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7화 (17/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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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북으로

자연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이 넓은 중원의 땅 모두가 천자의 것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천자도 죽으면 자연에 한 줌 흙이 되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자연은 그저 인간이 잠시 들렀다 가는 곳.

그러므로 강, 바다, 산 그 어느 것 하나 특정 누군가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지은 집에 대해서는 집문서로 권리를 요구할 수 있지만, 대지에 대해서는 인간들 사이에 ‘이곳은 내 땅이오.’하고 서로 정한 약속일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무당산에 오르는 것도 아무 문제 없음.’

전염병이 무당산에 퍼져 산의 출입이 봉쇄되었다고 한들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다.

산은 산일 뿐이고, 그 누구 하나 나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내가 산에 들어갔다가 나오는지도 모를 것이다.

'역병조차 나를 막을 수는 없다.'

내가 천화에 당할 사람도 아니고, 복면으로 한 번 공기를 거르고 양기를 일으켜 균을 사멸시킨 이후에 숨을 마시니까 병에 걸릴 일은 없다.

‘문제는 지나가는 도사 놈들인데.’

"......형, 궁금한 게 있소."

아무리 나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한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멀리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나는 나무 그늘에 숨었다. 마침 주변 경계를 나온듯한 무당파의 무사들이 횃불을 들고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미치겠군. 언제 봉쇄를 푼단 말이오?”

“천화에 걸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봉쇄가 풀리면 안 되지. 괜히 우리가 내려갔다가 천화가 퍼질 수 있지 않은가.”

“사형, 그러다가 우리가 걸리면 어쩌지요?”

“장로님들을 믿어보자. 필히 해결책을 찾아주실 거다. ...누구냐?!”

무사들은 검을 뽑아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도 갑자기 무사들에게 걸린 것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암영은신술이 고작 이류 정도 수준에 들킨다고? 극성인데?’

추소광을 두 번 찔러 죽인 전설적인 살수, 암왕의 독문무공 암영은신술은 주변 자연-그림자에 동화되어 몸을 완벽하게 숨기는 무공이다.

초절정의 고수들도 쉽사리 눈치채지 못하는 무공을 어떻게 무당의 무사들이 눈치챘나 나는 의아했지만, 곧 이유가 밝혀졌다.

“으아악!!”

내가 숨은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학사처럼 보이는 촌부 하나가 있었다. 그는 나무에 긁히고 찢긴 비단옷을 입고 있었고, 그다지 무공에 익숙해 보이지는 않았다.

“앗! 탈옥자다!”

“쫓자! 산 아래로 내려가서 천화를 퍼뜨리게 해서는 안 돼!!”

무사들은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치는 남자의 뒤를 추격했다.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나는 괜히 내가 걸린 줄 알고 긴장해버렸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못해도 무당 장문인 급은 되어야 이걸 눈치채지.’

암영은신술을 사용하고도 고작 이류무사에게 들켰다면 미래에 그림자에서 뽑혀 나와 사지가 찢겨 죽을 암왕에게 머리를 박고 사죄해야 할 일이었다. 아니면 미안해서라도 앞으로 사용하지 않거나.

“......휴.”

일각 뒤. 나는 무사들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숨을 참고 기다렸다. 다행히 무당파의 무사들은 남자를 쫓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는 몸을 돌려 다시 산을 천천히 올랐다.

짹, 째잭.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산을 오른 지 제법 시간이 지났고, 인기척은 아예 없다시피 했다.

‘어디 근처에 영약 없나?’

무당에 온 이유는 무당의 꽃을 눈으로 즐기고 몸으로 즐기는 게 우선이지만, 온 김에 꽃뿐만 아니라 삼이나 초 같은 온갖 영약들도 챙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가 먹어서 좋은 건 내가 씹어먹고, 적당히 은자 좀 챙길 수 있는 물건은 약방이나 문파에 팔아 버리면 그만.

‘영약을 얻어 내공이 강해졌느니 하는 놈들은 나중에 비슷한 걸 또 얻을 놈들이야.’

