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북으로
현타도사, 무당파의 장로인 사정후는 청년을 눈앞에 두고 직감했다.
강하다.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는 건 만나자마자 눈치챘다.
청년의 몸 안에서 주체할 수 없는 극양지기는 무당산 전체를 태워버릴 것처럼 뜨거웠고, 마침 산에서 내려가던 현타는 청년의 압도적인 공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극양지기를 가진 마공의 보유자?'
청년은 분명 뭔가 이상했다.
엄청난 양기를 가지고 검신에 불꽃을 뿜어내는 사파의 검객 <엽검>을 떠올리게 했으나, 그가 사용하는 무공은 양기를 숨기고 어둠속에 동화되는 마공이었다.
'저게 마공이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검법에서 매화검이 피어오른다면 백중백 화산파의 매화검수다. 하지만 청년의 무공은 그와 결이 같았고, 사정후는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저건 무조건 마공이야! 마공이 아니면 태극혜검이란 말이냐!'
청년의 무공은 마공이 틀림없었고, 마교의 잔당인지 아니면 기연으로 마공을 이어받은 자인지는 조금 불분명했다.
검을 부딪쳐보면 깨닫게 될 일.
사정후는 태극검으로 청년을 제압하려고 했고, 청년의 무공은 자신의 본실력을 명백히 숨기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마공 사용자라고 해도 초식과 보법을 보고 대략 상대의 문파를 가늠할 수 있건만, 청년은 삼류무사도 사용하지 않을 삼재검법으로 자신을 공격했다.
무당파의 차기 장문인 중 하나로 꼽히는 장로를 삼재검법으로 압박하고, 능욕했다.
'무슨 삼재검법이 이래?!'
십자로 베고 찌르기.
무한히 반복되는 공격의 연속은 정직하고 곧고 빨랐다. 하루에 수만 번 연습한 동작처럼 정교한 것도 소름이 돋는데, 그 속도가 여느 문파의 쾌검 못지않은 수준이라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막기에도 급급하다. 자신의 무공이 태극검이라 적의 공격을 흘려내리는데 강점이 있었기에 막을 수 있었고, 자신의 경지가 상승무공을 익히고 있는 고수의 반열에 있기에 막을 수 있었다.
반대로 얘기하면 절정의 고수조차 막기 힘든 삼재검법이라는 것. 사정후는 피가 들끓는 것처럼 더욱 빨라지는 공격에 입꼬리를 비틀었다.
'분명 뭔가 수작을 부린다!'
마공을 사용하는 자들의 특징 하나.
결코 정직한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
숱한 마인들과 싸워본 경험이 가득한 사정후는 자세가 서서히 무너지면서도 틈을 노리고 있었다. 상대가 정직하게 계속 밀어붙인다면 언젠가 방어가 무너지겠지만, 허초를 섞으며 십자의 틀을 벗어나는 순간만을 노렸다.
아니나 다를까.
'하여튼 마교 새끼들이란!'
삼재검법은 눈속임이었다는 듯 시야가 닿지 않는 곳으로 검이 파고들었다.
사정후는 전력을 다해 검날을 비스듬히 세워 공격을 흘리며 역공을 펼쳤다. 강물이 굽이치며 파고드는 듯한 검날은 아쉽게도 청년의 얼굴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쳤다.
"풋."
회심의 공격을 반사신경만으로 피해낸 청년은 자신을 향해 비웃었다. 반격조차 예상한 듯한 청년은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몰라도 사정후의 정신을 빼놓고자 열심히 입을 놀렸다.
"천외천을 보여주마."
그리고 취한 청년의 자세는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아는 무공이었다.
태극검.
어설프게 흉내 내는 태극검이 아니라, 자신이 한 수 배우고 싶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자세였다. 앞으로 뻗은 검과 대칭을 이루듯 뒤로 펼친 팔이 그리는 선에는 부드럽고 중후한 내력이 물씬 풍겼다.
'여자?'
목소리는 분명 청년의 것이건만, 기수식을 취한 자세는 마치 여인의 모습이 얼핏 스쳤다. 터져 나오지 못하여 안달이 난 극양지기가 음양의 조화를 이루듯 피어올랐다.
'아니다. 분명 남자다.'
목에 돋아난 울대부터 시작하여 말본새까지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무공은 여인이 극성까지 쌓아 올린 태극검을 청년의 몸에서 구현하는 듯한 기색에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다.
'이 새끼 도대체 뭐지?'
나이, 정체, 성별조차도 불분명한 존재가 무당산의 한가운데에서 장문인에 준하는 수준의 태극검을 펼친다. 사정후는 갑자기 어떤 가능성이 하나 떠올랐다.
'태사부?'
오래전에 무당을 떠난 몇 세대 전의 은거기인. 잡기로 익힌 마공을 쓴 걸 자신이 오해했다. 그게 아니라면 마교의 인물이 저런 정순한 태극검을 사용할 리가 없다.
'삼재검법은 나를 순수하게 골리기 위한 수작이었던가?'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다소 살기가 짙었다. 사정후는 정신을 가다듬고 고민을 끝마쳤다.
