사람에게 병을 옮겼거나."
당장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방법만 해도 세 가지를 훌쩍 넘었다. 사공희는 벌벌 떨기만 할 뿐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의 손을 푸근하고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것만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감옥이라는 건 필히 무당에서 잘못을 저지르는 이를 가두는 곳일 터. 환자들이 어떻게 감옥을 빠져나온 거지?"
"...어머니께서 주먹을 휘두르셨어요."
"과연. 마공을 익힌 이라면 그럴 수 있지. 무엇이 그녀를 폭주하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공희는 모친이 마인인 것을 몰랐다고 했다.
등에 닿은 가슴으로 전해지는 심장박동은 거짓이 없었다. 아마도 흔히들 있는 '남자에게 반해서 마교에서 도망치는' 꿈과 사랑 가득한 이야기의 주인공인 듯했다.
"이곳에 온 이유는 뭐지?"
"...아버지께서 승진을 앞두고 계셨어요. 더 바빠질 테니, 무당산의 영험한 기운을 받을 겸 가족끼리 화목하게 여행을 가자고 하셨...흐끅."
"비극이로다."
마침 온 곳에 천화가 터졌고, 마침 감옥에 갇힌 나머지 사공희 일가는 천화에 걸렸다. 피고름 인피면구로 남자의 음심을 불러일으키는 미모를 숨기고 있던 사공희는 진짜로 천화에 걸렸다.
그게 어쩌면 미래의 태극검후가 겪었던 과거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럼 더 큰 비극이 되기 전에 조금 더 달리도록 할까. 입 꾹 다물어라."
나는 내리막길에서 두 발을 붙여 땅을 밟았다. 땅이 움푹 파이며 나는 나무 위까지 높이 뛰어올랐고, 발아래에 내기를 둘러 앞으로 달렸다.
"초, 으븝?!"
무언가 말하려고 했던 사공희는 전면의 칼바람에 바로 입을 막아버렸다. 안 그래도 떨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꽉 잡고 있었지만, 초상비로 나무 위를 달리고 있으니 더욱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슬슬 보이는군."
나는 아름드리나무의 굵은 나뭇가지를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 사람 한 명을 안고 있음에도 내공을 분출하며 달린 덕분에 나는 마인이 가는 길을 앞지를 수 있었다. 마인이 도망친 뒤를 점할 수 있었다.
"사공희여, 이런 말을 알고 있는가?"
도리도리. 사공희는 눈을 질끈 감느라 앞에 누가 있는지 몰랐다.
나는 다리를 앞으로 뻗으며, 아직도 나를 눈치채지 못한 마인을 향해 다리를 뻗었다. 앞으로 뻗은 다리에는 나의 양기가 불꽃이 되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생사결은 선수필승!"
퍼---억.
수 십 장을 뛰어넘은 나의 발길질이 마인의 등판을 때렸다.
"비천염화패륜각!"
캬아아아악!!
내가 등에 업고 있는, 사공희의 어머니를.
* * *
"더는 기다릴 수 없네."
무당파 장로들이 관병과 옥신각신하는 가운데, 장로 중 머리가 회색으로 물든 거구의 노인이 관병들의 앞에 나서며 장로들을 제지했다.
"나는 입산하겠네."
"최, 최고 장로님?!"
"곤란합니다! 아무리 최고 장로님이셔도, 법과 질서를 어기시면...!"
"이보시게."
최고 장로가 중후한 내공을 뿜어내자, 관병들은 맹수 앞의 토끼처럼 바짝 굳어버렸다.
"통행을 막은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이 올라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주목적인가, 아니면 무당산 위의 이들이 내려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 주목적인가?"
"그거야 둘 다...."
"후자의 목적이 더 강합니다, 최고 장로님."
대로의 사람들이 좌우로 물러나며, 관복을 차려입은 병약한 인상의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최고 장로 또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랫사람을 보내면 될 것을 어찌."
"호북성의 성주가 병이 옮을까 무서워서 오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더 불안해지겠지요. 그런데 최고 장로님, 진심으로 입산하실 생각이십니까?"
"물론."
무림인이, 무당의 최고 장로가 무당산으로 올라가겠다는데 물리적으로 막을 방도는 없었다.
잘 훈련된 관병들은 삼류무사들보다 조금 더 강한 수준일 뿐, 무당파의 장로들이 입산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건 법과 질서라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무불가침.
관과 무림은 서로의 영역이 확고하지만, 전염병이라는 것 앞에서는 서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무당은 순순히 관의 일에 협조하고 있었지만, 상황이 변했다.
"산에서 마기가 느껴지네. 현타의 기가 끊어졌어. 사방에서 마기가 준동한단 말일세."
"마인들의 수작이라는 말씀입니까?"
"무당의 비급을 노리는 건지, 아니면 무당의 멸문을 바라는 건지는 우리도 몰라.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마기를 가진 마인 들이 하나둘 산에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야."
최고 장로의 은근한 목소리에 호북성주는 배알이 뒤틀렸다.
무림인들은 정사마를 막론하고 성의 치안을 지키는 입장에서 똑같이 귀찮은 것들이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살겁을 일으키는데 거리낌이 없는 마교의 무리들은 귀찮은 걸 넘어 당장 형장의 이슬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자들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마인을 제압할 황궁의 무인들은 오려면 한참 남았다. 진짜로 무당산에서 마인 들이 내려오고 있다면,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건 오직 무당의 무사들뿐이었다.
