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8화 (8/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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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다

무림에서 사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

바로 무공이다. 소림의 땡중인 척하려면 불경을 외울 게 아니라 소림의 무공을 시연하면 되는 것이고, 마교의 졸개인 척하려면 마공을 쓰면 된다.

그리고 신의의 제자인 척 사칭하려면 신의의 무공을 사용하면 된다. 나는 신의를 직접 죽이지 못했지만, 신의의 제자라는 자의 피를 취했다.

청낭심법.

고대 후삼국 시대, 당대의 신의 화타로부터 이어졌다고 하는 심법은 이전부터 있었던 의술을 하나로 집대성된 무공이었다.

당대의 의술부터 신화 시대의 의술까지.

그것을 모두 모은 책이 청낭신서라고 하더라.

전투 중에 다치는 이들을 살리려면 적과 싸우면서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집념으로 만들어진 무공은 세월이 흘러 나에게 들어오는 것으로 맥이 끊겼다.

따라서 신의의 모든 의술을 사용하지는 못해도 기본적인 침술이나 약제조 정도는 가능하다. 피로 배운 기억과 무공은 허상이 아니다.

"1인 전승에 독문 무공만큼 사칭하기 좋은 무공이 없지."

나는 팽유월과 접하기 위해 신의의 제자를 사칭하기로 했다.

* * *

"정말로 소협께서는 신의 님의 제자분이 맞으시군요?"

"모, 목소리가 큽니다."

팽유월은 흥분하여 내게 숨결이 닿을 만큼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팽유월과의 만남에 두근거리는 청년을 연기하며 전신에 혈기를 둘렀다.

"신의께선 당신의 이름을 숨기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도 마침 소문이 들려서 왔을 뿐입니다."

"천환단이요?"

"예, 소저. 하나를 해부하여 진품인지 위조품인지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건 제가 아니라 약방 주인께서 구하신 것이라."

"하…."

장원 하나를 살 수 있다는 천환단이 어린아이 흙장난감 마냥 해체되어있었다.

"그래서 저건 진품입니까? 위조품...이죠?"

"그거야 저도 모르죠. 좀 더 해부해봐야 아는 거니까."

"그렇습니까…."

"근데 진품 맞네요."

움찔. 팽유월의 손이 굳었다. 나는 순수한 미소로 내가 마구잡이로 해체해놓은 단환(이었던 것)을 집어 들었다.

"신의님의 배합법이 확실합니다! 인형설삼의 뿌리를 잘게 잘라 넣는 건 신의님 뿐이니까요."

"인형설삼…."

확실히 인형설삼정도면 세계 제일의 단환에 들어갈 재료라고 해도 그럴 듯했다. 천환단이 진품이라는 말에 팽유월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주인장, 염치가 없지만…."

"가져가시오. 나한테 있어 봐야 감당이 안 되는 물건이니."

"네?"

노인은 잎을 돌돌 말아 약초를 태웠다. 천환단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은 씁쓸함이 묻어있었다.

"나 같은 촌부가 저런 걸 다루기에는 무리라오. 약이란 본디 가장 필요한 자에게 쓰여야 가치가 있는 법."

"어르신…."

"소저의 사정은 내 이미 잘 알고 있소. 어디 추가놈이 떠들고 다니던 날이 하루 이틀인가? 내 팽가의 여식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부디 사람을 잘 보고 판단하시오."

노인의 신신당부에 팽유월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단환이 든 목함을 챙긴 팽유월은 작은 옥패 두 개를 꺼내 노인과 내게 건넸다.

"팽가의 은인에게 드리는 패입니다. 팽가는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팽유월은 포권이 아닌,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목함을 챙겨 떠났다. 그녀가 남긴 꽃향기는 내 코를 간질이며 나의 아랫도리를 뻐근하게 만들었다.

"쯧. 텄군."

약방 노인은 태우던 잎을 비벼끄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 쓸모도 없는 패를 가지고 약값을 치르다니, 이거 순 날강도구먼."

"왜? 팽가의 옥패도 천환단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가치를 지닌 물건인데."

"내가 안 쓰면 그만 아닌가. 에잉, 그보다 네놈 도대체 뭐냐? 진짜 신의의 무공을 알고 있어?"

