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9화 (9/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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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다

'정말 지독한 곳에 숨겨뒀구나.'

팽유월은 추소광이 이끄는 대로 뒤를 따라오며, 추소광의 지독한 준비에 치를 털었다. 표국에서 멀리 걸어오는 건 유분수고, 정교한 진법까지 갖춰놓았다.

추소광의 인도가 없었으면 분명 진법 안에서 헤매다가 죽었다 싶을 정도로 진법은 복잡했다.

"이건 무슨 진법이죠?"

"혼인하면 알려주겠소. 크흠."

추소광은 자신이 잡은 팽유월의 소매 끝을 살짝 잡아당겼다. 손목을 잡으려는 시도였으나, 팽유월은 물 흐르듯 추소광의 손길을 피했다.

"어서 창고로 가요."

"크흠. 그럽시다."

창고로 가는 동안 추소광은 몇 번이고 추파를 던졌으나, 팽유월은 그럴 때마다 거절하고 몸을 피했다. 진법만 아니었으면 소매조차 잡게 할 일도 없었다.

저벅, 저벅.

둘은 드디어 창고 앞에 도착했다. 숲 한가운데에 놓인 창고는 관리가 필요 없을 정도로 견고하고 단단한 철로 된 '집'이었다.

"여긴...?"

"그대가 표국의 안주인이 되면 더 자세히 얘기해주겠소. 표국의 중요한 물건을 두고 있는 창고요."

추소광은 창고의 문을 열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도 전혀 없었다. 팽유월은 자신의 도박수가 잘못되었나 전전긍긍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천환단은 어디에 있죠?"

"...저기, 철판이 덧씌워진 목함 안에 있소."

추소광은 잡동사니처럼 쌓여있는 창고 안을 가리켰다. 추소광이 가리킨 곳에는 자물쇠가 여럿 채워진 목함이 있었다.

"진짜 천환단이오."

추소광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팽유월은 자신의 품 안에 따로 모아둔 금박 천환단에 괜히 의심이 생겼다.

'하긴 진짜 천환단이라면 이 정도 보안은 필수지.'

어쩌면 신의의 제자라고 했던 자가 사기를 친 게 아닐까? 그냥 평범한 단환을 천환단이라고, 스승을 팔아서 뭔가 안 좋은 짓을 꾸민 게 아닐까?

만약 이게 진짜 천환단이라면, 만약 시종이 말한 게 진실이 아니라면 나는 진짜로 추소광과 결혼을 해야 하나?

온갖 혼란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가운데, 팽유월은 마음을 다잡고 자물쇠를 하나둘 열어젖혔다.

딸칵, 딸칵.

무쇠 자물쇠는 하나둘 열리기 시작했고, 팽유월은 목함의 덮개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복잡한 감정에 침을 꿀꺽 삼켰다.

없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추소광에 대한 분노가 앞섰다.

고작 표국 주제에 하북팽가를 기만한 것에 대한 분노가 팽유월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또한 안도감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과 추소광의 혼인이 천환단과 막대한 금전 때문인 걸 잘 알고 있다. 가주의 생명으로 겁박한 것에 대한 거짓임이 드러난 이상, 모든 비난은 추소광이 뒤집어쓸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정의는 살아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닥친 불합리한 상황에서 마침 신의의 제자가 이 마을에 있었고, 마침 천환단이 나왔고, 마침 자신이 그걸 발견하여 얻어낼 수 있었다.

'마음을 다잡아라, 유월아!'

팽유월은 자신을 다독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정의를 집행하는 일.

"추소광 이 놈-"

뻐---억!

무언가가 팽유월의 뒤통수를 때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극단적인 공격에 팽유월은 휘청거리며 나자빠졌다.

"어...?"

"하아, 하아, 하아."

전신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추소광은 박살 난 목함의 안에서 정체불명의 기물을 꺼냈다. 마치 죄인에게 거는 족쇄 같은 모습에 팽유월은 내공을 일으켜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했다.

"이, 이...."

하지만 팽유월의 경지는 높지 않았다. 표국의 소국주에 '팔려 갈 만큼', 무인으로서의 가치보다 가문의 여식이라는 가치가 더 높았다.

그 때문에 내공을 일으켜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뒷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할 정도였다.

"네 놈이...어떻...?"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추소광과 자신의 경지는 천지 차이였다. 평범한 남자가 어떻게 자신이 눈치도 채지 못하게 공격한단 말인가?

"크흐, 흐흐흐, 으헤헷!"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팽유월은 보았다. 눈에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광기까지 엿보이는 추소광의 사이한 기운이.

"마공!"

"크하하하! 몰랐지? 몰랐지? 크히힛!!"

추소광은 광소를 터뜨리며 팽유월의 혈을 짚었다. 순식간에 전신의 혈이 잡힌 팽유월은 말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됐을 것을...."

추소광은 팽유월의 몸을 들어 올렸다. 악적의 손에 몸이 잡히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었으나, 아무리봐도 추소광의 행동은 거기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몰라서 물어? 이래서 정파 아가씨들이란. 남녀상열지사 몰라?"