훗날 정마대전에서 영약으로 강해졌다고 하는 놈들은 분명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먹을 영약을 내가 전부 챙겼다고 한들, 그들은 분명 운명처럼 또 다른 영약을 챙겨 먹을 것이다.

자연에는 주인이 없다.

마찬가지로 영약에도 주인이 없다.

인형설삼을 먹은 남궁의 자제가 훗날 무림 공적에 오른 살인귀 하나를 죽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자가 먹을 인형설삼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누군가는 남궁의 자제 대신 살인귀를 죽일 것이다.

“꺼억.”

점심때 먹은 백숙의 화기가 속에서 끓었다. 삼을 잔뜩 먹은 덕분에 뱃속은 불길이 치솟는 것처럼 뜨거웠다.

“끙, 이놈의 양기.”

몸 안에 가득한 열을 주체할 수 없다. 이열치열로 몸의 열기를, 혈기를 다스리려고 하지만 딱히 소용은 없었다.

‘애초에 청년의 혈기를 억누르는 게 말이 안 되지.’

성인이 되기는 했어도 아직 가장 이상적인 몸은 완성되지 않았다.

근골이 최대한 성장을 마치고 체격이 온전히 다부지게 만들어질 때까지, 나는 어딘가에 정착하여 몸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여러모로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바로 지금,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시선을 느낀 것처럼.

“.......”

등 뒤에서 미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산짐승이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살인귀가 나를 뒷모습만 보고 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나를 덮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몸을 돌리며 손날을 휘둘렀다.

새애액!!

내 맞은편에 있던 나무가 일격에 반으로 쪼개졌다. 나는 다리까지 완벽히 뒤로 돌아 한걸음에 쪼갠 나무까지 달렸다.

‘하나.'

등허리에 저릿한 기운이 튀어 오른다. 명백한 적의가 내 피부를 찌르기 시작했다.

산을 타고 오르며 귀를 간지럽혀주던 새들의 청명한 노랫소리는 사라지고, 고요하고 싸늘한 기운만이 숲에 한가득 내려앉았다.

사락.

나뭇잎 하나가 내 눈앞을 스쳤다. 나는 바닥을 박차고 뒤로 거리를 벌리며 뛰었다.

“놈!”

아니나 다를까. 내가 있던 자리에 반듯한 검흔이 생겼다. 나를 공격한 장본인, 중년의 도사는 첫 일격이 무위로 돌아간 것에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거 인사가 너무 과한 거 아니오?”

“닥쳐라! 무당에는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무당산에 온 것이지 무당파에 온 것이 아니오.”

“이놈이 건방지게!”

도사는 나를 매도하며 검을 겨눴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푸른 검기에 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슬픈 예감은 벗어나는 법이 없군.”

정파의 무인들과 사소한 오해만 생겨도 바로 칼부림이 일어났던 건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나는 그저 명산 순례 중인 화초 수집가에 지나지 않거늘, 나에 대한 중년 남자의 태도는 몹시 적대적이었다.

"도사. 어찌 죄 없는 민간인을 검으로 겁박하는가? 이게 정녕 무당의 무인으로서 할 짓인가?"

“마교의 무공을 쓰고 태극검의 초식을 피하는 자가 어찌 민간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시 한번 묻겠다. 무당에는 무슨 일로 왔느냐.”

“......이걸 알아본다고?”

나는 발로 땅을 툭툭 건드렸다.

암영은신술의 주인인 암왕이 마교의 주인인 건 맞지만, 문제는 이 시점에서 암왕이 대외적으로 드러난 존재인가 묻는다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암왕은 정마대전 당시에 나타난 존재니까.

“네 놈, 정체가 무엇이냐?”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마라!”

“아니. 물어야겠다. 이게 마교의 마공이라는걸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야겠어.”

"뭐?"

상황은 역전되었다. 도사는 내 정체를 캐내려 했지만, 이제는 내가 그의 정체를 캐낼 차례다. 나는 검을 뽑아 도사에게 겨눴다.