"인연이 있어 잠시 배웠을 뿐. 신의의 제자는 아닐세."

노인은 나를 향해 치를 떨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신의를 스승이라고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네놈의 부탁으로 팽유월에게 천환단을 넘겼다. 이제 나는 뭘 하면 되지?"

"여기서 계속 약 팔면서 지내거나, 아니면 이걸 잘게 쪼개서 소단환이라고 비싼 값에 팔거나."

나는 뒤에 숨겨놓은 함을 두드렸다. 약방 노인은 저 함 안에 든 물건 때문에 나와의 위험천만한 거래에 응했다.

"정말 천환단, 100개로 쪼개어도 효과는 비슷한 거 맞지?"

팽유월에게 보여준 천환단은 무수히 잘게 쪼개어놓은 천환단 중 하나일 뿐이다. 추소광은 가짜라고 안심하고 떠났지만, 이건 진짜 천환단이다.

1/100 천환단이지만.

"물론. 내 어미라도 걸어야 믿으시겠는가? 단순 피로회복제부터 자양강장제, 불치병 치료제까지 효과는 무궁무진하지. 하나를 먹든 100개로 쪼개진 작은 구슬을 먹든."

"...믿겠네. 젠장, 백수오를 달에 하나 꼬박꼬박 챙겨올 때부터 눈치챘어야 하는데."

"흐흐흐, 값이나 제대로 치르지. 그거 주시게, 그거."

나는 당당히 손을 뻗으며 대가를 요구했다. 추소광을 속이고 팽유월에게 진짜 천환단을 건네줄 계기를 마련하고, 소분된 천환단 아흔 개 가량에 대한 대가로 그걸 받기에는 너무 약하긴 하다.

"진짜 그걸로 되겠는가?"

"아 글쎄 내놓기나 해. 요즘 들어 다들 더럽게 뜸을 들이는구먼!"

"끙. 알겠네. 주도록 하지."

노인은 책상을 옆으로 밀어, 아래에 숨겨둔 작은 함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허름한 약방에서 보기 힘든 고급스러운 유리병에는 용도가 대충 보이는 연분홍빛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정력제랑 춘약은 어디에 써먹으려고 그러는 건가?"

"음양합일에 쓰려고 하지 혼자 청승맞게 달 보면서 좆잡고 흔들려고 쓰겠나? 나 참."

"그게 성 하나 값어치의 물건이란 말인가? 누구한테 쓰려고?"

"흐흐. 약은 필요한 자에게 쓰여야 하는 법이라고."

노인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나는 소분된 천환단 하나를 집어 주머니 안에 쏙 집어넣었다.

"언젠가 삼구 그놈이 오면 저거 주시게. 어디 가서 칼침 맞고 오면 저걸로 상처 치료하라고 말이야. 놈, 천년하수오인줄 알고 왔다가 식겁을 할 거야. 흐흐흐."

"종놈이라면서 부리더니 아주 알뜰살뜰 잘 챙겨주는군."

"은혜는 갚아야지. 내 생에 두 번째로 나를 도와준 사람인데."

나는 바지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천환단, 어디서 얻은 거라고 했지?"

"그거? 추가놈 창고. 왜 일부러 금박을 씌웠다고 생각하나? 새끼, 금박 씌우니까 알아보지도 못하는 거 봤나?"

"......이 미친놈이? 너 설마 추가놈 천환단을 훔친 거냐? 그 새끼는 그걸 못 알아보고?"

"그런 셈이지."

나는 잎담배를 물고 군중의 틈바구니로 몸을 숨겼다.

"야, 이 개새끼야!"

개만도 못한 자의 자식이니 개새끼가 맞다. 나는 나를 향해 쌍욕을 퍼붓는 노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 * *

천환단이 팽유월의 손에 들어갔으니, 이제 팽유월이 추소광을 상대로 어떤 움직임을 취할 터.

"으어, 팽유월 먹으려고 별의별 짓을 다한다."

나는 추소표국안에 한 번 더 잠입했다. 표국 내의 지리와 구조를 익혀, 추소광의 처소까지 금방 숨어들 수 있었다.

