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2화 (1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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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유월

"잊지 마라. 아가씨께서 그 더러운 자에게 오욕을 당하면서까지 만든 기회다. 실수는 있어서는 아니 된다."

팽가의 무사들은 표국 안에서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팽유월이 수치와 굴욕을 참아내고 만든 기회를 허사로 만들 수는 없었고, 자신들이 세가로 돌아갈 좋은 기회였다.

"아가씨께서 '날씨가 참 좋군요.'라고 말씀하신다. 그건 무슨 뜻?"

"천환단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니, 그 자리에서 추소광을 구속하라는 겁니다."

"아가씨께서 '앗, 저기 벌레가'라고 말씀하신다. 그건 무슨 뜻?"

"천환단은 실제로 존재했으나, 그걸 가지고 자신에게 해를 가했다는 뜻입니다. 천환단의 위치를 안다면 빼앗을 각오까지 하라는 말입니다."

무사들은 미리 정한 암구호를 상기하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팽가 특유의 호쾌한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선 이들은 멀리서 호위 없이 걸어오는 추소광과 팽유월을 맞이하기 위해 대문 앞으로 나섰다.

"오셨...?"

무사들은 눈앞의 광경이 사실인지 두 눈을 비벼야만 했다.

갈 때는 서로 수 걸음 이상 떨어져서 갔건만, 올 때는 마치 갓 사랑을 일구어나가는 연인처럼 서로 붙어있었다.

팽유월은 추소광의 소매를 잡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추소광은 그걸 과시하듯 아주 천천히 걸었다.

"뭘 여기까지 나와 있느냐.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 괜히 무서운 분위기 조성하지 말고."

"소, 소국주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오냐. 그보다 너희, 가장 날랜 놈이 누구냐? ...네 놈이랑 너군."

추소광은 귀찮은 듯한 손짓으로 두 남녀를 가리켰다. '날랜 놈'이라는 말에 다소 울컥하기는 했으나, 실제로 호위무사로 딸려온 팽가의 무사 중 가장 경신법에 출중한 남녀였다.

"너희에게 내릴 임무가 있다."

"임무라니, 그게 무슨...."

"천환단...."

개미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팽유월은 손을 내밀었다. 무사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앞으로 뻗어 팽유월이 떨어뜨리는 물건을 조심스레 받았다.

"허억?!"

한눈에 보기에도 천환단인 걸 알 법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태극무늬에 특유의 푸른 기운-신의의 내기가 깃들어있는 단환은 천환단이 가진 특징을 여실히 가지고 있었다.

"함에 넣어라. 그리고 하북으로 떠나라. 앞으로 어르신으로 모셔야 할 분인데 한시라도 빨리 병환을 다스리셔야 하지 않겠느냐?"

"그, 그게."

결혼할 때까지 천환단을 빌미로 겁박하려던 게 아니었나? 무사들은 무엇이 계기가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팽유월은 또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가.

아니, 그보다 애초에 진짜로 천환단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천환단은 진짜였고, 소인배나 다름없는 추소광이 팽유월에게 진품을 보여주고 바로 건네줬단 말인가?

식을 올리기도 전에?

"아, 아가씨.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녀자는 지아비의 뜻을 따라야 하지요."

우울하면서도 부끄러운 듯한 팽유월의 목소리는 개미 기어가는 것보다 작았다. 무사들은 허탈함에 입을 벌린 채, 두 남녀가 표국 안으로 들어가는 걸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다.

"서, 설마 두 분이 정사를-"

빠악.

"그럴 리가 있느냐! 아, 아가씨께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무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 * *

"꺼어억."

나는 팽유월과 함께 표국으로 돌아온 뒤, 주방에서 배부른 식사를 마쳤다. 바로 방으로 들어가기에는 여러모로 찝찝한 게 많았다.

"소국주님, 침소 정리가 다 끝났습니다."

"그래? 그럼 들어가야지. 잘 먹었다."

그래서 먼저 침소를 정리하도록 지시했다.

추소광이 쓰던 모든 물품들을 햇빛에 소독하고, 창문을 모두 열어 환기를 시켰다. 그래도 퀴퀴한 냄새가 빠지지 않아 향초를 태워 냄새를 향으로 덮었고, 추소광의 흔적이 묻은 물건들을 죄다 새것으로 바꾸었다.

'이제 당분간 내 방이니.'

남의 여인도 품기 꺼려지는데 남이 쓰던 침구라고 오죽할까.

나는 지시를 내린 뒤 부엌에서 가볍게 간식을 요구했다. 평소에 먹던 만큼 내어놓으라고 했더니 만한전석이 눈앞에 나타났고, 나는 추소광이 어떻게 물살 외공을 단련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젠장. 이거 다 먹으려면 개고생을 하겠군.'

음식을 먹자마자 바로 몸속에서 내공으로 태워야 할 양이었다.

나는 힘겨운 척을 하며 고기만 골라서 집어먹었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살가죽과 근육 사이를 채우는 내공이 물살처럼 출렁거렸다.

"어휴...."

