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6화 (16/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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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북으로

호북성.

무한을 중심으로 중앙에 장강히 흐르는 이 땅은 무림인들에게 '무당파'의 지역으로 유명하다.

무당파!

당대 최강의 무인이자 도사 장삼봉을 시조로 둔 문파로, 현재 구파일방에서 제법 수위를 다투는 거대한 세력이다.

"형장, 무당이 망할 일이 있다면 계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무당파의 속가제자, 장무붕은 눈앞의 청년이 말하는 바가 너무나도 허황되어 어이가 없었다. 화가 나기도 전에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수준이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냐?"

"그렇지 않소. 보기만 해도 가슴이 절로 웅장해지는 이 자태가 얼마나 보기 아름답소?"

"그, 그렇지?"

"이런 곳이 망한다면 그때는 이 중원 전체가 망하게 되는 날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여쭤본 것이오. 언짢았다면 사과드리겠소."

청년은 깍듯이 예를 갖추며 허리를 숙였다. 장무붕은 청년의 다소 뒤틀린 감상에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바로 앞에 놓인 오향장육에 입 밖으로 소리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크흠. 그래서 또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무당파에 들어오고 싶은 게야?"

"아니오. 나는 이미 문파가 있소. 나는 지금 중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광활한 자연을 두 눈에 담고자 하는 중이오. 호연지기를 기르는 게지. 숲속에서 한 떨기 아리따운 꽃을 찾는 것이 취미요."

장무붕은 미묘하게 건방진 말투의 청년을 훈계하려다 화를 참았다.

자신보다 어린 자에게 정보사용료라는 이유로 크게 얻어먹는 것도 그런데, 여기서 청년을 '어딜 어른 앞에서' 운운하며 가르침을 주기에는 뭔가 상당히 찝찝했다.

"꽃이라...좋은 취미를 가졌군. 안휘에서 왔다고 했지? 그곳도 제법 절경이 많을 텐데."

"절경이었소. 봉긋한 언덕 사이로 둥글게 떨어지는 경사는 절로 감탄사를 저어내더이다. 폭포수를 몸으로 맞을 때마다 어찌나 몸이 떨리던지. 흐흐."

왠지 모르게 장무붕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마구니가 가득하구나.'

장무붕은 정신을 가다듬고 수저를 놀렸다. 청년이 제법 비싼 값을 치르고 산 음식은 식기 전에 먹어야 제맛이었다.

"그래서 무당산을 구경하고 싶은 것이냐?"

"그렇소. 마음같아서는 무당산의 정상까지 올라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보고 싶소만...."

청년은 무당산으로 오르는 길을 가리키며 난색을 보였다. 무당산으로 오르는 길에는 관졸들이 길목마다 자리 잡고 있었다.

"무당산이 출입금지라니, 도대체 이 무슨 말이오?"

"흠. 보면 모르겠는가? 무당산이 봉쇄되었다네. 산에 있던 도사분들을 비롯해 제자, 모든 이들이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지. 정확히는 아래에서도 올라가지 못하게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오?"

"...흠, 숨길 것도 없으니. 역병이 돌았네."

"예?"

청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무붕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꽃을 보러왔다고 하더니 유감이로군. 지금 무당산에는 천화(天花)가 돌고 있다네."

발진이 일어나고, 고열로 몸이 끓고, 악화할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염병. 청년은 마시던 차도 내려놓고 입을 쩍 벌리며 놀랐다.

"포창?"

"그렇소."

천화. 다른 말로는 천연두.

무당산에 핀 꽃은 인간의 몸에 온갖 종기를 들끓게 만들고 있었다.

* * *

"이 시국에 천화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나는 무당산이 보이는 객잔에 방을 잡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무당산을 오를 생각만으로 호북까지 왔건만, 정작 무당산이 관졸에 의해 폐쇄가 된 이상 오르내릴 방법이 없었다.

'절정 고수도 까딱 잘못하면 걸리는 게 천화이거늘.'

전염병은 정마대전 당시에도 두 세력 간의 전투를 잠시 멈추게 한 무시무시한 호환마마였다.

초일류를 뛰어넘은 무인들이야 삼매진화니 내공심법이니 하는 방법으로 사이한 기운을 빼내면 그만이었으나, 이류 이하의 무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염병에 걸려 앓아누웠다.

'무림맹주랑 천마가 사이좋게 전염병에 걸려서 앓아누웠지.'

천하제일을 두고 자웅을 겨뤄야 할 것 같은 두 무인이 동시에 같은 병에 걸렸다. 수많은 혈겁을 일으킨 정마대전의 끝을 알린 건 정파도 아니고 마교도 아닌 전염병이었다.