'검을 나눠보면 알게 될 일.'
죽더라도 강자에게. 사정후는 짧게 포권을 한 뒤, 앞으로 크게 뛰어올라 검을 내리그었다.
카앙---!!
수직으로 그어진 검은 청년이 비스듬히 세운 검에 미끄러지며 튕겨 나갔다. 사정후는 검을 회수하고 곧장 앞으로 검을 찔러넣었다.
캉, 캉, 카앙!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을 거의 동시에 찌르고 들어간 공격은 청년의 작은 몸짓에 물 흐르듯 스쳐 지나갔다. 청년은 고개를 살짝 돌려 공격을 피하고, 검신을 세워 검끝을 튕겨냈고, 몸을 비스듬히 돌리며 공격을 모두 피했다.
"아래가 비었구나."
청년은 마치 지도를 하는 듯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검에서 한 손을 떨어뜨렸다. 검보다는 붓을 더 많이 잡았을 것 같은 여린 손은 사정후의 복부를 벌처럼 찔렀다.
"컥!"
복장이 뒤집어진다. 손등을 가볍게 툭 쳤을 뿐인데 속이 진탕이 되는 것 같았다. 사정후는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을 간신히 삼켜 뒤로 물러났다.
"커흑, 허억!"
제대로 맞았다. 그리고 주먹에서 명백히 자신을 봐준 손속이 느껴졌다. 이것보다 더 강한 공격을 할 수 있었지만, 죽일 의도가 없다는 게 완연히 느껴지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순순히 항복할 수는 없는 법. 상대는 아직 제대로 초식 하나 펼치지 않았다.
"하압!"
호흡을 짧게 끊어 기를 몸에 두른다. 고통을 잠시 억눌러 검을 붙잡아 유연히 휘두른다. 폭우에 불어나 거칠게 흘러내려 가는 강물의 기세를 담긴 검은 사방에서 청년을 베고 찔렀다.
"과연 현타. 가장 무당답지 않은 무당의 도사."
청년은 사정후를 연신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말투로 검을 흘렸다. 청년의 검은 사정후가 휘두르는 검을 더욱 유연하게 흘려냈고, 사정후의 검은 사방으로 튀며 범람할 것처럼 위태로워졌다.
"검에 자연을 담으려고 하니 넘치지."
"놈! 나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냐!"
"미안, 이걸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청년은 킬킬 웃으며 검을 전부 받아냈다. 어깨를 향해 찌르는 검도, 정해진 초식을 벗어나 청년을 베겠다는 일념으로 휘두른 일격도, 공격이 맞지 않는 것에 대한 사정후의 분노도 모두 받아내고 흘려냈다.
"젠장, 젠장!"
공격 한 번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사정후의 공격은 일검조차 청년에게 닿지 않았다. 자신은 삼재검법의 공격에 여파만으로 옷깃이 찢어졌건만, 청년은 자신이 평생을 쌓아온 태극검을 물 흐르듯 받아내고 있었다.
"이럴 순 없다! 이럴 수는!"
"어쩌라고."
"이 놈!"
사정후는 바닥을 향해 검을 크게 내리그었다. 반월을 그리는 검의 궤적에 청년은 눈에 이채를 띄며 뒤로 크게 물러났다. 검에서 흘러나간 회색 검기는 청년을 당장이라도 갈라버릴 것만 같았다.
"약해."
청년은 검을 크게 휘두르며 원을 그렸다. 검끝에서 피어오른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고, 청년이 세로로 세운 검은 참격과 비스듬히 맞부딪혔다.
"맨날 채소만 먹어대니 근육에 힘이 없지."
청년은 아래로 내린 검끝 뒤에 손을 받치며, 몸을 한 발짝 뒤로 당겨 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 붉은 양기는 사정후의 검기를 집어삼키며 하늘로 튕겨 올렸다.
파스스.
막대한 양기에 불타오르는 것 마냥, 검기는 바스러졌다. 강철조차 순식간에 잘라내던 회심의 참격마저 흘려낸 청년은 검풍으로 흩날린 앞머리를 단정히 정돈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검에 기운이 모자라. 고기도 좀 뜯고 살아야지, 안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사나?"
청년은 말을 마치자마자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한걸음에 거리를 좁힌 사정후는 청년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근력이 부족해, 근력이."
"이...!"
사정후는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으나, 청년은 나지막한 미소와 함께 검을 위로 튕겨 올렸다.
카---앙!!
사정후와 청년의 검은 하늘 높이 튕겨 올라갔고, 사정후는 청년이 자신의 명치를 향해 찌른 주먹에 모든 움직임을 멈춰야만 했다.
"끝났다."
"...아직 안 끝났소. 내게는 아직 태극권이 남아있소."
"그래? 근데 이거 어쩐다."
청년은 하늘을 가리켰다. 사정후는 적을 눈앞에 두고 위를 올려다봐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하늘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오오오---
그곳에는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검 두 자루가 자신을 향해 검끝을 겨누고 있었다. 청년의 낡은 철검과 더불어, 자신의 애병까지.