추소광의 눈에는 음심이 가득했다.

"일단 안에 아이를 가지면 꼼짝도 못 할 것이다. 흐흐흐."

* * *

'들어갈까?'

나는 창고 밖에서 추소광의 범죄 행위를 구경했다. 추소광이 마공을 사용한 건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으나, 나는 추소광의 행동 자체가 놀라웠다.

'설마 저런 고전적인 방법으로 공격할 줄은.'

범하려는 여인을 제압할 때는 보통 혈을 누르거나 내공을 금제한다거나, 아니면 미약으로 중독시킨다거나 하는 세련된 방법이 있지 않은가?

'여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군. 색마 실격이다.'

냅다 나무상자로 뒤통수를 후려갈기다니.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짓이란 말인가.

'행여나 팽유월이 돌대가리라서 아무 문제 없었으면? 아니지, 그걸 다 계산한 거야. 무서운 놈.'

마공을 일으킨 추소광과 팽유월의 경지는 비슷했다.

따라서 실패하면 팽유월에게 목이 달아날 도박수를 감행한 장본인이 더 계산이 철저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저건 추소광이 취향인 걸까? 나는 창고 밖에서 추소광이 준비 작업을 유심히 구경했다.

사람이 대자로 눕기 편하게 만들어진 나무 형틀. 추소광은 팽유월을 형틀에 강제로 눕히고 목과 손목에 족쇄를 채웠다.

"크헤헤, 눈이 가려지면 감도도 높아지지. 크흡."

추소광은 팽유월의 눈에 안대를 씌웠다.

시야가 차단된 팽유월은 불안감에 다리를 움직이며 추소광을 발로 차려고 했으나, 추소광은 노끈 같은 줄로 팽유월의 다리를 묶어버렸다.

"흐흐흐, 아주 매끄럽구나. 역시 명문가의 여식이야."

팽유월의 다리는 노끈에 의해 허벅지와 종아리가 붙어버렸다. 그리고는 형틀에 발바닥까지 묶여, 정면에서 보면 八자를 그리듯 무릎을 붙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흘러내린 바지로 인해, 속옷이 훤히 드러날 지경이었다. 입술을 깨문 팽유월은 수치심에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흐흐흐,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추소광은 노끈을 풀어 팽유월의 배와 형틀을 하나로 묶어버렸다. 팽유월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형틀과 족쇄에 구속되어버렸다.

파바바박!

추소광은 빠른 속도로 혈을 눌러 점혈을 풀었다. 팽유월은 신체의 주도권이 돌아오자마자 바로 몸을 움직이며 저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하하하! 만년한철로 제련한 구속구다. 어디 빠져나가기 쉬운 줄 아느냐?"

"그, 그만둬! 그만...두세요...!"

"으하하하! 이 상황에서 존대해?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할지 아는군! 알면 조용히 닥치고 당하거라!"

추소광은 팽유월의 하관을 강제로 붙잡았다. 땀에 젖은 우락부락한 손이 그녀의 입을 강제로 벌렸고, 추소광은 벽면에 놓인 유리병 하나를 잡아 뚜껑을 열었다.

"으으읍?!"

팽유월은 입안에 강제로 흘러들어오는 붉은 액체에 마시지 않으려고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추소광의 억지에 결국 입으로 전부 삼켜버리고 말았다.

"무슨 짓을 한, 히끅?!"

"뭐긴 뭐야, 춘약이지."

추소광은 팽유월의 다리 앞으로 움직여 그녀의 무릎을 붙잡았다.

"흐흐, 개, 봉, 박, 두! ......응?"

추소광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무릎에 인상이 뒤틀렸다. 전신이 구속되어 있으면서 팽유월은 온몸의 힘을 다리에 집중하여 비부가 드러나는 것을 막았다.

"이, 이이익!!"

추소광은 힘겹게 무릎을 좌우로 당겼다. 살짝 벌어질 뻔 한 다리 사이로 보인 비경에 추소광이 감탄한 순간, 팽유월은 다시 다리를 닫았다.

"누, 누가 네 뜻대로 할 줄 아느냐! 이 악적!"

"오, 그래? 그럼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보지."

추소광은 유리병의 옆에 있는 춘약을 하나 더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팽유월의 매끄러운 허벅지 사이로 춘약을 쏟아부었다.

"윽!!"

"벌리지 않으면 춘약이 흘러내려서 어디로 스며들까?"

"아, 안...!"

가만히 내버려 두면 허벅지 사이로 흘러내려 골에 닿아 고이게 된다. 액체인 이상 속옷에 스며들게 될 것이며, 그럼 자연히 가장 위험한 곳에 춘약이 닿게 된다.

그렇다고 다리를 벌린다? 추소광의 뜻대로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 팽유월은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버티는 길을 선택했다.

"주, 죽어도 다리를 벌리지 않을, 흐윽, 것이다!"

"흐하하! 어디 언제까지 버티는지 보자고! 후우, 덥군."