“네 이놈, 마교의 첩자렸다!”

“뭐야?! 이, 이 미친놈이!! 네가 마공을 쓰는데 내가 왜 첩자야?!”

"이게 마공인지 알고 있으면 당연히 마교 관계자지!"

도사는 얼굴을 붉히며 검을 내게 겨눴다.

“개소리마라! 딱 봐도 마교 새끼들 움직임인데 그럼 마교 무공이지 정파의 무공일까봐?!”

“이래서 대가리에 피가 마른 도사들이란! 그런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 반선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고 속세에서 술이나 퍼마시는 것이다! 이게 마공인지 아닌지 눈으로 똑똑히 보아라!”

마공이 맞지만, 나는 단번에 앞으로 뛰어들었다. 도사의 앞까지 삼보를 내디뎌 횡으로 길게 그은 검에 도사는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

“삼재검법?! 이 썩을 놈이?!”

“삼재검법 무시하지 마라! 성명절기다!”

암왕의.

가로로 베고, 세로로 베고, 십자로 교차한 곳을 향해 검을 찌른다. 극히 간단한 초식이지만 거기에 극한의 속도가 더해지면 여느 무공 못지않은 절세검법이 된다. 나는 암왕이 하던 것처럼 호흡을 나누며 쾌검을 찔러넣었다.

“헛, 둘, 섯! 헛, 둘, 섯!”

베고, 베고, 찌른다. 또다시 베고, 베고, 찌른다. 검을 세 번 휘두르는 과정은 1초도 지나지 않았고, 몸이 달아오를수록 검을 휘두르는 속도도 절로 빨라졌다.

“큭?!”

도사는 검면을 비스듬히 세우며 검을 흘려냈다. 비스듬하게 튕겨내며 공격을 흘려내는 동시에 반격의 고삐를 쥐고자 틈을 노렸지만, 나는 도사가 공격하지 못하게 계속 몰아붙였다.

“헛둘섯, 헛둘섯!”

“이상한 소리 내지 마라!”

"나한테 따지지 마라!"

걸려들었다. 도사는 내가 ‘섯’을 외치는 순간 몸을 비틀며 검을 찌르려 들었다. 검끝은 정확히 내 심장을 가리키고 있었고, 도사의 두 눈에는 나를 죽이려는 살의가 넘실거렸다.

카-앙!

그러나 도사의 공격은 닿지 않았다. 오히려 검날을 비스듬히 쳐올린 내 공격이 깔끔하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종횡과 점만이 가득했던 내 공격에 반원을 그리듯 환이 섞이자, 도사는 당황하며 검을 놓고 도포를 크게 휘날렸다.

암왕의 절기, 탈혼격.

상대방에게 삼재의 궤적을 각인 시켜, 틈이 보이는 순간 변화를 주어 찌른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 숨어든 칼날은 시야의 사각에서 급소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

“쳇!”

하지만 나름 힘 좀 쓰는 도사다웠다.

시야가 도포에 가려지며 검날이 빙글 돌아갔고, 나는 한쪽 발을 앞으로 쭉 뻗으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흐르는 강물처럼 원을 그리듯 내 눈 바로 위에서 돌아가며 스치는 검날은 내 검을 튕겨내고 내 앞머리 몇 가닥을 살짝 잘랐다.

“하압!”

나는 짧은 기합과 함께 앞으로 내디딘 발로 땅을 굴렀다. 도사는 억지로 검 손잡이를 쥐고 나를 찌르려 했으나, 내가 체외로 방출한 내공의 기에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놈….”

도사는 여전히 검을 쥔 채 나를 노려봤다. 노려보기만 했다. 10합도 되지 않는 짧은 합 사이에 도사는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눈치챈 것이다.

“도대체 누구냐? 말로만 듣던 반로환동의 고수냐?”

“하나같이 반로환동이라고 하는군. 만약에 그렇다면 너는 선배에게 무례하게 행동한 셈이지 않겠느냐? 응? 현타야.”