"어검술...?! 설마 태극혜검...?!"
"한숨 자라."
아래로 빛처럼 날아든 두 검은 사정후의 머리를 스쳤고, 사정후는 공격을 피할 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했다. 청년이 어검술로 날린 검은 사정후의 머리를 스치듯 날아가 뒤통수를 검면으로 때렸다.
빠악, 빠아악.
"어떻게...."
의문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의문만 쌓였을 뿐인데, 사정후는 청년의 공격에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뒤통수를 얻어맞으며 앞으로 고꾸라지려던 순간, 청년은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어깨 너머로 넘겼다.
"어딜 노인네가 나한테 안기려고 해?"
퍼---억.
검보다도 매서운 일장에 명치를 얻어맞은 사정후는 의식을 잃었다.
* * *
"좀 더 그럴 듯하게 보내줄 걸 그랬나? 천외천은 커녕 그냥 실력차만 보여줬군. 씁."
현타 도사는 대자로 쓰러졌다. 머리 뒤에 커다란 혹이 두 개 생긴 그는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했고, 나는 품에서 흰 손수건을 꺼내 그의 얼굴 위에 덮었다.
"보기 추하군."
죽은 건 아니다. 단지 죽을 만큼 아프게 때렸을 뿐이다. 반나절 정도 기절해있으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날 수 있다.
그저 머리 뒤를 얻어맞고 명치까지 얻어맞으며 혀를 내민 채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한 모습이 차마 보기 흉할 뿐. 내가 손으로 건드리기 싫으니, 손수건으로 가려주는 방법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이래놓으니까 꼭 죽은 것 같기도 하네.'
손이라도 가슴에 고이 모아둘까 싶었지만, 상대는 남자다. 만약 얼굴 좀 반반한 여고수라면 손을 모으기는커녕 몸에다 대고 양기를 풀어낼까 싶었으나, 상대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될 남자다.
'생각보다 잘 싸워서 깜짝 놀랐네.'
예전부터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걸까? 현타는 내 예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괜히 정마대전 당시에 장문인으로 나선 게 아니었고, 당시의 실력과 비교하면 지금은 애송이에 불과했지만 내 예상보다는 훨씬 강했다.
'그런데 왜 이놈이 마교의 무공을 안 거지?'
싸우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일부러 묻지는 않았다. 물을 필요도 딱히 없기도 했고, 궁금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영계검후만 취하고 가면 되는 걸 굳이 깨워서 물어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나는 꽃을 구경하고 한 입 취하고 가면 떠날 몸이다.
내가 무당에 깊은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현타도사는 나의 수많은 적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마교 졸개 시절의 나를 상대로 한 번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
- 마에 빠진 불쌍한 자들이여...! 가라!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라!
무당파를 습격했을 때 그는 내가 몸을 담았던 자살특공대를 살려줬다.
설마 그때 살아남은 마교 졸개가 혈강시가 되어 엄청난 혈겁을 일으킬 거라고는 그는 모를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는 끝까지 내가 자신이 살려준 졸개라는 걸 몰랐다.
"어쨌든 한 번 살려줬으니 살려준다."
살려준 건 한 번뿐. 다음에도 귀찮게 굴면 현타도사는 고인이 될 것이다. 미리 경고도 해뒀으니 나는 원래 목적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에 있지?'
찾는 것은 진한 음의 기운. 나는 개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산을 타고 올랐다.
"씁, 하아."
여인의 향기가 느껴진다. 수풀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나는 단걸음에 나무를 밟고 뛰어올라 목적지에 이르렀다.
"도망치지 못한다, 이 년!"
"가만히 있어! 순순히 무릎을 꿇어!"
무복을 입은 무당의 제자 둘은 검이 아닌 밧줄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흑발의 여인이 뒷걸음질 치며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
기는 맞다. 기는 맞는데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르다.
'피부가 저렇게 깨끗할 리가 없는데.'
손가락 사이로 비친 여인의 얼굴은 백옥처럼 곱고 말끔했다. 어린 시절부터 미모로 이름을 날렸던 걸까? 아니면 자라면서 과하게 피부가 뒤집어진 걸까.
'어느 쪽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내가 그녀를 찾았다는 것. 나는 나뭇가지를 밟고 뛰어올라 두 개의 검을 무사들에게 날렸다.
빠악! 퍽!
태극혜검의 어검술로 검의 손잡이 끝을 정수리에 정확히 찍은 나는 기절한 무사들에게서 밧줄을 빼앗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나의 등장에 여인은 흠칫 놀라며 비틀거렸다.
"누, 누구?!"
"사공희?"
"......!!"
여인은 내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에 사색이 되었다. 나는 밧줄을 팡팡 당기며 미래의 태극검후, 사공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나와 잠깐 이야기를-"
"꺄아아악! 음적(淫賊)?!"
사공희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녀의 눈빛과 행동에서 강간마로부터 도망치려는 듯한 기색이 엿보여 나는 소름이 돋았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역시 미래의 검후. 나는 밧줄을 꽉 움켜쥐고 사공희의 뒤를 쫓았다.
[작품후기]
색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