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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유월
사건번호 갑신07-9025.
분류 : 화재
원인 : 실화 - 방화
사상자 : 추소광 (향년 38세) 1명
사망추정시각 : 불명
추소표국화재사건.
하북팽가의 여식 팽유월(21세)와 혼인을 앞두고 있던 추소광이 혼인을 며칠 앞두고 소사체로 발견.
화재의 시발점은 추소광 본인의 방으로 추정되며, 사건 초기에는 실화로 추정하였다.
사건 발생 후 부친 추소경이 시신의 몸에서 두 번 찔린 흔적을 발견하였고, 팽유월이 유력 용의자로 의심을 받았으나 명백한 증언-추소광 본인이 팽유월을 방에 있게 하였다는 표국 하인의 증언-이 있어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었다.
표국의 세를 불려 나가는 과정에서 있던 불화로 살수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 갑신 08-1295 추소경 음독자살 건의 원인이 됨. 아들의 죽음에 충격에 빠진 아버지의 자진으로 추정.
* * *
"여기는 올 때마다 끝내주는군."
"그렇지요? 크으, 소협. 역시 운치를 아시는구려."
삿갓을 쓴 청년은 작은 쪽배와 뱃사공에게 몸을 맡기고 강을 구경했다. 좌우 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장강은 하늘에 떠오른 따사로운 햇살처럼 잔잔했다.
"소협, 안휘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그럼 아시겠군요! 한동안 안휘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정의구현 사건!"
"정의구현?"
"그 왜, 석 달도 전에 있었던 대형 화재 있지 않습니까. 추소표국이라는 곳이 말끔하게 타버린 화재 사건."
"...아아, 들어는 보았지. 그런데 그것이 정의구현이다?"
청년의 의아한 목소리에 뱃사공은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추소의 발길이 드나든 곳에 돈이 남아나질 않느니! 추소표국 놈들, 왈패를 무사로 부리며 보호세니 뭐니 하며 온갖 돈을 뜯어 갔답니다. 추소광이 죽은 날, 저잣거리 상인들이 소리 없이 축배를 들었다더군요. 어라, 혹시 모르십니까?"
"알기야 하지만 그게 정의구현 사건인지는 몰랐군."
"그야 당연하지요! 나이도 제 반도 안 되는 여인을 겁박하여 혼인하려고 하고 죽어버렸지 않습니까. 잘 죽었지요. 어딜 딸 같은 여자를.
..쯧쯧."
"잘 죽었나…? 크흐."
청년은 피식 웃으며 강물의 파문을 눈으로 즐겼다. 장강을 거슬러 오르는 잉어를 살피는 청년은 영락없는 그 나이대의 청년 같았다.
"팽가의 여식은 잘된 일이지요. 결혼 직전에 악적이 살해당한 거 아니겠습니까? 비록 관아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지만...크흠. 금방 풀려났지요."
"금방? 왜?"
"그게, 설명하기가…. 어흠. 하인들의 결정적 증언이 있었답니다. 죽일 명분은 있었지만 죽일 시간도, 죽일 이유도 그다지 없었다고 하더군요. 다른 용의자가 나타나기도 했고요."
"다른 용의자?"
청년의 목소리에 흥미가 동했다. 뱃사공은 신이 나서 물로 목을 축이며 소리를 높였다.
"암왕! 천하제일살수인 그 자의 수법이 있었답니다. 불에 탄 건 칼로 찌른 흔적을 숨기려는 은폐 공작이었다고 하더군요. 그게 암왕의 수법이라나 뭐라나."
"천하제일살수...무섭도다. 그런 자가 안휘를 다녀가다니."
"흐흐, 누가 천만금을 줬는지는 몰라도 대단한 일을 했지요. 금자 밖에 모르는 돼지가 죽었으니까요."
뱃사공의 말대로 정의구현.
그게 추소광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평이었다.
죽은 사람에 대해 잘 죽었다느니 하는 말은 분명 사자에 대한 모독이었으나, 그런 평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로 추소광과 추소표국은 업보를 많이 쌓았다.
“결국 팽가의 아가씨만 좋아졌지. 표국의 국주와 소국주가 다 죽어버렸으니, 그 남은 유산이 누구에게로 가겠는가?”
“팽유월에게로 간단 말이오? 허. 계 탔군.”
청년은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었다. 그에 뱃사공이 더 열을 내며 청년을 나무랐다.
“소협, 아무리 그대가 손님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표현은 좋지 않소.”
“혼인도 하지 않고 잠시 다녀간 걸 대가로 천환단과 표국의 재산을 모두 손에 넣었으니 어찌 그리 평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살면 그래도 혼약을 맺은 지아비에 대한 도리를 지키겠다며 열녀라고 칭송받겠군.”