나는 일부러 껄렁하게 그를 빈정거렸다. 얼굴을 붉힌 도사는 아까 전까지의 기세가 어디로 갔냐는 듯 허리까지 숙이며 예를 표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몰라뵀습니다.”

“거짓말이다.”

“...이 놈이?”

도사의 이마에 혈관이 깊게 파였다. 나는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아아, 네가 그자로구나. 크흐흐. 현타야, 만나서 반갑다.”

워낙 흔한 이상이라서 설마 이런 곳에서 나타날 줄은 몰랐다.

<무당제일검> 현타도사.

태극혜검의 주인 때문에 잠시 무당제이검으로 강제로 내려온 시기도 있었지만, 그는 정마대전으로 앞 항렬의 선배 도사들이 모두 사망하고 무당의 장문인이 된 남자다.

성격이 불같고 지랄맞기로 유명해, 결코 등선은 하지 못할 거라고 공공연하게 놀림을 받기도 했다.

‘마교의 존재를 옹호했었지?’

무림의 검정(玄)은 그저 다른(他) 존재일 뿐이라며 열심히 말을 설파하던 그는 정마대전의 발호로 큰 충격을 받고 두문불출했다.

그러다 앞 항렬의 선배가 마교에 전부 살해당하며 무당의 장문인으로서 크게 활약했다.

혈강시 시절 한 번 상대했던 존재다.

비록 죽이지는 못했으나, 당시 그를 죽일 필요도 없었다. 현타도사는 남자였고, 나는 현타와 함께 나를 합격한 태극혜검의 주인에게 눈이 팔려있었으니까.

백발 성성한 노인과 몸매만큼은 천하일색인 여인 중 눈이 여인 쪽으로 가는 건 당연지사.

'꽃을 보러 왔는데 남자는 필요 없다.'

약한 존재에게는 관심 없다. 그게 나보다 약한 남자라면 더더욱 관심 없다.

“슬슬 끝내자꾸나. 아아, 보인다. 역시 네놈의 경지가 한눈에 보여.”

검을 맞댄 순간 그의 경지를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어딜 절정 수준으로 나와 검을 맞대느냐? 너는 분수라는 걸 알아라.”

“......네 놈.”

“왜? 꼬운가? 꼬우면 한칼 먹여보시던가.”

나는 그를 마음껏 조롱했다. 동시에 현타라는 걸 깨닫자마자 나는 절로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원리원칙주의자에 깐깐해 보이나, 무공 하나만큼은 확실히 출중한 남자다. 훗날 무당파의 장문인이 될 남자와 척을 져서 좋을 건 없다. 이미 검을 맞대었으나, 무림에서 오해로 칼부림이 나는 건 흔한 일이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까.’

현타는 내가 무슨 마교의 졸개라도 되는 것처럼 요상한 확신을 하고 있다. 암영은신술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현타의 오해를 풀려면 보통의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역시 사칭이 갑이지.’

나는 검을 서서히 아래로 내렸다. 자세는 옆으로 비틀어 무릎을 굽혔고, 검은 앞으로 뻗고 다른 손은 뒤로 들어 기수식을 갖췄다.

“들어오너라. 내 너에게 상승의 경지를 보여줄 테니. 어디 가서 천만금을 줘도 보지 못했을 값진 경험이 될 것이다.”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항상 하수들은 당하기 전에 그 소리를 지껄이지."

"...잠깐, 그 자세는 설마?"

현타의 표정이 급격하게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는 한눈에 나의 검법을 알아본 그를 몹시 칭찬했다.

"말로 할 필요는 없지."

태극혜검. 태극검후 사공희의 피와 기를 취하고 얻은 장삼봉의 검.

"오너라. 천외천을 보여주마."

"......!!"

현타의 몸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검을 슬쩍 옆으로 놓았다.

카---앙!!

맑고 청량한 소리와 함께, 우리의 본격적인 비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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