추소광은 진땀을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땀에 젖은 옷을 벗어 던지자 무인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체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연초 한 대 태우고 돌아오마."

추소광이 창고에서 물건 하나를 챙겨 나간사이, 팽유월은 몸부림을 치며 형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아, 하흑, 아...."

하지만 점점 뜨거워지는 몸은 견뎌낼 수 없었다.

* * *

푹.

"어딜 숲에서 연초를 태우고 지랄이야? 산불 나게."

나는 점혈을 찔렀다. 추소광은 연초를 손에 든 채로 전신이 굳었다. 나는 그의 뒤에서 단검으로 그의 등허리 살을 쿡쿡 찔렀다.

"나 기억하지?"

끄덕끄덕.

추소광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추소광이 팽유월에게 한 것과 똑같은 혈을 짚었고, 추소광은 속수무책으로 굳어있어야만 했다.

등허리에 흐르는 식은땀에서 머리를 맹렬히 굴리는 게 느껴진다. 나는 땀을 피해 칼끝을 뒤에서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표국의 소국주가 마공을 익혔다니, 세상 사람들이 알면 정말 재미있어하겠어. 그치? 심지어 여인이 될 아녀자에게 춘약을 먹이고 겁간하려고 한다니 말이야.”

“그, 그건....”

“아, 물론 이해하네. 팽유월 그년이 어지간히 쌔끈해야지. 기 센 여자는 한 번 기를 꺾어놓아야 지아비에게 대들지 않지 않겠나. 그렇지?”

추소광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나는 그의 손에 잡힌 연초를 허공섭물로 당겨 바닥에 비벼껐다.

“힉!”

추소광은 허공섭물을 보자마자 지려버렸다.

압도적인 무위 차이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수단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고수의 잡기를 보여주는 것이 최고이며, 이형환위나 허공섭물 같은 것이 제일 효과적이다.

“워, 원하시는 건 이미 드렸지 않습니까, 대협!”

실제로 추소광은 허공섭물을 보자마자 바로 기기 시작했다. 단전 아래에서 들끓던 마기는 바로 조루처럼 꺼져버렸다. 자신이 마공을 일으켜도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원하는 것? 아니, 아직 하나 가져가지 않은 게 있다.”

“무, 무엇입니까?!”

“팽유월.”

푹.

나는 그의 척추 가장 아래쪽을 향해 단검을 밀어 넣었다. 혈이 짚인 상태에서 찔린 단검에 추소광은 앞으로 피를 왈칵 토해냈다.

“어, 어째서...?”

“팽유월 처녀는 내가 가져가마. 덤으로 천환단도.”

“이런 개....”

푹.

추소광은 고개를 떨궜다. 나는 그의 등 뒤에 꽂아 넣은 단검에 내기를 불어넣음과 동시에, 또 다른 단검으로 추소광의 목덜미를 찔렀다.

“특급 살수는 두 번 찌르지. 죽일 때 한 번, 확인사살로 한 번.”

이미 죽어서 듣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추소광의 몸에서 두 개의 단검을 뽑아 비켜섰다. 단검에 불어넣은 내기는 추소광의 몸속 혈류를 억제하였고, 나는 적당히 거리를 벌린 뒤 추소광 안에 집어넣은 내기를 소멸시켰다.

푸화아아악---!!

추소광의 몸에서 피가 치솟아 올랐다. 단검으로 찌른 목과 등허리 양쪽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고, 나는 추소광이 떨어뜨린 연초 갑에서 연초를 꺼내 한 대 태웠다.

“쓰읍-하아.”

추소광은 죽었다. 동시에 피처럼 치솟아 오른 본능에 따라 온갖 추측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왜 추소광은 마공을 사용했는가?

추소표국은 마교와 연관이 있던가?

팽유월의 남편이 추소광이었던가?

천환단은 분명 팽가에 흘러가는 것이 순리인데, 그 과정에서 추소표국은 크게 의미가 없었나?

추소광이 마공 사용자인 걸 정말 사람들은 몰랐나?

"에이, 다 필요없다. 한 대 태우니까 별 잡생각이 드는군.”

잡념을 지우려고 태운 연초가 오히려 잡념을 일깨우고 있다. 나는 연초를 바닥에 튕겨 끝을 비빈 뒤, 추소광의 몸을 발로 뒤집었다.

“...과연, 추소광이로군!”

손가락 마디 하나는 될까!

이런 남자와 평생을 함께한다면 분명 불행하게 되리라. 나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내공을 움직였다.

“내 너를 잠시나마 상공으로 불리게 해주마. 팽유월에게 지아비로 인정받는 게 소원이었지? 그 바람, 내가 들어주마. 내가 최근에서야 이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거든. 흐흐.”

우둑, 우두둑.

근골이 뒤틀리고 내공이 몸 안의 공간을 차지한다. 점점 두툼해지는 손으로 얼굴을 빚어 형상을 묘사한다.

역체변용술.

“너는 이제 추대광이다.”

나는 추소광의 몸에서 하나 빼고 전부 복사해냈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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