혈교가 뿌린.

'가만히 세력을 응축하고 있던 혈교의 비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지 아마?'

혈교 교주는 일부러 전염병을 퍼뜨렸다.

원리는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맹주와 천마의 몸을 전염병의 힘으로 진탕으로 만들었다.

본래 실력의 7할 수준밖에 내지 못하게 된 둘은 마지막 순간에는 정마가 힘을 하나로 모아 혈교를 상대해야 한다고 깨달았으나, 이미 그때는 혈교의 혈강시-본좌-가 둘을 동시에 상대하여 이길 수 있을 때까지 성장을 마쳤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이 너무 늦은 것이다. 맹주와 천마는 혈강시에게 죽었다.

"구천현녀만 아니었으면 혈강시가 천하제일인인데."

혈강시는 죽었다. 은거기인과 기연이 난무하는 무림답게, 어디선가 뿅 하고 튀어나온 흑발의 여인은 맹주와 천마, 그리고 혈교주가 조종하는 혈강시를 뛰어넘는 반신의 경지에 이른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

- 이건 사기다! 최후의 순간에 너 같은 년이 튀어나오다니! 이럴 순 없어! 네년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더냐!!

- 구천현녀.

혈강시가 흡수한 모든 무공은 구천현녀의 앞에 박살이 났다. 혈교주가 먼저 목이 잘린 것으로 혈강시는 조종이 풀렸고, 이성을 잃고 구천현녀에게 달려들었으나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반로환동의 초고수가 아니라면, 혈교 교주의 말대로 세계가 사기를 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강자였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전염병에 걸려 죽으면 아무 소용없지만.'

죽음과 발병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 천하제일인이 될 기재라고 한들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안 올라갈 내가 아니지.'

나는 눈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창가에 비친 눈동자는 세로로 길게 찢어져 세상을 한 발자국 뒤에서 관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도 상태가 좋지는 않아.'

공기 중에 떠다니는 죽음의 기운이 은근히 보인다. 숨을 들이마신다고 한들 천화에 직접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병에 걸린 이의 근처에 다가가면 분명 십중팔구는 옮을 것 같았다.

"씁-하-"

비강안에 내공을 불어넣어 양기를 높였다. 몸은 감기에 걸린 환자처럼 고열로 뜨거워졌으나, 콧구멍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공기는 시원하게 폐부를 찌르고 빠져나갔다.

- 모든 전염병은 병원균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고열로 살균, 멸균만 하면 해결돼.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만, 잘 따라서 나쁜 건 없지.'

나는 혈교주가 항상 하던 것처럼 복면을 착용했다. 외부와의 공기 접촉이 차단되는 검은 복면은 내 얼굴을 가림과 동시에 들숨에 딸려오는 죽음의 기운을 최대한 걸러냈다.

"흐흐, 내가 간다."

이번에 내가 취하고자 하는 꽃은 훗날 <태극검후>라고 불리게 될 여인.

무당파의 제자는 아니지만, 장삼봉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비급을 발견하여 중원 오대 검객 자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자.

<태극혜검>이라는 성명 절기를 바탕으로 네 개의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이기어검술의 대가.

사공희.

'어렸을 적 모습이 참 기대되는군.'

얼굴은 비록 여인으로 태어난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화상 자국이 심하게 남아있었으나, 회색의 도복 아래에 가려진 몸매만큼은 팽유월 못지않게 아름다웠던....

"......응?"

천화. 사공희. 전염병. 피부.

"에이, 설마?"

* * *

“아이고, 어르신! 저희는 이 병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깡마른 중년 남자는 무복을 입은 남자에게 매달리며 눈물로 호소했다. 그의 뒤에 있는 두 명의 여인은 서로를 끌어안고 벌벌 떨며,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가 해결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병과 관련이 없어도 어쩔 수 없소! 당분간은 이곳에서 기거하시오!”

“어째서입니까?! 저희는 단지 이곳을 구경 왔을 뿐입니다!”

“크윽…! 산에 역병이 들었거늘, 어찌 산에서 며칠 기거한 자들이 산에서 내려가려 한단 말인가!”

무사의 말은 타당했다. 일가는 영험한 무당산의 기운을 받기 위해 여행차 방문했을 뿐이며, 딱히 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단지 그들이 산을 방문한 때에 역병이 돌기 시작했을 뿐이다.

"역병으로 인해 이곳은 봉쇄되었소! 우리도 나가지 못하고 격리되어있단 말이오!"

"그럼 우리를 왜 이런 감옥에 가둔 것입니까!"