'팽가의 무사들을 호위로 세웠군.'

기루에서 봤던 무사들이 이제는 침소 앞에 두 명이나 짝을 이루어 서 있다. 어찌나 겁을 심하게 먹었는지 문까지 열어두고 잠을 자고 있었다.

"윽, 끄윽, 크허엉…."

잠꼬대에 괴로워하면서 코를 곤다. 숨넘어가는 코골이 소리를 다음 교대 시간까지 들을 무사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하며, 나는 다른 방으로 숨어들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파혼해야 합니다, 아가씨."

호위로 선 무사들을 제외한 모든 세가의 사람들이 팽유월의 방에 모여 작전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 또한 팽가의 일원인 만큼, 이런 구역질 나는 곳에 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천환단이 아니라면요?"

"아가씨께서 눈으로 확인하셨잖습니까. 믿으십시오."

"암만 봐도 추소광 같은 놈들한테 사기 치려는 형태인데?"

"그래서 여기서 평생 저놈 밑에서 살 겁니까?"

무사들끼리도 의견이 갈린다.

나는 그들이 조금 더 빠른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목에 내기를 불어넣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기절시킨 하인 하나를 섭혼술로 조종하여, 내 옆을 함께 걷도록 만들었다.

"...에 있는 창고 말이야."

무사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팽유월의 방 앞을 지나가며, 나는 웃음을 참고 말을 이었다.

"거기 괴한이 들었다더군. 그래, 그게 있는 곳. 알려지면 큰일 나는 게 아닐까 몰라. 그게 실은 거짓...크흠."

저벅, 저벅. 복도를 지나친 나는 하인을 인형처럼 걷게 만든 다음 장원을 빠져나왔다. 팽유월을 비롯한 팽가 사람들의 기운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내일, 제가 직접 확인하겠어요."

팽유월의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멀리서 그녀를 응원했다.

"사기 결혼은 파혼해도 인정이지."

* * *

다음 날.

"천환단의 실물을 보고 싶어요."

아침부터 팽유월을 만날 생각에 들떠있던 추소광은 온몸에 핏기가 가셨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어제 위조품들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이 준비한 것이 진품이 아니면 어쩌나."

"그건…!"

평소 같았으면 어딜 의심하냐며 겁박을 했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실물이 없는 상황이다. 머뭇거리는 추소광의 행동에 팽유월은 살기를 뿌리며 추소광을 압박했다.

"왜 보여줄 수 없는 건가요? 설마 거짓은 아니겠죠?"

"허튼소리! 우리가 가진 물건은 소림에서도 인증한 진품이오! 설마 우리가 악참도 어른의 생사를 두고 기만을 했을 까봐?! 어림도 없지! 암!"

"그럼 보여주세요. 진품의 증거를. 만약 진품이라면 당장 내일 결혼을...합방을 해도 좋아요. 그래야 가주님께 천환단을 한시라도 빨리 보내니까."

팽유월은 도박수를 던졌다. 애초에 추소광은 믿음직스러운 존재가 아니었고, 추소광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를 의심하게 했다.

"조, 좋소! 하지만 그대 혼자 따라오시오! 팽가의 무사들은 표국에 두고!"

"...좋습니다."

팽유월은 자신감을 가지고 거래에 응했다. 아무리 봐도 질 것 같지 않은 분위기에 팽유월은 파혼을 점쳤다.

정체불명의 침입자.

갑자기 입은 어깨부상.

다음날 갑자기 나타난 천환단.

부자연스러운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당장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중요한 건 파혼과 천환단의 배송이었으니.

"따라오시오. 내 진품을 보여줄 터이니."

추소광은 팽유월을 데리고 장원을 떠났다.

* * *

숲 한가운데 넓은 공터.

나는 대장간에서 구한 낡은 도를 들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무공의 초식을 갖추자마자 끓어 넘치는 피는 나에게 구결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오호단문도는 패도다.

시작부터 경쾌하게. 나는 진각을 밟고 뛰어올라, 허상 속의 존재를 향해 도를 크게 휘둘렀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고 베어버리는 것이야말로 패도.

서걱! 서걱!