“표국의 유산이 어떻게 그 아가씨에게 갔는지 정녕 모르겠소?”
움찔. 청년은 다소 굳은 얼굴로 입술을 핥았다. 명백히 긴장하는 모습에 뱃사공은 실실 웃으며 자신의 배를 두드렸다.
“추소광의 아이를 가졌다 이 말이오.”
* * *
“이렇게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관에서 찾아오신 분들을 홀대할 수는 없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팽이왕입니다.”
팽가의 가주, 팽이왕은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 둘을 맞이했다. 한 명은 깐깐해 보이는 감찰관이었고, 다른 한 명은 팔에 금색 실장식을 두른 무인이었다.
“팽가의 가주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혹시 암왕을 고용하여 추소표국주를 살해하셨나?”
“공!”
금실의 무인은 감찰관을 질책하며 나무랐다. 단도직입적은커녕 면전에서 침을 뱉는 수준의 말이었으나, 팽이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당당히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이 팽이왕, 악참도의 별호를 걸고 맹세할 수 있소. 그런 일 없소이다.”
“가주가 아니더라도 세가의 사람이 그랬을 수도 있지.”
“감찰관!”
“아닙니다, 신창 선배님. 감찰관 님의 말씀은 타당합니다.”
팽이왕은 오히려 금실의 무사-금의위의 무인 중 한 명인 신창을 다독였다. 무림인을 상대로 하는 감찰관의 안하무인다운 태도에 신창은 몇 번이고 눈치를 줬으나, 감찰관은 신창의 기조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가주께서도 세가 사람들의 폭주를 인정하시지요? 가주 님을 살리기 위해 21살 여식을 38세 남자와 매매 결혼시켰습니다. 다행히 혼약은 맺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뭐요, 감찰관?”
“가문의 다른 이가 암살을 사주했거나, 팽유월 본인이 사주했거나.”
쾅! 과연 이 말에는 견딜 수 없었던 걸까. 팽이왕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하북팽가를 도대체 무엇으로 보는 것인가! 차라리 직접 도를 들고 난동을 부렸으면 부렸지, 암살 같은 치졸한 짓을 저질렀을 것 같은가!!”
팽이왕의 엇나간 분노에 감찰관은 그제야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팽이왕의 앞에 엎드려 절했다.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으, 으잉?”
“앉으시게, 가주. 내 대신 사과하지. 이 자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그렇다네.”
자리에 다시 앉은 감찰관은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짙은 어둠처럼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 안에는 홍채가 태극 모양으로 색이 다른 것처럼 보였다.
“흑백을 가리고자 하였습니다. 가주께서는 ‘백’ 입니다, 신창 어르신.”
“흑...백?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한 것은 기밀입니다. 모든 게 끝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주님, 이제 팽유월 아가씨를 불러주십시오.”
팽이왕은 감찰관의 태도에 혼란이 생겼으나, 감찰관과 함께 온 무인은 자신의 선배이자 금의위 삼대 고수 중 한 명인 <신창> 백주흔이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신창이 뭔가 잘못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에, 팽이왕은 불편한 감정을 추스르고 조카를 불렀다.
“유월아.”
“.......”
하얀 비단옷을 입은 여인, 팽유월은 밖에서 들어와 팽이왕의 옆에 앉았다. 감찰관은 노골적으로 팽이왕을 쫓아내고 싶어 했으나, 팽이왕은 팔짱을 끼며 자리에 눌러앉았다.
“......후우. 알겠습니다. 이대로 취조를 하도록 하죠. 팽유월 양은 사실대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팽유월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금의위에서 나온 두 사람을 상대로도 당당하게 가슴을 펴는 조카의 모습에 팽이왕은 괜히 울컥했다.
“사건이 있었던 그날, 어디서 무엇을 했습니까?”
“제 방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기절해있었죠.”
“기절? 누구에게 맞았습니까?”
“돌아가신 상공과 정사를 나누다가 지쳐 쓰러졌습니다.”
“쿨럭!”
신창은 마시려던 차를 뿜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팽이왕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곧이곧대로 말하는 팽유월에 전전긍긍했고, 감찰관도 입술을 깨물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증인들은 하인들이 있었죠.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질문. 배 속의 아이가 추소광의 아이라는 증거는 있습니까?”
“이놈!!”
팽이왕은 칼을 빼 들어 감찰관의 목에 겨눴다. 과연 이 질문에는 신창도 편을 들지 못하겠는지 우물쭈물하며 입가를 손등으로 닦고 있었다.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가주님, 참으세요.”
“월아야! 저건 너에 대한 모욕이자 팽가에 대한 모욕이다!”