"그건…!"

무사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유는 자신들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뿐, 정확한 사유는 전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설마 역병을 퍼뜨린 장본인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그러나 남자는 마냥 멍청이가 아니었다. 근골이 연약해 보이기는 했어도 그는 관직에 몸을 담은 자로, 머리가 몹시 비상하여 지역에서 촉망받는 인재로 유명했다.

"나는 바로 옆, 이창성의 관료요!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크게 경을 칠 사람이란 말이오!"

"들어본 적 없소! 에잇, 좀 조용히 하시오! 혹시라도 역병을 가지고 나간다면 당신은 생업을 잃는 게 아니라 생명을 잃게 될 테니!"

"하다못해 밖에 알려주기라도 하시오!"

"아, 글쎄 서찰을 보냈다니까!"

무사는 서찰을 보냈다고 하지만 과연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불안감이 남자를 더욱 절박하게 만들었고,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럼 희아, 나의 딸만이라도 밖으로 내보내 주시오!"

"딸이나 가족이나!! 젠장, 왜 그렇게 딸을 내보내려고 하는 거요!"

철컹철컹.

남자가 붙잡은 철창은 거칠게 흔들렸다.

일가는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무당파의 감옥 안에 갇혀야만 했다. 어째서 문파의 건물에 감옥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건 일가가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출입구에 채워진 무쇠 자물쇠는 열쇠로 열기도 힘든 물건이었다.

일가가 나오려면 철창을 검으로 잘라낼 정도의 일류 고수가 오거나, 최소 무당파의 장로급이 와야만했다.

“제발, 내 딸만큼은 내보내 주시오!”

“안 된다니까! 딸한테 뭐 문제 있기라도 하나?!”

거듭된 무사들의 거절에 남자는 조급함을 느꼈고, 결국 실언을 하고 말았다.

"내 딸은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되는 몸이란 말이오!!”

“여보!”

남자의 아내가 비명을 질렀다. 남자는 철창을 잡고 흔들다가 입을 쩍 벌리며 행동을 멈췄다.

“무슨 일이냐.”

“자, 장로님.”

인상이 나쁜 매부리코 도인이 멋들어진 무복을 입고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남자 일가를 눈으로 슬쩍 살피더니, 손가락을 들어 올려 지풍을 날렸다.

사아악!

감옥 안에 살얼음 같은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남자의 아내가 꼭 끌어안고 있던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인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로군. 저렇게까지 얼굴을 가릴 이유가 없지 않나?”

“그, 그게. 낯가림이 심하다고 하여….”

“저희가 손만 건드려도 비명을 지르며 울려고 하는 바람에….”

무사들의 변명에 매부리코의 장로, 현타(玄他)대사는 또다시 지풍을 날렸다. 남자의 아내는 딸의 얼굴을 가리려고 했지만, 여인의 얼굴은 지풍에 금방 드러나고 말았다.

“앗…!”

무사들은 여인의 얼굴에 피어오른 종기에 깜짝 놀랐다.

사람이 성장함에 따라 으레 생기는 피부병과는 달리, 여인의 얼굴은 의심해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못할 정도로 전형적인 천화의 흔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우웁!”

감옥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은 잽싸게 손으로 입을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무사 하나는 급히 횃불을 잡아 사방에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군.”

현타대사는 여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 한번 말해보시오. 저 여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도 된다고 생각하시오?”

“희아는 천화에 걸린 게 아닙니다! 다, 단순히 예전부터 피부가 좋지 않았을 뿐! 천화와 비슷하지만 천화가 결코 아니란 말입니다!”

“거짓말도 유분수지! 이런 시국에 그런 거짓말이 통한다고 생각하는가!! 병이 발병한 자들은 결코 산에서 내려갈 수 없다! 그게 호북성 주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도리다!”

“저, 저희는 다릅니다! 다르단 말입니다! 제발 저희를, 희아만이라도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해주십시오! 여기에 있다간 저희가 걸리지도 않을 역병에 걸린다고요!!”

남자의 말도 안 되는 말에 현타대사는 뒷골이 당겼다. 전염병에 걸린 것을 숨기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내려가겠다고 하는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한단 말인가?

유비무환.

설령 진실로 아니라고 한들, 현타대사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무사들은 들어라! 철창 너머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판자를 설치할 것이다!”

끼이익.

사공희 일가는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씁, 어허. 왜 이렇게 가볍지?"

"젠장. 저들 때문에 괜히 우리까지 옮는 거 아냐?"

감옥 앞에서 일가를 감시하던 무사들은 하나둘 피부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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