허상 속 적들이 일거에 휩쓸려 나간다. 바닥을 내려찍는 초식에 사방에 흙먼지가 비산하고, 중무장한 외공의 고수를 흉갑째로 베어 넘긴다.

-그러므로 오호단문도는….

"아 씁."

몸이 멈췄다. 기억은 더는 이어지지 않았고, 나의 오호단문도는 고작 3성에서 멈춰버렸다.

'생각해보니 팽가랑은 그다지 칼을 맞댄 기억이 없네.'

호쾌한 성향이 호전적인 성향으로 드러나서인지, 내가 혈강시로 날뛸 때는 이미 팽가가 멸문에 가깝게 무너지고 있었다.

팽유월이 가문의 부흥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직계와 방계의 구분이 힘들 정도로 많은 팽가의 인물들이 죽었다.

'누구 피를 마셨더라?'

기억을 더듬어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루에도 십 수명의 피와 정기를 흡수하여 무공을 쌓았고, 그중에 팽가의 여자도 하나 안았던 것 같았다.

'분명 자주 안았던 것 같은데....'

워낙 많은 여자를 안아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팽유월을 보고 기억에서 지워버린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팽가의 오호단문도는 정말 시원시원한 무공이었다.

'팽가 무공이 호쾌해서 때려죽이기에는 안성맞춤인데.'

쾌도난마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마교의 졸개 시절, 마교 간부들이나 장로들이 '이왕 싸울 거면 팽가 투견들과 싸우다 죽겠다'며 우스갯소리도 하고는 했다.

'이럴 때는 예전이 그립다니까.'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몸을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혈강시가 된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흡성대법과 채음보양, 그리고 혈교의 교주가 가진 독문무공 덕분에 나는 상대의 피를 흡수하면 무공을 습득할 수 있었다.

당시, 마지막에 살해당하기 직전 혈강시로서 내가 불리던 또 다른 이름은 <혈비고>. 무림의 온갖 무공들이 피에 기록되어, 살아있는 비급 창고라고 불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나를 노렸다. 장삼봉의 무공을 가지고 있다느니, 마교 교주의 독문무공도 알고 있다느니, 오백 년 전 천하제일이었던 신검의 창천신뢰검을 익히고 있다느니 말이 많았다.

'결국 다 죽었지만.'

과거로 돌아온 시점에서 피는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에 기억으로 남아있다. 혈강시로 얻은 비급과 무공은 내 기억에 하나도 손실되지 않고 남아있다.

하북팽가.

오호단문도.

3성.

...내가 먹어 치웠던 무림인이 배운 경지까지.

"씁. 혈교주 멍청한 년. 차라리 비급을 먹어 치우게 해주지."

비급 전체를 먹게 했으면 아마 오호단문도도 극성으로 익히지 않았을까? 이제 오호단문도를 더 익히려면 직접 팽가에 들어가 무공을 익히거나, 그 이상으로 배운 이를 취해야 한다.

태극혈천대법.

혈교주-지금은 소가주이거나 그에 준하는 여자가 내 몸에 익히게 만든 자신의 무공으로, 나는 온갖 무공을 배우고 혈교주는 나를 피로써 조종했다.

남을 조종하는 무공은 몰라도, 타인의 피를 흡수하면 무공을 흡수하는 건 똑같다. 하지만 그것만큼은 미래와 똑같아지기 싫다.

'추한 괴물이 될 수 없어.'

모처럼 잘생겨진 얼굴이다. 다시 못생겨지기는 싫다. 여자를 취하려면 얼굴이 받쳐줘야 일단 점수를 먹고 들어가니까.

당장 팽유월만해도 나의 아름다운 미모에-

"...쪽으로 가는 게 맞습니까?"

"......?"

나는 몸을 숨겼다. 멀리 두 남녀가 산길을 비스듬히 지나가는 게 보였다.

팽유월과 추소광.

'드디어 왔네.'

내가 무공을 단련하던 곳은 추소표국의 창고. 내가 천환단을 훔쳤던 곳의 근처로, 둘은 드디어 천환단을 확인하러 왔다.

"흐흐흐. 그럼 이제…."

스륵. 나는 암행복을 단정히 갖추고, 복면을 뒤집어썼다.

"색마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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