"......좋습니다. 다만, 입산하신 이후에는 천화가 진정될 때까지 내려오실 수 없습니다."
"알겠네. 마인 사태를 진정하고, 신의께서 오실 때까지 봉문하도록 하지."
서로서로 한 발씩 양보한 결과, 결론은 빠르게 정해졌다. 관병들은 무당파의 무사들에게 길을 열었고, 다시는 호북성에 발을 들이지 않을 기세로 도사들은 내공을 일으켰다.
"가자!"
"""예!"""
호북성 아래에 남아있던 무당의 무사들이 일제히 산 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흐흠, 이대로 있으면 곤란한데."
객잔에서 여인과 술잔을 기울이던 청년, 마교의 대공자는 산으로 올라가는 무당의 도사들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맞은 편의 여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휘어진 입꼬리를 술잔으로 감췄다.
"뭐가 그렇게 웃기는가?"
"후후, 말씀드렸잖아요. 정파의 무인들은 교인의 상식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고."
대공자는 젓가락으로 만두를 푹푹 쑤셨다.
젓가락으로 피를 찢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육즙이 피처럼 옆으로 튀었고, 그게 마치 사람을 칼로 찌르는 듯한 모양새라 주변인들을 소름 끼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행이라면 둘을 신경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전염병조차도 저들의 정의병을 막을 수는 없어요.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미쳐서 상식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하여튼 의와 협을 따르는 무리란."
계획이 다소 어긋났음에도 대공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번 작전을 위해 소모한 것이라고는 서찰을 쓰기 위한 종이 몇 장, 그리고 먹물 조금밖에 없었다.
"붓질 한 두 번으로 무당을 봉문시켰다. 교주께서 뭐라고 하실까?"
"분명 이번에 크게 칭찬하실 겁니다. 다른 곳도 아닌 구파일방 중 무당을 봉문시켰으니까요."
"그래. 더군다나 그냥 봉문도 아니지. 천화에 걸리게 되면 무인도 온전치 못해. 흐흐."
"어머, 그러면 저는 여기서 도망쳐야겠습니다. 괜히 여기에 있다가는 천화에 옮는 거 아니에요?"
"걱정마라. 우리 교에 염마께서 계시지 않느냐. 하룻밤 기를 거 하게 받으면 아무 문제 없다."
"염마요? 으...."
여인은 질색하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싫어요. 여자로서 상당히 불쾌한 사람이에요. 애초에 염마랑 천화가 무슨 관계가 있어요?"
"꽃은 화기에 타들어 가는 법. 천화도 마찬가지지."
"어머, 그 말은...?"
"극도의 양기를 머금은 태양지체라면 천화도 태울 수 있다고 하더군. 근데 뭐 그게 일어날 일인가?"
대공자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우리 상식의 선에서 이야기를 하자고. 천화를 극복하는 자라니, 그런 자가 있을 수 있나?"
* * *
"우하하! 마인, 물리쳤다!"
"꺄아아아악!!"
사공희는 비명을 지르며 나를 이마로 들이받았다.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불타고 있는 모습을 본 그녀는 내가 건 점혈조차 비명과 함께 풀어낼 정도로 내기를 터뜨렸다.
"크흑, 이거 완전-"
"미친놈아! 이 쓰레기! 개 같은 새끼!"
"잠깐, 구해달라며!!"
나는 사공희의 목을 잡고 위로 잡아 던졌다. 그리고 붕 뜬 그녀를 바닥에 대자로 패대기 쳐 혈을 다시 눌렀다.
"커헉!"
강제로 낙법까지 취하게 만들어 피는 토하지 않았지만, 땅에 자빠지는 충격 정도는 받았으리라. 나는 눈이 빙빙 도는 사공희를 일으켜 비천염마패륜각의 불길에 활활 타오르는 마인을 가리켰다.
"너, 내게 고마워해야할 것이다."
"남의 어머니를 불태워놓고...어...?"
화륵, 화르륵.
불꽃이 타들어 간 자리에는 말끔한 피부만 남아있었다. 몸에 한가득 터지기 시작하던 천화의 흔적도 피부가 붉어진 정도로 확실히 가라앉았다.
"마기 다루는 것 정도야 내게 아무것도 아니지."
들끓는 마기와 천화의 병세가 있다면,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누르고 태워버리면 그만. 비록 그 과정에서 마기가 쌓인 내공이 모두 불타버렸지만, 나는 사공희의 부탁대로 그녀의 모친을 구했다.
"......희아야?"
"어, 어머니?!"
사공희는 눈물로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불과 일각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사를 손으로 찢어 죽였던 여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눈빛이었다.
"나는...어떻게...?"
"폭혈로 들끓는 내기를 전부 태워버리고, 하는 김에 천화의 원인도 함께 태워버렸소."
"아...."
"그런데 미안하오. 내가 좀 과하게 태워버려서."
"네?"
나는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칼과 눈썹은 구하지 못하여 미안하오."
아니, 그 뭐냐.
머리칼과 눈썹에도 천화의 피고름이 튀어 어쩔 수 없었다.
[작품후기]
패륜!
수정했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