추소가문의 하인들은 추소광에 대한 존경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내가 추소광으로서 행동하기 편했다.

나 몰래 한숨을 쉬는 하인들의 표정에서 나는 추소광의 평소 행실을 확실히 알아냈다. 내가 안하무인으로 나서도 아무 문제가 없겠다 싶었다.

"월아는? 바로 방으로 들어간 것 같던데."

"월아...요?"

"팽유월."

팽유월을 부르는 나의 애칭에 하인들은 헛구역질하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당당히 산적을 씹으며 대답을 기다렸고, 결국 하인 중 제법 높은 이-총관으로 보이는 노인이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안주인께서는 세신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

팽유월은 돌아오자마자 씻으러 갔다. 나는 그녀의 나신을 상상하자마자 역체변용에 의한 내공살이 풀릴까 봐 걱정되었다.

'진정해라, 추대광. 너는 지금 추소광이어야 한다.'

어두운 창고 안에서 안아서 팽유월의 몸을 눈으로 잘 담지 못했다.

형틀에 묶여 강제로 벌려진 것도 색정적이었지만, 역시 모든 무공의 초식은 기본이듯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체다.

- 역시 은꼴보다는 대꼴이지.

혹자는 조금 걸치고 있는 것이 가장 야하다고 하지만, 혈교 교주는 그리 말하지 않더라.

나는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던 혈교 교주의 말을 십분 공감했다.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하는 투로 그 느낌을 이해했다.

원래 무공도 비급에 적힌 구결을 체득하고 깨닫는 것이 아닌가. 은꼴보다 대꼴. 좋은 울림이다.

"나는 이만 방으로 들어가지. 무슨 일이 있으면 종으로 부르도록 하마."

"알겠습니다, 소국주님."

나를 배웅하는 하인들의 표정에 안도감이 스쳤다. 내가 이 공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가쁜 숨이 풀리는 것처럼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당분간 모든 식사는 내 방에서 해결한다. 2인용 찬거리를 매 끼니 준비하도록. 내 건 장어, 용봉탕, 흑마늘 위주로. 정해진 식사 시간 이외에는 그 어떤 음식도 들이지 말거라."

"네? 그건...설마…?"

하인들이 모두 입을 쩍 벌리며 놀랐다. 다들 '네가 어떻게?'하는 표정으로 놀라는 것에 나는 크게 공감했다. 추소광이 어떻게 팽유월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었겠는가.

"뭘 설마냐. 이제 곧 너희들의 안주인이 될 사람인데. 무엇이 문제라도 된단 말이냐?"

"그, 그건 아니지만.... 아니 어떻게...?"

"나니까."

나는 놀란 하인들에게 팽유월의 방을 가리켰다.

"월아에게 전하라. 세신이 끝나면 내 방으로 오라고. 마침 시간도...슬슬 잘 시간이군."

태양은 산 너머로 넘어가고, 어느덧 하늘에 달이 걸렸다.

"총관. 미리 부부끼리 시간을 가질 테니 아무도 들이지 마라."

"예, 크흡."

총관은 울컥한 얼굴로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홀로 추소광의 방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국주님, 곧 보십시오. 도련님께서 팽가의 여식을...으헝헝!"

그 도련님, 지금 땅에 파묻혔는데. 나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우리의 방'으로 향했다.

* * *

"이것이 정녕 천환단이란 말입니까?"

"......."

무사들은 가운데에 놓인 금박의 단환에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팽유월은 천환단의 진품을 보러 간다고 했으나, 정작 결과는 진품을 받아오게 되었다.

"그자라면 분명 식을 올릴 때까지 안 줄 거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가질 때까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상하군요. 이런 대범함을 보일 자가 아닐 텐데."

결혼식 전에 추소광이 천환단을 건네줬다. 무사들은 자신들이 편견을 가지고 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아가씨. 도대체 추소광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읏."

대화의 열쇠를 가진 팽유월은 구체적으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추소광에게 천환단의 실재를 물었고, 추소광에게 천환단을 받았다'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그, 그게."

"사실대로 말해주십시오. 그자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겁니까?!"

"이 멍청아, 아가씨께서 곤란해하시잖아!"

무사 중 유일한 여자 무사가 옆구리를 주먹으로 툭 찔렀다.

팽유월이 씻는 걸 옆에서 도와준 그녀는 추소광과 팽유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했고, 눈치 빠른 무사들은 얼굴을 붉히며 난감해했다.

"허. 아무리 그래도, 그런...."

"...어차피 부부의 연을 맺을 사이였습니다. 혼인 전이나 후나 상관은 없죠."

팽유월은 오히려 대범하게 나섰다. 뭉그적거리는 것은 팽가의 사람들답지 않았고, 팽유월은 오히려 당차게 가슴을 펴며 가운데에 놓인 천환단을 가리켰다.

"그는 천환단을 내어줬습니다. 그리고 그대들에게 하북으로 가도 좋다고 했지요. 지금 당장 출발해주십시오."

"아, 아가씨...!"