“저게 직업이시잖아요. 저분은 일하시는 거예요.”
팽유월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가주의 소매를 붙잡았다. 길길이 날뛰려던 팽이왕은 팽유월의 미소에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맙습니다, 소저.”
“물론 당신의 질문이 무례하지 않다는 건 아녜요. 방금 그 말씀은 저와 팽가에 대한 모욕에 더불어, 죽은 상공에 대한 오해니까요.”
팽유월은 품에서 곱게 밀봉한 서찰을 하나 꺼냈다. 감찰관과 신창은 서찰 안의 내용을 쭉 훑으며 큰 충격에 빠졌다.
“허. 어찌….”
“추소표국은 마교의 협박을 받아 돈을 상납하고 있었어요. 돌아가신 상공은 마교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셨죠. 그게 팽가와의 교류였고, 혼인관계를 맺어 마교의 비열한 수법을 피하려다가….”
팽유월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감찰관과 신창, 팽이왕 또한 유서를 통해 드러난 진실에 침묵하고 말았다.
서찰에는 마교의 부당한 협박을 받고 있었지만, 첫눈에 반한 여인과 만남으로 의와 협을 깨우친 사내가 있었다. 비록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의 삶은 분명히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이 서찰이 증거가 되는 건 아닙니다.”
감독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에 팽유월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와 통정하여 아이를 가졌고, 마침 가문의 사람들이 다 죽어서 표국 전체의 재산을 유산으로 상속받게 되었다? 충분히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볼 문제죠.”
“무엇으로 저를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추소표국이 당신을 정녕으로 안주인으로 맞이하려고 했다는 증거?"
"이, 이...!"
팽이왕은 속이 터져 가슴을 두드렸다. 감찰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무례함의 도를 넘어섰고, 신창은 무림 시절의 후배와 같은 금의위 후배 사이에서 중간에 껴 난색을 보였다.
"증거...이것이 증거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팽유월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자신의 하복부에 손을 올리고 당당히 말했다.
"추소표국의 비고를 알고 있습니다. 상공이 저를 그곳에 데려가신 적 있습니다. 진법이 있었는데, 어떤 진법인지는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비고를 생각하며 앞으로 쭉 걸어가면 된다고...."
"호오."
감찰관과 신창의 표정이 변했다. 그들의 불신과 의심은 확고한 신뢰와 믿음이 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추소표국의 재산은 모두 팽유월님과 자제분에게 귀속될 겁니다. 지금까지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크흠. 유월아, 괜찮겠느냐? 네가 저걸 받는다는 건...."
"네. 괜찮습니다. 아이를 낳고, 기를 겁니다."
팽유월의 당찬 말에 세 남자는 입술이 바짝 말랐다. 아무리 가문의 힘이 대단하다고 한들, 어디 여인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분과의 인연은 분명 다시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팽유월의 눈에는 어딘가 확신 같은 것이 엿보였다.
* * *
"그리하여 팽유월 아가씨 덕분에 가주는 살고, 추소표국의 재산은 모두 팽유월 아가씨의 것이 되었다고 하더군!"
"흠, 그런가. 그래서 정의구현이라고 하는 건가?"
"그렇소, 소협. 어디 그자의 악행이 한 둘이었는 줄 아시오? 세상에 팽유월을 닮은 기녀를 불러서 취하려고 했다고 합디다."
"오호. 그 기녀는 또 어찌 됐소?"
"추소표국이 망하면서 손님이 끊겼다고는 하나, 어디 추소표국의 무사들만 손님인가? 웃음 파는 대상이 달라졌을 뿐."
청년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뱃사공은 다른 때보다 훨씬 더 청년의 웃음이 께름칙하여 괜히 소름이 돋았다.
"크흠. 그래서 저 동네에는 무슨 이유로 가려고 하는 겁니까?"
"그것이 궁금하오?"
어느던 배는 항구 근처에 다다랐다. 청년은 품에서 은자를 꺼내 자리에 놓았다.
"꽃을 구경하러 왔소. 무당파의 꽃을."
"...꽃? 무당에 꽃이라 할 만한 이가 있습니까?"
"왜, 장삼봉의 태극혜검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자가 있지 않은가?"
"큽, 크하하! 소협이 농이 지나치시구려. 그런 자가 있었다면 제가 모를까 봐요? 에잉, 농담은."
청년은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낮게 웃었다.
"크흐흐, 그래. 농담이오. 사실은 스승님의 명을 따르려고 하는 것이오. 스승께서는 나보고 농사나 지으라고 하셨거든."
"농사?"
"그렇소."
청년은 넓은 장강에서 두 팔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천하에 나의 씨를 뿌릴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