팽유월이 몸으로 받아낸 천환단이다. 가주를 살리기 위해 원치 않은 혼인을 하게 된 여인은 식을 올리기도 전에 추소광의 마수에 결국 몸을 허락하고 말았다.

"계십니까."

"누구냐?"

"총관입니다. ...주인님께서 찾으십니다."

무사들이 칼을 뽑으며 살기를 뿌렸으나, 팽유월은 다소곳한 몸가짐으로 일어났다.

"알겠다. 금방...가지."

"흐흑, 아가씨...."

그러나 팽가의 사람 그 누가 그녀를 더럽다고 할 수 있을까? 제 한 몸 바쳐 가문의 수장을 구할 수 있게 된 여인의 비극에 대한 비통함과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만 남을 뿐이었다.

* * *

'이 새끼 마교 자금줄이었어?'

나는 추소광의 방 안에서 발견한 물건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디 빼먹을 돈이 있나 싶어서 자금의 흐름을 살펴보니 대량의 자본이 어딘가로 새어 나가는 것을 발견했고, 하필이면 그게 최종 목적지가 천산임을 알게 되었다.

'이거 좆됐네.'

안 그래도 마공을 사용한 것을 대충 얼버무린 것으로 숨겼다. 그런데 아예 추소표국이라는 곳 자체가 마교의 끄나풀이라고 한다. 추소광은 분명 마교에 자금을 대고 천환단을 얻고 마공을 익혔을 터.

'어쩌면 이거 자체가 팽가를 몰락시키려는 계략인가?'

큰 그림을 그려라.

혈교 교주는 혈강시인 나를 상대로 엄청나게 혼잣말을 하며 나를 가르쳤다. 듣기 싫었지만 들을 수밖에 없었던 내게 혈교 교주는 내 인생 제3의 스승이라고 봐도 무방한 자였다.

비상한 음모가 있을 때 그걸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네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음모를 꾸며 현실과 대조하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모략에 있어서 혈교 교주를 따라갈 자는 없다. 나는 교주의 말대로 '내가 마교였다면', '팽가를 어떻게 몰락시킬까'를 가정해봤다.

하나. 팽가가주, 악참도 팽이왕에게 사술을 건다.

둘. 천환단이라는 미끼를 만들어 팽가를 끌어들인다.

셋. 팽가의 여식을 끌어들여 마공을 익히게 하거나 마공에 물들게 한다. 굳이 여식이 아니더라도 후계자급의 남자라면 금상첨화.

넷. 팽가의 자제에게 마공을 익혀 살겁을 일으키게 하거나-

'이건 아니지. 이건 혈교의 방식이고 마교의 방식은 아니다.'

넷 중 둘. 팽가의 자제에게 팽가의 가문 비전 무공을 훔쳐 오게 한다.

"이게 맞지."

혼인으로 맺어진 상대를 마공으로 금제를 가하여, 가문에 한 번 돌아가는 날 팽가의 비급을 훔치거나 필사한다.

모든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면 표국은 멸망하겠지만, 마교는 자금줄인 표국 하나를 내어주는 선에서 오호단문도를 비롯한 팽가의 온갖 무공을 훔치게 된다.

'지극히 마교스러운 짓이로군.'

마교의 은밀한 손길이 이곳까지 뻗었음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 사이, 어느덧 시간이 되었다.

"...상공."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는 팽유월의 것이었다. 나는 나를 부르는 호칭에 입꼬리가 비틀렸지만 애써 참고 그녀를 들였다.

"들어와라."

"......."

아무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본인 자신도 몸의 열기를 주체할 수 없어 이렇게 내 부름에 달려온 것이리라.

'화장도 했네.'

남자의 부름에 여인이 화장을 하고 찾아온다? 이 싸움은 사실상 끝났다.

"밤은 길다. 어서 자리에 앉아라."

"...의자는-"

"네 자리가 여기 말고 어디가 있느냐?"

나는 내가 앉은 침대의 바로 옆을 두드렸다. 노골적인 위치 선정에 팽유월은 얼굴이 더욱더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부끄러움에 우물쭈물하며 내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거칠게 다뤄주기를 바라는 것 같군."

"윽...?!"

나는 몸을 일으켜 팽유월의 허리를 휘감았다. 무공조차 사용하지 않은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순순히 침대 위에 던져졌다. 흡사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것만 같았다.

'혼란스러울 테지.'

쾌락을 알아버린 여자 무인만큼 알기 쉬운 존재가 없다.

상승의 경지를 깨우친 무인이 개안하는 경험을 잊지 못해 그다음 경지를 더욱 추구하는 것처럼, 팽유월도 개통에 따른 쾌락에 중독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시선을 옆으로 돌린 그녀의 눈동자에 흐르는 기대감을 확인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방종술.

남근 하나로 여인의 생각을 바꿔버리는 초유의 발정대법.

'이게 진짜 마공이지.'

무공은 아니지만, 여인을 남자에게 종속시키는 사술. 나는 창고와 마찬가지로 자세를 취하는 그녀의 아래에 앉았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할 것이오, 부인."

"......으읏!"

팽유월의 아래는 서서히 젖어 들어갔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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